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raway Nearby (Paperback) - 『멀고도 가까운』원서
리베카 솔닛 / Granta Books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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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 ‘The Faraway Nearby’는 미국 화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가 했던 말에서 차용했다고 생각한다. ‘멀지만 늘 가까이’라는 것은 언어의 역설이지만, 우리 삶에도 잘 적용이 된다. 짐작건대, 평생을 힘들게 했던 엄마와의 물리적·정신적 거리를 의미할 수도 있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직면해야 하는 죽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한다. 치매였던 엄마에게, 혹은 뇌종양에 걸렸던 작가에게도 죽음은 늘 가까이에 있었다. 그러나 실존 인물과 배경을 바탕으로 한 작가의 자서전적 이야기는 우리가 늘 공감(empathy), 동정(compassion), 이해(understanding), 용서(forgiveness)를 가까이에 두기를 원한다. 이 네 가지는 타인을 위한 확장의 개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의 감옥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됨을 작가 스스로 입증했다.

이 책을 오랜 기간 붙들고 있을 때는 얼마나 귀한 책인지 몰랐는데, 연휴 기간 몰입하여 읽으니 한 권의 철학책을 읽는 느낌이었다. 어둡고 차가운 깊은 우물에서 건진 정화수 같은 작가의 회고록은 은유적·수사적 표현 하나하나가 너무 아름답고 깊음이 있어서 오랜 기간 나의 좌우명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비록 배움은 선택 사항이지만, 어려움은 배움의 학교이며 그 어려움을 독서로 극복한 작가가 존경스럽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음이 꼭 축복일 수 없듯이, 엄마에게 인정받지 못함도 반드시 불행은 아니었다. 책은 우리가 만나는 고독이지만 작가는 책에 몰입하고 언어 단식을 통해 세상과 높은 담을 세웠던 조용하고 말이 없는 아이였지만, 결국엔 엄마를 이해하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어른으로 성장했다.

늘 도덕적 질문과 원리에 집착하고 성취와 공헌으로 정당화시키려 했던 엄마의 삶은 치매를 통해 마침내 모든 원한, 비교, 기대감, 불안한 포부를 내려놓게 되었다. 자신과 닮지 않아서 기대감에 미치지 못해 구박하고 미워했던 딸에 대해 관대해졌다기보다 자신에게 너그러워진 것이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현재에 사는 삶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했는데, 치매라는 질병도 엄마에게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고, 모녀 관계를 회복시키는 매개체가 된 것이다. 아울러 작가는 엄마를 비로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엄마를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용서의 시작이었고, 충분히 이해한다는 것은 일종의 용서이자 사랑이었다. 내가 너를 용서하니 너의 빚은 나의 관대함으로 탕감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오래되고 추한 낡은 고통을 내려놓고 미움과 증오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 당당히 과거로부터 걸어 나옴이 진정한 용서이자 자유일 것이다.

작가의 삶을 그늘지게 했던 것은 단순히 엄마의 영향만은 아니었다. 뇌종양을 진단받고 그녀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나이 들어가는 엄마에게만 가까운 줄 알았던 죽음이 내게도 곧 엄습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인간의 욕망, 포부, 집착의 허무함을 알게 된다. 에라스무스의 ‘인간은 마치 거품과 같다’는 말을 통해 인간의 삶이 얼마나 유한하고 한시적인지 잊지 말아야 한다. 삶의 아이러니는, 그녀의 질병이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해 책 속에서 위안을 얻었던 그녀의 고독을 완화했다는 것이다.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어야 하는, 아무것도 영원한 것이 없는 이 세상에서는 고독도 사치였으리라. 만약 조만간 이 세상을 마감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에는 자신의 부정적 감정에 몰입하며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붙들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을 얼어붙게 하고 세상을 왜곡하는 것은 나르시시즘이거나 냉소주의자의 거울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나 역시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었다가 다치고 나면 금세 냉소주의로 변하게 된다. 허무주의에 머물렀다가 어느새 냉소주의자가 되어 마음을 닫고 세상을 향해 부정과 불만을 마구 쏟아내려고 한다. 혁명의 아이콘 체 게바라 이야기에도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다. 그는 초기에 길 위에서 만난 개별적인 인간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했던 의사였으나, ‘더 나은 세상‘이라는 혁명적 대의를 위해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제거해도 좋다는 냉혹함으로 변하게 되었다. 혁명의 아이콘이 되면서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멀리 있는(Faraway) 억압받는 민중에게는 무한한 애정을 쏟았지만, 정작 자신과 가까이 있는(Nearby) 동료나 가족, 적대자들에게는 무자비하게 대우했기에, 아르헨티나와 쿠바에서 그에 대한 평이 엇갈리고 있는 것 같다.

