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지금 인류는 목전에 닥친 위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내가 제시하는 경제 변혁이 기적처럼 보인다면, 적어도 이 세계를 치유하는 데 기적이 필요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돈의 영역에서부터 생태적 치유, 정치, 기술, 의료에 이르는 모든 영역에서 지금 가능한 수준을 넘어서는 해결책이 필요하다.·······이런 위기들이 개개인의 삶에 영향을 주고 이 세계를 허물어뜨려, 결국 우리가 새로운 세상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재탄생하게 만들 것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전 지구적 위기, 심지어 경제 위기에서 영적인 차원을 감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정상normal’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새로운 ‘정상’을 향해, 새로운 사회, 지구와의 새로운 관계, 인간으로서 새로운 경험을 향해 재탄생하고 있음을 느낀다.(14쪽)
山是山 水是水(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la naïveté première(제1차 소박성)
山不是山 水不是水(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la critique(비판)①
山是水 水是山(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다.): la critique(비판)②
山是山 水是水(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la naïveté seconde(제2차 소박성)
왼쪽 한문은 청원 유신 선사의 것이다. 오른쪽 프랑스어는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œur의 것이다. 청원 유신의 글은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같다. 겉보기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익숙한 통속 논리에서 볼 때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므로 함의 또한 같다고 할 법하다. 청원 유신이 어찌 통속 논리 따위를 구사했겠나. 청원 유신은 스스로 그 차이를 구태여 밝히지 않았으나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지구 반대편의 폴 리쾨르가 제1차, 제2차라는 구분을 통해 진실을 드러내주었다. 부정의 부정은 단순한 긍정 회귀가 아니다.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은 부정不定이다. 부정不定은 모순 너머 역설 품은 무애자재다. 신성 운동이다.
인류의 고대적 삶은 “‘정상normal’”이었다. 분리 이후 인류의 문명적 삶은 비정상이다. 비정상의 폐해를 꿰뚫고 이제 인류가 꽃피워야 할 삶은 고대적 정상의 복원이 아니다. 문명이 일깨운 지혜를 폐기할 수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지혜를 신성하게 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신성한 삶은 “새로운 ‘정상’”이다. 숙성 정상이다.
숙성은 발효되어 잘 익은 상태다. 지금 인류가 벌이고 있는 온갖 화학적 행태들이 발효로 귀결될지 부패로 끝나고 말지 단정하기 어렵다. 머리로는 이미 비관적 판단이 내려졌다. 가슴으로는 아직 낙관을 부여잡는다. 낙관으로 낙원을 일구려면 판단 너머 결단으로 나아가야 한다. 결단은 통속한 이해와 달리 의지의 힘에서 나오지 않는다. 결단은 “영적인 차원을 감지하는 것”에서부터 추동된다. 영적 차원을 감지하는 것은 “지금 가능한 수준을 넘어서는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금 가능한 수준을 넘어서는 해결책, 다름 아닌 “기적”을 일구어간다는 영적 신뢰가 결단을 낳는다. 영적 신뢰는 기적을 ‘표적σημεῖον’이 되게 한다.
표적은 본디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자신이 구약 전승의 예언을 따라 도래할 메시아임을 나타내는 증거로 행한 일을 뜻한다. 예수의 표적은 바로 오늘 우리에게 신성한 삶을 살도록 이끄는 깃발이다. 우리는 그 향도를 따라 표적을 행할 따름이다. 모든 표적이 기적일 필요는 없다. 기적이 필요한 시대에 표적이 그대로 기적인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