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e Christianity (Paperback) - C.S.루이스의『순전한 기독교』원서
Lewis, C S / Collins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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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 동일한 책을 두 번 읽는 경우는 아주 드문 경우이다. 직장 독서 모임에서 이 책이 선정되어 다시 읽었다. 처음 읽고 나서도 후기를 쓰지 않은걸 보니 내가 집중해서 읽지 않은 것 같다. 두 번째도 모두 잘 이해는 못한 것 같다. 여전히, 언제나 부족한 나는 의지할 목발, 어깨, 팔이 필요하다. 나는 포도나무 가지로서, 절대 포도나무를 떠나 열매를 맺을 생각을 꿈꿀 수 없다는걸 새삼 느낀다.

‘나니아 연대기’란 책으로도 너무나 유명한 작가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한 때 무신론자이기도 했었다. 그런 그가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기독 서적은 하나님의 존재를 기정 사실화하고 시작하지만, 이 책은 왜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가로 시작한다. 인간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강한 욕구를 느낀다. 즉, 이기적이면 안되고 공정해야 하며 악이 아닌 선을 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본성이 있다. 누가 우리에게 이런 생각을 하게 할까?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며 온 우주는 어떤 섭리와 법칙하에 운행되고 있다. 그 섭리의 주관자가 누구인가?

오늘 우연히 물리 전공자 지인을 만났다. 난 오랫동안 과학적인 논리 끝에서, 과학자들이 만나는 것은 무엇일까 궁금했었다. 이성적 논리적 분석적 논리로 풀지 못하는 과학적 원리가 얼마나 많을까? 지인은 그걸 ‘우연’이라고 말했고, 배웠던 물리학 교수님들이 대부분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우연’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했다. (Coincidence is God‘s way of remaining anonymous.) 우연의 우연이 반복되면 과연 그것이 우연일까? 우연이 절대자의 섭리가 아니라면 우연을 어떤 합리적인 논리로 설명할 것인가?

인간 본성은 옳은 일을 행해야 하고 어떤 일은 해서는 안된다는걸 알고는 있으나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기독교인은 절대 나쁜 일을 행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회개하고 넘어질 때마다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다. 회개로 인해 용서를 약속받으며 말할 수 없는 위안을 얻지만, 기독교는 위안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쉽게 믿기지 않는 당황과 놀라움으로 시작한다. 진리를 찾으면 위안을 얻고, 위안을 찾으면 그 어떤 진리와 위안을 얻지 못한다는 말에 공감한다.

내가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3장 기독교인의 행동 중용서이다. 나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고(loving your neighbors as yourself),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hate the sin and not the sinner)는 구절에서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이 낙담할까? 어떻게 원수까지, 미운 이웃까지, 죄를 지은 사람까지 사랑하라고 하시는지, 이해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않는다’는걸 실천해 왔다는걸 알고 깜짝 놀랐다. 즉, 나 자신(myself)을 그렇게 쉬지 않고 사랑해 왔다는 문구에서 눈물이 흘렀다.

사실 나 자신의 교만, 허영, 큰 실수, 욕심, 분노, 질투, 게으름 등등이 싫고 혐오스러웠던 적이 얼마나 얼마나 많은가? 왜 내가 그 때 그 사람에게 그런 부끄러운 행동을 하고 큰 죄를 지었는지 내가 너무 원망스럽고 부끄럽다. 그런데, 쉬지 않고 나 자신을 용서하고 이해하며 사랑하기 위해 운동, 독서, 읽기 등등으로 노력해 왔다.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고 아픔과 분노가 약해지길 기다려 주고, 회복되어 다시 새롭게 시작할거라 믿어 주었다. 나 자신처럼 이웃을 대하라고 했다. 꼭 사랑이라고 해서 좋아할 필요는 없어도 용서하고 기다려 주고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마치 내가 사랑스러운 점이 하나도 없어도 오직 내가 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해 주신 것처럼, 사랑해야할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영적인 암으로 정의되는 교만(Pride)은 기독교에서 가장 죄악시 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교만은 타인과 경쟁하며 내가 아닌 나를 높이려하는 거짓된 자아의 모습이다. 추하고 어리석은 거짓 자아의 옷을 벗음으로써 기쁨으로 낮아지는 겸손과 참다운 나를 찾는 무한한 위로를 얻을 수 있다. 나는 내가 교만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교만하다고 생각지 않는 것도 교만이다(If you think you are not conceited, you are very conceited indeed.)라는 문구에서 엄청 충격을 받았다. 겸손의 옷을 입으며 믿음의 진보를 이루기가 이리 어려운가?

