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팡의 소식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한희선 옮김 / 비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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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코야마 히데오의 미스터리가 시작되는 지점..

 

   잘 알려진 데로 요코야마 히데오의 [루팡의 소식]은 작가의 데뷔작입니다. [64]와 [사라진 이틀]을 통해 작가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고, 제 취향에 잘 맞는 작품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데뷔작을 읽어보면 그 작가가 추구하는 작품세계의 원형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루팡의 소식]은 이 시점에서 읽어보기에 딱 적당한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가의 작품을 전작... 아니 그러니까 전부 읽어본다...기 보다는 전부 사 모은다는 의미지만 말입니다. 사다놓으면 언젠가는 다 읽게되겠지요.

 

   [루팡의 소식]까지 읽고 보니 이 작가의 색깔을 어느정도 알게 된 느낌입니다. 경찰 조직과 생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 풍부한 경험이 배어나는 서술들이 돋보입니다. 등장하는 캐릭터 한 명도 소홀히 다루지 않는 치밀하고 세심함, 인물들간의 팽팽한 신경전과 긴장감 역시 데뷔작부터 잘 살아있었습니다. 단순히 누가 범인인가?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나에 그치지 않고 왜 범죄가 일어났는지, 살해당한자를 둘러싼 인간들의 면면은 어떠한가를 상세히 잘 묘사하고 있는 부분도 놓쳐서는 안되는 부분입니다.

 

 

 

#2. 공소시효 만료를 앞둔 미스터리의 미덕...

 

   공소시효는 많은 미스터리에 등장하지만 유독 요코야마 히데오가 좋아하는 설정으로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특징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일단은 공소시효 만료를 기본적인 설정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듯 합니다. 다른 작품들을 더 읽어봐야 알 수 있겠지만 공소시효를 활용하는 장점은 명확합니다. 미스터리적 긴장감과 동시에 사회파 미스터리에 반드시 필요한 휴머니즘적 스토리를 비교적 자유롭게 포함시킬 수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루팡의 소식]에서도 오래된 15년전 자살로 마무리된 사건을 공소시효를 하루 앞둔 시점에 새삼 타살이었다는 구체적인 제보를 기점으로 재수사하게 되는 설정을 사용했는데, 이렇게 되면 읽는 이에게 극적 긴장감을 제공하기 용이해집니다. 시간에 쫒기다보니 복잡한 수사절차를 하나하나 밟지 않고 생략해가며 빠른 전개가 가능합니다. 또한, 다소 무리한 진행도 용인되는 장점이 있습니다.

 

   반면 사건자체가 오래전 과거에 일어났다는 점은 용의자들의 신체적, 정신적, 환경적 변화를 통해 휴머니즘적인 요소를 충분히 자유도 높게 설정해줄 수 있습니다. 비록 그 당시에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이후에 얼마나 반성했는지, 아니면 지속적으로 악행을 저질렀는지 등을 작가의 의도에 맞게 정해줄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이를 통해 가해자를 동정하기도 하고, 어느정도 입장을 이해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설정은 사회파 미스터리적 요소를 충분히 강화해주는 도구로 활용되기에 좋습니다.

 

 

 

#3. 아직은 치밀하지 못한 완성도에서 느껴지는 아쉬움

 

   이 작품은 전형적인 본격 미스터리도, 그렇다고 사회파 미스터리의 원형을 갖추었다고 보기에도 애매한 지점에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뭔가 정체성이 모호하면서 실험적인 느낌도 조금 듭니다. 게다가 배경도 주로 고등학교다보니 약간 성장소설같은 느낌도 나고 말이죠..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가있어요. 이것저것 좋은 재료를 너무 많이 섞었습니다. 그리고 말미에 대단원의 막이 깔끔하게 내려져야 하는데, 내려가는 막에 사회자가 머리를 내밀고 '사실 이이야기는 말입니다~~~'하고 한참을 다시 설명하는 형국입니다.

