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깨비 복덕방 - 신비한 공간을 빌려드립니다
도선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12월
평점 :
1. 너무나 한국적이고 현대적인 판타지
문학동네 소설상과 세계문학상 대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던 도선우 작가의 신작이 출간되었습니다. 캐릭터 묘사와 촘촘히 쌓아 올리는 서사의 맛이 탁월해 매력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는 두 수상작 후에 의외로 스케일 큰 SF 소설 <모조 사회>를 발표했었죠. 이후 두문불출하다가 판타지 힐링 소설로 분류할 수 있는 <도깨비 복덕방>을 들고 돌아왔습니다.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는 것인지 트렌드에 맞는 글을 찾아나가는 과정인지 모르겠지만 작품만 놓고 보면 역시나 훌륭합니다.
<도깨비 복덕방>은 제목처럼 한국적인 소재와 설정으로 잘 메이크 된 힐링 소설입니다. <불편한 편의점>이라든가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 등 특정 장소를 중심으로 에피소드들이 소개되는 K-힐링 소설과 같은 범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워낙에 퓨어하고 골저스한 저 같은 사람은 힐링 소설이 별로 필요가 없다 보니 읽을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이번에 <도깨비 복덕방>으로 제대로 힐링 했습니다.
제목에 등장하는 두 단어 '도깨비', '복덕방'은 지극히 한국적 향기가 느껴지는 조합입니다. 도깨비는 한국의 대표적인 요괴라고 할 수 있죠. 물론 공유가 등장하는 드라마 때문에 세련된 능력자로 이미지가 바뀌었습니다. 복덕방이란 단어도 요즘엔 잘 쓰지 않다 보니 전통적인 느낌도 있고 뭔가 장소와 관련될 것이 짐작돼서 이 소설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가늠하게 해 줍니다.
자세히 설명하면 또 스포일러가 되지만 <도깨비 복덕방>은 뭔가 도깨비 같은 비상한 능력을 가진 존재가 운영하는 신비한 공간입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지지리 운이 없고 힘든 삶에서 새로운 희망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제안하는 공간이 됩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거처를 새롭게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한국적인 소재와 설정이지만 현대적인 느낌이 나는 이유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처한 상황이 바로 지금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너무도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내 옆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사회적인 문제들을 상당히 치열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개인과 사회의 문제를 유기적으로 잘 연결하고 복잡한 상황을 쉽게 잘 설명해 나가는 것이 도선우 작가의 탁월한 점인데, 이 소설에서도 유감없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2. 고전적인 인과응보, 고진감래가 통하는 소설적 즐거움
다큐멘터리가 아닌 소설이기에 현실에는 일어나지 않을 판타지가 펼쳐집니다. 초월적 존재가 도움을 주고 극적인 변화를 이루는데 이 과정이 완전 사이다입니다. 답답한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어버립니다. 이 지점이 힐링 소설의 키포인트입니다. 과할 정도로 강렬하게 묘사하고 있어 시원시원합니다. 살다 보면 올바르게 잘 살려고 노력하는데도 일이 계속 꼬이는 경험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설에서는 그 꼬인 실타래의 일부를 풀어주는 식으로 도움을 주게 됩니다.
물론 이유 없이 초월자가 무작정 도움을 주는 뜬금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각 등장인물마다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면 마땅히 도움을 받을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특별한 경험과 도움을 받을 명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현실적이고 극적인 사건에는 그럴만한 이유, 명분이 중요합니다. 아니면 밑도 끝도 없는 소리가 되어 버리니까요.
고개를 끄덕일 그럴듯한 사연이 서사에 잘 붙어서 답답한 문제가 풀려나갈 때 무릎을 탁 치면서 '그래, 그렇지!'하고 감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감정의 정화, 카타르시스가 슬그머니 올라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차용되어온 클리셰라고 욕해도 기본적으로 인간은 고전적인 인과응보에 반응하게 되어 있나 봅니다. 그래서 소설적 쾌감이 상당합니다.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열심히 노력해도 뭐 하나 잘 풀리는 일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삶이란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기로에 서 있는 위태로운 것입니다. 물론 사는 걱정 없는 속 편한 삶도 있고, 그 어떤 줄 같은 것을 놓아버리고 경로를 이탈해 버린 인생도 있습니다. 삶이 힘들고 마음먹은 데로 안 될수록 고생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이야기에 매달리게 됩니다. 소설 속에서라도 노력에 대한 보상은 결국 받게 된다는 결말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도깨비 복덕방>은 이런 필요를 충분히 채워주는 좋은 소설입니다.
