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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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이 책을 읽다 잠깐 잠이 들었다. 잠깐 잠이 든 것치곤 너무나 생생하게 악몽을 꾸었다. 순간 눈은 번쩍 떠졌고 미동도 없이 그 자세 그대로 누워 정신을 되돌리고 있었다. 그때 서서히 내 눈앞에 들어오는 나무의 표지. 쪼끔 괴기스럽네.ㅋ 나는 책을 읽다 잠이 들 때면 가끔 책 관련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러니 자연스레 책 속 내용이 궁금해졌다. 결론은 꿈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면은 없었지만 어딘가 묘하게 분위기는 닮아 있는 듯하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의 세계로 입문하고자 <나무>부터 끊었다. 책이 출간된 그 당시에 읽었더라면 더 신선하긴 했겠다. 얼마 전 아들 녀석도 반강제로 이 책을 읽었다. 읽는 도중에 책 제목이 왜 나무냐며 아리쏭한 표정을 짓자 나는(책을 읽기 전이었으므로) 대충 모든 이야기의 뿌리는 그 근원이 있다는 의미 아닐까 하며 모호하게 대답해 줬다. 뭐 읽기 전이었으니 뭔 말을 못 할까.ㅋ

 

베르나르는 아주 상상력이 풍부하고 호기심이 많으며 지적 탐구를 즐기는 작가인듯하다.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지만 작가의 의도는 명확하다. 인간의 내면과 삶을 풍자하는 데 있어 거침이 없다.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편의 풍자가 재밌다. 거대한 외계인이든 걸리버 같은 거인이든 그들의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이야기는 인간을 사육하는 외계인이란 설정인데 수컷이 자기 둥지에 들어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배설이고 암컷은 군것질이라니. 우리 집도 그런가? 앗! 남편아~~.ㅋㅋ

 

인간은 장점도 어마 무시한 생명체이지만 단점 또한 어마 무시한 존재다. 인간의 정신세계는 워낙에 복잡 미묘해서 인간을 쉽게 정의 내리기도 어렵다. 한없이 위대하다가도 한없이 보잘것없고 어리석은 게 또 인간이기에 인간의 어두운 면을 꼬집는 이야기에는 그 끝이 없어 보인다. 이곳에도 여러 인간 유형이 등장한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든 어디까지나 해석은 독자의 몫이고 각 단편의 귀퉁이에 메모하듯 몇 자 끄적여 보련다.

 

첫 번째 단편 <내겐 너무 좋은 세상>은 이미 제목에서 의도가 보인다. 기계 인간이 기계들을 탓하던 나름의 반전이 있던 이야기였는데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제가 바로 떠올랐던 이야기였다.

"살아움직이는 인간들이여, 그대들에게 진정 영혼이 있는가."

 

<바캉스>편에서는 과거 여행이 자유로운 지구 상태가 썩 좋은 편이 아닌 어느 미래다. 한 남자는 현재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과거를 동경한다.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의 교훈이 살짝 스쳤는데 이 이야기는 더 직설적이다. 1600년대의 파리는 그야말로 우리가 동경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과거에 갇혀 위기를 맞은 남자는 그제서야 후회를 한다. 살다 보면 옛날이 좋았어라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이 있다. 왜 현재 삶을 부정하고 과거만 동경하는가. 부디 현재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를.

<다시, 올리브> 속 한 문장이 떠오른다.

우리 모두 어떤 시기를 지나는 중이지.

 

<투명 피부>는 우째 상상하기엔 조금 소름이 돋고 거부감이 든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이성이 앞설 수 있을까. 심장이 뛰고 피가 흐르고 위가 음식물을 부수고 장에 배설물이 쌓여가는 모든 과정을 본다는 것 자체보다 그 시뻘건 색감이 더 싫다. 알록달록 컬러풀하다면 모를까. 피부가 투명하지 않아 얼마나 다행스러운지.ㅎ

그렇듯 진정한 두려움은 실체를 마주하기 전이 아닐까. 오히려 그 변화를 마주하면 대담해지는 것도 또 인간이니까. 그 대담함을 받아들인 것이 한국인이라니.ㅎ

 

<냄새>편은 그냥 인간이 위대해 보인다. 작가의 의도와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정말 인간은 창조의 동물이다. 위기에 강하고 어떻게든 헤쳐나간다. 어떤 시련이 와도, 어떤 똥 덩어리가 떨어져도!