믿음이란 무엇일까? 상대가 누구이든 믿는 사람이나 물건이 있다는 것은 엄청난 위안을 주지만 절대 절대 사람을 믿어서는 안된다고 했다.(Never never pin your whole faith on any human being.) 조변석개로 변하는 나를 누군가가 믿고 있다면, 그는 나의 부족한 모습으로 반드시 실망할 것이다. 그 실망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는 쉽지만 만족시켜 드리기는 어렵다고 했다.(God is easy to please, but hard to satisfy.)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new man)이 되어, 사랑받고 복받기를 넘어, 작은 예수(a little christ)로 살아가길 원하신다. (We must get over wanting be needed.) 불완전한 인간에게 불가능한 프로젝트임을 알지만, 그런척하며 살기(pretence, behave as if)를 반복하다보면 실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만족하실 때까지 불가능 프로젝트에 도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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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3-08-04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적인 리뷰네요 ^^

serendipity 2023-08-04 05:58   좋아요 0 | URL
❤️
 
How to be Perfect : The Correct Answer to Every Moral Question - by the creator of the Netflix hit THE GOOD PLACE (Paperback) -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원서
Mike Schur / QUERCUS PAPERBACKS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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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해 지는 법(모든 도덕적 질문에 대한 정답)’이 없다는걸 알면서 혹시나하고 미혹되었다. 사실 정답이 있었다면 이미 수 많은 현자에 의해 개발 되었을 것이다. 없는줄 알면서 책을 읽는 것은 남들도 나와 같음에 위안을 얻기 위함일까? 부제목에 답이 있다. 오늘날과 같이 복잡 다양한 시대에 정답(correct answer)이 한 개라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실상, 정답이 없다는 것이 답이다.

기본값으로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도록 설정되었다 하지만, 도덕적 담론은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고 다룰 가치가 있다. 누구나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하고, 도덕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통해 한 사람이 된다(A person is a person through other people. p. 93)고 했다. 우리가 있기에 나라는 사람이 존재한다( I am because we are; and since we are therefore I am. p. 94). 우리는 독립적인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고 서로에게 빚진 자로서, 서로에게 더 나은 사람이 되기위해 노력하는 것은 필요을 넘어 의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옳은 생각과 행동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동네 마트 카트를 제자리에 둘 것인가, 얼마의 금액을 자선단체에 기부할 것인가, 친구의 새 옷에 대해 솔직한 답변을 주어야 하는가 등등의 크고 작은 문제를 만나면서 도덕적 딜레마와 피로감(ethical dilemma, ethical exhaustion)에 빠지게 된다. 삶의 목적이 부유하고 풍요롭게 사는 것이라 했던 Aristotle, 다수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Utilitarianism, 정언명령에 따라 의무감으로 행동하라는 Kant, 부조리한 세상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Existentalism 등등의 철학적 이론과 담론을 모두 살펴 보았으나 그들을 현실에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가 없음을 알게된다.

어떤 한 개의 철학이론을 적용하든, 노력하고 노력하여 모든 철학적 개념을 심사숙고하여 적용하듯 실패가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다. 억만장자가 엄청난 액수를 재난 기금으로 기부하였으나, 그의 총 자산에 비해 매우 적은 액수라는 이유로 비난받기도 한다. 개인적인 선호도때문에 의도치 않게 나쁜 결정을 한 것으로 비난받기도 한다. 아이폰을 구매한 것도, 수백만명의 아시아인들이 굶어죽어감을 방치한 파렴치한 사람이 될 수가 있다.

결국 작가는 우리가 선을 그을(draw the line) 필요가 있다고 한다. 도덕적 개념의 잣대를 모든 사람과 상황에 일괄적으로 획일적로 적용할 수가 없다. 선을 그어 일정 한계선을 정하고 모순이 발견되면 숙고하여 재설정하고 실패 속에서 진실값을 찾아내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히는 것은 현재 누리는 수많은 축복은 노력과 의지에 의해 얻은(earned) 당연한 것이 아니라, 행운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A lot of life is just luck.) 나의 노력만이 아니라 상황과 시대에 따른 행운임을 기억할 때 겸허해지고, 서로에게 빚진자임을 알게된다. 마지막으로, 사과의 중요성이다. 도덕적으로 살려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날마다 실패하기에 그럴 때마다 사과(apilogizing)를 해야한다. 사과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위해 우리가 반드시 올라야하는 최정상이다. (Apologizing is the final ascent on the mountain we have to climb in order to become better people. p.244) 돌봄과 노력이 윤리적 향상의 열쇠이고, 실패가 불가피한 결과라면, 사과는 실패를 위한 퇴직자 면접과 같다.