작가는 책 외에 또 다른 건강한 출구를 통해 삶의 균형을 이룬 것 같다. 자신의 신조인 ‘타당한 이유 없이 모험을 거절하지 말라’에 따라 그랜드 캐니언으로 모험을 다녀왔다. 극한의 추위와 마주해야 하는 아이슬란드로의 여행도 매우 아름답다. 물론 책으로 그녀의 여정을 읽는 것보다 실제 겪어야 했던 그녀의 어려움은 어마어마했으리라. 그럼에도 모험 앞에서 ‘Yes’를 함으로써 그녀의 대답은 삶의 이정표가 되고, 또 다른 이정표를 세우는 계기가 된다. 많은 준비 없이 떠난 여행이기에 ‘부족한 것이 경험을 다채롭게 했다(What was absent colored experience. p.253)’는 표현이 나의 좌우명이 되길 바란다. 현재의 나 역시 부족한 것투성이이다. 남들에게는 있는데 나에게는 없는 것이 너무 많아 늘 이것이 열등의식과 피해의식이 되었다. 부족한 것을 자산으로 삼을 수 있고 삶의 양념으로 노래할 수 있는 그녀의 용기와 패기에 존경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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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 as a River : The powerful Sunday Times bestseller (Paperback) - 『흐르는 강물처럼』원서
Shelley Read / Transworld Publishers Ltd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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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연애소설을 읽고 싶었고 사랑의 기운을 받고 싶어서 고른 책이다. 내가 부러워하는 흐르는 강물 같은 삶은 깊음과 넓음이 있어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시대를 거스르지 않고 편승하지 않기에 가볍지 않으며 강물의 색깔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가 없는 아름다운 색채를 띠고 있다. 쉼이 없으나 분주하지 않고 멈춘 것 같으나 늘 어딘가를 향해 유유자적 흘러간다. 강물 같은 삶을 살았고 지향했던 Wilson Moon을 사랑했던 Victoria의 슬프지만 멋진 삶을 읽으며 인간은 생각보다 용감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큰 용기이고 그 용기의 대가 또한 엄청난 희생을 요구했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Wilson을 순수하게 사랑한 대가는 엄청난 아픔과 고통이었다. 혼자서 외딴 오두막에서 아이를 낳고 그에 대한 그리움 못지않게 압도하는 배고픔에 아이마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연히 만난 다른 사람의 자가용 뒷 자석에 아이를 놓고 도망을 쳤다. 그것만이 아이를 살리는 길이라 생각했다. 저수지 건설로 인해 고향 집을 떠나야 했던 그녀는 대대로 물려받은 복숭아 과수원은 살리고 싶었다. 도망치고 묻고 싶은 과거가 있는 반면 오래 오래 가슴에 함께 간직하고 싶은 과거의 유산 중 하나가 과수원이었나보다. 농과대학 교수의 도움으로 복숭아 나무들을 성공리에 이전하고 열매 없는 몇 년을 보낸 후 마침내 복숭아 수확을 하게 된다.

