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의 사춘기 - 서른 넘어 찾아오는 뒤늦은 사춘기
김승기 지음 / 마젠타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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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성숙한 어른이 된다는 것

 

   최근 첫째 아이의 아동심리상담을 했습니다. 심리상담이라는 것이 한번 가서 해보면 진단이 나오고 답이 나오는 문제는 아니지만 일단 막연하게 생각하던 문제들이 객관화되고 방향성을 찾는다는 점에서 무척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정식 심리검사 전에 사전 미팅 정도의 성격이었지만 일단 아이가 가지고 있는 잠정적인 어려움이랄까?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을 잘 캐치해서 언급해주셨습니다. 우리 아이의 경우는 스스로 무척 잘한다고 생각하고 말하지만 정작 그 기준에 본인 스스로가 못 미치는 것에서 오는 불균형 때문에 자존감이 낮다는 것이 가장 큰 부분이었습니다. 앞으로 상담과 검사 등을 진행하면서 부모가 아이를 더 정확히 이해하고 균형잡힌 인격체로 성장하도록 도와야 겠습니다.(라고 하지만 나도 애같은데 뭘...)

 

   상담을 진행하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낮아진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부분이었습니다. 가령 지금 7살이라면 나이만큼의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14살이 되어서야 완전히 해결될 거라는 이야기 입니다. 아내와 나는 끝나고 이런 대화를 나누었죠. "와, 14살에 자기 문제를 해결한다면 완전 대박이잖아", "그럼 그럼, 나도 나이 마흔이 되어가는 시점에 지랄총량을 다 못쓰고 난리치고 있는 판에..."

 

   성숙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사실상 아주 힘든 일입니다. 통상 성숙한 인격을 갖춘 어른과 사회생활에 필요한 대인관계 스킬과 처신술을 완벽하게 장착한 사람이 동일시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만 좋고 능력이 없으면 성숙했다라는 평가를 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또한, 심리치료센터나 정신과를 찾는 것이 마치 '나는 정신병자다'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 같아 심하게 터부시되는 것이 관례이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근래에 와서는 상황에 따라서 곡 필요한 것으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래도 정신과나 침리센터를 찾는 것이 심리적으로(또는 비용적으로) 껄끄럽다면 이 책 [어른들의 사춘기]가 큰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다. 

 

 

 

#2. 어른이 해결해야할 내면의 문제, 사회생활의 문제

 

   [어른들의 사춘기]는 주로 정서적 문제를 균형있게 정리하고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이만 들어가는 어른들을 위한 책입니다. 읽다보면 '다 아는 건데'하는 생각도 들지만 '다 잘하는 건데'하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정서적 문제들을 소개하는 꼭지들을 넘기다보면 어디에 걸려도 걸리게 되어있지요. '나는 어떤 문제도 없는 완벽한 어른이야'라고 생각이 드신다면 꼭 정신과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심각한 중증일 확률이 높습니다.

 

   시인이자 정신분석 전문의인 저자는 몸에 비해 다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같은 내면에 대해 이야기해 줍니다. 또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에 대해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단순히 문제에 대한 심리학적 정의를 나열했다면 이 책이 이렇게 쉽고 재미있게 공감을 얻지 못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내 주변 어디에나 있을 만한 사람들의 상담사례를 간략히 잘 소개해주고 있고, 이 이상 쉬울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일상 용어와 구어체에 가까운 문장으로 전달해주고 있어 읽기에 무난합니다. 원래 관심분야이기도 하지만 정말 쉽고 재미있게 술술 읽히는 책입니다.

 

   현대인이 안고 있는 다양한 심리적 문제, 사회생활 속에서의 관계설정 등에서 오는 문제들을 자연스럽게 풀어주고 있는 이 책은 분류상 자기계발서에 포함시켜야하나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읽다보면 통상 문제를 제시하고 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이래라저래라하는 자기계발서와는 결이 많이 다릅니다. "휴지뽑아주는 남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저자는 이런 저런 문제를 가지고 있는 어른 아이를 대할 때마다 안타깝고 본인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저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눈물을 닦도록 휴지를 뽑아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이 책을 쓰신 것 같습니다. 읽다보면 문제에 대해 지적받고 수정을 요구받는 느낌은 없고, 책을 읽는 내가 오히려 저자에게 나의 내면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착각이 드는 순간이 있습니다. '아, 나도 이 사례에 속하는 구나'하는 생각에 곰감하게 됩니다.

