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비비어의 광야에서 - 하나님 도대체 어디 계십니까
존 비비어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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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독서가 유익을 줄 수 있다는 점에 공감한다. 이상적인 것은 독서의 기쁨을 향유하며 자발적으로 시작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강제 독서에 의지하여 완독하는 것도 추천한다. 올해만도 시작하고 미완성인 책이 4권도 넘는다. 그러나, 직장 독서 모임으로 인해,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는 ‘마감일’의 압박감으로 이 책을 끝내고 나니, 결국 큰 기쁨과 뿌듯함이 찾아든다. 비록, 강제 독서라 할지라도 여전히 동일한 독서의 기쁨을 선물로 받았다.

광야(원제: God, Where Are You?)는 규모와 때를 달리할 뿐, 모든 사람이 여지 없이 통과해야 하는 장소이다. 그것이 종착지가 아니라 기착지(stopover)라는 데 큰 위안이 있다. 이 책에 가장 빈번히 나온 단어가 ‘준비, 영적 성숙’이 아닌가 한다. 광야의 이유와 목적이 죄를 지어서 정죄하고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양적 근육을 위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기다림과 인내의 장소이고 시기라는 것이다.

또한, 교만을 낮추시고 겸손하게 빚어가시기 위한 장소라고 한다. 창조주보다 창조된 것을 찾는 우리의 연약함을 시험하시어, 하나님 자체를 사랑할 수 있도록, 당신을 향한 첫사랑을 회복하게 하시는 때요 장소라고 한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읽고, 동행하며 친밀한 교제를 이어가길 원하신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우정의 황홀경을 더욱 갈망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평범하게 여기지 않기 위하여 숨으신다고 했다.

헬스장에서 신체 근육 만들기는 믿음 근육을 어떻게 강화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건강 이상 신호가 와서 헬스장을 찾았을 때 45kg을 겨우 들었으나, 150kg까지 들어 올렸던 것은 쉬지 않고 도전했기 때문이리라. 빠르고 쉬운 길로 가려고 했다면 신체 근육을 키우지 못하는 것과 같이, 전략적인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광야를 인내로 통과하라고 한다. 물론 하나님은 감당할만한 시험을 주시고, 피할 길을 내시는 분임을 기억하자.

사역조차 우상이 될까봐, 사역 자체를 잘 감당함이 목적이 되고, 기쁨이 없이 의무감으로 하다가 교만해지거나 분노할까 염려하시어 하나님을 향한 첫사랑과 기쁨을 먼저 회복하게 하신다.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짧으며 교만은 또 얼마나 강력한가?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보다 ’하나님이 내게서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먼저 구하라 한다.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에 대한 정의도 잘 구별해야 한다. 사실 내게 필요한 것은 모두 주셨는데, 원하는 것을 필요한 것과 착각하여 갖고 싶어하다가 받지 못하면 시험들 때가 많지 않은가?

광야의 공통분모인 박탈감과 메마름의 상태를 지날지라도,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말씀을 통해 성령으로 주신 비전을 끝까지 믿어야 한다. 결국은 작가가 아침 7시부터 1시간 30분간 기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항상 말씀을 읽으신 것처럼,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라는 뜻이리라. 마지막에, 광야에서 필기를 열심히 하라고 한 것도 실천하고 싶다. 고전적인 방법이지만 메모는 집중력과 성찰에 많은 도움이 된다. 나를 시험하사 내 마음이 어떠한지 보시는 그 분을 기억하며, 내가 가는 길을 아시는 그 분을 마음에 품고, 현재의 광야를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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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거의 일 년 동안 들고 있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882페이지밖에 안되는데, 중간에 다른 책을 동시에 읽다가 다시 조금씩 시작하니 내용도 이어지지 않는다. 책에서 위안을 얻고 회복력을 얻던 예전의 나는 어디로 가고 그저 핑계거리만 찾다가 읽어야 할 이유도 잊고, 책의 진정한 가치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작가에게 미안하기까지 하다. 피로 쓴 작가의 보석를 제대로 읽어냈다고 할 수 있는가? 다시는 한 권을 제대로 끝내지 못한 채 다른 책을 동시에 읽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Dickens의 이 자서전적 소설은 19세기 발행된 것이라 내용적으로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고 영어도 고어체가 많았다. 그럼에도 읽을 때 편안한 안정감을 주는 것은 현대 소설과 달리 권선징악으로 끝날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인간의 노력과 의지에 의해 수직적 상승이 쉬웠기 때문일까? 현대 소설은 반전에 반전을 추구하며 더 짜릿하고 자극적 감동을 추구하기에 해피엔딩이 적은 것일까? 고전의 권선징악적 해피엔딩이 마치 삶의 지표가 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가? 나홀로 현대와 고전의 결말을 비교해 본다.

