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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쓰고 버리는 물건으로 가득 찬 삶은 풍요로운 삶이 아니다. 경제 활동의 대상, 즉 사람들이 창조하고 교환하는 것들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신성한 경제를 이룰 수 있겠는가?(228쪽)
소시민의 소심한 감각임을 모르지 않으나 어쩌다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에 갈 때마다 나는 묵시록적 의문에 사로잡힌다.
“대체 누가 얼마나 필요로 하기에 이 많은 물건들을 만들고 팔아대는 걸까? 이게 인류가 파멸하는 징조 아닐까?”
나 같은 가난뱅이 집에도 한두 번 쓰고 처박아둔, 사실상 버린 물건이 적지 않다. 연필에서 옷까지 실로 다양한 물건들이 이런 처지에 놓인다. “쓰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제대로 쓰지도 않고 버리는 것이다. 아니. 제대로 쓰지 않는다는 것은 버린다는 것이다. 온갖 곳에 쟁여진 그런 물건들만 재활용해도 인류가 생산을 전면 중단한 채 몇 십 년은 충분히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면 이자 기반 화폐시스템 자체가 ‘제대로 쓰지도 않고 버리는’ 낭비 시스템이다. 전 세계 산업설비의 40%가 멈춰 서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증거가 된다. 무엇보다 돈, 특히 부자들의 금고 속에 모셔진 돈은 버려진 돈이다. 그 돈이 그들의 부라 하자. 그 부의 실재는 뭔가? 없다. 굶어서 죽어가는 아이의 우유 값으로조차 쓰이지 않는 저 빳빳한 현금은 버려진 물건일 뿐이다. 돈은, 대체 얼마나 쓰고, 아니 쓰지 않고 버리는 우스운 것이어서 무서운 악인가 말이다.

내게는 10년 훨씬 넘게 쓴 가방이 하나 있다. 버리라고 아무리 말해도 버리지 않자 아내는 새 가방을 하나 사왔다. 나는 주말 나들이 때 한 번 새 가방을 쓸 뿐 여전히 그 가방을 들고 출퇴근한다. 이리 오래 쓸 만큼 잘 만들었고, 낡았으나 본디 기품을 잃지 않은 가방을 버리는 것은 “경제 활동의 대상, 즉 사람들이 창조하고 교환하는 것들을 존중하지 않”는 신성 모독이라 생각한다. 내 작은 신념과 실천이 생산, 유통, 폐기의 포르노를 얼마나 저지할 수 있을까만 열이 되고 백이 되면 신성한 경제 이룰 그 날을 희망 속에 놓을 수 있지 않겠나. 그 희망을 품은 헌 가방이 진정한 풍요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