​

   이 상황을 대하면서 일전에 보았던 인디밴드의 공연이 떠올랐습니다. 밴드 이름도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말이죠. 왜 잊지 못하냐면 노래가 좋았는데 무척이나 무거웠고, 사회비판에 가까웠는데 노래자체에는 분위기는 알겠지만 뭘 말하려고 하는지 무척이나 모호하더란 말입니다. 노래가 끝나고 나니 가수가 노래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이 노래는 왜 만들었고 어떤 의미이고 어떤 의도로 이러저러하게 만들었습니다.'라고 하더군요. 좀 안타까웠습니다. 좋은 노래라면 설명없이도 누구나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시디나 라디오에 나온다면 누군가 이런 구구절절한 설명을 덧붙여주어야 청취자들이 이해를 한다는 말이 되니까 말이죠...

 

   이런 연유로 사족과도 같이 길고긴 대화를 통한 저자의 의도설명이 아쉬웠습니다. 이미 사건은 종결되었으니 가볍고 즐겁게 마무리해주던가, 임팩트 있게 딱 끝내야 기분좋게 책을 덮는건데 말이죠. 어찌나 이러쿵 저러쿵 길게 설명을 하는지 좋은 내용이 좋게 들리지가 않고 작품성을 해친다는 생각만 자꾸 드는 겁니다. 서사 중에 끝냈어야할 설명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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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적으로 굳이 평가를 해보자면 이 작품은 읽는 재미면에서 중반과 중후반이 가장 재미있는 사다리꼴 형태의 그래프를 보여줍니다. 초반에 설정이나 전개가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진행이 더디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만 어느새 흠뻑 빠져들게 되더군요. 역시나 히데오야!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고 등장인물들 제각각의 속사정이 드러나면서 무난하게 잘 끝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무리는 임팩트 넘치기보다는 조금 흐지부지한 느낌이어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히데오옹 작품세계의 원형과 욕심이 넘치게 반영된 작품으로, 전반적으로는 아주 훌륭한 장르소설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 양반 책은 다 사모아보는 것으로다가... 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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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끝에 다시 - 소설로 만나는 낯선 여행
함정임 외 지음 / 바람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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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돋보이는 기획의 '도시와 나'를 그대로 닮아있는 개성 가득한 이야기들의 향연

   

   처음 '도시와 나'를 읽으며 일본소설에서나 만나는 독특한 기획의 소설집이라 반갑고 신선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도시와 나'가 해외의 여러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이야기 모음이라 신선했다면, 이번 소설집 '그 길 끝에 다시'는 국내의 여러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보니 신선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이 가장 큰 특징이었습니다.

   

   이러한 단편 소설집의 가장 큰 유익은 정해진 한정된 테마를 담아내는 작가들 제각각의 개성이 작품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독자들은 이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풍성하게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 길 끝에 다시'는 역시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너무도 개성 넘치는 작품들이 오롯이 담겨 있었습니다. 기본 테마인 '도시'와 '여행' 두가지를 기본으로 짧은 이야기속에 함축적으로 표현해 내는 작가들의 역량을 대하며 감탄하게 되고, 또 서로 너무 다른 방식의 설계와 접근과 풀이를 대하면서 진심으로 놀라게 되었습니다.

 

 

 

#2. 흔히 단편 소설들을 만나는 수상작 모음집과 차별되는 편안하고 특색있는 이야기들의 매력

 

   어차피 기본적으로 해외의 도시와 독특한 문화를 접목시킨 이야기가 펼쳐졌던 ‘도시와 나’를 읽을 때는 잘 못 느꼈던 부분입니다만, 익숙한 국내 도시를 배경으로 쓰여진 이번 작품집 ‘그 길 끝에 다시’를 읽다보니 확실히 차별화된 특색을 느꼈습니다. 흔히 다양한 문학상 수상 작품집을 읽을 때면 느끼는 것은 작품들이 하나같이 지나치게 무겁다는 것이었습니다. 문학상 마다 평가 포인트가 있고, 역량을 평가하기 위한 우리 평단의 일관성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해야 할까요? 그 코드에 맞추다보니 기본적인 무거움이 한결같이 존재하고 거기에 약간의 차별화된 부분이 들어갈 때 높은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그것이 독자들의 기대와는 별개로 변함없이 흘러가는 평단의 강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문학상과는 관계없이 발표되는 이 소설집에서는 그러한 강박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파격적인 느낌의 작품도 있고 참신한 느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지나치게 무겁지 않아 잘 읽어지고 편안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한 감동까지 발견하게 되어 참으로 행복한 기분으로 책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개인의 취향에 따라 골라 읽을 수 있는 재미

 

   물론 골라 읽지는 않았지만 쭈욱 읽다보니 좀 더 취향에 맞아 좋았던 작품이 있고, 약간은 기대에 못미치는 느낌 또는 이건 뭐지? 하는 느낌이 약간 남는 작품도 있었습니다. 완전히 소화가 안되는 느낌의 작품을 만나면 살짝 좌절하기도 하고 말이죠.

