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이야기 - 고익진 교수님이 들려주는
고익진 지음 / 광륵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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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고익진 교수님이 들려주는 불교 이야기

지은이: 고익진/ 광륵사

제목:  대장경의 미로속에서 만난 안내서

 

 

앞으로 누군가에게 불교에 관한 쉬운 책을 추천하라고 한다면 바로 이 책 <고익진 교수님이 들려주는 불교 이야기>을 꼽게 될 것 같다.

지금 까지 읽었던 불교 서적중 불교 기본 법문에 대해서 가장 쉽게 정리가 된 책이다.

 

 

우선 이 책을 통해 알게된 점 2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병고(丙古) 고익진 교수님에 대해서 알게 된 것과, 두번째는 <아함경(阿含經)>에 대해서도 알게 된 점이다.

고익진 교수님은70~80년대에 동국대학교에서 불교를 가르치신 교수님이시다.

원래 그는 불교 전공자가 아니였고 의학을 공부하다가 이유를 알수 없는 병을 얻게 되어 병원에 5년간 누워 있게 되었다.

어느날 갑자기 병에 걸려 죽을수도 있는 운명 앞에 그는 자연스레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그뒤 우연히 접하게 된 반야심경 의<是故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 味觸法 (시고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구절을 보고 충격을 받게 되는데...

 

 

 

 

 

우리는 분명히 몸을 가지고 살고 있고 또 몸안에는 눈,,, 입이 다 있지 않는가?

어찌하여 반야심경은 '무안이비설신의'  즉 눈,,,, ,뜻이 다 없다고 하는지?

당시에 그는 '무안(無眼): 눈이 없다' 는 말이 도저히 이해가 안됐다고 한다.

그것이 화두가 되어 3년을 참구하다가 결국 불교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때가 31, 동국대학 불교학과로 다시 입학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은 고교수님이 불광사에서 하신 아함경에 관한 강연을 책으로 편찬한것이다.

대학에서 불교를 전공하는 학생이 아닌 일반 불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이니 만큼 비교적 쉽게 설명이 되어 있다.

 

불교의 경전은 팔만사천법문이라고 전해지는 만큼 무수히 많은 법문이 존재한다.

일생에 걸쳐 다 볼수도 없고 배울수도 없다.

하지만 그 가운데 에서도 핵심은 존재한다. 

이 강의에서는 불교의 가장 핵심되는 6가지 법문에 대한 소개를 눈여겨 볼만하다.

'십업설 법문, 육육법설 법문, 오온 사제설 법문, 십이연기설 법문, 반야바라밀다설 법문, 일불승설 법문' 까지 6개 법문 이다.

그중 앞의 4가지 법문은 이 책에서 주요하게 언급되는 아함경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뒤의 '반야바라밀다설 법문'은 반야경에, '일불승설 법문' 은 법화경에  속한다.

 

 

 

책에서는 아함경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소개가 나온다.

솔직히 우리나라 조계종 불교 신자들에게 아함경은 비교적 생소하다.

조계종에서 일반적으로 예불시(禮佛) 에는 반야심경, 천수경을 외운다.

신자들이 사경(寫經) 을 한다고 하면 금강경을, 참선을 공부한다고 하면 육조단경이나 선어록을 보게된다.

그외에도 그 유명한 유마경, 화엄경, 법화경 등을 따로 공부하는 분들도 많이 계신다.

이 경전들은 전부 대승불교 경전들이다.

즉 우리나라 불교는 대승불교, 북방불교 라고 학창시절에서 부터 배워 왔다.

그러나 아함경은 초기 불교, 즉 부처님 당시에 전해진 설법을 중심으로 만든 경으로 초기 경전으로 분류를 한다.

 

이러한 정리를 책에서는 각 법문의 핵심 내용을 군더더기 없이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책이 대장경의 미로속에서 안내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얼마전에 유튜브 통해 봤던 숏츠의 한장면이 있다.

D.J가 된 스님 한분이 신나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소리를 치며 청중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이 또한 지나가리!' 를 외친다.)

스님의 법명은 뉴진스님. (순간 뉴진스라는 아이돌 그룹이 떠올랐다.)

