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포도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4
존 스타인벡 지음, 김승욱 옮김 / 민음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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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후 미국산 오렌지, 포도의 수입이 크게 늘어 국내 과일재배 농가가 큰 타격을 입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7일 농림수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해 3월 15일 한미 FTA 발효 후 연말까지 미국산 오렌지 수입액은 1억4800만 달러로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33.4% 급증했다. 오렌지는 3월부터 8월까지 계절관세가 적용돼 기존 50%였던 관세가 30%까지 떨어졌다. 오렌지의 뒤를 이어 수입이 급증한 것은 체리였다. 작년 3월5일~12월31일 수입액이 8000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무려 78% 증가했다. 포도 수입도 21.6% 늘어 같은 기간 수입액이 2600만 달러에 달한다.

<강원도민일보> 2013.3.8 연합뉴스기사 인용

 

평소 같았으면, ‘그렇군’하면서 넘어갔을 기사인데, 직전날 저녁,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서 다음을 읽었기에 기사가 매우 생생하게 다가왔다.

 

 

사람들이 강에 버려진 감자를 건지려고 그물을 가지고 오면 경비들이 그를 막는다. 사람들이 버려진 오렌지를 주우려고 덜컹거리는 자동차를 몰고 오지만, 오렌지에는 이미 휘발유라 뿌려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만히 서서 물에 떠내려가는 감자를 바라본다. 도랑 속에서 죽임을 당해 생석회에 가려지는 돼지들의 비명에 귀를 기울인다. 산처럼 쌓인 오렌지가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지켜본다. 사람들의 눈 속에 패배감이 있다. 굶주린 사람들의 눈 속에 점점 커져 가는 분노가 있다.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 간다. 수확기를 향해 점점 익어 간다.

- 2권, 255쪽

 

 

저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에서는 얼마나 많은 오렌지와 체리와 포도가 불태워졌을까. 지구 반대편에, 아니 미국 내에서조차 굶어 죽는 사람이 있음에도 말이다. 존 스타인벡이 그려낸 1930년대의 미국사회의 모습이, 지금은 글로벌사회에서 진행 중이다.

 

 

“... 사람이 땅뙈기라도 조금 갖고 있으면, 그 땅이 바로 사람이고, 그 사람의 일부고, 그 사람을 닮아가는 법인데, 사람이 자기 땅을 걸으면서 땅을 관리하고, 흉작이 들면 슬퍼하고, 비가 내리면 기뻐하고, 그러면 그 땅이 바로 그 사람이 되는데. 그 땅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사람이 더 커지는 법인데. 농사가 잘 안 되더라도 땅이 있어서 사람이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인데. 원래 그런 건데”

-1권, 78쪽

 

 

분노의 포도는 ‘땅’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메리칸 드림으로 황무지를 일군 동부의 농부들이 사회가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되고 대공황이 되면서 자신들이 개간한 땅을 잃고 쫓겨나 서부 캘리포니아로 찾아가 노동착취도 당하고 파업도 하면서 근근히 살아가지만, 그 와중에도 인간애를 잊지 않는다는 것이 기본 주제이다. 스타인벡의 자연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휴머니즘을 그려나가는 방식은 아름다우며, 이것이 현재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로 우뚝 설 수 있는 힘이라고 여겨진다.

 

 

 

민음사 刊 ‘위대한 개츠비’의 해설에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1910년대를 알고 싶다면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시스터캐리를, 1920년대는 위대한 개츠비를, 1930년대는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읽으면 된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위대한 개츠비'라는 짧은 소설이 20년대를 축소해 담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노의 포도가 대공황기 소작농들의 어려운 삶이 작가의 예리한 관찰로 파헤친 것만은 틀림없다.

 

 

작품에는 멋들어진 문장이 많다. 진한 인간애로 감동을 주는 장치를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애를 드러내는 방식에도 품격이 있다. 나는 인간애를 극명하게 표현한 작가와 작품을 좋아하는 편인데, ‘분노의 포도’는 그 모양새가 조금 떨어진다. 요즘 말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다. 어머니가 고기를 좀 사고. 추가로 설탕을 사려하는데, 돈이 부족해 점원과 티격태격하다 결국 점원이 자신의 돈으로 미리 지불하고 나중에 갚으라고 하자 어머니가 말한다.

