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투
헬렌 던모어 지음, 윤미나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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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전쟁은 끝났다. 승리국이든 패배국이든 망가진건 똑같고 사람들은 엉망이된 삶을 회복하려 애쓰고 있다. 죽은 이들을 대신 할 이들을 더 많이 낳아야 했고 전쟁을 위해 세웠던 모든 것들을 갈아 엎고 다시 씨를 뿌려야 했다. 폭격의 여파로 갈라진 금은 메워졌지만 그럼에도 티가 났다. 상처를 봉합한 자리가 부풀어 오르듯.

 

어쩌면 삶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영혼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 멎어버린 그 어딘가의 시간속에 갇혀 잊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 다닐런지도 모른다. 그때의 그 미소를 간직한 채. 하지만 좀 더 초조하게.

 

"작전수행 보고가 끝나면 곧장 당신에게 갈게.

바이크를 타고 가면 십오 분밖에 안 걸려.

창문을 두드릴게. 잠들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

 

이번 작전만 끝나면 곧장 오겠다던 그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버렸고 그와의 약속을 잊지 못하던 여인은 여전히 창문 가까이를 떠나지 못한다.

기다림은 서서히 노여움이 되고 노여움은... 결국 수류탄처럼 폭발하고 마는 삶의 비극을 낳는다. 전쟁의 긴 그림자 속에 갇힌 사람들이 견뎌야 하는 것들은 비단 마음의 상처만은 아닐 것이다. 얼어붙은 고통이 녹아내리기까지 견딜 수 없는 추위가 사계절 내내 그들을 괴롭힌다.

 

이저벨은 이제 막 결혼한 새내기 주부다. 그녀는 프랑스 교사가 되거나 공무원이 될 수도 있었지만 의사의 아내가 되었다. 남편 필립은 아내를 사랑하고 직업정신도 투철하다. 비록 남의 집 셋방살이로 신혼살림을 시작했지만 점차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반면 이저벨은 작고 연약한 고양이 같다. 긍정적인 남편과는 달리 어딘가 불안정하다. 우선은 남편이 발품 팔아 얻은 이 집부터 맘에 들지 않는다. 오래된 냄새, 공용 욕실, 춥고 습한 복도, 위층에 사는 주인집 여자의 발소리. 게다가 마을에 적응하는 일도 크나큰 숙제다. 그녀에게 보통의 주부로 사는 일(장 보기, 바느질 모임 참여하기, 티타임 갖기 등)은 넘어야 할 인생의 허들이다.

 

겨울이 일찍 시작되자 추위를 견디는 일이 더 곤혹스럽다. 전쟁이 끝난 뒤라 모든 물자는 부족했다. 미트파이도, 돼지고기도, 석탄도, 담요 한 장 더 마련하기도 팍팍한 현실이다. 추위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에 이르자 언뜻 벽장 안에서 보았던 낡은 옷이 떠오른다. 남편의 의학 서적까지 동원해서 겨우 끄집어 낸 것은 낡은 군용 외투였다. 먼지를 털어내고 그녀의 작은 몸을 넣어 본다. 외투는 당장 이불 대용으로 써도 될 만큼 넉넉했다. 그녀는 오래간만에 푹 잠이 든다.

 

그런데 그날부터 누군가 그녀를 찾아온다. 창문을 두드리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한 남자.

그리고 그녀의 기억 속에서 재생되는 누군가의 과거.

 

이상하게도 이저벨은 은근히 이 외투에 집착한다. 꼭 따뜻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알렉의 존재를 궁금해한다.

확실히 그는 전시 중이다.

나는 이 묘하게 흘러가는 상황 때문에 과거인지 꿈인지 모를 혼동이 오기 시작한다. 이저벨이 환영을 보았거나 빙의가 된 건가라는 착각이 들긴 하지만 분명한 건 이 모든 환영은 외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가끔 집 밖을 나서면 폐허가 된 비행장을 둘러보곤 했다. 그 모습이 낯설지가 않은 건 전쟁 중에 보낸 어린 시절 때문이다. 그녀의 어린 시절도 전쟁이 내지르는 광포한 소음으로 가득했다. 비행기의 소음과 공군들로 북적이는 마을. 그랬기에 그녀는 과거 속 사연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알렉의 그녀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죽으러 가기는 정말 싫은데

진짜로 그러긴 싫어

죽으러 가기는 정말 싫은데

어차피 뒈질 테....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행운에 의지했을까.

책의 프롤로그를 몇 번이고 읽었다. 알렉과 지미와 두기, 레스, 시드, 레이니, 로드.

침묵 속에 드리워진 긴장감이 비행장의 푸른 불빛들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 그들이 믿는 건 오로지 행운뿐이었을 것이다.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앗아갔고

수많은 사람들을 삶을 망쳐놨고

수많은 사람들의 현재를 과거 속에 붙잡아 두었다.

이저벨 또한 그랬다. 알렉과의 만남으로 그녀는 그녀를 그토록 추위에 떨게 했던 과거의 문을 닫는다.

"이리 와. 어서, 이지.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

시간이 멎어 버린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 우리의 일상을 그런 무모한 전쟁에 빼앗겨서는 안 된다. 다시는.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작가의 섬세한 문체가 돋보인다. 작가의 책을 더 만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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