David의 어린 시절 우상인 Steerforth는 좋은 친구를 분별하여 사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하게 한다. 특히나 외적인 매력에 카리스마까지 풍기는 인상이라면 주변 친구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외적인 준수함에 의해 가려진 도덕성 결여와 무절제한 오만함을 읽어내기란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외적인 아름다움과 매력에 대한 속단과 판단을 보류하는 습관이 어른이 된다고 저절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외적인 것에 쉽게 흔들리며 영향을 받는 나는 항상 부족한 어른이다.

사악함의 표상인 Uriah Heep은 읽는 내내 불편했으나, 고전 소설이기에 그의 사기와 위선은 끝이 있을 것을 알고 읽었다. 입으로 항상 humble을 말하지만 거짓 겸손, 사기 행각, David에 대한 열등의식은 읽기만 해도 마음 속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의 행동에 내가 민감한 것은 그의 교만함과 허영이 내 속에도 있을지 모른다는 불편함 때문인가? 한편, 그의 사기 행각이 들통이 나고 교도소에서 회개한 내용은 어디까지가 진정성이 있었는지 궁금해 진다. Salem House에서 가혹한 처벌과 권위적인 교장이던 Mr. Creakle은 교도소장이 되어 수감원들을 교화시키는 데 있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뽐내고 있었으나 Uriah Heep의 회개는 어디까지가 진심이었을까? 인간의 위선과 허영은 잘못을 인정하는 데 있어서도 항상 기본값으로 자리하는가?

Agnes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친구 Steerforth에 대한 진실을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처럼, 그의 사랑을 찾기까지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가까운 보석은 근접성 때문에 소중함과 가치를 제대로 알기가 어려운가? Dora이전에도 그의 가슴 속에는 늘 불같은 감정이 요동치고 있었으나, Dora를 만나면서 열정이 정점을 찍고 결국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마음 속에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있었고, 대화를 시도하였으나 더 악화되자, 기대를 접고 상황과 상대를 바꾸어가는걸 포기하게 된다. 항상 부족한 뭔가가 있었으나 더 악화되지 않고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 것에 만족하는 삶을 살게 된다.

Agnes는 늘 그 자리에 있었으나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이라 생각했을까? 좋은 사람이고, 항상 기댈 수 있는 친구라서 설레임과 그리움이 적었을까? 두근거리고 떨림이 있는 감정만을 사랑이라 단정하는 오류 때문일까? 결국 그는 먼 길을 돌고 돌아 얼마나 Agnes를 사랑하는지 알게 된다. 마음 속 허전함은 늘 Agnes를 향해 있었기에 Dora와 마음까지 나누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Agnes는 항상 북극성이자 나침반이었기에 외적인 아름다움에 반한 철부지 Dora와는 반쪽 사랑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의 마지막 고백( I went away, dear Agnes, loving you. I stayed away, loving you. I returned home, loving you.)이 그의 방황이 얼마나 길었는지, 그의 사랑의 종착역은 결국 누구였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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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인간의 삶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해 보고자 쓰여졌다고 했다. 즉, 인간이라는 존재가 악마에 의해 범속한 것의 압력에 얼마나 속수무책으로 끌려다닐 수 있는지 실감하게 한다. 제목 Screwtape는 Scrooge, screw, thumbscrew, tapeworm(촌충), red tape(관료적 형식주의의 상징 빨간 끈) 등의 음성학적 연상 작용을 일으켜 불쾌한 느낌을 주도록 의도하였다. 결국 사탄이 나약하고 연약한 인간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어떤 방법으로 유혹하는지 등을 설명하고 있다.

