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즐긴다
빅토르 위고 지음, 이선화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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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지금까지 본 오페라가 40편 이상인데, 그 작품의 원작인 문학작품들을 읽어본 게 하나도 없었다. 한때 위고, 졸라, 디킨스 등에 빠져 지냈는데도.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읽었던 작품들은 오페라 작곡가들이 별로 안 땡겨했던 것 같다(푸치니에게 '레 미제라블'의 오페라화 제안이 갔었으나 거절했다고). 내가 즐겨 소설을 즐겨 읽었지만, 오페라의 원작들은 대부분 희곡인 것 같고, 그래서 실러, 괴테, 셰익스피어 등의 희곡 작품들이 오페라 작곡가들의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절치부심해서 간만에 서양고전문학을 읽어보기로 했고, (비싸지만) 이 작품을 택했다.

 

의외로, 위고의 이 작품과 베르디의 '리골레토'는 거의 내용이 같다. 오페라는 희곡의 마지막 한 장(scene)만을 옮기지 않았을 뿐이다(나는 오페라의 엔딩이 더 마음에 든다). 주인공이 '왕'에서 '광대'로, 등장인물의 이름과 공간만 바뀌었을 뿐, 귀족계급을 까기 위한 목적의식까지 똑같다.

 

희곡은 '레 미제라블'이나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봤던 것처럼 위고 특유의 장광설로 빼곡하다. 오페라는 가락이라도 붙어 있지, 이걸 어떻게 다 외워서 말할지 의아할 정도. 당연히, 리브레토의 상당 부분이 희곡의 대사를 차용했지만 대부분 축약되어 있고, 그래서 오페라에서는 동기라든가 이해가 잘 안되던 부분들을 이 작품을 통해 명백히 알 수 있었다.  놀라웠던 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 '여자의 마음'이 프랑수아 1세가 남긴 시에 곡을 붙였다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남았을 그 싯구가 베르디의 음악을 타고 지금까지 모든 이들의 뇌리에 남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 위고가 했다는 유명한 말, '인생은 꽃, 사랑은 그 꽃의 꿀'이라는 구절을 여기서 발견한 것도 반가웠다. 매우 낭만적으로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프랑수아 1세의 작업용 멘트라는 걸 알고는 환상이 다소 깨지긴 했지만, 역시 위고의 말을 다루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마지막으로, 해설이 매우 풍부하다. 박종호의 '리골레토' 해설과 겹치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을 참고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리골레토'를 더 즐기고 싶다면 이 희곡을 꼭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곳곳에 문맥이 다소 이상해 오역 스멜을 풍기는 곳이 몇 군데 있긴 해도 전반적으로 번역은 훌륭한 편이다. 가격이 너무 비싸서 별 하나 삭제.

백작, 이번 연애사는 어떻게든 성사시키고 싶구료. 출생도 불확실하고 부르주아 여자이긴 하지만 미모가 여간 아니거든.

연애사에서 허술한 전략의 보완책은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죠. 위장술 말입니다.

저는 꼬투리 잡는 일에 열중할 테니 폐하께서는 즐기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 참 상서롭지 못한 징조올시다! 왕이 향락에 빠진 것보다 위험한 것은 없지요.

왕께서 누리는 즐거움은 늘 누군가에게서 가로챈 것이라는 걸 말입니다. 누이건 딸이건 부인이건 유혹으로부터 잘 지켜내십시오. 도락에 빠진 권력자는 해를 끼칠 생각밖에는 안 하는 법이니까요. 그 안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건 백성들 몫 아니겠습니까. 입으론 웃고 있어도 안으로는 온갖 뾰족한 이빨을 숨기고 있지요.

눈을 멀게 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없지요.

당신은 왕이고 저는 아비입니다. 나이로 보면 왕권을 가져 마땅한 나이지요. 우리는 둘 다 머리에 왕관을 두르고 있지요. 그 누구도 금으로 된 백합 왕관을 쓰고 있는 폐하나 백발을 하고 있는 제게 방자한 시선을 던질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 둘 다 처지가 비슷하군. 한 명은 가시 돋친 혓바닥을 갖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뾰족한 날을 품고 있고. 내가 사람들을 웃기는 사람이라면, 저자는 죽이는 사람이고.

인생은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이고, 사랑은 그 꽃에서 난 벌꿀이지. 사랑은 하늘에 있는 독수리와 맺어진 비둘기와 같은 것이라오. 사랑은 밀어붙이는 힘에 전율하는 은총과 같은 것이오. 사랑은 가만히 내 손 안에서 스르르 녹아내리는 그대 손과 같은 것이지.

악마는 자기 식대로 일을 풀어나가지요!

여자는 죽 끓듯 변덕을 부리지.
여자를 믿는 건 미친 짓이라네.
여자는 수시로 바람에 흩날리는
깃털과 같으니.

저 자 이름 마리오? 내 이름도 알고 싶지 않소? 저 자 이름은 죄이고 내 이름은 벌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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