물질적 번영과 외적인 삶의 안정이 반드시 마음의 평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산속 공터에 피덩어리 같은 아들을 남기고 온 엄마의 심정은 매일 매일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녀는 매년 공터로 순례를 다녀왔고, 기념비적인 돌탑을 쌓기 시작한다. 복숭아가 얹혀있던 그 바위 위에 아들의 나이만큼 돌을 얹기 시작하고, 그 돌탑이 아들을 만나는 교량 역할을 한다. 아들을 입양했던 Inga Tate는 같이 자란 친아들 Maxwell을 잃고,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Lukas는 군대에 입대를 하게 된다. 어쩌면 친아들보다 더 사랑했던 Lukas를 얻기 위해 Inga Tate는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돌탑에 가져다 둔다. Victoria, Inga Tate, Lukas는 각각 인간이기에 짋어져야 하는 다른 슬픔을 가슴에 묻고, 견디며, 포기하지 않는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반드시 희극적인 요소만 있는 것이 아닌 저마다의 비극적 요소가 있다. 그 비극이 우리의 삶에서 권태, 지루함, 교만함을 제거시키며 인간의 모단 부분을 둥글게 다듬으며 겸손의 미학과 감사를 배우게 하는 것일까? 인간은 비와 구름을 만나기 전까지는 고개 숙이지 못하는 오만한 동물인지라 아픔과 상처의 양념을 통해 성숙과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겪지 않을 수 있었던 극단의 고통을 겪어야 했던 Victoria의 삶은, 겉으로 보이기에는 비극적이지만 희극으로 대단원을 내린 역설이 있어서 편안한 마음으로 마지막 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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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nial of Death (Paperback)
어네스트 베커 지음 / Free Pr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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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의 시대에 살면서 가장 확실한 명제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것이다. 빈부 격차가 극심해지는 불평등의 시대에 가장 공평한 진리다. 그 누구도 질병, 노화, 죽음을 피할 수가 없다. 경미한 것을 제외하고 심한 질병에 걸리지 않고 평생을 살 수는 있다. 의학, 의술, 물질의 혜택으로 노화의 시기도 최대한 늦추거나 감출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음은 시기와 방법을 달리할 뿐 인간이라면 누구나 도달해야 하는 종착역 같은 것이다. 가진 것이 많아서 이 세상의 삶이 행복한 자는 최대한 늦게, 가진 것이 없어서 이 세상의 삶이 곤고한 자는 최대한 빨리 도착하고 싶은 목적지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죽음이란 단어는 오랜 기간 터부시되어 왔고, 공론화가 되더라도 달가운 화제는 아니며, 죽음을 원한다고 해도 과연 그 고백 속에 얼마큼의 진실이 담겨 있을지 의문이다. 탄생, 발전, 진화, 팽창을 거듭하는 인간이 결국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인간의 이중성(duality)은 존재론적 불안감을 야기시킨다. 결국엔 부패하고 무질서를 맞이해야 한다면 과연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삶이 결국 죽음으로 이어진다면 태어난 이유는 무엇이고 삶의 목적이 무엇일까? 마치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모든 인간은 죽음을 향해 간다. 이를 두고 파스칼은 ‘미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또 다른 형태의 광기일 것이다’라고 표현했다.

실존적 모순이나 역설은 극복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죽기 때문이다. 영웅주의, 나르시시즘도 죽음이라는 공포를 잊거나 피하기 위한 긍정적 방어 기제가 될 수 있다. 우울증, 노이로제 같은 정신 질환 역시 근본적인 뿌리는 죽음이란 공포에서 출발했는지도 모른다.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은 거짓과 허상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허상도 궁극적으로는 민낯이 드러난다. 어린 시절 산처럼 높아 보였던 부모님, 사랑하는 연인, 최고라 선택했던 배우자, 절친이라 믿었던 친구들의 변화를 보며 다시 존재론적 모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영원한 영웅, 변치 않는 아름다움, 한결같은 선은 존재하지 않기에 인간은 불멸에 집착한다. 심리학, 정신분석학, 과학으로는 불멸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인간의 본성과 삶의 의미를 다룬다는 점이 닮아 있는 심리학과 신학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죽음의 공포를 잊고 삶의 의미를 찾게 하는 유일한 길은 믿음이 아닐까 한다.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Freud의 영향력은 오늘날도 엄청나지만 그의 성에 대한 집착은 많은 모순을 안고 있다. 그의 논리를 경시할 수 없고 공감도 가지만 존재론적 딜레마를 설명하기에는 미흡하다. 자신의 죽음의 날짜를 정해 놓았던 것과 삶에 대한 그의 염세적 태도는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반면 Otto Rank와 Kierkegaard는 프로이드와 달리 신학에서 죽음의 해결점을 찾는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난 고아와 같고 살기 위해서는 삶의 의미가 필요하다. 인간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평생 허상을 붙들고 씨름하다가 결국엔 공허감 속에 빠지게 된다. ‘나는 할 수 있다’라고 믿었던 ‘가능성’이란 단어가 얼마나 나를 기만하고 짙은 패배감 속에 묶어 두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하려고 발버둥 치느니 오히려 죽음을 초월하는 신에게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자유로움인가? 어깨 위의 무거운 짐을 벗어 신에게 맡김이 얼마나 창의적인 생각인가? 그 신은 인간이 찾아온 불멸의 대상이 아닌가?