내가 원래 좋아했던 Samuel Beckette의 명언이 3번 이상 반복된다. 작가가 의도했던 정답이 아닐까? Ever tried. Ever failed. No matter.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완벽을 요구하는 것은 아무도 완벽하지 않은 단순하고 아름다운 현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To demand perfection is to deny the simple and beautiful reality that nobody is perfect. p.252). 궁금했던 것에 대하여 마지막 장을 덮어도 답을 구하지 못함에 답답증이 있어야 하는데 위안을 얻는 것은 왜일까?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지속적 노력은 멈출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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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본의 되는 삶이 곧 자녀들의 믿음을 키우고 지켜주는 초석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교회를 다니면서 사람에게 실망하고 사람과의 관계로 오히려 피폐해 질 수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멀어질 수 있다. 그러나 예수전도단 프로그램에 참석하신 후 사람을 용서하신 아버지는 매 년 선교지를 다녀오시고 선교사 후원을 50가정 정도 하시게 되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20년 동안 가족 수련회를 즐겁게 준비하셨다. 새벽 2시까지 선교사 편지를 읽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기도 제목 10가지 등을 나누는 가정이 얼마나 될까? 선교사를 초대하여 숙소를 마련해 주고 벽면에 세계지도를 붙여놓고 후원하는 선교사로 부터 받은 편지를 함께 붙여 놓는 가정이 얼마나 될까?

그런 믿음의 가정에서 올곧게 자란 작가는 대학생이 되어 과외를 하면서부터 선교사 후원을 시작한다. 어린 시절부터 용돈기입장을 작성하며 성경적 재정관을 갖게 된 그는 화려한 것에 취해 본질을 놓치지 않으려 했고, 내 수준의 멋짐보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광의 면류관이 훨씬 크고 아름다운 것을 아는 진정한 청지기의 삶을 살아가는 것 같다.

하루 3개씩 감사거리 나누는 ‘감사 챌린지’도 배워보고 싶고, 미리 드리는 십일조, 십이조는 감동적이다. 신앙의 발목을 잡는 예민한 영역인 십일조를 아주 어린 시절부터 철저하게 훈련해 온 작가는 하나님이 돈과 재능을 우리에게 맡겨주심을 항상 기억하며, 물질, 재능, 시간을 하나님 나라 확장에 잘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스타 강사를 꿈꾸었던 그를 상상을 뛰어넘어 새 길로 놀랍고 독특하게 인도하신 하나님이, 역시 내 인생의 작은 점들을 절묘하게 이어서 사용하시길 기도한다.

내가 가진 재능과 물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나의 믿음의 진보를 위해 얼마나 더 노력하고 훈련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사수하여, 바쁨 가운데 주님의 오아시스를 만나 영혼의 갈급함을 채우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 노력하자. 내 마음이, 나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올곧게 서 있는지 항상 점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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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이 가장 궁극적인 세련됨이란 말이 있다’(Simplicity is the ultimate sophistication by Leonardo da Vinci). 안나 카레니나와 전쟁과 평화에 비하면 앉은 자리에서 읽을만큼 엄청 짧은 내용이지만, 그에 버금가는 큰 메세지가 담겨 있는 책이다.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질문과 답을 함에 있어서 반드시 장황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제목부터 우리게게 심오한 질문를 던지고 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What Men Live By)

내 삶의 목적과 이유를 알고 싶었다. 내가 왜 이 세상에 왔으며,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이 책은 나를 살게 하는 수단과 방법에 대해 말해 주는 듯하지만 내가 항상 궁금하게 여겼던 삶의 목적과 이유에도 유사하게 접근하고 있다. 구두 수선공으로 근근히 살아가던 Simon이 추운 겨울날 자신의 겨울 코트도 못사고 아내에게 꾸중들을 걱정도 있는데, 길에서 떨고 있는 Michael을 집으로 데려가는 자비를 베푼다. 그 역시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으나, 그의 양심이 다시 Michael을 돌보게 이끈다.

