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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치유의 본질에 대하여 - 노벨상 수상자 버나드 라운이 전하는 공감과 존엄의 의료
버나드 라운 지음, 이희원 옮김 / 책과함께 / 2018년 6월
평점 :
의사의 말 한 마디가 환자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치유를 크게 촉진시킬 수도 있다. 치유 과정은 과학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환자의 긍정적 기대감과 의사에 대한 신뢰감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신중하게 선택된 말은 의사가 환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치료이기도 하다. 사실 말은 가장 훌륭한 치료 수단임에도 여전히 별로 중요시되고 있지 않다. 나는 의사 생활을 하는 동안 말이 치유에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 많이 경험해왔다.
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의 빛을 찾으려 노력해왔으며 그 성공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아무리 절망적이고 치료 가능성이 전혀 없더라도 환자가 그에 맞설 수 있도록 하려는 내 의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의지다.(126쪽)
이 부분을 읽으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아서 프랭크, 『아픈 몸을 살다』의 저자 말이다. 관련된 그의 말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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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살려면 종양이 없어져야 하지만 이것은 몸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였다. 내 의식이 종양을 발생시키지 않았듯 사라지게 할 수도 없었다. 내가 의식적으로 할 수 있었던 일은 몸에 경이로워하고 몸의 지혜를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살기를 욕망했지만 삶 자체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이었다. 자신과 싸우기를 포기하고 몸 나름의 지혜에 따라 몸이 변하도록 내버려두자 마음이 훨씬 평화로웠다.(135-136쪽)
·······나라는 존재는 신체과정이지만 또 의식이기도 해서, 의지와 역사를 가졌고 생각과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신체과정과 의식은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질병은 그 둘이 하나임을 가르친다.·······통증을 겪으며 나는 몸에 사고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사고가 변화하면서 사고는 다시 통증을 변화시켰다. 몸과 정신은 이렇게 끊이지 않는 원을 그리며 순환한다.(140쪽)
분명한 모순인 두 말 사이에 절묘한 단속斷續관계가 존재한다. 몸과 마음이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不二而不一라는 진리를 나름대로 예리하고 정확하게 전해준다. 이는 그가 사회과학자이며 암환자였다는 사실과 유관하다. 마음의 힘으로 몸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실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니 말이다. 확실히 그의 이야기는 버나드 라운과 다른 진동수를 나타낸다.
버나드 라운은 심장병 전문의다. 심장은 ‘마음의 기관’이므로 심장병 환자는 마음을 움직이는 말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하고 받는 영향 또한 직접적일 수밖에 없다. 버나드 라운은 의사로서 그런 현실을 생생하게 경험했기 때문에 아서 프랭크와 같은 비대칭의 대칭을 날카롭게 의식하지 못한다. 긍정주의 분위기를 풍기며 매끄럽게 모순의 길목을 통과하는 근거가 십분 존재한다.
단순하다는 통속한 표현과는 달리 진리는 무한한 점이지대를 품은 모호성의 영지다. 이제 이 모호성의 영지 자체를 직면한다. 버나드 라운의 말을 모멘트로 삼는다.
“치유 과정은 과학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환자의 긍정적 기대감과 의사에 대한 신뢰감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버나드 라운의 문맥에서 이 말에 딴죽을 걸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까, 걸어야 한다. 이 말대로라면 기대감·신뢰감 같은 마음 문제는 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적어도 서구의 주류 사유 전통에 따른다면 말이다. 버나드 라운이 이른바 과학주의자가 아님은 물론이겠으나 이런 과학 개념에 동의하는 한, 과학의 영역인 몸 문제와 과학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마음 문제를 대하는 태도에서 근원적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다.
“가장 훌륭한 치료”인 말이 마음을 움직여 심장에 “큰 위력을 발휘”함으로써 병을 낫게 한다면 과학으로서 의학에 비 과학으로서 말-마음은 대체 무엇일까? 가장 훌륭하고 큰 위력을 지닌 치료를 의학 아닌 것에 내주고도 그 의학을 의학이라 할 수 있을까? 의학이 과학 아닌 것을 포괄하는 인식·실천체계임을 인정하든지, 과학의 개념을 아예 바꾸든지 해야 하지 않을까?
마음을 움직이는 말로 몸 병을 치료한다 할 때 제기되는 질문들은 몸을 조절하는 약물로 마음병을 치료한다 할 때 제기되는 질문들과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과학으로 비 과학 영역의 병을 치료한다면 그 과학을 과학이라 할 수 있을까? 비 과학 영역의 병이 과학적 방법으로 치료된다면 그 병을 비과학 영역의 병이라 할 수 있을까?
서구과학의 근간을 이루는 형식논리는 정량定量·인과因果를 버리고는 성립할 수 없다. 정량·인과는 정확, 확실, 확정을 담보하는 조건이다. 정확, 확실, 확정을 목표로 개발한 과학은 세계가 그런 구조를 지니고 그렇게 운동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 전제는 설정된 것일 뿐이다. 아직까지 서구과학은 그 설정을 온전히 실재화하지 못했다. 세계는 여전히 과학의 정확, 확실, 확정 언어와 수식에 다 포획되지 않은 채다. 앞으로 더 시간이 흐르면 서구과학은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그럴 리 없다. 그럴 수 없다.
이제 서구과학은 자신의 전제와 달리 정성·비인과 세계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진실을 인정해야 한다. 정성·비인과 세계는 정량·인과 세계 바깥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존재 양태를 주고받으며 상호작용하는 과정으로 공존하고 혼재한다. 이것이 세계의 역동적 모호성이다. 역동적 모호성이 진리다. 진리를 위해 서구과학은 오만한 독선을 버려야 한다. 정확, 확실, 확정언어로 세상을 모두 설명하려 드는 탐욕을 삼가야 한다.
과학으로 몸의 병을 치료하고 마음의 힘으로 그 과학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과 마음의 힘은 상호작용하는 동등한 주체다. 실제 영향력의 차이는 무수한 인연의 갈래가 그려내는 각기 다른 풍경들이다. 인공화학합성물질로 뇌를 조절하여 우울증 치료한다는 제약회사 광고는 철석같이 믿으면서 신중하게 선택된 말 한 마디가 마음을 움직여 심장병을 치료한다는 의사의 증언은 믿지 못할 까닭이 대체 뭐란 말인가.
시인 이영광의 말을 음미한다.
정확한 것을 부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오류지만,
부정확한 것을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폭력이다.
정확한 것을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 능력이라면,
부정확한 것을 부정확하게 정확히 말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초능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