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 나이듦에 관한 일곱 가지 프리즘
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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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니 마틴의 「경외감과의 재결합」이라는 글을 읽었다. 16개월 된 딸 마야를 보면서 그 걸음마 배우는 아이의 눈을 통해 자신이 삶의 경이로움을 어떻게 볼 수 있었는가를 상세하게 묘사한 글이다.

  나는 코트니의 첫 문장에 사로잡혔다. “내 딸은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 있다.” 그것은 정확하게 내가 오늘 일흔아홉 살의 나이로 서 있는 곳이다.(28쪽)


코트니에 따르면 그녀의 딸은 “세상이 즐겁게 하리라는 크고, 분별없는 기대 하나만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간다.” 16개월짜리 마야처럼, 나도 여든 줄에 들어서면서 오직 하나의 기대를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고 싶다. 세상이 나를 즐겁게 할 수 있음을 알 만큼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내 기대는 세상이 아닌 나 자신을 향해 있다. 즉, 삶이라는 선물을 즐기는 것, 그리고 감사하는 것이다.(32-33쪽)


코트니 마틴의 글 첫 문장에 파커 J. 파머가 사로잡혔듯 나는 제목만 보고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를 샀다. 가장자리라는 말에 단도직입으로 꽂히는 감수성이 흔할 리는 없다. 내게 가장자리라는 말은 마주가장자리, 어름, 변방, 경계로 변주되면서 사유의 기조 목록어로 자리 잡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리의 삶과 사상의 자리, 그러니까 원효의 삶과 사상의 자리가 가장자리기 때문이다. 파커 J. 파머에게는 그만의 다른 감각이 있을 테지만, 이 책에서 꾸준히 드러나는 깨달음의 기조는 서로 다르지 않다.


깨달음이라 하지만 무슨 특별한 오의를 품어서가 아니다. 16개월짜리 아기가 지닌 “크고, 분별없는 기대”를 일흔아홉 살 노인도 지닌다 할 때, 차이는 오직 크고 분별없는 기대를 지녔다는 자기인식 여부뿐이다.


16개월짜리 아기는 매순간 모든 것의 가장자리를 넘어가면서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아니 한다. 인식의 주체로서 중심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중심자아는 분리의 산물이다.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세상이 두려울 것도, 불확실할 것도 없다. 즐거운 탄성을 지르며 아기는 나아간다.


일흔아홉 살 노인은 매순간 모든 것의 가장자리를 넘어가면서 그 사실을 인식한다. 인식의 주체로서 중심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분리의 시대를 통과하며 형성된 중심자아는 세상과 적대적 모순 관계에 있다가 마침내 역설로 달여 낸다. 두렵고 불확실한 세상이지만/이므로 선물인 삶에 감사하며 노인은 나아간다.


이 차이는 삶의 실재에서 과연 무엇인가?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지만, 우리가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지점은 일흔아홉 살 노인이 왜 하필 16개월짜리 아기의 가장자리 풍경에 온 영혼이 떨리는 현상을 일으켰을까, 바로 여기다.


에덴 회귀retrotopia가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다만 근원성radicality을 급진적radical으로 소환할 따름이다. 인식 여부는 세상의 전체성, 그 전체의 모호성을 끝내는 알 수 없다는 자각의 여부다. 이 차이의 관건성cruciality은 딱 하나의 점을 영지로 지닌다. 겸허다. 세상과 삶의 경이로움 앞에 엎드릴 줄 아는 ‘노인’의 거처가 가장자리다. 모든 것의 가장자리는 오늘의 문명인류를 준엄하게 부르고 있다. 모두 ‘노인’ 목소리로 응답하라. 어라? 내 목에서 꼰대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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