 

   제 취향에 너무 잘 맞아 흡족했던 작품은 첫 번째 백영옥 작가님의 ‘결혼기념일’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정말 정말 너무 좋았습니다. 이 작품에서 개인적으로 빵 터지면서 이 책 전체에 대한 기대치를 극한으로 올려놓았습니다. 주인공의 상황 설정과 여정, 감정표현들이 너무 좋았고 공감이 갔습니다. 전체적인 구도가 너무 좋았습니다. 물론 그래서 다음 단편에서 실망을....

 

   제목처럼 결혼생활과 이혼 후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결혼생활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큰 성공이 큰 행복을 의미하진 않는다. 돈을 많이 벌면, 집을 넓히면, 좋은 가구를 들여놓으면 행복해질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던 그때의 우리가 알 리 없는 진실이었다”p.21

 

"지금 돌이켜보면 행복은 무료함 그 자체, 아무 일도 없음에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p.22

 

"이혼할 지음, 호탕하던 그의 성격도, 웃음도, 그에게선 점점 사라져버렸다. 남편은 해파리처럼 투명한 인간으로 변해갔다. 위선도 위악도 없는 투명한 인간, 겉과 속이 똑같아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인간, 보호색도, 어떤 색깔도 가지지 않는 무색 무취의 인간, 그는 그저 본능에 충실한 인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p.26~27

 

   인생에 많은 행과 불행이 있지만 결혼생활에 있어 경제적 파탄은 사실상 관계를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어렵게 만드는 큰 불행입니다. 함께 힘을 합쳐 이겨내야 하는 것이 인생의 지혜이지만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신뢰하고 이겨내는 부부는 사실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런 불행과 잊혀지는 것들에 대해 감각적으로 잘 표현해주고 있어 너무 좋았습니다.

 

   정말 마음에 들었던 또 하나의 작품은 바로 함정임 작가님의 ‘꿈꾸는 소녀’ 였습니다. 외국인 소녀의 몽환적인 독백과 상실감을 품고 있는 노총각 G의 건조한 서사가 교차 진행되는 방식이 정말 독특하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제가 살던 부산이 배경이었던 점, 그 익숙함이 더욱 좋았습니다.

 

이기호 작가님의 ‘말과 말사이’는 꽤나 충격적이었습니다. 흐흐... 미녀 작가 윤고은님의 ‘오두막’은 솔직히 좀 익숙한 죄의식과 치유코드라 신선함이 떨어졌는데 마지막 상징적 장면이 임팩트 있게 와닿았습니다. 한창훈 작가님의 ‘여수 친구’도 또 한가지 충격적이고 황당한 한 인물에 대한 묘사가 특징있었습니다. 김미월 작가님의 ‘만보걷기’는 마무리가 약간 약하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4. 기타 등등 남겨야 할 말

​

   1) 작품의 후반부에 첨부되어 있는 ‘작가 인터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의 50페이지에 육박하는 ‘작가 인터뷰’는 작품에 대한 작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작가들만의 독특한 상황과 시각, 생각을 조금 훔쳐보는 기분이어서 무척 신선하고 좋았습니다. 제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작품속 의미들을 설명해주는 느낌도 있어서 좋기도 했는데, 이거 참, 저의 역량부족이겠지만 정말 좋은 작품은 따로 설명을 안해도 쉽게 이해해야하는 것인데 말입니다.(라고 남탓으로 마무리를...)

   2) 표지는 개인적으로 취향이 아닙니다...

   3) 책은 그린라이트지로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하는 지질입니다. 가볍고 느낌이 좋은 편입니다.

   4) 여러작가님들이 참여한 단편 소설집은 참 다양한 맛이 있어서 좋습니다.

