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ㅣ 박람강기 프로젝트 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안현주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4월
평점 :

#1. 아는 사람만 아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속살을 들추다!
어쩌면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작가를 일반인들(장르물을 딱히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은 하드보일드나 미스터리 애호가들보다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닐까 합니다. 아니, 실제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역할이 매우매우 중요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대표적으로 하루키가 챈들러를 언급했다고 알려진 것은 그의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이라는 희한한 이름의 에세이집입니다. 읽지는 않아도 남들 사는건 다 사는 저는 물론 문학동네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5권 세트를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습니다. 하루키가 말하는 챈들러 스타일이 뭔지 내용은 알고 있었으나 다시 한번 꺼내 들쳐봤습니다.
"아무튼 나는 그것을 챈들러 방식이라고 부른다. 우선 책상 하나를 딱 정하라고 챈들러는 말한다. (중략) 그리고 매일 일정시간 - 예를 들어 두시간이면 두시간 - 그 책상 앞에 앉아서 보내는 것이다. (중략) 그러다 보면 당장은 한 줄도 쓸 수 없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글이 써지는 사이클이 돌아온다. 초조하게 굴면서 불필요한 일을 해봐야 얻어지는 건 없다. 이것이 챈들러의 방식이다. 나는 이런 방식을 비교적 좋아한다. 건전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무라카미 하루키 p42~43
하루키는 챈들러의 이러한 방식을 매우 건전하게 평가하고 있지만 정작 이 책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에 기록된 챈들러의 편지속 이 대목은 사실 성실한 느낌보다는 상당히 제멋대로거나 쿨한 그러거나 말거나 식 뉘앙스를 풍기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챈들러 본인은 조금은 삐딱하면서 전형적인 것을 상당히 싫어하는 독특한 스타일을 뽐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챈들러가 쓴 편지들을 읽고 있노라면 이 양반은 남들 눈치 안보고 하고싶은 말 하고 하고싶은데로 하겠다고 강력하게 결단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챈들러는 글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타일'이라고 강조하는데 작품 뿐만 아니라 작가 스스로도 개인의 퍼스날리티가 차별화 될 수 있는 특징있는 스타일을 창조해 내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하여 작품 외적으로도 작가 자신이 관심받고 사랑받는 브랜드가 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작가의 개성이 편지라는 형식으로 잘 표현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최대 미덕이자 장점입니다. 뭔가 정제되지 않는 날 것이 담긴 느낌, 그것으로 작가가 아닌 한 인간으로써의 레이먼드 챈들러의 속살을 들여다본 느낌이 남습니다. 챈들러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말입니다. 뭐가 되었건 캐릭터가 살아야 매력이 있고 오랫동안 기억되며 사랑받게 되는데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작가이자 실존 인물이 편지를 통해 그려내는 그 스타일은 곱씹을수록 매력적입니다.
#2. 레이먼드 챈들러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경험을, 아는 사람에게는 깊은 감회를...
음... 제 걱정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레이먼드 챈들러의 솔직한 성격과 당시 다양한 정보를 알 수 있는 깨알 재미가 있더라도 작가 자체를 모르고 이 작가의 작품을 전혀 안 읽어본 나같은 사람이 과연 흥미로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예를 들어 TV 연예프로그램 '힐링캠프' 같은데 유명한 작가가 게스트로 나왔다면 팬들은 그것 자체가 흥미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작가를 모르고 정보가 없는 사람들은 어디선가 이름은 들어봤고 작품도 워낙 유명하니 몇개 들어봤는데 정작 작가 자체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는 무지상태인 것이고 주위 분들이 좋아서 껌뻑 넘어가도 공감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이런 걱정은 역시나 기우였습니다. 어차피 작품에 대해 논하는 에세이가 아니다 보니 작가로서의 챈들러의 위상과 별개로 그의 생의 이면에 펼쳐지는 일들에 대한 정보와 그에 대한 챈들러의 리액션을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가 쏟아내는 날카로움을 대하면서 '역시 작가로 뭔가 이룬 사람들은 사회생활이 대체로 사교적이지 않고 좌충우돌하거나 자기만의 세계가 뚜렸하거나 그런 모양이야..'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네요..
