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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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도직입으로 말해, 나는 지금 경제의 역성장을 주장하고 있다.·······돈의 할 일을 줄이자는 것이다.(285쪽)


줄어드는 (화폐)경제 흐름 속에 확대되는 부의·······사례·······자연의학으로 전환해서 빚어진 경제적 효과·······. 한두 세기 전만해도 돈을 내고 치료 받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흔한 병의 경우는 할머니와 이웃이 돌봐주었고, 전통치료사나 약초치료사 등의 비공식적 네트워크를 통해 치료 받을 수 있었다. 약초 지식이 널리 보급된 데다 보통은 거저 쓸 수 있었다. 천연 의약품이 완전히 전문화된다 해도, 그 잠재적 수익은 첨단의약품의 수익에 훨씬 못 미칠 것이다. 복잡한 기술을 이용한 첨단 의약품 생산에 비해 천연 의약품은 값싸게 생산할 수 있다. 약효가 뛰어난 많은 약초들이 흔히 볼 수 있는 잡초들이기 때문이다. 천연 의약품, 동종요법, 그밖에 지금 부상하는 온갖 심신요법으로의 전환은 경제적으로는 역성장을 가져오겠지만, 우리 삶의 질은 조금도 낮아지지 않을 것이다.(287-288쪽)


“싼 게 비지떡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옛날 충북 제천의 박달재 주막 인심 좋은 주모가 과거보는 선비들에게 보자기에 담은 비지떡을 선물로 주면서 “(보자기로) 싼 것은 비지떡이니 배고플 때 먹으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싼wrapped 것이 싼cheap 것으로 와전되었다는 이야기다. 진실 여부를 떠나 ‘와전’은 화폐시스템의 가치관을 가감 없이 반영하고 있어서 서늘하다.


싼 게 비지떡이면 돈 없는 인간 역시 비지떡인간이 된다. 비지떡인간이면 그 삶의 질 또한 비지떡이지 않겠나.


여기서 열대야 쾌적 취침 에어컨을 틀고 자는 아파트보다 뜨거운 바람이 쏟아져 나오는 선풍기 틀고 자는 반지하방에서 더 높은 삶의 질을 구가할 수도 있지 않느냐 뭐 이런 식의 같잖은 엄숙주의를 떠들자는 것이 아니다. 화폐라는 기준 자체를 툭 쳐 넘어뜨릴 때 일어나는 경쾌한 반전을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의료적 반전을 예로 든 것이 저자에겐 우연이라 할지라도 내겐 필연이다. 의료 화폐화는 기적이며 저주다. 의료 화폐화로 인류는 전염병을 포함한 많은 질병에서 해방되었다. 동시에 속수무책 의료화 사회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태어나기 전 산부인과 진료실에서 시작해서 죽을 때 영안실까지 인간의 생명동선은 병원 손바닥 안에 있다. 시시각각이 돈이며 처처가 돈이다. 화폐화된 의료, 의료화된 인간, 과연 어떻게 얼마나 높은 질의 삶을 펼쳐내고 있는가. 『잃어버린 치유의 본질에 대하여』의 저자 버나드 라운은 <한국의 독자들에게>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전 세계적인 위기의 시대이며 의료제도 역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현재 미국에서는 의사에 대한 불만이 최고조에 달해 있습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 의사가 더 많은 질병을 치료하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지만 대중의 불만은 오히려 더 커졌고 의사에 대한 반감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이 시점에서 우리는 과연 의사가 계속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다루는 전문가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아니면 단순히 고장 난 신체 일부를 고치는 기술자로 전락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의료제도에 닥친 위험은 깊은 근원을 가지고 있으며 제가 보기에는 모든 인간관계와 행위가 시장 기능에만 의존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인간의 기본 가치가 변질되고 사람 사이 관계가 단절되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이와 같은 문제가 어쩌면 더 심각한지도 모릅니다. 한국의 모든 의료인뿐만 아니라 대중도 문제를 인식해야 합니다.”


버나드 라운이 말한 ‘시장 기능에만 의존하는 것’이 다름 아닌 화폐화다. 화폐화는 산업화다. 산업화는 기계 기술과 화학합성약물에 모든 것을 맡긴다. 기술과 약물에 묶인 인간은 관계와 존엄을 빼앗긴 채, 원자화된 소비단위로 전락한다. 더 깊은 바닥이 있겠나.


바로 이제 여기서 돈의 할 일을 줄여나가는 거다. 할머니의 손을, 잡초를, 동종요법을, 심신요법을 재발견하는 거다. 의료산업을 역성장시키는 거다. 역성장이 복원하는 인간관계와 존엄을 누림으로써 삶의 질을 높이는 거다.


다행인 것은 할머니의 손, 잡초, 동종요법, 심신요법 모두가 우리사회 의학 전승 속에 생생히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불행인 것은 이 전승을 국민보건의학체계와 의료대중이 끊임없이 익명화한다는 사실이다. 이 모순된 두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는 데서 역성장·정상상태의 도정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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