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화와 비밀의 부채
리사 시 지음, 양선아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착한 성품과 여자의 도리를 배우는 소녀가 있다고 들었어. 너와 나는 같은 해, 같은 날에 태어났다지. 우리가 서로의 단짝이 될 수 없을까? 65P
운명과도 같은 인연. 라오통이 될 소녀 설화에게서 처음 온 부채의 글귀는 위와 같았다.
학창시절에던가? 중국의 전족이라는 풍습에 대해 아주 짧게 기억한 적이 있었다. 남성의 소유물로 여겨지던 여성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아주 어릴적에 발을 동여매서, 작게 만드는 풍습이 있었다는 사실로 말이다. 그 전족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 책에 아주 상세히 다뤄진다. 천년동안 이어진 신비의 문자 누슈와 함께, 전족이라는 생소한 문화는 이 책의 주요 사건이자 모티브가 되면서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 또 전통 중국 사회로 우리를 되돌려주는 가교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때 누구도 말하지 않은 얘기가 있었다.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용밍군 뿐만 아니라 중국을 통틀어 소녀 열 명 중 하나는 전족을 하다 죽는다는 이야기는 내가 시집을 간 후 시어머니에게서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전족이 내 결혼 생활을 좀 더 편하게 해주리라는 것과 여자의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이자 행복인 아들 낳는 일을 좀더 쉽게해준다는 것을 알 뿐이었다. 내 목표는 작고, 좁고, 곧고, 뾰족하고, 휘고, 향기롭고, 부드러운 완벽한 발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건 중에서도 길이가 가장 중요했다. 대략 엄지 손가락 길이인 7센티미터가 이상적이었다. 완벽한 발의 모양은 연꽃 봉오리와 흡사했다. 39P
발이 더이상 자라지 않게 묶어놓는 것인줄만 알았지. 진실을 알고서, 충격적인 현실에 너무나 놀랐다. 여섯살 정도의 여자아이들의 네 발가락들을 모두 부러뜨려서 발을 기형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게다가 여자의 인생, 운명은 바로 그 발에 달려 있었다. 집안도 중요하겠지만, 당시 여자들에게 최고의 신분 상승을 꾀할 수 있는 좋은집안과의 결혼은 얼굴 뿐 아니라 최고의 금련, 즉 전족이 잘된 환상적인 발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전족을 하지 않은 일반 큰 발을 가진 여자는 모든 집안의 남자들과 잠을 자야하는 노리개로 전락할 수 있었으니, 전족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 배우 전지현의 헐리웃 영화 진출작이라는 소식에 관심을 갖고, 영화 정보와 책 정보까지 접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설화를 읽으며, 전지현을 대입해 생각하게 되었고, 말띠 해에 태어난 자유로이 날아가고픈 영혼이었던 설화의 가혹한 운명에 대해 참담한 마음을 금치 못하게 되었다. 영화에서 그녀들의 동성애가 그려질 수 있다라는 식으로 자극적으로 쓰인 기사가 있었는데, 소설을 읽어보면 그 장면이 그런내용이 아님을 알게 된다. 오해의소지가 있을 부분은 있으나 설화와 나리의 우정은 사랑을 넘어선 것이었지, 육체적 관계로 지탱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설화에 너무 몰입되어 읽은 나머지, 나리를 더욱 이해하기 힘들었다.
비극적으로 운명이 바뀌어버린 두 여인에 대해, 또 그녀들의 삶에 대해 인생은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땅의 중국여인이 아닌, 지금 이 시대의 한국의 현대여성으로 태어남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려야할 정도였다.
의자매, 라오통, 우리에게는 생소했던 그 여인들의 우정 문화, 자유로이 친구를 사귈 수 있지도 않았고, 부모가 맺어준 인연에 의해서만 친구를 알 수 있었던 시기, 그리고 결혼 못지 않게 중매쟁이를 거쳐서 사귈 수 있었던 독특한 제도 라오통, 그 제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설화와 나리의 관계를 더욱 이해하기가 힘이 들어진다. 물론 이 책에서는 그 모든 것을 우리가 숙지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서술이 되어 있다.
설화는 라오통으로서 마님을 있는 그대로 사랑했어요 하지만 마님은 너무 남자처럼 생각했죠 오직 남자의 규칙에 서서 설화의 가치를 평가하고, 남자가 사랑하듯 설화를 사랑했어요. 361P
이름도 중국 이름같았던 리사 시, 읽으면서 더욱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은 리사 시가 중국 여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중국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나 펄벅처럼 중국에서 오랜동안 생활한 사람도 아니었고, 다만 누슈, 전족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파리태생, 미국 거주의 작가였다. 그녀가 이 작품을 위해 통코우 마을에 들어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아흔이 넘은 최고령 여인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는 하나 그녀에게서 쏟아져 나온 이야기는 정말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물론 그녀의 말마따나 진실은 어긋나있을수도 있지만, 많은 부분 우리가 몰랐던 통코우의 옛 삶으로 우리를 보내주었을 것이라 굳게 믿음이 간다.
여자는 아들의 어머니일 수 밖에 없었던 과거의 삶, 사랑받고 싶었지만, 어머니에게서 항상 관심 밖의 인물이었던 둘째 딸 나리가 타고난 발 모양으로 인해 집안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관심을 받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엄마의 사랑은 받을 수 없었던 그 이유로.그녀는 소중한 마음을 다치게 되고 그것이 그녀의 평생의 사랑이었던 라오통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되었다. 아름다운 두 여인의 비극적인 우정 이야기를 전해준 여인들만의 문자 누슈. 그 신비의 문자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한권의 책에서 깊은 감동을 받은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