   5) 느낌좋고 의미있는 이런 기획 소설집은 앞으로도 시리즈로 쭈욱 출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문학상 수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독자를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다음편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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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린 1 - 사도세자 이선, 교룡으로 지다
최성현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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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력은 누구에게나 달콤하지만 더러운 흔적을 남긴다.

 

   권력(權力)은 권세와 힘을 합친 단어로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타인을 복종시키고 지배하여 좌지우지 하며 달콤해 하는 것은 역사 이래로 변함이 없는 듯 합니다. 이런 권력의 사용은 자기존재의 확인과도 직접 연결되다보니 이 땅에 태어나 뜻을 펼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여겨온 것이 인간이고 그 결과로 빚어진 역사가 우리의 권력 투쟁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승자들의 역사속에 조차 권력을 위한 암투는 끝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그 권력이라는 것의 위력은 크고 한없이 강력해서 단 한번도 제대로 나누어 가졌던 역사가 없습니다. 흔히 "The Winner Takes it all"1이라고 부르는 이 현상은 필연적으로 반대세력에 대한 피나는 숙청과 처단으로 이어집니다.

​

   이를 반대입장에서 본다면 참으로 억울한 희생의 역사입니다. 최성현 작가의 [역린1 교룡에 지다]에서는 사도세자로 잘 알려진 이선의 억울한 희생에 초점을 맞춥니다. 역사적으로 사도세자 이선이 문제가 있는 인물이라는 평, 즉 '죽을만 했다'는 의견과 영조와 노론세력의 견제에 억울한 희생양이라는 평, 다시 말하면 아버지 영조의 권력에 대한 병적 집착, 정치적 정적으로써 아들을 대하는 과도한 불안감과 이를 교묘히 이용한 정치세력 노론의 합작의 결과로 빚어진 슬픈 역사라는 시각이 공존하는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는 역사를 잘 모르고 그저 예전에 사극을 통해서나 접했던 내용이다보니 사극에서 묘사된 내용을 그냥 사실로 받아들인 꼴이 되었는데 제가 보았던 내용은 그저 사도세자가 어리버리하여 결국은 죽임을 당하는 정도의 스탠스였고 그저 그 '뒤주 속에서의 죽음까지가 처절하고 슬프고 아타까웠다' 정도의 기억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쪽이건 이선은 억울한 희생의 역사에 최대 희생양입니다. 뒤주속에서 일주일을 넘게 굶어가며 처절하게 죽어갔으니 참으로 인간적으로 있어서는 안될 역사입니다.

​

   ​이렇듯 권력은 늘 더러운 흔적을 남깁니다. 감추려 하면 할수록 결국엔 흔적이 남기 마련입니다. 최성현 작가님은 작품속에서 권력을 쫒는 각 세력들의 형편과 입장을 놀랍게도 입체적으로 그려냅니다. 각자의 입장이 상당히 설득력있게 그려집니다. 그 더러운 흔적이 [역린]이라는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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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기는 자가 선이요, 패배는 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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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을 위해 잔인한 학살을 자행하는 인간들의 행보는 참으로 잔혹하고 비인간적이기 그저없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미시적인 관점에서 각 세력들, 아니 한사람, 한사람을 잔잔히 들여다보면 단순하게 단정짓기 어려워집니다. 각 사람들마다 생존을 위해, 성공을 위해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사정들을 알게되면 그 나름대로 명분이 있고, 그럴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각자의 행동에 정당성을 얻기 시작하면 문제는 복잡해집니다. 명확히 선과 악을 구별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