인간, 즉 나의 연약함과 간사함의 민낯이 드러나기에 읽기에 유쾌하거나 즐거운 책은 아니다. 오죽하면 작가도 악마의 마음으로 비트는 일이라 쓰는 동안 온갖 티끌과 갈망과 욕망으로 자신을 몰아가야 했기에 영적 경련 같은 것이 일어났다고 했다. 이 책과 상반되는 ‘천사의 충고들‘ 같은 글이 동시에 실렸다면 독자가 위안을 얻을 수 있었을텐데 모든 문장에서 천국의 향기가 묻어나는 높은 수준의 영성을 갖춘 적합한 문체를 구사하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위 글은 곧, 죄인인 인간은 언제라도 악마의 유혹에 쉽게 노출되어 있어서 시험 당하기는 쉽지만, 유혹의 손길에 좌지우지 되지 않는 거룩한 영성을 변함없이 유지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을 양서류로 표현하고 있었다. 인간의 영혼은 영원한 대상을 향하고 있지만 그 육체와 정욕과 상상력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기에 감동의 시기, 무감각하고 결핍의 시기의 기복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연약한 육체가 원하는 쾌락은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 지배를 받기에 영원할 수 없고 결국 불행을 부를 수도 있다.

청년의 시기에 갈구하는 순간의 짜릿한 쾌락을 넘어서는 중년은 악마의 손길에서 자유로운가? 사랑과 희망의 점진적 쇠락, 조용한 절망, 무미건조함, 모호한 원망 등이 마음 속에 자리하게 되는 중년의 시기 또한 감사가 줄어들게 되며 악마의 타겟이 될 수 있다. 나의 연약함에 비해 악마는 언제나 전투복을 입고 강건함을 유지한 채로 나를 마중나오고 있다. 중용을 지키는 종교는 무교와 같다는 무서운 표현이 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나의 영적 상태는 믿지 않음과 같아 악마의 속삭임에 쉽게 넘어갈 수 있음을 기억하자.

다행히도 마지막 페이지에 희망의 서광이 비치고 있다. 예수님을 만나니 ‘바로 당신이었군요’라는 감격스런 선언과 간증을 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즉, 고독한 순간마다 경험했던 느낌, 모든 순수한 경험 속에 내재해 있었지만 기억 속에 잡아둘 수 없었던 그 중심의 음악을 복원한 느낌, 누군가가 나를 강하게 이끌어 가고 있었구나라는 등의 고백을 하는 날이 내게 오기를 소망한다. 이제 더 이상, 감각적, 정서적, 지적 즐거움, 미적 자체가 주는 즐거움으로 나의 하루를 가득 채우기 위해 동분서주한 후 탈진된 상태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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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책을 좋아하지만 나름의 선정 기준이 있다. 우선, 참신한 소재와 구성에 마치 자석처럼 끌리며 눈과 손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듯 보이나, 결국엔 유에서 유를 창조하는 직업이 작가임을 알기에, 항상 신선하고 놀랄만한 스토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런 이유로 스토리가 아니라면 같은 듯 다른 표현이지만 세련되고 정제된 언어의 미학을 보여주는 책이 좋다. 물론, 스토리와 언어의 미학 둘 다를 내포한 책이라면 금상첨화지만, 그것이 힘들다면 후자가 선택의 기준이 된다.

