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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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영적spiritual’이라는 말을 쓸 때는 ‘물질적’이라는 말과 대조적인 의미로 쓰는 것이 아니다. 나는 물질 영역의 초월을 추구하는 철학이나 종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영혼과 물질의 분리는 우리가 물질세계를 이토록 악랄하게 다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성한 경제학은 세계를 지금보다 더 신성하게 대하며, 지금보다 더 유물론적이다. 따라서 내가 영적인 욕구를 충족한다고 말할 때는 지구 파괴적인 물건을 계속 쏟아내면서, 천사와 영과 신에 대하여 떠들고 기도한다는 뜻이 아니라, 관계와 순환과 물질적 삶 자체를 신성하게 대한다는 뜻이다. 그것들은 실제로 신성하기 때문이다.(461쪽)


유럽 어디든 그 중심에 자리 잡은 찬란하고 견고한 기독교 건축물이 내게 주는 느낌은 이중적이다. 아름다움에 찬탄을 쏟아내다가도 문득 천국의 영생을 역설한 기독교가 왜 허탄한 지상의 건축물에 이리도 공을 들였을까 의심을 품는다.


수준이 떨어지긴 해도 오늘날 우리사회 기독교, 특히 대형 개신교를 보면 건물에 공들이기는 옛 유럽과 다를 바 없다. 혹시 교회 지도자들은 천국의 영생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고 죽기 살기로 건물, 돈, 권력에 집착한 것 아닐까?


이 의문을 끝까지 밀고 가면 영혼과 물질을 분리한 이데올로기가 궁극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는 진실에 가 닿는다. 창조주니 영성이니 하는 것들은 결국 물질세계를 수탈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최악의 통속 유물론이다. 통속 유물론은 “지구 파괴적인 물건을 계속 쏟아내면서, 천사와 영과 신에 대하여 떠들고 기도한다.


관계와 순환과 물질적 삶 자체를 신성하게” 대하는 신성 유물론은 물질과 분리된 영혼의 존재를 기각한다. 영혼은 관계 속에서 순환 가운데 일어나는 물질의 직접적 실감이다. 물질의 직접적 실감이 빚어내는 감사와 사랑을 우리는 영성이라 부른다. 영성을 신이나 견성이 매개하면 틀림없이 가짜다. 가짜라고 내다버리고 마는 무신론도 가짜다.


진짜 영성은 “실제로 신성하기 때문”에 관계와 순환과 물질적 삶 자체를 신성하게 대한다. 물질과 물질에 직접 닿음과 닿음이 주는 실감과 실감이 피워내는 감사·사랑의 무한 네트워킹이 유물론적 신 사건이다. 유물론적 사건 신은 통치하지 않는다.


통치하지 않는 유물론적 사건 신은 저마다 중심이며, 자발적 내부창조며, 평등한 개체끼리의 직접 닿음이며, 소요고요의 생명 연대다. 이것이 바로 신성 유물론이 건설한 공화국의 정치학이다. “분권화, 자기조직화, P2P, 생태적 통합”(215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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