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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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신성이란 무엇인가? 신성에는 고유성uniqueness과 관계성relatedness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신성한 사물 혹은 존재란 독특하고도 유일무이해서, 한없이 귀하고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하다.·······

  이렇게 고유하지만 신성은 그것을 만들어낸 모든 것, 그것의 역사 그리고 모든 존재의 그물망 속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자리와 분리될 수 없다.(9쪽)


  신성의 존재란 마치 늘 거기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고, 변함없이 존재하는 진리로 회귀하는 것과 같다. 벌레 한 마리, 풀 한 포기를 들여다볼 때·······신성은 거기에 있다. 그런 경험들은 특별하지만 결코 나머지 다른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런 경험들은 이 세계의 바탕을 이루고 관통하는 더 진짜 같고 신성한 세계를 언뜻 보여줌으로써 힘을 발휘한다.

  그렇다면 ‘늘 거기 있는 집’이자 ‘변함없이 존재하는 진리’란 무엇일까? 그것은 만물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진리이며, 자기 자신과 별개가 아니면서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에 참여하는 느낌이다.·······

  신성은 모든 존재의 기저에 놓인 통일성에 이르는 관문이자, 각 존재의 고유성과 특별함에 이르는 관문이다.(11쪽)


뜨르르한 서구 지성의 사유를 접할 때, 동아시아 사람은 두 가지 상반된 느낌이 공존하는 것을 경험한다. 뛰어난 언어 구사로써 진실의 층위와 구체성을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현기衒氣가 지나칠 정도다. 심지어 지식 포르노로까지 치닫는다. 반면 전체 진실, 그러니까 비대칭적 대칭의 현기玄機를 통짜로 드러내는 직관에서는 적잖이 모자란다. 동어반복을 끊임없이 변주한다.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분명히 균형이 잘 잡힌 사상가다. 그럼에도 아직 서구적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필경 그런 의식 자체를 지니고 있지 않을 것이다. 신성이나 통일성을 이야기할 때,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형식논리의 붕괴 앞에서 그가 들려주는 음성은 플라톤의 진동수에 여전히 공현共絃한다.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신성에는 고유성uniqueness과 관계성relatedness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한 첫 문장부터 이미 이런 한계는 예고된 것이었다. 고유성과 관계성이란 말은 구체적이고 역동적이지만 신성의 비대칭적 대칭을 담아내기에는 부족하다. 동아시아 전통에서 오랫동안 써온 一卽多 多卽一, 또는 色卽是空 空卽是色과 비교하면 대뜸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말은 단 한 글자로 표현할 수 있다. . 은 고유한 낱 존재와 그 낱 존재의 네트워킹이 빚어내는 온 존재를 모두 담아낸 최고의 말이다. 그가 이런 언어·사유 세계에 이르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신성에 고유성과 관계성 두 측면이 있다는 말과 “신성은 모든 존재의 기저에 놓인 통일성에 이르는 관문이자, 각 존재의 고유성과 특별함에 이르는 관문이다.”는 말은 서로 어긋난다. 관계성과 통일성이 같은 말이 아닌 한 어긋남은 불가피하다. 통일성은 “만물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진리”로서 “이 세계의 바탕을 이루고 관통하는 더 진짜 같고 신성한 세계”와 조응하는 표현이다. 신성의 경험은 그 통일성의 세계를 “언뜻 보여줌으로써 힘을 발휘한다.” 통일성은 실체substance다. 신성은 실체에 이르는 관문일 뿐이다. 플라톤의 진동수가 확인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동아시아, 특히 의 사유는 존재와 존재의 기저를 분리하지 않는다. 존재의 기저는 실체 개념이기 때문이다. 실체 아닌 실재the Real로서 존재의 네트워킹 운동/사건을 인정한다. 존재와 존재의 네트워킹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으므로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不二不一. 더 진짜 같은 세계는 이 세계의 기저에 따로 있는being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운동/사건으로 끊임없이 실행doing된다. 의 사유를 원효가 불교적으로 정리한 것이 다름 아닌 一心和諍無碍 사상이다.


신성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가운데도 아니고 가장자리도 아닌,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무한불확정의 자유·평등·박애 운동이다. 신성 운동의 어느 찰나에 맛보는一味 장엄 사건을 구태여 이름 한다면 (찰스 아이젠스타인에서 실체 개념 뺀) 통일성이라 해도 나쁘지 않다. 장엄을 맛보지 않고도 신성에 깃드는 자가 싯다르타며 예수다.


* 본문에서  처리된 글자는 아래 아를 쓴 '한'이다. 알라딘 시스템에서는 인식이 되지 않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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