프로이드는 가시적이고 가능한 영역만을 연구했지만 죽음의 압도적인 공포를 극복하지 못해 염세적이었다. 보이지 않는 무한한 세계에 존재하는 신을 믿음도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누군가는 믿음을 또 다른 ‘창의적인 허상’이라 말할 수 있다. belief와 faith 사이에서 faith로 나가기 위해서는 신의 은총이 필요하다. 인간의 의지로 믿음을 가질 수가 없다. 보이지 않는 어떤 원초적 힘에 의해 인간은 끊임없이 창조되고 유지되어 오고 있다. 그 원초적인 힘과 섭리는 무엇일까? 작가는 그 힘을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지는 않다. 모든 과학은 부르주아이고 관료주의라 표현한 걸로 보아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은 결코 실존 불안을 해결할 수 없다.

창조의 목적과 인간의 실존 이유에 대해 심리학은 마법의 치료약이 되지 못한다. 결국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고 죽음을 초월하는 절대자인 신의 손안으로 이 문제를 맡김으로 인간은 자유함을 얻을 수가 있고 정신적인 건강을 얻을 수가 있다. 작가는 구체적으로 기독교를 언급하지 않았으나 종교 및 믿음의 절대적 필요성에 공감한다. 실제로 나의 신앙은 내 삶의 이유와 목적을 모두 찾아 주었다. 질병, 노화, 죽음은 겸손과 신의 존재를 배우게 하는 관문이 아닌가 한다. 젊음, 아름다움, 건강의 유한함을, 인간은 everything이 아니라 nothing임을, 유의미한 삶은 독립이 아니라 의존을 통해 가능함을 가르치는 영적 스승이라 칭하면 과장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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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onfession Leo Tolstoy (Paperback)
Leo Tolstoy / Fili Public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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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 톨스토이의 송두리째 흔들렸던 신앙이 확고하게 뿌리내리기까지의 고백을 담은 이 책이, 길 잃은 세대의 나침반이 되길 소망한다. 풍요 속에서 그를 끈질기게 괴롭힌 화두는 ‘대의명분, 이유, 의미(cause, reason, meaning)’였다. 존재의 이유와 목적에 스스로 답할 수 없다면 그 삶은 얼마나 공허한가. 그는 자신을 ‘기생충‘이라 자책할 만큼 치열하게 괴로워했다. 오늘날에도 같은 고민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는 이들에게, 아픔마저 투명하게 드러낸 이 참회록이 잠든 영혼을 깨우는 촉매가 되길 바란다.

15세에 철학 작품을 읽으며 교리를 거부하고 16세에 기도를 멈춘 그는 ‘도덕적 완벽’을 추구하다가, 궁극적으로는 모든 면에서 완벽함을 갈구했다. 어디선가 완벽이란 단어는 오직 신에게만 어울리는 단어라고 들은 것 같다.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목표를 설정했기에 그는 실패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교리와 삶의 실천에서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종교인과 지인들의 모습에서 그가 얻은 것은 좌절감과 경멸감이었다. 파리에서 바라본 공개 처형 장면을 지켜보며, 과연 이 행동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지 생각하며 그는 참담해했다.