이 소설의 또 다른 큰 장점 중 하나는 절묘한 균형 감각입니다. 등장인물의 상황은 처절하지만 도깨비 복덕방의 인물이들은 현실을 잊을 만큼 느긋하고 초월적입니다. 이 간극에서 오는 엉뚱함이 이 소설의 웃음 포인트입니다. 제가 워낙 작가의 말장난 같은 아재 유머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읽다 보면 중간중간 계속 등장하는 이 어이없는 유머 코드가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소설이 심각하게 흘러가는 것을 막아주고 균형을 잡아주는 키 같은 역할을 합니다. 다시 봐도 재미있을 정상급 아재 개그입니다.
3. 흥미롭고 재미있지만 분명한 사족
훌륭한 힐링 소설로 이야기가 잘 마무리됩니다. 에피소드마다 사연이 디테일하고 정교하다 보니 소설에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각 에피소드가 제각각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놀라울 정도로 서로 엮여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읽다가 '응? 이 양반은 바로~~'하면서 '아~~ 갸가갸가가???'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이게 참 자세히 설명할 수 없어서 답답하지만 그렇습니다.
사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초월적인 존재인 도깨비는 그저 도깨비로 존재해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니까요. 독자가 감정이입을 하고 빙의하는 것은 각 등장인물이 어떤 사연으로 힘들어했고, 어떻게 시원하게 인생 역전 또는 행복을 찾았느냐가 아니겠습니까? 도깨비가 사실은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는 부차적인 사족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의 말미에는 작가의 고질적인 성격이 나와요. 굳이 기어코 한사코 도깨비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 등장합니다. 단순히 도깨비는 사실 뭐시기였다 수준이 아닙니다. 이들이 어떤 존재고 어떤 역사 속에서 발생했고, 왜 이런 일을 하는지 등에 대한 방대한 세계관을 설명합니다. 그나마 스케일은 방대하지만 약식으로 짧게 설명하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했는데, 아주 이쁘게 잘 됐어요. 나는 너무 만족한단 말입니다. 예뻐서 좋아. 그게 끝이죠. 그런데 헤어디자이너 양반이 "자, 잘 들어보세요. 이 머리에 들어간 스타일링은 누구로부터 나왔고, 이 컷 기술은 누가 만들어내서 발전시킨 건데, 우리 사이에서는 이렇게 불려요. 이게 뭐냐면~~" 하고 유래부터 계속 설명하면 저는 머리가 지끈거리고 골치가 아프기 시작하는 겁니다.
물론 인간이란 자고로 다양하고 지 멋대로인 것이라 머리는 만족하지만 이 머리에 들어간 기술과 스타일의 유래에 대해 더 궁금한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오히려 덤으로 지식까지 알게 돼서 대만족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도깨비 복덕방>의 결말 이후 이야기로 등장하는 도깨비의 대서사시에 대해서 선물 받은 느낌으로 더욱 만족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바쁘다 바빠 현대 생활 속에서 이야기 이면의 속 깊은 사연까지 깊게 알고 싶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작가가 세계관을 만들고 이 정교한 세계관의 구석구석을 알리고 이야기를 완성도 있게 마무리하고 싶어 하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나 대강 트렌드 따라 적당히 쓴 글 아니다'라고 강변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도선우 작가의 신간 <도깨비 복덕방>은 독자들이 좋아하는 트렌드도 충족하면서 작가의 특기이자 장점도 최대한 살린 소설입니다. 현실의 어려움도 공감하고 대리 만족도 느낄 수 있는 훌륭한 힐링 소설이자 판타지 소설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