아내 Matryona 역시 당장 내일 끼니를 걱정해야 히는 상태에서 이름 모를 낯선 사람을 데리고 온 남편에게 핀잔을 주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 보라는 남편의 말에 마음이 움직여 낯선 Michael을 환대하게 된다. 농부의 아내 Mary는 자신의 자녀가 아닌 쌍둥이(한명은 불구)자녀를 친자녀처럼 돌보며 살아간다. 그 무엇이 Simon, Matryona, Mary의 마음을 움직인 것인가? 나는 나 자신의 문제 해결도 너무 힘들고, 내 문제를 해결한 후, 여유가 있어야 남에게 손을 내밀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신으로부터 추방된 천사 Michael은 3가지 질문에 답을 구해 오라는 명령을 받는다. 1)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가? (What dwells in man?) 2)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What is not given to man?) 3)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What men live by?).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은 사랑이고, 사람은 자신만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간다. 신이 사람에게 주지 않은 것이 있다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힘이 없다는 것이다. 한 귀족 남자는 가죽을 가져와서 일 년을 신어도 튼튼하게 유지될 구두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지만, 주문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차에서 죽게 된다. 오후에 죽음을 맞이하는 줄도 모르고 일 년간 신을 구두를 주문하고 간 것이다. 인간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당장 오늘 꼭 해야 할 일과 필요를 모두 안다면 신이 되고자 하는 교만함으로 고개 숙이며 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예지력과 능력을 신은 부여하지 않은 것이다.

가슴 속에 풍요롭게 넘치는 사랑과 자비를 나누는 것은 많이 가진 자이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란 여유있는 자의 몫으로 생각하기 쉽다. 각박하고 치열한 세상에서 살아가기에는 사랑만으로 부족하고, 물질, 명예, 건강, 자신감, 정체성 등등의 많은 요구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이 세상의 조물주가 어떤 조건과 상황에 상관없이 인간의 내면에 사랑을 심어 두셨다고 했다. 우리는 그 사랑과 자비를 꺼내어 나누고 살면 된다. 그리고 물질과 명예가 아니어도 사랑을 지팡이 삼아 사랑의 버팀목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설계하셨다고 했다.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기도 너무나 버거운 삶에서 내 것도 빼앗겨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삶인데, 내 안에 거주하는 사랑과 자비를 꺼내어 그것을 수단으로 살아가라고 가르치고 있다.

올해는 이 책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살고 싶다. 책 읽기의 궁극적인 목적은 삶 속에서 책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내 삶의 변화를 이루는 것일지니 실패하더라도 다시 책을 읽고 다시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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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 넘는 기간에, 전체 1215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읽고 리뷰를 쓰려니 중압감이 밀려 온다. 책 사이즈도 커서 들고 다니기도 손목이 아파 나중에는 집에서만 읽었고, 글씨도 너무 작아 침대에서 읽기엔 불편할 정도였다. 워낙 분량이 많고 앞 뒤 여백이 적어 애초에 감동 문구와 약간의 줄거리 내용을 다른 종이에 적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10장(A4)이나 되어서, 책을 다 읽고 이걸 읽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빨리 읽었어야 하는데, 게으름의 늪에 빠져서 오랜 기간 읽고 나니, 내가 왜 이걸 감동 문구로 적었는지 이유가 잘 기억나지 않기도 했다.

예전에 읽은 Anna Karenina와는 사뭇 다른 종류의 작품이었다. 톨스토이가 왜 이 작품을 시, 소설, 역사 연대기가 아니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에필로그를 읽으며 펑펑 눈물을 흘렸는데, 마지막에 그의 철학적 담론이 나의 심금을 크게 건드렸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역사가 기록되는 방법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고, 그런 이유로 그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 했다. 나의 영웅은 바로 진실( My hero is truth.)이라 했던 그가, 특정 기간(1805-1812)의 러시아인들에 대한 삶의 진실을 철학적 담론으로 풀어낸 이야기이다.

Volume 1~Volume 4까지는 러시아 귀족들의 삶과 전쟁이야기가 교대로 전개된다. 워낙 등장인물이 방대해서 누가 주인공인지 혼동스럽기도 했다. Princess Marya, Natasha가 주로 등장하는 러시아 귀족들의 화려한 파티, 사교 모임, 사랑 고백이 이어질 때는 소설을 읽는 듯 했으나, Prince Andrei, Pierre, Nicolas가 참전한 전쟁편에서는 그냥 역사책 같았다. 160명 이상의 실제 인물과 톨스토이가 Crimean War에 참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그려진 전쟁 이야기는 용어도 너무 어려웠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유일하게 패했다는 Bordino 전투는 내용이 더 많기도 하고 지도까지 상세하게 그려져 있어 엄청 몰입하며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모두가 회의적일 때 Bordino 전투의 승리를 확신했으나 노익장으로서 많은 비난을 받았던 총사령관 Kutuzov의 감동적인 문구가 있다. 인내와 시간(patience and time)이 그의 전쟁 무기였던 총사령관이 쫓기는 프랑스 군인들을 향해 보여주는 자비로운 표현이다. “그들이(프랑스 군대) 강할 때, 우리는 자신에게 동정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들을 동정할 수 있다. 그들 또한 사람이다( While they were strong, we took no pity on ourselves, but now we can pity them. They’re also people. p. 1089)”

