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우리는 돈의 모순에 걸려 있다. 본래 돈은 감사와 신뢰의 징표고, 선물과 필요를 연결해주는 매개체며, 돈이 아니면 아무 교류도 없을 사람들 간의 교류를 돕는 촉진제로서 우리 모두를 풍족하게 만들어주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의 돈은 불안과 빈곤을 가져왔고, 자연과 문화적 공유자원을 고갈시켜왔다. 왤까?


그 원인을 찾으려면 화폐시스템의 핵심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원인은 돈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방식에 내재해 있으며, 그 시스템의 중심에 이자놀이가 있다. 이자놀이는 선물과 정반대의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소유한 사람이 그것을 남과 나누는 대신, 소유의 힘을 이용해 더 많이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118쪽)


문제는 이자에서 비롯한다. 이자를 낳는 빚은 언제나 새로운 돈을 수반하기에, 빚의 총액은 언제나 돈의 총액을 넘어선다. 돈의 부족은 우리를 서로 경쟁하게 만들고, 끊임없는 구조적 결핍에 시달리게 만든다.(127쪽)


이자 기반의 빚 시스템에서 신용 거래는·······현재의 상품과 ‘더 많은’ 미래의 상품을 교환하므로, 우리가 ‘충분한’ 상태로 되는 날은 결코 오지 않는다. 빚을 갚거나 단지 살기 위해, 우리는 남이 가진 기존의 부를 빼앗거나·······공유자원에서 ‘새로운’ 부를 창출한다.(128쪽)


불교의 <중아함경>을 제외하면 고대 종교나 철학 사상 대부분은 이자를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화폐시스템의 경제적 본질을 통찰하고 내린 결론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도 그럴 것이 자본주의 등장 이후 몇몇 이슬람국가 말고는 이자 자체를 문제 삼는 종교는 없으니 말이다. 불교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모든 종교도 이제야말로 돈과 이자 문제를 놓고 근원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멸절의 조짐 앞에서 이토록 무력한 종교라면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지 않는 한 구원과 깨달음을 더 이상 전파할 수 없으리라.


이슬람국가, 예컨대 말레이시아가 이자 자체를 금지하는 것에 대해 개신교 사람들은 극단적이라고 말한다. 극단이란 중용을 잃고 치우친 상태다. 이자는 “필요 이상으로 소유한 사람이 그것을 남과 나누는 대신, 소유의 힘을 이용해 더 많이 얻으려” 하는 수탈 수단이다. 수탈의 정도를 낮춘다고 중용이 되나. 수탈 자체를 멈추어야 중용이다. 수탈을 멈추면 “정반대의 것”이 경제를 이끈다.


선물


선물을 주고받는 경제는 “우리를 서로 경쟁하게 만들고, 끊임없는 구조적 결핍에 시달리게” 하지 않는다. “남이 가진 기존의 부를 빼앗거나·······공유자원에서 ‘새로운’ 부를 창출”하게 하지 않는다. “감사와 신뢰”의 세계를 다시 펼친다. “아무 교류도 없을 사람들 간의 교류”를 촉진해 “우리 모두를 풍족하게” 하는 길에 새삼 세운다.


모순을 푼다.


* 번역 문제-본디 이자놀이는 고리대금으로, 모순은 역설로 번역되었는데 인용자가 바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