 

 

 

#3. 당신의 마음 속 아이는 몇살입니까?

 

   [어른들의 사춘기]에 등장하는 다양한 사례처럼 다 큰 어른이 아이처럼 특이한 취미생활을 하거나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드는 경우는 사실 실생활을 통해 흔히 접하게 됩니다. 특히 요즘 눈에 많이 띄는 것은 중독현상입니다.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SNS, 블로그도 예외가 아니지만 집착과 중독성향이 너무 흔히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도대체가 자신을 혼자 놔두지를 못한다. 차안에서는 스마트폰, 직장이나 집에서는 인터넷, 항상 누구와 그 무엇과 연결되어 있어야 마음이 놓이고 거기에 의존한다."p139

 

   이런 집착과 중독은 우리의 근본적 불안과 닿아 있습니다. 이런 행동은 무엇보다 스스로를 피곤하고 지치게 만듭니다. 저자는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어려움 중 하나인 이 중독부분에 대해 이렇게 조언해 줍니다.

 

""우리 신경은 너무 혹사당하고 있다. 잠시도 쉬지 못하고 자극에 노출되어 있다. 이제 잠시라도, 움직이는 차 안에서만이라도 신경을 쉬게 했으면 좋겠다. (중략) 이렇게 계속 모든 감각이나 생각을 지나가게 하며 관찰한다면 아주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가 온다. 이렇게 30분만 있어도 아주 깊은 잠을 자고 난 듯 개운해진 당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p141

 

  그렇습니다. 신경이 쉬도록 깨어있는 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30분을 멍하게 있는 일은 현대인들에게 오히려 고문에 가까운 주문입니다만 지친 정서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행동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른들이 사춘기]에는 이런 문제 말고도 더 다양한 문제에 대해 소개하고 조언해주고 있습니다. 위의 중독현상이 좀 다른 방향으로 나타나면 으스스합니다. 바로 사람에 대한 칩작입니다. 흔히 스토커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입니다. 저저는 이런 스토커에 대해서 '자아가 성숙하지 않은 미성숙한 사람'으로 정의합니다. 그리고 미성숙했기 때문에 이런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대하되 단호해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나저나 생각할수록 어떤 존재보다 무서운 존재가 바로 스토커가 아닐까 싶습니다. 답이 안나오니까요. 말도 안통하고... 스토커가 따라붙을 만큼 매력적이거나 특별하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겠습니다.

 

"길을 걷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이 부지런히 오간다. 그런 그들을 이끌고 어디론가 향하게 하는 것은 현재의 그가 아니라 그 사람들 마음 속의 어린아이,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아이들이 아직 채우지 못한 갈증이다. (중략) 성숙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 어린아이들을 모두 현재 나이만큼 키워 자신에게 통합시킨 사람이다. 그래서 쓸데없이 떼를 쓰거나, 괜한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다."

 

   저자는 미성숙한 내면의 어린아이가 자신의 삶을 엉뚱한데서 낭비하도록 한다고 염려합니다. 한번 뿐인 자신의 삶이 풍요롭게 가꾸기 위해서 정서적 성숙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스스로를 잘 통합하고 타인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 성숙한 사람이 균형잡힌 시각으로 행복한 인생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한동안 이런 류의 책을 읽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흥미롭고 재미있는 책을 읽게 되어 흡족하였습니다. 내용이 충실한데 비해 누가 읽어도 부담없을 만큼 쉽게 쓰인 책을 만나니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거뭐 꼭 마음속 아이를 키워야하나? 피해만 주지 않도록 조심한다면 어른 아이로 살아가는 것도 행복하게 사는 한 방법이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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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여행 - 소유흑향, 무모해서 눈부신 청춘의 기록
노경원(소유흑향) 지음 / 시드페이퍼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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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그럼에도 여행, 이보다 더 저자를 한마디로 대표하는 표현도 없을 것...