Bordino 전투에서 승리하고도, Moscow를 프랑스 군대에 넘겨 준 것에 대해 엄청난 비난이 따랐다. 그러나 그는 약세로 몰린 군대와 Moscow 둘 다를 잃느냐 혹은 Moscow를 넘겨 주느냐의 선택에서 후자를 선택하며 Moscow가 프랑스 군대에 의해 약탈당하고 불에 탄 것에 대해 맹공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Moscow에서 마침내 쫓겨나가는 프랑스 군인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말하고 있다. 총사령관으로서, 엇갈린 평을 받았던 Kutuzov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는 내용을 톨스토이가 담고 있다.

한 영웅이나 혹은 역사에 대한 우리의 평가가 올바르게 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다(We can know only that we know nothing. p. 348)”라는 표현이 있었다. 나폴레옹이 유일하게 패배한 Bordino 전투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나폴레옹은 Moscow에서도 다른 나라에서 처럼 철저하게 준비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철저하게 지시하고 명령을 내렸으나 그는 결국 실패하고 쫓겨가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과거 역사가들은 인류의 역사를 신의 직접개입과 신이 의도하는 목적으로 설명했다. 즉, 재앙이 내리는 경우 인간의 과오에 대한 신의 징벌로 해석을 했다. 그러나 현대 역사가들은 이를 부인하고 영웅과 그의 목적으로 해석을 하려 든다. 그러나 과연 나폴레옹 같은 영웅으로 인해 그 전쟁이 일어 났을까? 이런 해석은 곧, 뜻밖의, 이해할 수 없는, 알려지지 않는(unexpected, incomprehensible, unknown) 무수한 우연들(coincidence, accidents)을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 그 어떤 힘(by what force)이 60만명의 병사들로 하여금 죽음을 불사하며 전쟁에 참여하게 했는가? 왜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을 말하면서 수백만명을 서로 죽이고 참수형에 처하게 했는가? 왜 종교혁명이후에 서로 학살을 하고, 프랑스 혁명 동안 서로를 처형했는가? 현대 과학, 역사, 문화, 추상화(자유, 평등, 진보 등과 같은 대의 명분)로도 이 사건들 뒤에 작동한 힘(power)과 원인(cause)을 밝히는데 실패했다.

왜 전쟁과 혁명이 일어나야 하는지 우리는 모른다. 왜 사과가 익어서 떨어지는지 이유를 모르듯이. 왜 일어나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누군가가 만든 법칙이고 섭리에 의해서, 그렇게 일어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반복되는 우연과 사건(coincidence, accidents) 뒤에 작용하는 힘(power, force)을 무엇으로 설명하고 증명할 것인가?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주변 상황, 시간, 공간에 제약을 받는다. 내 팔을 내 의지로 올리는 것 조차, 과거로는 할 수도 없고, 약간의 장애물이 있는 있어도 들지 못한다. 천문학과 역사에 대한 비유가 마지막에 나온다. 우리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모순에 도달하게 된다. 반면에 느끼지 못하는 그 움직임을 인정함으로써 법칙에 도달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무언가에 의존하고 있다는걸 느끼지 못한다.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해 독립적으로 행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하다고 인정함으로써 모순에 도달하게 된다(실제 주변 상황, 시간, 공간의 제약이 있기에). 반면에, 외부 상황, 시간, 공간에 의존함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법칙에 도달하게 된다. 그 법칙과 섭리가 무엇인를 Pierre, Marya, Prince Andrei를 통해 잘 설명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자유(freedom)을 부인하고, 우리가 느끼지 못하지만 우리의 의존성(dependence)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 에필로그는 한 편의 철학서적과 같이 너무나 감동적이다. 자신의 주장을 펴기위한 궤변도 아니고 설득력있는 논리도 곁들여 있다. 뒷부분은 집중력이 떨어져서 이해를 다 못해서 나중에 다시 읽으려고 한다. 올해 첫날부터 이 책을 읽게 된 것이 우연일까? 에필로그에서 그 동안의 많은 궁금증이 모두 풀리는 느낌에 많은 눈물을 쏟게 된 것이 우연일까? 요즘 들어 자꾸 일어나는 우연들 뒤에 어떤 힘이 작용하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감상의 눈물을 넘어 깨달음을 얻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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