 

<황혼의 반란>은 많이 씁쓸하다. 어느 광고가 떠오른다. 인간의 수명이 백오십이 될 거라는. 그 라디오 광고를 들을 때마다 뜨아~~ 그건 아니지라며 설레발을 쳤었다.

수명연장 기술은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나. 세대 간 격차를 해소하기엔 세상의 변화가 너무 빠르고 사회적 시스템 구축만이 살길인데! 당장에 늙음이 현실이 아니라고 해서 미래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회구성원의 톱니바퀴로써 각자의 존재와 역할이 있기에 노년의 삶도 보장할 수 있는 시스템이 보장돼야 한다. 세금으로만 충당하려 들지 말고 나라 경제력을 키워야 할 텐데.

"너도 언젠가는 늙은이가 될 게다."

 

 

 

손이 자율성을 갖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 정신 하나도 제어하기 힘든데 손까지 말썽을 부린다면 진짜 피곤하긴 하겠다. <조종>편은 한 형사가 자신의 왼손을 제어하지 못해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결국 왼손을 으르고 달래는 것으로 타협점을 찾는데.

내 적을 사랑하라?는 조금 과장된 말일 것이고 적을 포용할 수 있게끔 나의 능력을 키우는 게 더 맞는 말이겠지. 적이 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도록 구워삶아야 하지 않을까. 왼손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건 아량뿐이다.

 

인간관계의 네트워크를 나무의 무수한 가지에 빗댄 <가능성의 나무>는 나무의 생과 사를 통해 인간 역사의 순환을 찾는다. 상상은 인류의 미래를 나아가게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상상은 언제나 긍정의 가능성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 늘 상호보완적인 사고가 중요하다. 가지가 툭 부러졌던 순간을 무수히 지나면서도 다시 가지를 뻗어내었던 역사를 반복해 왔다. 그런 장점을 기반으로 더 나은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인간은 원래 한계를 모르는 존재임에도 반면 그 한계 안에 스스로를 가두려는 어리석은 면도 존재한다. 그리하여 한계를 벗어나는 일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 한계는 한끝의 차이일 뿐이다. 17과 18, 18과 19처럼. <수의 신비>는 이런 점을 역설한다. 가장 무서운 건 무지다. 그 무지보다 더 무서운 건 지식 안에 갇히는 것이다.

 

<완전한 은둔자>도 조금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이 단편이 <투명 피부>보다 더 소름이 돋았다. 우리의 삶은 육체 안에서 더 의미가 있고 가치가 빛나는 것이다. 무슨 내세의 삶도 아니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취급 주의: 부서지기 쉬움>야말로 어리석은 어른의 표본이다. 이 이야기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아이에게 우주를 만들라니. 그 나이에 맞는, 아이가 원하는 선물을 하자. 아이야말로 부서지기 쉬운 존재가 아닌가.

 

<달착지근한 전체주의>는 우리가 주의하고 경계해야 한다. 다른 단편보다 내용이 길었는데 어느 시대나 이런 경우가 흔하지 않았나 싶다. 흥미의 맛에 길들여진 대중을 주무르는 자들. 그들의 입맛대로 움직여주는 대중. 이 기가 막힌 찰떡궁합에 속아있는 동안 시대는 진실을 놓쳐버린다. 훗 대나 되어서야 깨닫게 되는 사실들. 어쩌면 이것 또한 역사의 쓰디쓴 악순환이 아닐까.

 

<그 주인에 그 사자>편은 사자를 애완동물로 기르면서 벌어질 수 있는 사회현상들을 보면서 앞뒤 계산 없이 유행만을 좇는 인간을 비꼬고 있다. 뭐 전갈이 그 자리를 대신하듯 유행이라는 건 유통기한이 심하게 짧긴 하지만 사자로 인한 리스크를 떠올린다면 그런 무분별한 유행은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말 없는 친구>는 화자가 나무다. 살인 사건의 현장을 고스란히 지켜본 나무는 말 대신 다른 방법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실제 나무는 전쟁통엔 성장을 멈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식물도 생명체임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어느 신들의 학교>편은 글쎄다. 신들끼리 인간 세상의 부분을 관리한다는 이야기인데 신들끼리 잘 좀 협력해서 종교전쟁만은 더 이상 일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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