 

 

“좋은 걸 한 가지 배웠네요. 항상 배우고 있죠. 매일. 사람이 곤란해지거나 다치거나 도움이 필요할 땐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라는 것. 남을 도와주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뿐이니까. 그런 사람들뿐이에요.”

- 2권, 312쪽

 

 

빅또르 위고의 ‘가난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말인데, 위고는 반전의 기법으로 순식간에 독자들에게 파고든 반면(미리엘 주교가 장발장에게 은촛대를 주는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분노의 포도’에서는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맞는 말이고 어디가서 써먹기는 좋기는 한데, 설정이 다소 억지스럽다. 작품 말미, 아이를 사산한 로저샨이 굶어 죽어가는 사내를 만났을 때 한 행동은 또 어떠한가.

 

 

그녀의 손이 그의 머리 뒤로 돌아가서 머리를 받쳤다. 그녀의 손가락은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그녀는 시선을 들어 건너편 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한데 모이더니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 2권, 473쪽

 

 

죽어가는 사내에게 젖을 먹인 그녀는 순식간에 성모마리아로 변신한다. 그녀의 남편은 저만 살겠다고 도망가고 아이는 사산해 버려 말도 못할 고통을 토해내던 그녀가, 마지막에 어머니와 눈빛 교환만으로 성모가 된다는 것은 생뚱맞기까지 하다. 

 

한편으로, 이러한 결말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주제를 극명하게 드러낸 장치가 아닌가 한다. 앞서 작품 전반부가 주로 '땅'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는데, 중반부터는 ‘모성’을 그리고 있다. ‘톰 조드’와 ‘짐 케이시’가 만나 고향으로 돌아오는 데서 시작하고, 남자들이 일자리를 구해 돈을 벌어오고 하는 모습에서 남성들의 이야기인 듯 하지만, 점차 해체되는 가족에서 중심을 잡는 역할은 어머니가 하고 있다. 서양사회에서 ‘땅’은 곧 ‘어머니’이다(mother earth). 즉 전반부에서는 ‘땅’을, 후반부에서는 ‘어머니’를 강조함으로써 주제를 일관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어머니는 마지막에 딸에게 ‘모성’을 물려줌으로써 ‘죽은 아기’를 대신해 새로 생긴 ‘가족’을 돌보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따뜻한 인간애와는 별개로, 이 작품에는 인종주의적 편견이 곳곳에 숨어 있다. 땅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농민들은 그 땅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닌 ‘인디언들과 싸워서 얻어낸 땅’임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스타인벡은 자본이 몰아낸 농민들의 마음 속에 익어가는 ‘분노의 포도’는 정확히 관찰했지만, 농민들이 몰아낸 인디언들의 마음 속 ‘분노의 포도’는 간과한 것이다. 흑인에 대한 경멸도 볼 수 있는데, 이런 점들 때문에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물론, 인종주의가 여전히 만연한 1930년대이기에 작가의 문제만으로 볼 수는 없지만, 바로 이것으로 (위에 언급한 대로), ‘분노의 포도’는 1930년대 미국의 모습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존 스타인벡의 이중적 모습은 뉴스를 통해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베트남전쟁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는가 하면 ‘찰리와 함께 한 여행’은 가보지도 않은 곳을 서술한 ‘소설’이라는 주장도 있다.)

 

 

작품은 천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두껍지만 읽기는 어렵지 않다. 그만큼 작가의 '썰'을 풀어가는 능력이 뛰어나다. 조드 일가가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기 때문에, 등장인물 때문에 애먹는 나로서는 상당히 소화하기 수월했다. 게다가 뛰어난 문장력. 매우 담백하다. 찰스디킨스의 문장 같은 시적인 아름다움은 없지만, 읽기가 매우 편하다.

 

 

번역도 상당히 좋았다. 지루함 없이 읽을 정도로 가독성이 뛰어났고, 오타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아 민음사 세계문학 중 가장 집중력을 갖고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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