 

   [그럼에도 여행]입니다. 소유흑향으로 잘 알려진 노경원씨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한문구는 "그럼에도 여행'인 듯 합니다. 사실 저는 저자의 첫번째 저서인 "늦지 않았어 지금 시작해."를 읽지 못했음은 물론 심지어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웹상이나 온라인 서점에서 두어번 본 기억은 어렴풋이 나지만 사실상 대학 때 열심히 돈모아서 여행을 다닌 이야기를 찾아 읽기에 제 연령대가 이미 만만치가 않습니다. 왠만하면 "늦지 않았어 가족여행!" 뭐 이런 제목에 눈길이 갈 나이가 되었으니까요. 아니면 "여행으로 키우는 건강한 아이" 뭐 이런 책이던가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책은 일단 제목이 너무 눈길을 끌더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여행... 음... 상당히 있어 보입니다. 뭔지는 몰라도, 뭔가 표현하지는 못해도 짧으면서도 임팩트 있으면서도 끌리는 제목입니다. 사실 평범한 문구인데도 그랬습니다. 저자는 정말 힘들고 어려운 어린시절을 지나 여전히 궁핍한 대학시절을 보내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끝끝내 세계 각지를 여행하고 다닌 이력을 담담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정말 처절한 지난날들입니다. 처절하지만 그럼에도 여행을 통해 아름다울 수 있는 눈부신 기록입니다. 그래서 또한 아름다운 청춘입니다. 대충대충 흘려보낸 저의 청춘이 무색해지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밀도있게 담겨있습니다.

 

 

#2. 어떻게 살 것인가? 갈등, 선택, 행동, 정신승리

 

   저자는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훌쩍 훌쩍 여행을 떠나는 행위를 반복합니다. 그 와중에 책의 전반을 지속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갈등과 선택, 그리고 정신승리입니다. '돈도 없는 것이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았으면 부모님도 부양하고 착실히 모아서 훗날을 도모해야하는 것이 정신 똑바로 박힌 젊은이의 마땅히 할바가 아닌가?' 라는 그 누군가의 목소리에 맞서 자신의 뜻을 끝까지 펼치는 일종의 모험담입니다.

 

""추억 속 사진 몇 장 남기는 게 그렇게 중요해?" (중략) 결국 어떤 것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어떤 부분에 더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각자의 인생관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 누구도 남의 인생에 대해서 '옳다, 그르다' 식의 가치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중략) 결국 어떤 선택을 하든 자기 자신이 확신을 가지고 내린 결정이라면, 그리고 그 결정이 베스트라고 믿는 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p.22

 

   이런 비슷한 갈등 상황에 대한 자신의 의견 피력이 여러번 반복됩니다. 그러니까 '여행간다고 깝쭉대지 말고 평범한 남들처럼 주제에 맞게  열심히 저축하고 취직준비를 해야하는가?'와 '두번 다시 오지 않을 대학시절, 이 자유로운 시절에만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위해 모은 돈을 탈탈 털어 여행을 다니며 견문을 넓힐 것인가?'의 취사선택의 문제입니다. 이는 곧 가진 것은 젊음과 시간 뿐인 청춘의 시기를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그 삶을 토대로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자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누가 나서서 손가락질하며 '사진 몇 장 남기는게 그렇게 중요해?' 라고 지속적으로 비난을 하겠습니까? 사실은 그동안 의식, 무의식 중에 교육 받아온 내용들과 자신을 둘러싼 형편을 돌아보는 저자자신의 시선이요, 죄책감의 발현으로 보아야 겠습니다. 그리고 이 갈등과 죄책감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선택하고 행동에 옮기는 동력을 얻습니다. 그리고 정신승리도 잊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내게는 그 시절에 대한 단 한 점의 후회도 남아 있지 않다. (중략) 다시 한 번 더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결정을 내릴 것이란 확신이 생긴다. (중략) 내 모든 이상과 꿈의 무게를 든든하게 잘 버텨줘서 정말 고마웠다고 전하고 싶다."p23  

 

   이 정신승리의 절차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만약 여행을 그렇게 다녔는데 막상 지나봤더니 개뿔이나 남는 건 없고 통장잔고만 비었다라는 결론에 이른다면 그야말로 정신의 붕괴를 경험하게 되어, 자신의 치열했던 젊은 날을 부정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과거와 선택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적절한 의미부여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 저자는 나이에 비해 놀랍도록 진중하고 지혜롭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화두에 적극적으로 대답할 준비를 마친 듯 해 보입니다.

