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끄러운 일이지만, 남들은 고등학교, 대학교 때 읽은 책을 나는 만 서른 넷 생일에서야 다 읽을 수 있었다. 예전엔 문학이라는 것이 쓸데없는 것으로 여겼다. 사실에 충실한 글만이 나에게 텍스트로서의 가치가 있었다.

 

EBS라디오 '고전읽기'에서, 지금은 작고한 구본형 씨가 이 작품을 '거대하다'고 묘사한 적이 있다. 그런데 실제 '죄와 벌'은 라스꼴리니꼬프와 어머니, 동생, 이웃의 창녀 등 몇몇 사람들 간의 일화를 며칠 간에 거쳐 다루고 있을 뿐이다. 800페이지 분량에 달하지만 (정신없이 읽어서 그런지) 그다지 길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러면 그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것을 '거대하다'고 한 것일까. 왜 이 작품을 꼭 읽어야만 하는 것으로 본 것일까.

 

읽고 나니 과연 '거대했다'. 그러나 한 번 읽은 것으로는 그 느낌을 잘 표현할 수가 없어 키워드로 정리해 봤다.

 

1인칭 주인공시점

 

물론 이 작품은 전지적 작가시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라스꼴리니꼬프가 아닌 다른 인물들만 등장하는 장면이 종종 있음에도) 그의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작가는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의 심리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그러나 그의 심리를 온전히 전달하는 역할에 그친다. 반면에 다른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는 보이지 않는다. 전지적 작가의 가면을 쓴 1인칭 주인공 시점인 것이다.

궁금증은 '역자 후기'에서 풀렸다. '죄와 벌'의 모체가 되는 그의 전작인 '참회'에서의 1인칭 주인공시점을 그대로 쓰려다 이것이 '주변세계와 주인공의 심리를 보다 폭넓게 묘사 분석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전환하였다는 것이다.

 

스릴러, 심리소설

 

'죄와 벌'은 스릴러 같다. 잔혹한 살인자와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무척이나 흥미 있게 읽힌다. '페이지 터너'라고 하나. 이 작품이 그랬고, 끝까지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살인자의 심리를 파헤치는 '심리소설'의 성격도 짙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이상한 습관이 있다. 혼자 중얼중얼 거리면서 다닌다는 것이다. 당연히 주변 사람들은 그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나와 비슷한 소심한 사람의 습관을 여기서 발견하고 주인공에 감정이입이 될 수 있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살인죄를 저지른다. 그러나 이는 평화로운 세상의 법규의 관점에서 그런 것이다. 그는 단지 세상에 해로운 '이'같은 존재를 죽였을 뿐이다. 그에 대한 양심의 가책은 거의 없다. 반전은, 그는 가난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자신이 수중에 돈이 없음에도, 일단 돈이 생기면 어려운 사람들에게 주고 만다. 조금의 망설임만이 있을 뿐이다. '이'같은 존재는 사회의 법과 관계없이 죽여도 된다. 가난한 사람은 무조건 도와야 한다. 이것이 그가 스스로를 '비범인'으로 여긴 증거가 아닐까.

 

 

라스꼴리니꼬프에 있어 '벌'은 불안한 심리였다. 살인자의 불안한 심리. 남들의 이야기가 자신을 살인자로 간주하고 있는 것인가의 불안함. 가뜩이나 평소에도 중얼중얼 거리고 다니는 소심한 남자에게 그러한 벌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에게 죄책감이나 형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소냐

 

가족의 어려움 때문에 거리에 나서게 된, 모두가 손가락질 하는 매춘부. 그러나 그녀는 성경에서나 볼 수 있는 순결한 영혼을 갖고 있다. 보통 매춘부는 나오면 주인공에게 몸을 주려 한다는 게 클리셰인데, 작품에는 단 한번도 그런 이야기가 없다. 그녀는 성녀이다. 라스꼴리니꼬프의 단 하나의 '구원'이다. 심리적 불안이라는 '벌'에 시달리는 그를 자수하여 광명찾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의 옥바라지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연극적 요소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희곡을 읽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일이 발생하는 장소는 그리 많지 않다. 그의 '노란 하숙방', 마르멜라도프의 집, 소냐의 집 등. 그리고 등장인물 간 대화가 뛰어나고 매력적이다. 주인공의 심리묘사는 독백에 해당할 것이다. 연극으로 각색해도 무척 좋은 작품이 될 것이라는 상상을 해봤다.

 

새로운 고골에서 대문호 도스또예프스끼로

 

'죄와 벌'은 작가의 5대 장편 중 첫 작품이다(해설에서는 '5막짜리 비극의 제1막'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작가와 작품 모두에게 불멸의 이름을 허락해 주었다. 5막에 해당하는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과 어느 것이 더 걸작인가 하는 논쟁은 후세의 책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던져진 떡밥일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