   이런 형국에는 결국 결과로 말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 결과는 승자에 의해 덧칠되고 기록되어 집니다. 역사는 사실이라기 보다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된 승전보인 경우가 많습니다. 보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꿈을 꾸던 무리가 역도가 되고 악한이 되는 것이 승자의 역사입니다. 이들의 논리대로 따라가다보면 역사적 패자는 무조껀 악의 무리가 되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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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쯤되면 역사속에 드러난 사건의 선과 악을 바라보는 우리의 입장에 혼란이 생깁니다. 세자를 살해하려는 살수는 누가봐도 절대 악이겠지만 살수가 어떻게 살수가 되어 그자리에 서 있는지 한 사람의 역사를 돌아보면 또 그럴수 밖에 없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게다가 워낙 정교하고 힘있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상황이 되면 저도 모르게 '음.. 그래, 그럴수도 있겠군..'하고 생각하고 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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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데자뷰와 같은 희생자들의 진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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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데체 최성현 작가님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역사이야기가 원래 재미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완전히 몰입하도록 빼어난 구성력을 보여줍니다. 게다가 각각 등장하는 캐릭터가 특색있고, 명확해 이해가 쉽고 제각각의 매력이 넘칩니다. 각각의 문장에는 힘이 있고 전통적인 느낌인데도 세련됩니다. '문장이 좋다'니 '문장력이 뛰어나다'라는 식의 평가를 좋아하지 않는 저이지만 문장이 좋습니다. 문장력이 뛰어납니다. 자연스럽게 끝까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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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가 어느정도 의도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제각각의 입장과 환경과 필연을 바라보며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를 느낍니다. 악한 욕망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한없이 잔인해지는 속성을 돌아보게 됩니다.

​

   작가의 표현대로 영조와 거대일당 노론 사이에서 짓이겨지는 이선의 잔인하도록 슬프고 억울한 죽음의 진혼곡이 왠지 그 당시에 국한된 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저만의 착각은 아닐 것입니다. 역사속에 끝없이 억울한 희생자가 생겨났고, 지금도 권력 앞에 힘없이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진혼곡이 끊이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작품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공감을 받는 것은 그런 희생이 우리에게도, 우리주변에도 언제든 닥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직, 간접적으로 겪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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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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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유정 작가가 들려주는 여행에세이의 신선함을 접하다.

 

   우리는 여행에세이 범람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처음 이책을 접했을 때, 표지가 예쁘다는 생각 외에 '정유정작가님? 아, 작가로 성공하기는 하셨구만... 이런 여행기까지 제안을 받으셨나보네...' 하는 삐딱한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정유정"이라는 브랜드를 이용해서 팔릴만한, 돈되는 여행에세이를 하나 냈나보다 했던 겁니다. 요즘 이런 기획이 가끔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이상하게도 기대감이 전혀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여행의 발단이 출판사의 기획이나 제안은 전혀 아니었으니 오해는 풀렸습니다만, 또 하나 의아했던 것은 '왜 히말라야인가?' 였죠. 딱히 여행을 자주 다니는 걸로 알려진바가 없는 작가님이 뜬금없이 히말라야라니요? 그래서 프롤로그에 나와있는 남편의 반응에 과도한 몰입을 하며 '맞아, 맞아, 두들겨 패든 머리를 밀고 방에 가둬두든 못가게 해야지. 이거이거 거기가 좀 위험하겠어?' 하는 생각을 자연히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2. 여행가서 일기 쓴다고 다 여행에세이는 아니다

   여행에세이의 유익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독자가 잘모르는 여행지의 숨은 아름다움을 알려주는 정보전달이 주 목적인 경우 또는 여행지는 여행지대로 소개하지만 사실 저자가 여러가지 감상을 더해 하고싶은 말을 함으로써 독자들과의 교감을 하고 영향을 미치는 방식 등이 있겠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설명체로 기술되면서도 중간중간에 재미난 에피소드가 들어가서 흥미를 잃지 않도록 하는 방식이 됩니다. 반대로 후자의 경우 상당히 감각적이고 감상적인 글이 되거나 여행지랑 무관하게 무거운 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정유정 작가의 "히말라야 환상방황"은 어느 케이스에도 끼워맞추기 힘든 독특한 여행에세이 였습니다. 히말라야 일대를 17일간이나 도는 안나푸르나 라운딩코스는 책 서두에 제공된 코스지도를 보나 코스별 고도를 기준으로 작성된 단면도를 보나 잘모르는 사람도 숨이 턱막히고 벌써 걱정이 앞서는 어려운 코스임을 예감하게 합니다. 그래도 이책이 정상적으로 출간되었다는 것은 저자가 별탈없이 돌아온 것이므로 천만다행인 것입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상당히 일기스럽습니다. 매일매일의 코스와 들린 지점, 식당, 배경, 신체적 정신적 상태등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정도면 주저리주저리 열매 능력자를 능가하는 수준입니다. 가히 질릴만한 수준의 디테일입니다. 그런데 질리지 않습니다. 전혀 지루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여행이 진행될 수록 더욱 흥미진진하고 몰입하게 됩니다. 이런 점이 바로 이 책의 훌륭한 점입니다. 저는 이 에세이 한편만으로도 저자의 글쓰기 능력을 진심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3. 평소엔 알 수 없는 작가의 인생궤적과 사람됨을 알게되는 즐거움

