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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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상적인 돈의 성질이 이론상 무한히 돈을 소유하게 만든다.·······숫자가 증가하는 데 무슨 한계가 있겠는가? 우리는 추상성에 도취되어, 이런 성장에 대한 자연과 문화의 수용 한계를 무시한다.·······이 세계가 숫자만큼 무한하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돈의 무한성은 또 다른 무한성을 그 안에 담고 있다. 그것은 이 세계에서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영역이 무한하다는 생각이다.(68-69쪽)


오랫동안 마음 아픈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수도 없이 들어온 말이 ‘죽을 만큼 ~~하다.’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지 않는다. 그 이상의 묘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죽음을 거론한다. 공감하면서 한 발 물러나 생각해본다. 죽음은 누구에게도 경험 밖의 일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삶의 마지막 찰나뿐이다. 직관도 가 닿지 못하는 세계다. ‘죽을 만큼 ~~하다.’는 말은 이치상 허구며 허영이다. ‘죽을 만큼 ~~하다.’는 말은 ‘죽고 싶을 만큼 ~~하다.’는 뜻일 뿐이다.


죽음이 산 자에게 그러하듯 무한 또한 유한한 자에게 허구며 허영이다. 인간의 실제 경험은 마지막 찰나까지 지속되는 유한이다. 무한 증가하는 숫자인 돈이 가르쳐준 무한이란 언어에 이끌려 불안, 우둔, 탐욕을 한사코 지속할 따름이다. 세계도 유한하고 소유도 유한하다.


이야기가 이런 깨달음에서 멈춰진다면 인간사 간단하다. 간단하지 않아서 인간의 문제가 종말론적 상황까지 오지 않았나. 돈의 소유에서 유한과 무한의 차이가 무의미해지는 한 순간이 찾아온다. 그 임계점은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결코 휴먼스케일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자신이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가처분소득 수준을 넘어서 쌓이는 돈은 자기 돈이 아니다. 여기가 유한과 무한의 구분이 없어지는 지점이다. 무한의 세계로 들어선다. 유한 세계의 감각과 윤리, 그리고 성찰이 무화된다. ‘뽕’ 무한이다.


단돈 45만 원에 가사도우미를 고용하려고 필리핀 여성 여권까지 빼앗았다는 한진가 안주인을 보라. 임계점이 딱 거기다. 그 이상 쟁여진 부는 인간성 말살을 부른 ‘뽕’에 지나지 않는다. 한진은 2018년 기준 재계 서열 제14위다. 그보다 높은 서열에 있는 부자들은 수준이 더 높을까. 그럴 리가. 세계 최고 부자 빌 게이츠라면 그래도 수준이 상당히 높지 않을까. 어림없다. 그가 공익사업에 투자하고 기부하는 막대한 돈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지만 재단 설립으로 포탈한 세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무한하지 않은데 무한을 전유해 살아가는 ‘뽕’ 맞은 인간들 손에 지구가 결딴나고 있다. ‘뽕’ 무한의 숫자놀이를 멈추어야 한다. 멈추고 그 숫자를 큼큼 맡아보라. ‘뽕’ 무한의 언어유희를 멈추어야 한다. 멈추고 그 언어를 톡톡 건드려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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