뭔가 이상하다. 다시 알아보니 어느 한 개그맨이 스님으로 분장한것 이었다.

그러나 법명은 조계종에서 정식으로 받았다고 한다.

(NEW) ( 나아갈 진) , '새롭게 나아간다' 는 뜻이 담겨 있다.

불교의 '정진' '수행' 을 뜻한다.

앞으로 불교의 미래는 이러한 시도가 많이 늘어 갈 것 같다.

단순히 개그의 소재를 넘어선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는 시기가 온 것이 아닌가 싶다.

진짜로 스님의 법명처럼 새롭게 나아가는 정진이 불교의 미래가 되지 않을까?

 

 

 

진리는 불변하는 것이지만 진리를 전하는 형식은 고정되지 않았다.

마치 물의 고유한 성질은 변하지 않지만 담는 그릇이 바뀜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듯이 진리를 전하는 방식도 그런게 아닐까 싶다.

 

 

 

 

부처님께서 전한 8 4천 법문 그 모두가 한가지 사실을 중생들에게 알리기 위해 전한 방편이라고 했다.

그 한가지 사실은 우리 모두가 깨달아 부처가 될 수 있다는것.

 

우리집에서 키우는 앵무새, 길 가의 고양이, 옆 집의 멍멍이, 가축장의 소나 돼지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들 까지.

착하고 순진한 사람만 부처가 되는게 아니라 이기적인 나쁜 부류의 사람들 그리고 사회에 해가 되는 범죄자  같은 사람과 심지어 사이코패스 살인자 까지. 부처를 이룰수 있다고 하셨다.

 

부처님 당시 '앙굴리마라'100명의 목숨을 해친 무법 살인자로 부처님까지 살해하고자 했으나 후에 부처님에게 교화 되어 승려가 되었다.

또한 부처님에게 반역을 하고 암살까지 감행한 '데바닷다' 까지도 법화경에서는 내세에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까지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처럼 불교는 바다와 같은 포용력을 지녔다.

세상의 모든 물은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산골짜기 계곡의 물도, 시냇물도, 강물도 결국엔 바다에 이르듯이

우리가 부처가 되는것은 당연한 흐름일지도 모르겠다.

 

 

 

큰스님께서 하신 말씀중에 진리를 깨닫기가 세수할 때 만지는 코만큼 쉽다고 하셨다.

그처럼 쉽다고 하셨는데 난 어째서 코를 만지질 못하고 있는가?

나는 세수를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나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닦고 있는게 아닐까?

 

 

 

 

 

 

 

 

봄은 왔다.

누구는 심춘(尋春)이라 봄을 찾는다고 했는데

 

 

나는 심안(尋眼). 부터 찾아야 겠다.

 

 

가만, 무안(無眼) 이라 했는  없는데 눈을 어떻게 찾노?

 

 

 

 

 

 

 

만일 모든 것이 절대적 존재에 의해서 창조되고 지배되다고 하면 두 가지 현상이 설명되지 않는다.<중략>
‘인간의 죄악의 책임 문제‘ 와 ‘자율적인 노력의 문제‘ 이 두 가지가 마땅한 도리로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삼종외도 비판 중에서> - P38

현실의 문제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궁극적인 진리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 P43

아함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진리를 제시하기 전에 우리 인간의 현실 세계를 먼저 보자는 것입니다. - P44

결국 세계라는 것은 ‘여섯 가지 감관 기관(육근)‘과 ‘여섯 가지 인식 대상(육경)‘으로 이루어진 ‘일체 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유명한 12처설 입니다. - P50

우리는 나 아닌 것을 나라고 집착하고 있고, 나의 것이 아닌 것을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정반대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 P67

변화하려고 하는 작용과 변화를 허용할 수 없는 아집이 서로 팽팽히 맞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괴로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략>
그래서 ‘모든 것은 덧없고, 덧없는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운 것은 나라고 할 수 없다‘ 라고 불교에서는 말하는 것입니다. - P71

커다란 태양이건, 바다건, 모든 중생들이 업력을 일으켜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생들의 업력에 의해서 우주가 성주괴공하게 되는 것입니다.업력이라는 것이 엄청나게 큰 힘을 작용합니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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