 

   소설가가 몇편의 작품으로 능력을 인정받고 지명도가 올라가고 유명세를 타다보면 자연히 작품자체와는 별개로 작가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작품이 좋았다'에서 '작가가 좋다'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일반독자가 작가의 개인적인 삶의 방식이라든지 평소의 가치관 등을 자세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의 매체의 인터뷰라던가 에세이 집을 통해 그 갈증을 해소해야합니다. 이를테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다양한 에세이를 통해 생각보다 엉뚱발랄한 작가의 인간적 매력에 빠질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관점에서도 이 책은 매우 의미있는 책입니다. 정유정 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인생스토리와 인생관, 디테일한 성격등이 매우 적나라하게 담겨있습니다. 작가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평소의 갈증을 해소하는 정도가 아니라 깜짝 놀랄만큼 작가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정도입니다. 그만큼 자기를 오픈하는데 적극적이고 솔직합니다. 곳곳에 작가의 과거 이야기와 가족사, 삶의 태도 등이 자연스럽게 담겨있습니다. 저는 이 에세이 한편을 통해서 작가에게 가지고 있던 제 마음대로의 이미지가 완전 수정되었습니다. '이 양반 완전 훌륭하구나. 그리고 한편으로는 안스럽도록 힘든 세월을 견뎌왔구나'하는 생각을 자연히 하게되었습니다. 이 분의 작품의 어떠함과 무관하게 작가자체에 매력을 담뿍 느끼고 말았습니다.

 

 

#4. 재화의 가치는 얼마나 즐거움을 제공하느냐에 달려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각종재화의 가격이라는 것은 실제가치 즉, 그 재화가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유용성이 있느냐에 달려있기는 하지만 그 외에도 얼마나 즐거움을 제공하느냐에 달려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책의 가치는 얼마나 바른 정보를 제공하느냐도 있지만 독자가 책을 읽는 동안 얼마나 즐거움을 제공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이렇듯 모든책이 정보제공을 위해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정보제공의 역할은 인터넷이 차지한지 오래되었습니다.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은 정보제공의 역할도 톡톡히 하지만 놀랍도록 재미있습니다. 심지어 거기에 감동도 잘 버무려져서 뭐하나 나무랄데 없습니다. 읽으면서 작위적인 재미를 위한 요소나 감동코드를 위한 안배가 따로 있다는 생각을 전혀 들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습니다. 재미와 감동이 묘하게 적절한 비율로 섞여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작가의 능력에 감탄합니다.

 

   예를 들면 시작부터 지속된 생리적 현상인 변비 트러블을 솔직하게 적고 있는데, 읽고 있는 저는 살면서 변비를 겪은적이 없는 쾌변남인데도 불구하고 자꾸 저의 배가 더부룩하고 터질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지나니 이젠 소변을 참고 참아 방광이 터져나가는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줍니다. 와우.. 조금도 작위적 느낌이 없지만 마치 소설속 설정처럼 극적입니다. 이 별 것 아닌 상황이 여행기 전체의 극적 긴장감과 몰입을 돕는 엄청난 역할을 담당합니다. 거기에 무경험자의 안나푸르나 좌충우돌기에 순간순간 자신의 인생스토리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흥미진진하게 진행됩니다.

 

   좋은 책은 감동과 재미를 선사합니다. 이 책은 감동과 재미가 넘치도록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좋은 책입니다. 말로 더 이상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읽어보세요... (단, 모든 책은 개인의 취향이 제 1조건임을 전제합니다... 라고 일단 빠져나갈 길을...) 여튼 저는 깜짝 놀랄 만큼 재미지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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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ㅣ 박람강기 프로젝트 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안현주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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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는 사람만 아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속살을 들추다!

