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 나이듦에 관한 일곱 가지 프리즘
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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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과 식물은 자기들이 단지 거기에 있음으로써 우리 삶을 고양시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 그런 작용을 탁월하게 해낼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다! 반면에 우리 인간 종은 이 세상에서 늘 스스로를 의식한다. 우리가 어떤 결과를 겨냥해 노력을 기울일 수 있고, 올바르게 수행하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환상으로 스스로를 부추긴다.

  그렇게 해서 고통스러운 세상이 펼쳐지는데, 자칫하면 “내 삶에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은 우리를 그쪽으로 몰아갈 수 있다. 내 목표가 아무리 분명하고 내 기술이 아무리 탄탄해도, 내가 종국에 누구에게 도움을 주거나 무엇에 기여하는지는 종종 모르며 알 수도 없다는 것, 이것이 진실이다.


  ·······무엇을 왜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면, (그래서 실제로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제공해야 하는지에 관한 결정적인 실마리를 놓치고 있다면) 그것은 내 에고가 작동 중이고 그러므로 위험하다는 신호다. 내가 내놓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은 더 심오하고 직관적인 장소, 즉 영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데서 우러나온다. 내가 무엇으로 누구에게 기여하는지를 정확히 알 길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내 말과 행동은 에고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36-38쪽)


파커 J. 파머는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해주는 능력과 친절을 지니고 있다. 여기 ‘나는 모른다.’ 이야기를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읽는 독자는 아마 없으리라. 여든 줄에 든 노인이 들려주는 궁극 차원 이야기를 새파란 독자가 쓱쓱 읽는 풍경이 그려질 때 나는 그저 신통방통해할 따름이다. 쉬운 읽기 밑바닥에 매우 어려운 근원적 문제가 가라앉아 있으니 말이다.


2016년 3월 10일, 나는 숭산崇山의 사여四如에 짧은 소疏를 붙였다. 내용은 이렇다.


우리는 흔히 ‘모른다.’를 ‘알지 못한다.’로 새겨 부정어 취급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디 ‘모른다.’에서 출발해 길을 떠납니다[如如only don't know]. ‘모르지 않는다.’고 부정하면서 ‘안다.’의 세계로 진입합니다[無如]. 아무리 ‘안다.’의 세계를 헤매어도 ‘모른다.’는 상태가 해소되지 않음을 깨달으면서 ‘안다.’와 ‘모른다.’의 차별이 없는 세계에 다다릅니다[一如]. 결국 ‘모른다.’에 내맡긴 채 걸림 없이 살아갑니다[卽如only go straight]. 이렇게 살아감으로써만 실재 세계를 엽니다. 아니 오직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실재 세계 그 자체입니다[卽如是如如].


내 소疏에서 나타난 숭산 이야기의 흐름은 큰 맥락에서 파커 J. 파머 위 본문의 흐름과 동일하다. 무지와 무지 사이의 지를 부정적으로만 볼 때 누락시킬 가능성이 높은 중요한 에피소드 둘이 있다. 어떻게 무지로 다시 돌아갈 계기를 잡는가, 가 하나다. 앞의 무지와 뒤의 무지는 같은가, 아니라면 무엇이 다른가, 가 남은 하나다. 이 문제를 해소하려면 왕필王弼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夫無不可以無明 必因於有 故常於有物之極 而必明其所由之宗也。


여기서 무는 무한, 유는 유한일 테지만 우리 논의의 문맥으로 가져오면 무를 무지, 유를 (유)지로 보아 억지일 것이 없다. 인간의 근원적 무지 상태는 무지 상태 그 자체에서 깨달을明 수 없다. 반드시 지 상태를 거쳐야 한다. 지의 극한/극단極brink/edge에 도달해야 궁극宗, 그러니까 무지를 깨닫는 근원적 전복이 일어나는 법이다.


지의 극한/극단은 무엇인가? 분별지/추론지에 대한 자만이 이끈 양적인 파멸만 주목하면 안 된다. 분별지/추론지를 도저하게 밀고 가서 자발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질적인 부서짐에도 주의해야 한다. 지는 저주를 넘어 축복이기도 하다.


축복은 무엇인가? 지를 통과해 도달한 무지는 지를 통과하기 이전 상태로 복귀한 무지가 아니다. 무지를 통렬히 깨달아 스스로 기꺼이 무지 상태에 자신을 맡기고, 아니 무지 상태로 자신을 만들고 나아가는 겸허와 감사의 무지다. 겸허와 감사는 지식의 지에 더 얹어진 각성의 지가 불러온 축복이다. 이 축복에 힘입어 무지는 전체 진실을 향해 훌쩍 날아오른다. 날아오르는 찰나 무지는 무심의 세계로 들어가 무지의 경계를 벗어난다.


시원적 무지 상태에서 인간은 ‘무심코’ 살아간다. 지의 상태로 접어들어 ‘유심히’ 살다 보면 어느 변곡점에서 깨달음에 이른다. 깨달은 무지 상태에서 비상하는 순간부터 ‘무심히’ 살아간다. ‘무심히’ 살면 삶은 탱맑아진다. 탱맑은 삶의 바다에 ‘의미’는 미세플라스틱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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