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1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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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관람했던 상연작 중에는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가 있었다. 이 오페라는 주인공 음유시인 만리코와 루나 백작은 어릴 적 헤어진 형제로서 레오노라를 사랑하는 연적인 하는 구도로 되어 있다. 2014년작의 특이한 점은 형인 루나 백작 역을 칠순을 훌쩍 넘긴 플라시도 도밍고가 맡았다는 점이었다. 이미 테너에서 바리톤으로 변신했지만 나이를 뛰어넘은 그의 연기력은 충분히 박수를 보낼 만 했다.

 

뜬금 없이 오페라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는 여자친구의 짧은 감상평 때문이다. 여자친구는 늙은 플라시도 도밍고를 형으로 출연시킨 연출의 의도가, '어린 여자를 갖고 싶어하는 남자의 심리와 질투를 묘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이 그렇다. 이 작품은 두 남녀가 주고 받은 서간문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편지마다 '사랑하는 나의...'로 시작하지만, 처음부터 작가가 밝힌 두 남녀의 차이는 거의 30살 정도 된다. 그러면서 남자는 말한다. 내 감정을 오해하지 말라고, 그것은 부성애와 같은 것이라고.

 

그런데 젊은 여자가 남자만큼 자주는 아니더라도 성의껏 답을 주니까 남자는 몸이 달았나보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격정을 담아 편지를 보낸다. 자신의 문학적 소양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해서, 여자가 추천한 고골의 '외투'를 읽어보더니 흠을 잡는다.

 

그러나, 남자의 이러한 감정이 부성애가 아니라는 실마리가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여자의 편지 중 다음 문장이다.

 

"제가 어쩌다 조심성 없이 어떤 사물에 대해 언급이라도 하면 당신은 그 즉시로 그것을 사버리시는군요."  - 17쪽

 

...연애 고수들의 방법이다.

 

어쨌거나, 둘은 계속 돈이 없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넋두리를 늘어 놓다가 결국 여자가 떠난다. 남자는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 받고 싶어하지만, 외로운 외침일 뿐이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는 결국 (그 끝이야 어찌 되든) 돈 있는 남자를 찾아 떠난다는 진리? 늙은 남자는 찌질하게 그 여자가 거의 자기에게로 넘어온 것으로 생각했나보다.

 

 

창문 아래 마당에서는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지고 있건만, 저는 웬 향기 타령이었을까요! 아마 제가 어리석어서 그냥 그렇게 느껴졌던가 봅니다. 가끔은 누구나 그렇게 자기 느낌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바보 같은 얘기를 할 때가 있잖아요. 그건 바로 심장이 지나치게, 어리석으리 만치 뜨거워서 생기는 일이죠. - 21쪽

나는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고 있으니..... 추억은 기쁜 것이든 슬픈 것이든 항상 괴로운 것이다. 최소한 나한테는 그렇다. 그러나 그 괴로움은 또 달착지근한 것이다. 마치 타는 듯한 하루가 지나고 밤이 되면 이슬피 폭염에 바싹 마른 꽃에 신선함을 주어 소생시키듯이, 추억은 괴롭고 아프고 지치고 슬픈 내 가슴에 새로운 힘을 주어 소생시키는 것이다. - 64쪽

사실 전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한곳에 정착해서 살고 싶어요. 슬픔을 끌어안고 살아도 익숙한 곳에서 사는 게 아무래도 더 낫겠죠. - 98쪽

불행은 전염병입니다.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전염되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옛날에 검소하고 조용하게 사셨을 때는 겪어 보지도 못했을 불행을 이제 제가 당신께 가져다 드리고 말았군요. - 122쪽

누가 책에 뭐라고 쓰든 엉터리 3류 작가 족속들이 뭐라고 끼적이든 가난한 사람의 인생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왜 이전하고 같을 수밖에 없느냐고요? 3류 작가들의 말대로라면, 가난한 사람이 가진 것은 모두 옷을 뒤집어 보이듯 세상에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죠. - 129쪽

가난한 사람에게 비어져 나온 발가락과 다 해진 팔꿈치는, 예를 들자면 당신에게 처녀성과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커다란 부끄러움이란 말이죠. - 131쪽

제 목을 조이는 것은 사람들이에요, 그렇죠? 제 목을 조이는 것은 돈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느껴지는 불안감, 사람들의 수군거림, 야릇한 미소, 비웃음입니다. - 153쪽

당신만 생각하면 제 아픈 상처에 약을 바르듯 편안해집니다. 비록 당신 때문에 괴롭기는 합니다만, 당신 때문에 괴로워하는 일 마저도 저는 즐겁답니다. - 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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