 

   어쩌면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작가를 일반인들(장르물을 딱히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은 하드보일드나 미스터리 애호가들보다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닐까 합니다. 아니, 실제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역할이 매우매우 중요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대표적으로 하루키가 챈들러를 언급했다고 알려진 것은 그의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이라는 희한한 이름의 에세이집입니다. 읽지는 않아도 남들 사는건 다 사는 저는 물론 문학동네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5권 세트를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습니다. 하루키가 말하는 챈들러 스타일이 뭔지 내용은 알고 있었으나 다시 한번 꺼내 들쳐봤습니다.

 

"아무튼 나는 그것을 챈들러 방식이라고 부른다. 우선 책상 하나를 딱 정하라고 챈들러는 말한다. (중략) 그리고 매일 일정시간 - 예를 들어 두시간이면 두시간 - 그 책상 앞에 앉아서 보내는 것이다. (중략) 그러다 보면 당장은 한 줄도 쓸 수 없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글이 써지는 사이클이 돌아온다. 초조하게 굴면서 불필요한 일을 해봐야 얻어지는 건 없다. 이것이 챈들러의 방식이다. 나는 이런 방식을 비교적 좋아한다. 건전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무라카미 하루키 p42~43

 

   하루키는 챈들러의 이러한 방식을 매우 건전하게 평가하고 있지만 정작 이 책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에 기록된 챈들러의 편지속 이 대목은 사실 성실한 느낌보다는 상당히 제멋대로거나 쿨한 그러거나 말거나 식 뉘앙스를 풍기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챈들러 본인은 조금은 삐딱하면서 전형적인 것을 상당히 싫어하는 독특한 스타일을 뽐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챈들러가 쓴 편지들을 읽고 있노라면 이 양반은 남들 눈치 안보고 하고싶은 말 하고 하고싶은데로 하겠다고 강력하게 결단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챈들러는 글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타일'이라고 강조하는데 작품 뿐만 아니라 작가 스스로도 개인의 퍼스날리티가 차별화 될 수 있는 특징있는 스타일을 창조해 내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하여 작품 외적으로도 작가 자신이 관심받고 사랑받는 브랜드가 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작가의 개성이 편지라는 형식으로 잘 표현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최대 미덕이자 장점입니다. 뭔가 정제되지 않는 날 것이 담긴 느낌, 그것으로 작가가 아닌 한 인간으로써의 레이먼드 챈들러의 속살을 들여다본 느낌이 남습니다. 챈들러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말입니다. 뭐가 되었건 캐릭터가 살아야 매력이 있고 오랫동안 기억되며 사랑받게 되는데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작가이자 실존 인물이 편지를 통해 그려내는 그 스타일은 곱씹을수록 매력적입니다. 

 

 

#2. 레이먼드 챈들러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경험을, 아는 사람에게는 깊은 감회를...

 

   음... 제 걱정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레이먼드 챈들러의 솔직한 성격과 당시 다양한 정보를 알 수 있는 깨알 재미가 있더라도 작가 자체를 모르고 이 작가의 작품을 전혀 안 읽어본 나같은 사람이 과연 흥미로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예를 들어 TV 연예프로그램 '힐링캠프' 같은데 유명한 작가가 게스트로 나왔다면 팬들은 그것 자체가 흥미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작가를 모르고 정보가 없는 사람들은 어디선가 이름은 들어봤고 작품도 워낙 유명하니 몇개 들어봤는데 정작 작가 자체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는 무지상태인 것이고 주위 분들이 좋아서 껌뻑 넘어가도 공감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이런 걱정은 역시나 기우였습니다. 어차피 작품에 대해 논하는 에세이가 아니다 보니 작가로서의 챈들러의 위상과 별개로 그의 생의 이면에 펼쳐지는 일들에 대한 정보와 그에 대한 챈들러의 리액션을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가 쏟아내는 날카로움을 대하면서 '역시 작가로 뭔가 이룬 사람들은 사회생활이 대체로 사교적이지 않고 좌충우돌하거나 자기만의 세계가 뚜렸하거나 그런 모양이야..'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네요..

