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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의 7분 드라마 - 스무 살 김연아, 그 열정과 도전의 기록
김연아 지음 / 중앙출판사(중앙미디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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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는 우리나라의 피겨여왕이다. 그런데 김연아가 피겨를 처음 시작하게 된 것은 6살 정도였다고 한다. 부모님이 "스케이트 타러 가자!"라고 해서 따라간 것이 김연아의 피겨 인생을 시작하게 했다고 한다. 김연아를 처음 가르쳤던 코치는 김연아의 남다른 재능을 알아보고 김연아의 부모님께 연아를 피겨 선수로 키워보시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김연아의 부모님의 경제적 사정은 그다지 여유가 없던 터라 결정하기에 쉽지 않았지만, 김연아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투자를 하기로 결심을 했다고 한다. 김연아는 처음 나간 전국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 보였고, 계속 두각을 나타냈지만 이런 그에게도 고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첫번째 고비는 부상이었다. 어느날, 김연아는 발이 너무 아팠고 잘 낫지도 않아서 피겨를 그만두었지만 부상이 낫자, 하고 싶은 욕망이 가시지 않아 다시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한번은 피겨 연습이 너무 힘들어서 주저앉아 버렸고  그래서 그 때도 그만두려했는데 역시 피겨에 대한 열망이 그녀를 다시 일어나게 했다고 한다. 이후 김연아는 인터뷰에서 자기는 피겨를 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라고 밝혔고 열심히 목표를 위해 연습에 몰두했다. 그 결과로 김연아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고 많은 대회에서 1등을 한 대한민국의 보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그런데 만약 김연아가 몇번의 고비 때에 피겨가 힘들다고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재능이 있는 사람은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에게 지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에게 진다고 한다. 그런데 김연아는 피겨를 운명으로 받아들인 후, 노력도 하고 즐기기도 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재능도 아주 뛰어났다. 이 세 가지를 다 갖추고 있었기에 김연아가 최고의 선수가 된 것 같다. 우리도 목표로 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무엇보다 즐기면서 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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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랑카랑 카이사르 앗, 이렇게 훌륭한 인물이! 1
믹고워 지음, 이희주 옮김 / 주니어김영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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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는 옛날 로마 시대의 남다른 소년이었다. 카이사르는 공부는 물론 무술 분야에서도 최고의 우등생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카이사르에게는 한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그 것은 바로 남의 돈을 내 돈 쓰듯 한다는 것이다. 카이사르는 항상 한 분야의 최고의 사람이 되고 싶을 때 남의 돈을 이용했다. 남의 돈을 써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이루었고 때가 되면 몇배로 갚아주겠노라'고 큰 소리를 쳤지만 실제로 자기 힘으로 돈을 다 갚은 적은 한번도 없다. 그리고 카이사르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는데 알려주겠다. 어느날 카이사르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을 때 해적선을 만났다고 한다. 해적들은 카이사르의 몸값을 20달란트로 치고 빨리 주라고 했으나 카이사르는 자기 몸값을 도리어 50달란트로 하였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종들이 자기 몸값을 가져올 때까지 해적선의 두목같이 행동하고 시간날 때마다 자기가 해적들의 목을 다 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고 한다. 해적들은 이 말을 거짓으로 생각했지만 카이사르는 진짜로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 해적들의 목을 다 쳤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엄청난 바람둥이였다. 자기의 애인 목록만 해도 한 200개는 족히 넘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허무하게 죽었다. 원로원들이 지배하고 있는 로마를 구하려고 하다가 시도도 해보기 전에 자기 아들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그러나 카이사르를 좋아했던 시민들이 이 일을 듣고 불같이 화를 냈고 결국은 카이사르가 로마를 구한 셈이 됬다. 이 책을 읽고 카이사르처럼 남의 돈을 자기의 돈처럼 이용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렇게 남에게 나의 돈을 빼앗기다시피 하면 정말 기분이 더러울 것 같다. 나는 돈을 빌리더라도 꼭 약속한 시일 안에 갚아야겠다. 여러분들도 절대로 카이사르처럼 남의 돈을 자신의 돈으로 이용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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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눌 수 있어 행복한 사람, 이태석 햇살 담은 아이 1
서영경 그림, 정희재 글 / 주니어중앙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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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석 신부님의 별명은 '수단의 슈바이처'다. 이태석 신부님은 형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희망이 보였다. 열심히 공부를 해서 의과 대학에 입학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의사가 되서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을 더 좋아해서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러 혼자서 수단으로 떠났다. 수단의 아이들은 처음에는 새로운 사람이 등장해서 신기한 분위기였지만 이태석 신부님이 병원을 만들어서 아픈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기 시작하자 점점 정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태석 신부님은 이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게 성당에 전등을 설치해 주었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직접 냉장고를 만들어서 백신 주사도 놔주었고 이 사람들의 발이 정말 상처가 많이 난 것을 보고 신발도 만들어 주셨다. 만약에 내가 그렇게 성공했으면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도울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의사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수단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평생을 산 이태석 신부님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 신부님은 어렸을 때부터 집안이 가난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기 어려운 곳에 가서 그 사람들을 도와주고 자기도 같이 고생했다. 그 때 이태석 신부님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자신의 아들딸들 중에서 유일하게 의사가 되어 집안을 일으킬 희망이 보이는 아들이었는데 수단에 가서 고생만 하고 있으니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태석 신부님이 한국에 와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폐암이 걸릴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태석 신부님은 빨리 수단에 가야한다고 암 치료를 받지 않으려고 했다. 결국 이태석 신부님이 암에 걸리셔서 마지막 순간 때 자신의 엄마를 봤을 때 기분이 어땠을까? 정신이 없었지만 다시 본 것이 정말 반갑고 이때까지 혼자서 잘 살고 계신 것에 감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부님의 엄마는 수단이 원망스러웠을 것 같다. 유일하게 의사가 될 아들이었는데 수단에 가서 고생을 하다가 암에 걸려서 죽었으니 말이다. 나라도 그럴 것 같다. 하지만 이 분은 정말 위대한 위인이시다. 이태석 신부님이 없었으면 지금 수단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망률이 훨씬 높아졌을 것이고 엄청나게 불편하게 살고 있었을 것이다. 나도 이태석 신부님 같은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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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황제 펠레 - 개정판 큰 인물 큰 이야기 2
김경우 지음, 이명환 그림 / 청개구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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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펠레에 관한 감상문을 써보겠다.