부와 명예의 절정에서 그를 사투로 몰아넣은 결정적 계기는 형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지혜롭고 선했던 형이 서서히 꺼져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며, 그는 물질도, 사랑도, 신앙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함을 깨달았다. 나이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자살 충동을 느낄 만큼 그는 비참하고 괴로웠다. ‘진보‘와 ‘발전‘이라는 화려한 이름 아래 지인들처럼 향락을 쫓으며 살았으나, 결국 죽음이라는 종착역 앞에서는 모든 성장이 허무로 귀결될 뿐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이면과 달리 그의 내면은 어두운 그림자에 사로잡혀 있었다.

결국 인간은 질병, 노화, 죽음(sickness, old age and death)이라는 필연적 굴레를 피할 수 없다. 이를 대하는 태도는 저마다 다르다. 무지로 외면하거나(Ignorance), 쾌락에 탐닉하거나(Epicureanism), 죽음으로 저항하거나(Strength), 혹은 솔로몬과 쇼펜하우어처럼 삶의 허망함을 노래하며 약함(Weakness)을 드러내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철학과 과학이 삶의 의문에 답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멀어지게 함을 깨닫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자신의 삶을 관조하고 있다는 직관을 지울 수 없었다.

지구상의 모든 것은 유기체이든 무기체이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정렬되어 운행되고 있음을 보며, 결국 그는 지식의 교만함과 그 허상을 인정했다. 삶의 유의미함을 입증하는 유일한 길은 이성을 버리고 비이성적인 지식이라 생각했던 신앙을 택하는 것이었다. 죽음이 파괴하지 못하는 삶이 의미를 갖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연합이다. 죽음이 예정된 유한한 세상에 살지만 무한하고 영원한 천국이 있음을 인지할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고, 믿음과 삶이 일치할 때 우리의 삶은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톨스토이는 해외여행을 다녀온 후 농민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의 모습에서 참다운 신앙을 보았다. 과중한 육체노동을 하고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만족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내는 농민들을 보며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아직 읽지는 못했으나 ‘편안함의 습격’이란 책이 시사하듯, 몸의 편안함이 마음의 질병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몸이 주는 불편함을 일부러라도 감수하고 노동의 신성성을 깨달으며 편안함을 벗어나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수반될 때, 소소한 일상에 대한 감사가 넘칠 수도 있다.

지식의 한계로 명시할 수 없으나 이 세상을 정확하게 운행하는 섭리가 있음을 깨닫고도 실존의 위기는 언제든 덮칠 수 있다. 인간이 공중에 덩그러니 매달려 있고 심연의 아래를 보아도 무섭고, 바라보지 않아도 언제 떨어질지 몰라 무서울 때, 단지 위를 바라봄으로써 공포를 물리칠 수가 있다. 질병, 노화, 죽음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의심할 수 없는 유일한 기둥이 있는 위를 바라보는 것이다. 20대에 저술을 시작하여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라는 대작을 쓰고도, 50대 초반에 삶의 위기를 맞이한 톨스토이가 시사하는 바가 너무나 크다.

그의 치열한 사투가 바로 나의 오랜 화두였고 누구나의 고민일 거라 생각한다. 내 소견으로 다 알지 못하나 내가 이 세상에 사는 이유를 희미하게 알고 있다. 명확하고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해도 내 삶의 이유와 목적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톨스토이처럼 또다시 ‘삶의 이유’로 흔들릴 때가 올 수 있으리라. 그때는 내 지식의 한계와 교만을 내려놓고 내가 얼마나 작고 초라하며 유한한지를 기억하며, 이 세상을 운행하시는 신의 섭리는 얼마나 무한하고 영원한지를 떠올리며 아래가 아닌 위를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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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rch: Why Bother? (Paperback)
Philip Yancey / Zondervan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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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인 ‘Church: Why Bother?’를 직역하면 ‘교회, 왜 굳이 성가시게 가야 하지?’라는 냉소적인 질문이 된다. 반면 우리말 도서명인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은 애증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신앙인의 마음을 절묘하게 포착해냈다. 불신자가 교회에 갖는 의구심 또한 그 기저에는 완전함에 대한 갈망이 있기에, 우리는 그 비판을 성장을 위한 뼈아픈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나와 같은 고민을 가감 없이 드러내면서도 따뜻한 해답을 건네준 이 책이 못내 고맙다.

