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아이젠스타인 이야기를 끝으로 한다.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가 내게 준 마지막 선물은 바로 이 것이다.
“예술가는 그냥 일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일을 신성하게 여긴다는 것은 곧 일을 받아들이고 그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좀 더 정확하고 다소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창조물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창조물이 물질적이든 인간적이든 사회적이든 이미 존재하나 아직 구현되지 않은 무언가를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는 것이다.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에 경외심을 갖는 것은 그 때문이다.”(447쪽)
살면서 입버릇처럼 내가 했던 말이 ‘다시 태어난다면 예술 할 꺼다.’다. 예술이란 문학, 음악, 미술, 연극들을 말함은 물론이다. 예술적 감수성을 지녔다는 뜻뿐만이 아니다. 삶을 대하는 자세 자체가 다른 일을 해서 ‘대박’나기와는 거리가 멀다는 자각에서 연유한다. 아픈 사람 치료하는 일을 하면서도 늘 예술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이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치료행위에 예술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딱 여기까지가 내 수준이었다.
전적全的은 아니더라도 내가 주체적인 어떤 작위로 예술인 치료행위를 한다고 생각했다. 아픈 사람과 함께 아픔과 삶을 숙의하는 과정에서도 “자기 창조물의 도구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이미 존재하나 아직 구현되지 않은 무언가를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는” 행위가 아니었다. 나는 내 “일을 신성하게 여긴다는 것”에 다다르기 전에 예술가인 양 했다. 신의 길을 가지 않으면서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올랐다. 아, 참람함이여.
“일을 받아들이고 그 도구가 된다는 것”은 마치 나사렛 예수가 골고다의 길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십자가를 진 것과 같다. “자신의 작품에 경외심을 갖는 것”은 빈 무덤 앞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마라.’ 한 것과 같다. 치료, 그것이 내게 왔을It came to me 때, 나는 의자로서 받아들이고 도구가 되면 그만이다. 나는 죽어 마지막 거점조차 지우는 일로 경외를 표하면 그만이다. 의자는 치료 속으로 배어들고, 아픈 사람의 변화된 삶에서 배어나는 것으로 그만이다. 이것이 치료의 예술이다. 예술이 아니면 녹색의학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