또 하나의 기준이 있다면 작가이다. 조정래는 나의 까다로운 선택의 범주에 있지 않은 거의 유일한 국내 작가가 아닐까 한다. 부족한 내 안에 가득한 인지 편향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정래 신간이 나오면 무조건 읽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가 없다. 태백산맥, 한강, 아리랑과의 너무나 강렬했던 첫사랑은 지금까지도 나의 눈과 귀를 가리며 맹목적인 선택을 하게 한다. 설레임과 두근거림이 가득했던 첫사랑과 조우가 예전의 기억과 느낌을 그대로 살릴 수는 없다. 사람과의 만남이 그러하듯 책과의 만남도 첫 느낌을 능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믿도 읽는 조정래 작가의 혼을 알기에 실망감이 따르지는 않았다. 2년 전 ‘천년의 질문’ 이후 출시된 장편이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2년 전 책과 달리 이 책은 제목에서 책의 주제와 내용이 모두 보이기에 큰 신선감은 없었으나 이 작가의 책은 일단 시작하면 멈추기 어렵고 진부한 내용도 지겹지 않다는 데 매력이 있다. 황금만능주의 시대에 물질의 노예로 전락한 인간들에게 던지는 또 하나의 경고라는 슬픈 내용이었다. 알람이 울리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야 하는 데, 경종이 울림에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음은 나 또한 물질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까?

나라와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눈과 귀를 덮고 싶을 때가 많은 것은, 막강한 권력과 부패 앞에 내 자신이 너무나 무기력하고 달라지지 않는 악인의 교만함 때문이다.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면서도 아무 실천도 하지 않으며 감정적 분노만 앞세우는 내가 더 싫어진다. 꼿꼿하고 빳빳하게 기개를 세우며 사회를 바꾸어 보고자 했던 운동권 출신의 이태하, 한지섭은 결국 세파에 시달려 한풀 꺾인 신세가 되었다. 이태하는 검사를 포기하고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머임)의 일원으로, 한지섭은 정치를 내려 놓고 귀농하여 영농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너와 우리의 맥박은 언제나 영원히 함께 뛰고 있다고 생각하며 둘은 서로 다른 위치에 있으나, 이 세상을 혐오하거나 포기하지 않으며 각자의 위치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기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51명으로 시작한 민변 회원이 30년 사이에 1,200명이 되었다는 것은 고무적이지만, 인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지 않은 것 또한 물질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기 때문이리라.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판사, 검사, 변호사의 삶이 아닌 민변의 일원이 되어 약자를 도우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자기희생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힘겨운 싸움을 해 왔던 극소수의 사람 중 한 명을 ’순결한 영혼, 상처투성이의 영혼, 가장 고독한 영혼‘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만큼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고, 황금종이의 위력에 지배받지 않으며 독야청청하기란 얼마나 외롭고 힘든 길인지 잘 암시하고 있다. 이태하와 한지섭이 뜻을 같이 공유하며 넘어지지 않도록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우정이 따뜻하고, 각자의 다른 위치에서 약자들의 위로와 힘이 되어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 2의 이태하와 한지섭 같은 인물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에 여전히 세상은 살아갈만한지도 모른다.

2권 후반부에 KTX를 타고 가는 이태하는 영어 범람의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 국가의 존엄성과 국민적 자주상 상실의 시대라 할만큼 영어의 지배하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김영삼 정권시에 영어 조기교육을 강조하며 시작된 영어 사대주의는 갈수록 심해져서 상습적으로 사용된 단어는 한글인지 영어인지 모르는 것도 있다. 회사, 상품, 아파트, 가게, 노래, 가수 이름 등 예시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더 신선한걸 찾은 탓인지 여러 언어를 섞거나 혼합하여 국적 불명의 언어도 많다. 심지어 관공서에서 내세우는 프로젝트나 슬로건에도 영어가 들어감은 말할 것도 없다. 현재 내가 쓰는 글에도 영어가 살아 숨쉬고 있다. 심지어 난 영어 전공자이지만 필요시에만 사용하고 아름다운 한글이 오래 오래 사랑받고 존중받기를 간절히 바란다.