챈들러가 직설적이고 여러 다른 작가들을 신랄하게 비난한 듯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데 있어서 만큼은 누구보다도 진지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글을 쓰는 것이 삶의 목적이죠. 나머지는 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겪어야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어떻게 실제로 글쓰는 일을 싫어할 수 있습니까? 싫어할 만한 요소가 뭐가 있다고? 차라리 사람은 장작 패는 일이나 집 청소는 좋아하지만, 햇빛이나 밤바람이나 꽃의 흔들림이나 풀잎에 맺힌 이슬이나 새들의 노래는 싫어한다고 말하죠. 어떻게 문단이나 문장이나 대화나 묘사를, 창조적인 무언가로 만들어 내는 마법을 싫어할 수가 있겠습니까? 글쎄, 분명히 그러면서도 성공할 수 있나 보긴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니 정말이지 우울하군요." p124
이 글은 실제로 글 쓰는 과정은 싫어한다고 말한 존 딕슨 카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본인의 글쓰기에 대한 진정성을 변호합니다. 그러니까 주요 작가를 내리고 본인은 자연히 들어올리는 이중효과네요. 이 곳 외에도 이책 곳곳에서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는 돈이나 어떤 특권 때문에 글을 쓰는게 아닙니다. 다만 사랑 때문에, 어떤 세계에 대한 이상한 미련 때문에 글을 쓰는 거죠. 사람들이 치밀하게 생각하고 거의 사라진 문화의 언어로 말을 하는 그런 세계 말입니다 나는 그런 세계가 좋습니다." p194
저도 돈 때문에 글을 쓰는건 아니니 비슷하군요. 흐흐.. 분명한 건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작가를 기존에 몰랐던 독자라도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하고 매력을 흠뻑 느낄 수 있을만한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워낙에 레이먼드 챈들러와 그 작품을 잘 아는 팬들에게는 깊은 감회와 추억에 잠기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3. 역자도 편집자도 역할의 경계가 모호한 재미난 책
이 책은 애초에 태생 자체가 독특합니다. 물론 미스터리류는 그런 경우가 종종있지만 역자가 책을 기획하고 출판사에서 제작을 담당한 경우입니다. 그러다보니 저로써는 상당히 희한한 상황을 대하게 되었는데, 이례적으로 역자가 서문을 썼더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편집자, 정확히는 마포 김사장님이 책의 말미에 후기를 써두었습니다. 뭔가 통상적인 상황과 거꾸로라고나 할까... 얼마전에 포스팅한 바도 있지만 이 책의 탄생 비화를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상황도 아니기는 합니다.
역자가 애초에 책을 기획했다는 것은 저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는 의미이고 그러니 레이먼드 챈들러를 소개하는 서문을 쓰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저기 흩어진 그의 편지를 분류하고 읽기 좋게 정리하는 작업도 편집부와 공동으로 진행한 듯 합니다.
"이 책에서는 챈들러의 편지들을 발췌, 편집하여 주제별로 정리하고, 각 편지마다 제목을 붙여 놓았다. 편지의 특성상 일정한 주제로 전개되지도 않고 제목이 있을 리도 없지만 굳이 그렇게 정리한 이유는 우선, 개괄적인 내용을 목차에 드러내어 독자의 흥미를 끌기 위함이다. (중략) 두 번째 이유는 독서의 편의를 위해서이고, 마지막으로는 나중에 해당 편지의 내용을 쉽게 떠올릴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다." p12~13
저자의 편지들을 '작품론', '작가들', '할리우드', '필립 말로', '일상' 등으로 크게 분류하고 각 편지마다 적절한 제목을 붙여준 작업은 매우 의미있고 유용한 작업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저처럼 기본 배경지식이 없는 독자에게는 더욱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이 책을 펴낸 북스피어의 마포 김사장님은 편집 후기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챈들러와 하루키의 오랜 팬으로서 만드는 동안 많이 신났고 때때로 짜릿했습니다. 저는 그랬어요. 이런 게 편집자로서의 소소한 기쁨이 아닐까 생각한 김홍민 드림" p255
저는 이 책을 무척 쉽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만드는 사람이 신나하며 짜릿해하며 만든 책이라고 합니다. 역자가 정성을 다해 번역한 책인 듯 합니다. 번역자가, 편집자가 즐겁고 재미있게 만든 책이 재미가 없을리가 없겠지요. 세상모든 이치가 그런게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