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ust (Paperback) - 『트러스트』원서
Hernan Diaz / Penguin Random House / 2022년 5월
평점 :
품절


너무나 오랜만에 장편 소설을 읽으며 독서 삼매경에 빠지는 호사를 누렸다. 빨리 읽고 싶어서 잠드는 시간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난 스포일러나 티저 없이 책을 읽는 것을 즐기고 단편 보다 장편 소설을 선호한다. 분명 목차를 보면 네 명의 작가가 쓴 단편 소설을 묶은 것 처럼 되어있다. 이해가 안되어 읽으면서 겉 표지 작가와 목차 속 작가를 얼마나 많이 넘겨 보았는지 모른다. 전체 흐름을 이렇게 뒤 늦게 깨닫고 짐작도 할 수 없어서 계속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추리 소설 형식을 빌린 것도 독자를 긴장시키는 묘미라 하겠다.

나의 이해력에 혼란을 준 것 외에 또다른 묘미는 영어가 너무 너무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고난도 어휘도 있었지만 현학적이라는 느낌보다 세련되고 정제된 절제미에 압도되어 수 많은 인생 문장을 건질 수 있었다. 언어의 채석강에서 옥석을 구분하느라 땀흘린 작가의 노력을 읽으며, 수려한 문장을 마음의 양식으로 삼을 수 있음에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내적인 정서와 심상을 언어, 노래, 그림 등의 다양한 외적 수단을 통해 표현하고 독자들이 이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난 축복인 것 같다. 언어와 동행하며 명불허전의 대어를 낚는 작가는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다.

수려한 언어와 문체에 매료된 것 외에 이 책의 독특한 구성은 나의 이해력에 큰 도전과 흥미를 주었다. 끝까지 결말이 어떻게 날지 예상할 수가 없어서 기대가 너무 컸기에 책을 내려 놓고 야간의 실망감이 동반되었는지도 모른다. 1부(Bonds)가 끝났을 때도 약간 허무했고, 2부(My life)를 읽을 때는 여전히 미궁이여서 엉뚱한 곳으로 결론을 짓고 있었다. 난 책에서 항상 교훈을 건지려는 고지식한 면이 있는 것 같다. 2부에서 개인의 자산이 공공 선에 기여할 수 있고, 기여해야 한다는 것을 3번 이상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난 이것이 책의 주제일거라 추측하며 읽었고 부에 대한 신선한 개념을 정립하게 되었다고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나, 3부에서 부는 새로운 얼굴을 보여 준다. 돈은 허상이지만 모든 것의 중심에 있고 실제로 모든 것이기도 하다는 표현이 있다. 자신은 공공 선에 기여한 삶을 살아 왔다고 굳게 믿으며 자신의 부는 국익을 증진시키는데 기여했다고 확신하는 주인공은 또 다시 부를 이용하고 비서를 뽑아 그녀를 통해 새로운 자서전을 작성하여 명예를 회복하고자 한다. 외적으로 보여지는 삶과 자신이 생각하는 나 사이에서 어느 것이 진정한 나인지는 결국 4부에서 밝혀지는 것 같다.

4부의 이야기를 통해 결혼 생활과 외로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외적으로 보여지는 화려한 결혼 생활 이면에 좁혀지지 않았던 외로움의 거리가 있었고, 두 사람 사이의 정신적 거리는 결국 삶의 일부가 되었다. 불황기에 이루었던 선견지명을 통한 금융업계의 탁월한 성공은 아내의 도움 때문이었다. 사기와 조작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기 때문에 세상의 눈을 가리기 위해 자선사업에 매달린 것일까? 부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욕심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도 자신은 공공 선에 기여하는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는 주인공에 나는 큰 배신감을 느꼈다.

사람들은 승리의 능동적 주체이지만 패배의 수동적 객체( active subjects of our victories but also the passive objects of our defeats)가 된다고 했다. 금융업계에서 그가 거둔 승리와 쾌거는 자신의 총명함과 직관의 결과이고 사회의 비난과 중상 모략은 왜곡된 것이어서 자서전을 통해 공공 선에 기여한 자신을 모습을 증명하고자 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인간의 악함을 읽었다. 아내의 고민과 외로움에 상관없이 그녀는 평생 자선 사업을 하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노라 굳게 믿고 있는 그를 통해 인간의 교만함을 읽었다.

물질적 풍요의 선물은 권태감(ennui)일까?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도덕적 불편함(moral discomfort)이 필요한 것일까? 그래서 자선 사업과 봉사를 권장하는 것일까? 결국 물질과 공공 선은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가? 또한 이 책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사람의 믿음(Trust)은 어디까지 신뢰할만한가? 주인공의 부와 결혼 생활은 자신이 믿고 있는 것, 아내가 믿는 것, 비서가 믿는 것,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모두 다르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나에 대한 신념이 또 얼마나 틀릴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남들이 나를 바라보고 또 나에 대해 믿고 있는 것이 틀릴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다. 내가 틀린 것을 나의 신념처럼 확고하게 믿고 있을까봐 두렵다. 결국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조차 잘 알지 못하는 이리 나약한 존재인가? 아님 알면서 자기 부인을 하지 못하는 악한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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