작가는 소설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제시(p. 149)’라는 표현으로 이 책이 존재하는 이유를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 시대의 풍자와 비판을 통해 시원하고 통쾌한 해결책을 제시하였더라면 책을 덮고 내 마음이 편안했으리라. 그러나, 마지막 장에서 의로운 길을 가고자 했던 민변 이태하도 10억 앞에서 고민하는 내용으로 끝이 난다. 무조건 흔들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단칼에 내치지 못하고 있다. 여전이 마음 속 내적 갈등 상태로 책이 끝난다. 현재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서 겅아지에게 막대한 유산을 물려 줄 수도 있는 시대가 아닌가? 이태하의 고민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고민임을 암시하며, 황금종이의 엄청난 문제점을 제시하는 것으로 마치고 있다.

돈이 인간의 실존이자 부조리가 된 것은 최근의 일은 아니지만 갈수록 불감증이 심해지고, 인간의 마음 속에 돈의 필요성이 기본값으로 내재되어 이제는 필요를 넘어 악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소설로 인해 그 문제점을 인지하고 의식하는 것 자체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물질에 지배받지 않는 자유함으로 그것을 어떻게 지혜롭게 사용할지 고민해야겠다.

인간이 저지르는 많은 어리석음 중에서 가장 큰 어리석음두 가지는, 첫째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고, 둘째는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일을 자꾸자꾸 생각하며 후회하는 것이라고 했다. - P85

정경유착, 경언유착, 경유착, 권경유착이 상시적으로벌어지고 있으니 권력이 바뀔 때마다 ‘경제개혁, 재벌개혁‘ 구호를 요란하게 떠들어대지만 조금씩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물쭈물 용두사미가 되고는 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 P94

왜 그 명칭이 ‘KTX‘인지 이태하는 기차를 탈때마다 눈에 거슬리고 비위가 상했다. 그것은 갈수록 통제불능 상태로 범람하고 있는 영어 남발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수출에 주력하는 개인기업도 아니고 국가가 경영관리하는국철에 왜 굳이 ‘KTX‘라고 외국어를 붙이는가. 외국인들이편하라고? 외국 사람들이 몇이나 타는가. 글로벌 시대에 맞춰서? 이 열차가 파리나 뉴욕까지 달리는가? 영어 남발은 김영삼 정권의 영어 조기교육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파트 단지들이 국적 불명의 뜻 모를 외국어 명칭들을 경쟁적으로 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 P140

우리는 왜 국가적으로 이런 조처를 취하지 못하는가. 영어간판을 쓰되 위에는 반드시 한글로 쓰고, 아래에는 영어를 쓰게 하는 방법 말이다. 이것은 쇄국이 아니다. 그건 국가적 존엄성과 국민적 자주성을 스스로 지키는 일인 것이다. 이 나라의 이 정신없는 영어 범람 현상을 미국 사람들은 뭐라고 하며바라볼까 고마워할까, 기특하다고 할까, 스스로 문화식민지가 되려고 허둥거리는 꼴을 보며 불쌍해하고 경멸할까. - P141

소설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제시라고. 아마 작가는 독자들에게 문제를 제시하고, 그 답은 역사에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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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ust (Paperback) - 『트러스트』원서
Hernan Diaz / Penguin Random House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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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오랜만에 장편 소설을 읽으며 독서 삼매경에 빠지는 호사를 누렸다. 빨리 읽고 싶어서 잠드는 시간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난 스포일러나 티저 없이 책을 읽는 것을 즐기고 단편 보다 장편 소설을 선호한다. 분명 목차를 보면 네 명의 작가가 쓴 단편 소설을 묶은 것 처럼 되어있다. 이해가 안되어 읽으면서 겉 표지 작가와 목차 속 작가를 얼마나 많이 넘겨 보았는지 모른다. 전체 흐름을 이렇게 뒤 늦게 깨닫고 짐작도 할 수 없어서 계속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추리 소설 형식을 빌린 것도 독자를 긴장시키는 묘미라 하겠다.

