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nial of Death (Paperback)
어네스트 베커 지음 / Free Pr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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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의 시대에 살면서 가장 확실한 명제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것이다. 빈부 격차가 극심해지는 불평등의 시대에 가장 공평한 진리다. 그 누구도 질병, 노화, 죽음을 피할 수가 없다. 경미한 것을 제외하고 심한 질병에 걸리지 않고 평생을 살 수는 있다. 의학, 의술, 물질의 혜택으로 노화의 시기도 최대한 늦추거나 감출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음은 시기와 방법을 달리할 뿐 인간이라면 누구나 도달해야 하는 종착역 같은 것이다. 가진 것이 많아서 이 세상의 삶이 행복한 자는 최대한 늦게, 가진 것이 없어서 이 세상의 삶이 곤고한 자는 최대한 빨리 도착하고 싶은 목적지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죽음이란 단어는 오랜 기간 터부시되어 왔고, 공론화가 되더라도 달가운 화제는 아니며, 죽음을 원한다고 해도 과연 그 고백 속에 얼마큼의 진실이 담겨 있을지 의문이다. 탄생, 발전, 진화, 팽창을 거듭하는 인간이 결국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인간의 이중성(duality)은 존재론적 불안감을 야기시킨다. 결국엔 부패하고 무질서를 맞이해야 한다면 과연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삶이 결국 죽음으로 이어진다면 태어난 이유는 무엇이고 삶의 목적이 무엇일까? 마치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모든 인간은 죽음을 향해 간다. 이를 두고 파스칼은 ‘미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또 다른 형태의 광기일 것이다’라고 표현했다.

실존적 모순이나 역설은 극복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죽기 때문이다. 영웅주의, 나르시시즘도 죽음이라는 공포를 잊거나 피하기 위한 긍정적 방어 기제가 될 수 있다. 우울증, 노이로제 같은 정신 질환 역시 근본적인 뿌리는 죽음이란 공포에서 출발했는지도 모른다.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은 거짓과 허상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허상도 궁극적으로는 민낯이 드러난다. 어린 시절 산처럼 높아 보였던 부모님, 사랑하는 연인, 최고라 선택했던 배우자, 절친이라 믿었던 친구들의 변화를 보며 다시 존재론적 모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영원한 영웅, 변치 않는 아름다움, 한결같은 선은 존재하지 않기에 인간은 불멸에 집착한다. 심리학, 정신분석학, 과학으로는 불멸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인간의 본성과 삶의 의미를 다룬다는 점이 닮아 있는 심리학과 신학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죽음의 공포를 잊고 삶의 의미를 찾게 하는 유일한 길은 믿음이 아닐까 한다.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Freud의 영향력은 오늘날도 엄청나지만 그의 성에 대한 집착은 많은 모순을 안고 있다. 그의 논리를 경시할 수 없고 공감도 가지만 존재론적 딜레마를 설명하기에는 미흡하다. 자신의 죽음의 날짜를 정해 놓았던 것과 삶에 대한 그의 염세적 태도는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반면 Otto Rank와 Kierkegaard는 프로이드와 달리 신학에서 죽음의 해결점을 찾는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난 고아와 같고 살기 위해서는 삶의 의미가 필요하다. 인간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평생 허상을 붙들고 씨름하다가 결국엔 공허감 속에 빠지게 된다. ‘나는 할 수 있다’라고 믿었던 ‘가능성’이란 단어가 얼마나 나를 기만하고 짙은 패배감 속에 묶어 두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하려고 발버둥 치느니 오히려 죽음을 초월하는 신에게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자유로움인가? 어깨 위의 무거운 짐을 벗어 신에게 맡김이 얼마나 창의적인 생각인가? 그 신은 인간이 찾아온 불멸의 대상이 아닌가?

프로이드는 가시적이고 가능한 영역만을 연구했지만 죽음의 압도적인 공포를 극복하지 못해 염세적이었다. 보이지 않는 무한한 세계에 존재하는 신을 믿음도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누군가는 믿음을 또 다른 ‘창의적인 허상’이라 말할 수 있다. belief와 faith 사이에서 faith로 나가기 위해서는 신의 은총이 필요하다. 인간의 의지로 믿음을 가질 수가 없다. 보이지 않는 어떤 원초적 힘에 의해 인간은 끊임없이 창조되고 유지되어 오고 있다. 그 원초적인 힘과 섭리는 무엇일까? 작가는 그 힘을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지는 않다. 모든 과학은 부르주아이고 관료주의라 표현한 걸로 보아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은 결코 실존 불안을 해결할 수 없다.

창조의 목적과 인간의 실존 이유에 대해 심리학은 마법의 치료약이 되지 못한다. 결국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고 죽음을 초월하는 절대자인 신의 손안으로 이 문제를 맡김으로 인간은 자유함을 얻을 수가 있고 정신적인 건강을 얻을 수가 있다. 작가는 구체적으로 기독교를 언급하지 않았으나 종교 및 믿음의 절대적 필요성에 공감한다. 실제로 나의 신앙은 내 삶의 이유와 목적을 모두 찾아 주었다. 질병, 노화, 죽음은 겸손과 신의 존재를 배우게 하는 관문이 아닌가 한다. 젊음, 아름다움, 건강의 유한함을, 인간은 everything이 아니라 nothing임을, 유의미한 삶은 독립이 아니라 의존을 통해 가능함을 가르치는 영적 스승이라 칭하면 과장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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