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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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인생이 청소년기에서 끝나지 않듯이, 문명의 진화도 성장이 끝난다고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말하자면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성장해가는 과도기에 있다. 육체적 성장이 끝나면 인간의 생명차원은 내면으로 향해 다른 영역의 성장을 돕는다.(175쪽)


과학시대 인류는 추상적 사고가 가능한 ‘형식적 조작기’로 알려진 인지발달 단계를 마치고, 데카르트적 과학을 통해 극단적 분리, 완전히 발달한 자아, 지나친 합리성을 지닌 십대로 접어들었다.·······극단의 분리는 재결합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청소년기에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 자아 경계가 사랑하는 사람으로까지 확대되면서, 완벽하게 합리적이고 완벽하게 이기적이던 세계도 무너져 내린다.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기도 하고, 함께 창조하기도 하는 새로운 종류의 애정관계가 탄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타자와 완전히 분리될 때 비로소 타자와 사랑에 빠질 수 있고, 본래의 결합보다 더 위대한 결합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은 분리의 여정을 다 끝내고 이룬 결합이기 때문이다.(176쪽)


인류사를 한 인간의 일생에 빗대어, 아니 그 틀로 설명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어딘가 나이브해 보인다. 게다가 목적론적 해석의 냄새도 풍긴다. 심지어 요절을 염두에 두지 않은 듯 전개하는 이야기는 무근의 낙관론처럼 보인다.


이렇게 다시 물어보자. 한 인간의 일생을 틀로 썼다 할 때, 그 틀에는 해석이 없나? 없을 수 없다. 임의의 틀은 불가피하다. 4. 신성한 경제학이란 무엇인가? ④에서 쓴 틀도 결국은 마찬가지다. 문제는 ‘맞나 틀리나’가 아니다. 점을 치는 게 아니니까.


문제는 해석의 틀이 기술description뿐만 아니라 처방prescription도 낳는다는 데 있다. 처방은 당위다. 이제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누락시키면 해석 틀은 운명론이나 예정론으로 영락한다. 자, 이제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간단명료하다.


사랑에 빠진다.


이상하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자연Sein 아니던가. 한 인간과 한 사회는 이 지점에서 갈라선다. 한 사회는 한 사람이 아니다. 한 사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집합이 아니다. 한 사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네트워킹이다. 네트워킹에서 순수한 자연Sein은 없다. 필경 누군가의 당위Sollen와 마주 엮인다. 위기가 닥친 사회일수록 당위가 향방을 결정한다. 이때 당위는 영적 본질을 지닌다. “인간의 생명차원은 내면으로 향해 다른 영역의 성장을 돕는다.” 이것이 당위로서 사랑이다. 천명으로서 사랑이다.


사랑이 천명이라면 천명은 시대를 따르니 사랑은 역사적 실재다. 고정불변의 영원한 사랑은 없다. 지난 수천 년 간 철저히 처절히 타자와 분리되어온 우리는 이제 “비로소 타자와 사랑에 빠질 수 있고, 본래의 결합보다 더 위대한 결합”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이 사랑은 다른 사랑이다. 이 다른 사랑은 언젠가 천명을 따라 또 다른 사랑으로 변해갈 것이다. 변화의 결에 맡기고 우리 여정을 계속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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