필립 얀시의 책을 읽는 지금, 공교롭게도 그는 불명예스러운 논란으로 활동을 멈춘 상태다.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성경의 선언이 서늘하게 다가온다. 작가의 이중성에 잠시 반감이 일기도 했으나, 이내 그의 티눈보다 내 눈 속의 들보가 더 무거움을 깨달았다. 소설 ‘주홍글자’의 딤즈데일 목사처럼, 그 역시 치부를 드러냄으로써 영혼의 가벼움을 얻었을까. 그의 인간적 얼룩이 이 책이 머금은 빛나는 가치까지 희석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사실 작가의 허물은 교회의 민낯과 닮아있다. 교회는 선한 사명을 감당하면서도 본질적으로 세상의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위태로운 운명을 타고났다. 교회가 완성이 아니라 ‘공사 중인 시작점’임을 기억할 때, 우리는 비로소 과도한 기대를 내려놓을 수 있다. 기대를 내려놓는 것은 체념이 아니라 적극적인 수용이며, 오랜 기다림의 시작이다. 실수투성이인 나를 포기하지 않고 안아주어야 하듯, 부족함이 교회의 ‘기본값’임을 인정해야 한다. 작가는 관찰자의 시선을 거두고 시선의 방향을 하늘로(Up), 주변으로(Around), 밖으로(Outward), 그리고 안으로(Inward) 옮기라고 조언한다.

예배의 청중은 오직 하나님이며, 목사는 배우에게 대사를 상기시키는 ‘프롬프터(Prompter)’에 불과하다. 전령이 메시지를 전달할 때 표현이 다소 서툴거나 지루하더라도, 그가 전하는 본질의 무게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 기쁘게 해야 할 대상이 오직 하나님뿐이라면, 우리에겐 설교의 기교를 채점하거나 목사를 정죄할 자격이 없다. 그간 주제넘게 설교를 판단했던 나의 오만함이 이 글 앞에서 뜨겁게 부끄러워졌다.

교회는 다양한 인종과 계층이 뒤섞인 ‘멜팅 팟(Melting Pot)’과 같다. 하나됨(Unity)은 획일성(Uniformity)이 아니며, 다양성(Diversity)은 분열(Division)의 동의어가 아니다. 본능적으로 결이 같은 사람에게 끌리겠지만, ‘같음’만 수용하는 곳에는 예수의 숨결이 머물 수 없다. 나와 다른 타인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교회가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다.

교회는 ‘거름’과 같다. 한곳에 쌓여 있으면 악취를 풍기지만, 넓게 나누고 펼쳐지면 세상을 비옥하게 일군다. 기독교를 ‘목발 종교’라 부르는 냉소적인 시선조차, 사실은 우리가 서로의 목발이 되어주어야 하는 연약한 존재임을 증명한다. 알코올 중독자 모임(AA)이 교회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사례는 뼈아픈 대목이다. 교회가 은혜의 등불이 되기는커녕, 판단의 잣대로 타인의 아픔을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본다.

헌신에 있어서는 ‘신경과민’과 ‘굳은살’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이 필요하다. 타인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되, 내 눈물만으로 상황이 호전되지 않는다고 해서 절망의 수렁에 빠져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의 가시처럼, 인간은 약함이라는 틈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을 경험한다. 이웃에게 어깨를 빌려주어도 아무런 진전이 보이지 않는 그 막막한 순간, 우리는 지나친 예민함을 내려놓고 거룩한 굳은살이 돋기를 기다려야 한다. 내 사랑의 무게를 다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교회가 나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해묵은 기대를 내려놓으려 한다. 오직 하나님의 전에서는 하나님만이 영광 받으셔야 함을 가슴에 새긴다. 겸손히 말씀을 경청하는 연습부터 다시 시작하여, 공동체의 가장 낮은 곳에서 기꺼이 사랑의 흔적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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