펠레는 어릴적 가난한 브라질의 동네에서 겨우겨우 먹고 살았다. 펠레는 틈만나면 친구들과 축구를 하였다. 축구가 너무나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펠레의 기량은 매우 뛰어났다. 어느날 펠레 동네의 소년들은 자기들끼리 축구단을 만들자고 하였다. 축구화 등 축구용품들은 어떤 아이의 아버지께서 대주셔서 축구단을 만들 수 있었다. 펠레의 팀은 대회에도 많이 나갔는데 나가는 곳마다 우승을 차지하였다. 거의 모든 대회에서 펠레는 득점왕 자리를 차지해서 적지않게 유명했다. 결국 브라질 최강의 팀에서 펠레를 스카우트하였다. 펠레는 그 팀에서도 아주 잘하였다. 세계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지만 알아주는 곳은 별로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펠레는 모처럼 휴가를 내어서 집으로 왔다. 그리고 휴식을 취하며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 라디오 방송에서 월드컵 출전 선수를 발표하였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엄청난 기적이었다. 세계에서 이름을 별로 떨치지 못하던 펠레의 이름이 4번째로 불렸던것이다. 펠레는 아주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펠레에게 첫 월드컵은 1958년 스웨덴 월드컵이었다. 거기서 펠레는 많은 골을 기록하였다. 펠레의 많은 골 덕분에 팀은 결승전까지 무난하게 진출하였다. 결승전 상대는 이번 월드컵 개최국이자 아주 잘하는 국가인 스웨덴이었다. 브라질은 스웨덴 관중의 큰 함성 소리에 기죽어서 먼저 한 골을 내주었지만 그에 기죽지 않고 2골을 연달아서 뽑아냈다. 팀은 5:2로 이겼다. 이 경기에서 펠레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세계 최고의 선수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다음 월드컵에도 출전했으나 부상 때문에 제대로 뛰지 못하였다. 그 다음 1970년 월드컵에서는 이탈리아와의 결승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우승에 큰 기여를 했다. 펠레는 30대 초반에 미국 리그로 이적하였으며 큰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37세 때 그의 성공적인 축구 인생을 마쳤다. 참, 29세 때는 바스코 다가마 팀과의 경기에서 1,000번째 골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60세 때 20세기 최고의 축구선수 상을 받았다. 나도 펠레처럼 축구를 잘하고 싶다...... 펠레는 가난한 환경에서 성공한 사람이다. 나는 가정환경이 나쁘진 않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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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으로 간 맹인소년 강영우
김성춘.김현정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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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우 박사님은 맹인인데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오신 훌륭하신 분이다. 강영우 박사님은 어릴 때 아주 화목한 집안에서 살았다. 가족은 엄마와 아빠, 누나, 동생 두명으로 모두 6명이었다. 그리고 가정형편도 나쁜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날 아빠가 갑자기 서울로 집을 옮기자고 말했다. 그래서 서울로 가서 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너무 고된 일을 하셔서 눈을 감으시고 말았다. 강영우 박사님은 며칠간 절망감에 젖어 살았지만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공부를 했다. 그런데 어느날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가 강영우 박사님은 골키퍼를 맡게 되었다. 어느 친구가 코너킥을 올렸는데 강영우 박사님은 공을 잡으려다가 그만 눈에 정통으로 맞고 말았다. 오른쪽 눈에 계속 동그라미가 보이는데 실명될수도 있는 위기 상황이었다. 어느날 의사선생님은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강영우 박사님이 맹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로 한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 엄마는 하늘나라로 가셨고 누나는 엄마 대신 일을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엄마, 아빠와 함께 하늘나라로 떠났다. 강영우 박사님은 맹인이 되었고 자기 가족들까지 저 세상으로 갔는데도 좌절하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하여서 연세대학교에 들어갔다. 거기에는 어떤 착한 누나가 있었는데 강영우 박사님은 계속 그 누나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급기야 결혼까지 하였다. 강영우 박사님은 아내의 도움으로 박사 학위까지 얻게 되었다. 그 때는 마냥 좋았지만 강영우 박사님을 불러주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미국에서 생활하기로 결심하신 강영우 박사님은 미국에서 뛰어난 연설을 많이 하였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알아주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한국에서 책도 많이 쓰고 훌륭한 일을 많이 하셨다. 나는 맹인이 되었다면 삶을 포기하였을텐데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나의 성향에 맞지 않는 일이 생기면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야겠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말이다. 장애가 있는 분들은 강영우 박사님을 본보기로 삼아서 좌절하지 말고 알차게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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