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13 - 4부 1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13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한참을 쉬었다. 이놈의 귀차니즘이 또 발동을 해서 도서관까지 가는 길이 우째 이리도 더뎠던지. 다른 책을 미뤄두고 토지 원정대를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4부와 5부 반을 빌려 왔다.

읽다 보니 희미해진 캐릭터들이 스멀스멀 되살아난다. 4부에선 가장 좋아하는 주갑 아재가 소문으로만 살짝 등장해서 아쉽긴 하지만 여전히 좋은 사람이라 맘이 든든하다.

 

불안에 쫓기어 사는 사람들. 그들의 삶은 여전히 굴곡지게 흘러가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타격이 크진 않다. 3.1운동과 광주학생사건 등으로 일본은 더욱 조선을 압박하고 목을 죄어 온다. 기워놓은 시간 곳곳에서 피고름이 새어 나오고 딱지가 엉겨 붙어 형편없지만 세대를 이어받은 이들은 식민지 시대를 가엽게 버텨낸다.

 

점점 조선인들의 생활은 마른 풀과 같다. 일본인들 아래서 소작을 하니 삶의 궁핍함은 더욱 말할 것도 없다. 식민지가 길어질수록 허무주의도 만연하다. 허무주의는 소비를 촉진한다. - 13권, p.14 라는 말인즉 자포자기 심정으로 사는 이들이 늘어만 간다는 얘기다. 바가지를 들고 전전하는 사람들이나 방구석이 있어도 손가락 빠는 건 매한가지다.

 

일진이 사나운 강쇠의 하루를 보고 있자니 시작부터 열불 터진다. 시비 건 놈은 일본놈인데 되려 얻어맞은 건 강쇠다. 일제 치하 이 정도 설움은 설움 측에도 끼지 않겠지만 생전 이런 일을 처음 겪은 강쇠는 분노가 치민다. 이리가 도 저리 가 도 사방이 벽이니 여기저기서 터지는 한숨소리에 독립의 꿈마저 사라져 버릴 것 같다.

 

도대체 사람은 열쇠를 몇 개나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13권, p.145

 

독립이 되리라는 희망을 쥘 수밖에 없는 자들은 생존을 포기할 수 없기에 희망의 끈이라도 붙잡고 있지만 친일 덕에 목숨을 부지하는 자들은 희망을 불신하며 동족의 피에 빨대를 꽂는다. 만세를 부른 죄로 이미 한 번씩 옥고를 치른 아이들. 부모들의 심정 또한 살얼음일 수밖에 없다. 일본인들의 표적이 되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는 처지가 되자 지식인들의 고민과 방황도 깊어진다. 오죽하면 환국은 톨스토이의 작품에서조차 고민에 빠진 톨스토이만 보았다고 했을까.

 

두 형제 사이에서 껍데기뿐인 삶을 살던 명희는 드디어 조용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촌구석으로 숨어버린다. 인실을 잊지 못하는 오가타, 그런 오가타의 아이마저 매몰차게 남겨둔 채 만주로 떠난 인실, 자신을 버리고 중이 된 남자를 기어이 만나 이유를 따져 묻는 지연, 그런 지연이 부담스러워 또다시 떠나버린 일진, 이유가 어찌 되었든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과 거짓으로 얼룩진 사랑에 마음이 찢겨나가고 그렇듯 아픔은 혼자만의 몫이다. 그만큼 아픔을 덜어 줄 이도 위로해 줄 이도 남아 있질 않다.

 

세월은 흘렀어도 부모가 지은 죄는 대를 이어 따라붙고 신분이 격상해도 미천했던 신분 또한 여전히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무식한 농사꾼이나 식자 들어간 지식인이나 눈밖에 나면 초주검이 되는 세상이지만 그렇다고 몸 사리고 납작 엎드려 세월이 흐르기만을 기다리기엔 불안함이 크다.

 

동네 남정네의 칼부림을 말리다 죽다 살아난 홍이, 그런 홍이를 찾아온 김두수, 조강지처에게 화풀이를 일삼고 돈독이 오를 대로 오른 두만, 독립운동을 위해 딸자식을 급히 혼인시키고 떠나는 관수, 일본에서 거의 망가질 대로 망가진 후 악기쟁이가 된 영광, 드디어 옥에서 나온 길상, 환국은 그림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거쳐를 옮겼고 윤국 또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가출을 하기도 한다. 임이네 딸 임이의 존재도 등장하고(피는 못 속이나 보다. 그 엄마의 그 딸!) 숙이라는 처자도 처음 등장한다. 윤국이와 얽힌 것 때문에 영호의 미움을 받는 걸 보니 우째 앞날이 평탄해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술이 없었다면 어찌 버텨내었을까 싶을 정도로 수없는 술상은 차려지고 내뱉는 신세한탄을 안주 삼아 설움을 마시는 이들 투성이다. 비록 지배국과 피지배국 사이이지만 찬하와 인실과 오카타같은 인물들이 만나 벌이는 심도 있는 관점은 토지라는 대하소설을 더욱 가치있게 만든다. 읽으면서도 이 많은 역사적 사료를 어떻게 정리하셨을까 싶을 정도로 작가 박경리 선생님의 해박함에 놀라울 따름이다. 그래서인지 실제 역사 속에서 인물들이 존재했던 것 마냥 읽힌다.

 

세월은 그냥 세월이 아니외다. 세월은 만들어 놓고 가는 거요. 다듬어 놓고 가는 거요. 갈아놓고 가는 거요.

물(物)만 그러하더니까 생각도 만들어놓고 다듬어놓고 갈아놓고 가는 거요. 왜 만들며 다듬으며 갈아놓는가. 삼라만상 생명 있는 것이 그 생명을 부지하기 위함이요, 부지하더라도 좀 더 편안하게 부지하기 위함이 아니겠소이까.- 14권, p.473

 

영만의 한방에 기세등등하던 두만이의 공허하고 한풀 꺾인 웃음소리를 들으며 다행스럽다고 해야 하는 건지 김두수의 역적질이 끝나감을 안도해야 하는 건지 의문이지만 다롄 학살에 관한 대화 내용을 듣자니 일본의 천벌이 원자폭탄으로 끝날 것 같진 않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세상이 이치가 맞는다면 일본은 진즉에 가라앉았어야 했고 동족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한 친일파들 또한 삼족이 멸해야 했을 텐데. 신이 있기나 한 건지, 업보라는 통하기는 하는 건지 의문은 매한가지다.

 

4부의 끝은 오가타로 끝나서였을까. 그의 고뇌와 번민에 마음이 쓰라리다. 사랑하는 여인을 품을 수 없는 현실, 어디선가 자라고 있을 자신의 혈육에 대한 진실도 모른 채 자신도 공범자라는 죄책감에 소멸돼가고 있는 그가 안타깝다.

 

5부에선 다시 그들의 삶이 어떤 끈으로 이어지게 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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