나의 이해력에 혼란을 준 것 외에 또다른 묘미는 영어가 너무 너무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고난도 어휘도 있었지만 현학적이라는 느낌보다 세련되고 정제된 절제미에 압도되어 수 많은 인생 문장을 건질 수 있었다. 언어의 채석강에서 옥석을 구분하느라 땀흘린 작가의 노력을 읽으며, 수려한 문장을 마음의 양식으로 삼을 수 있음에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내적인 정서와 심상을 언어, 노래, 그림 등의 다양한 외적 수단을 통해 표현하고 독자들이 이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난 축복인 것 같다. 언어와 동행하며 명불허전의 대어를 낚는 작가는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다.

수려한 언어와 문체에 매료된 것 외에 이 책의 독특한 구성은 나의 이해력에 큰 도전과 흥미를 주었다. 끝까지 결말이 어떻게 날지 예상할 수가 없어서 기대가 너무 컸기에 책을 내려 놓고 야간의 실망감이 동반되었는지도 모른다. 1부(Bonds)가 끝났을 때도 약간 허무했고, 2부(My life)를 읽을 때는 여전히 미궁이여서 엉뚱한 곳으로 결론을 짓고 있었다. 난 책에서 항상 교훈을 건지려는 고지식한 면이 있는 것 같다. 2부에서 개인의 자산이 공공 선에 기여할 수 있고, 기여해야 한다는 것을 3번 이상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난 이것이 책의 주제일거라 추측하며 읽었고 부에 대한 신선한 개념을 정립하게 되었다고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나, 3부에서 부는 새로운 얼굴을 보여 준다. 돈은 허상이지만 모든 것의 중심에 있고 실제로 모든 것이기도 하다는 표현이 있다. 자신은 공공 선에 기여한 삶을 살아 왔다고 굳게 믿으며 자신의 부는 국익을 증진시키는데 기여했다고 확신하는 주인공은 또 다시 부를 이용하고 비서를 뽑아 그녀를 통해 새로운 자서전을 작성하여 명예를 회복하고자 한다. 외적으로 보여지는 삶과 자신이 생각하는 나 사이에서 어느 것이 진정한 나인지는 결국 4부에서 밝혀지는 것 같다.

4부의 이야기를 통해 결혼 생활과 외로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외적으로 보여지는 화려한 결혼 생활 이면에 좁혀지지 않았던 외로움의 거리가 있었고, 두 사람 사이의 정신적 거리는 결국 삶의 일부가 되었다. 불황기에 이루었던 선견지명을 통한 금융업계의 탁월한 성공은 아내의 도움 때문이었다. 사기와 조작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기 때문에 세상의 눈을 가리기 위해 자선사업에 매달린 것일까? 부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욕심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도 자신은 공공 선에 기여하는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는 주인공에 나는 큰 배신감을 느꼈다.

사람들은 승리의 능동적 주체이지만 패배의 수동적 객체( active subjects of our victories but also the passive objects of our defeats)가 된다고 했다. 금융업계에서 그가 거둔 승리와 쾌거는 자신의 총명함과 직관의 결과이고 사회의 비난과 중상 모략은 왜곡된 것이어서 자서전을 통해 공공 선에 기여한 자신을 모습을 증명하고자 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인간의 악함을 읽었다. 아내의 고민과 외로움에 상관없이 그녀는 평생 자선 사업을 하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노라 굳게 믿고 있는 그를 통해 인간의 교만함을 읽었다.

물질적 풍요의 선물은 권태감(ennui)일까?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도덕적 불편함(moral discomfort)이 필요한 것일까? 그래서 자선 사업과 봉사를 권장하는 것일까? 결국 물질과 공공 선은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가? 또한 이 책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사람의 믿음(Trust)은 어디까지 신뢰할만한가? 주인공의 부와 결혼 생활은 자신이 믿고 있는 것, 아내가 믿는 것, 비서가 믿는 것,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모두 다르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나에 대한 신념이 또 얼마나 틀릴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남들이 나를 바라보고 또 나에 대해 믿고 있는 것이 틀릴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다. 내가 틀린 것을 나의 신념처럼 확고하게 믿고 있을까봐 두렵다. 결국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조차 잘 알지 못하는 이리 나약한 존재인가? 아님 알면서 자기 부인을 하지 못하는 악한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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