 

   챈들러가 직설적이고 여러 다른 작가들을 신랄하게 비난한 듯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데 있어서 만큼은 누구보다도 진지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글을 쓰는 것이 삶의 목적이죠. 나머지는 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겪어야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어떻게 실제로 글쓰는 일을 싫어할 수 있습니까? 싫어할 만한 요소가 뭐가 있다고? 차라리 사람은 장작 패는 일이나 집 청소는 좋아하지만, 햇빛이나 밤바람이나 꽃의 흔들림이나 풀잎에 맺힌 이슬이나 새들의 노래는 싫어한다고 말하죠. 어떻게 문단이나 문장이나 대화나 묘사를, 창조적인 무언가로 만들어 내는 마법을 싫어할 수가 있겠습니까? 글쎄, 분명히 그러면서도 성공할 수 있나 보긴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니 정말이지 우울하군요." p124

 

   이 글은 실제로 글 쓰는 과정은 싫어한다고 말한 존 딕슨 카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본인의 글쓰기에 대한 진정성을 변호합니다. 그러니까 주요 작가를 내리고 본인은 자연히 들어올리는 이중효과네요. 이 곳 외에도 이책 곳곳에서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는 돈이나 어떤 특권 때문에 글을 쓰는게 아닙니다. 다만 사랑 때문에, 어떤 세계에 대한 이상한 미련 때문에 글을 쓰는 거죠. 사람들이 치밀하게 생각하고 거의 사라진 문화의 언어로 말을 하는 그런 세계 말입니다 나는 그런 세계가 좋습니다." p194

 

   저도 돈 때문에 글을 쓰는건 아니니 비슷하군요. 흐흐.. 분명한 건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작가를 기존에 몰랐던 독자라도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하고 매력을 흠뻑 느낄 수 있을만한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워낙에 레이먼드 챈들러와 그 작품을 잘 아는 팬들에게는 깊은 감회와 추억에 잠기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3. 역자도 편집자도 역할의 경계가 모호한 재미난 책

 

   이 책은 애초에 태생 자체가 독특합니다. 물론 미스터리류는 그런 경우가 종종있지만 역자가 책을 기획하고 출판사에서 제작을 담당한 경우입니다. 그러다보니 저로써는 상당히 희한한 상황을 대하게 되었는데, 이례적으로 역자가 서문을 썼더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편집자, 정확히는 마포 김사장님이 책의 말미에 후기를 써두었습니다. 뭔가 통상적인 상황과 거꾸로라고나 할까... 얼마전에 포스팅한 바도 있지만 이 책의 탄생 비화를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상황도 아니기는 합니다.

 

   역자가 애초에 책을 기획했다는 것은 저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는 의미이고 그러니 레이먼드 챈들러를 소개하는 서문을 쓰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저기 흩어진 그의 편지를 분류하고 읽기 좋게 정리하는 작업도 편집부와 공동으로 진행한 듯 합니다.  

 

"이 책에서는 챈들러의 편지들을 발췌, 편집하여 주제별로 정리하고, 각 편지마다 제목을 붙여 놓았다. 편지의 특성상 일정한 주제로 전개되지도 않고 제목이 있을 리도 없지만 굳이 그렇게 정리한 이유는 우선, 개괄적인 내용을 목차에 드러내어 독자의 흥미를 끌기 위함이다. (중략) 두 번째 이유는 독서의 편의를 위해서이고, 마지막으로는 나중에 해당 편지의 내용을 쉽게 떠올릴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다." p12~13

 

   저자의 편지들을 '작품론', '작가들', '할리우드', '필립 말로', '일상' 등으로 크게 분류하고 각 편지마다 적절한 제목을 붙여준 작업은 매우 의미있고 유용한 작업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저처럼 기본 배경지식이 없는 독자에게는 더욱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이 책을 펴낸 북스피어의 마포 김사장님은 편집 후기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챈들러와 하루키의 오랜 팬으로서 만드는 동안 많이 신났고 때때로 짜릿했습니다. 저는 그랬어요. 이런 게 편집자로서의 소소한 기쁨이 아닐까 생각한 김홍민 드림" p255

 

   저는 이 책을 무척 쉽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만드는 사람이 신나하며 짜릿해하며 만든 책이라고 합니다. 역자가 정성을 다해 번역한 책인 듯 합니다. 번역자가, 편집자가 즐겁고 재미있게 만든 책이 재미가 없을리가 없겠지요. 세상모든 이치가 그런게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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