 

 

 

#3. 여행은 서서하는 독서,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

 

   어쩌다보니 에세이를 계속 읽고 있습니다. 게다가 별로 텀도 없이 여행 에세이를 읽고 있습니다. 성격이 너무나 상반된 여행 에세이들입니다. 그러나 어떤 에세이냐와 무관하게 여행의 여정과 그 여운과 감상을 기록한 여행 에세이를 접하면서 그야말로 앉아서 여행을 다니고 있는 느낌입니다. 여행을 마음껏 떠나기 힘든 현실 가운데 저는 저 나름의 일종의 "정신승리"를 노리고 있는 형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제가 생각하는 여행의 개념보다 사실상 훨씬 무거운 의미와 개념으로 여행을 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의 유익에 대한 생각은 대동소이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의 팍팍함을 잠시 떠나 삶의 소중함을 돌아보고 환기시키는 전환점이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삶의 놀라운 터닝 포인트가 되기도 하고 말입니다.

 

 "내게 있어서 여행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무게중심을 잃지 않되,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는 어떠한 작용이자 행위, 그게 내게는 여행인 것이다. (중략) 그리고 앞으로도 쭉 내가 살아왔던 삶의 궤적을 더듬어가며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p79  

 

   소위 특정한 글에는 타겟팅한 목표 독자층이 있습니다. 이 책의 주요 독자층은 사실 저보다는 젊은 20대 여성층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찬찬히 정성껏 이 책을 시간을 들여 읽을 수 있었던 원천은 저자의 문장력과 자신의 생각을 설득력있게 풀어내는 능력인 듯 합니다. 과장없이 담백하고도 차분한 감성이 돋보입니다. 저도 모르게 살짝 무거워지면서도 저자의 독백과 설명, 때로는 우김이 그럴듯 하고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그리고 나라도 그랬을 수도 있겠군. 내지는 그렇게 하는게 바람직하기는 했겠어.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여행의 방식에 있어서 탐구적이거나 학구적으로 여행지를 파고 든다거나 주요 사적지의 역사적 의미를 설명한다거나 하지 않고, 그야말로 그 도시의 정취와 특색을 정처없이 걸으며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참으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무언가를 결정하는데 있어, 딱딱한 원칙보다는 그때그때 드는 생각에 따라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후회할 것 같은가?'가 행동을 결정하는 원칙이라니, 참 멋진 원칙입니다. (물론 솔로일때만 한정해서 말입니다.)

 

   여행 뿐 아니라 인생의 여정가운데에서도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스스로에게 '후회할 것 같은가?'하고 물어보는 태도는 지혜롭습니다. 타인의 일반적인 통념에 맞추어 결정하는 선택은 종국에는 후회에 빠질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을 최근에 와서야 피부로 느낍니다. 저는 생겨먹기를 손해를 본다 한들 지나간 일을 되돌아보는 성향은 아닙니다만('못먹어도 고'라는 표현이 그냥 생긴건 아니라는 말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중요한 테마가 될 한 문장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정리하고 적용해 살아가는 저자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자 이제 선택하시지요. "후회할 것 같습니까?"......  (왠지 유치원 아이들의 "네, 네, 선생님!!"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오는 것 같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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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팡의 소식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한희선 옮김 / 비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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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 요코야마 히데오의 미스터리가 시작되는 지점..

 

   잘 알려진 데로 요코야마 히데오의 [루팡의 소식]은 작가의 데뷔작입니다. [64]와 [사라진 이틀]을 통해 작가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고, 제 취향에 잘 맞는 작품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데뷔작을 읽어보면 그 작가가 추구하는 작품세계의 원형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루팡의 소식]은 이 시점에서 읽어보기에 딱 적당한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가의 작품을 전작... 아니 그러니까 전부 읽어본다...기 보다는 전부 사 모은다는 의미지만 말입니다. 사다놓으면 언젠가는 다 읽게되겠지요.

 

   [루팡의 소식]까지 읽고 보니 이 작가의 색깔을 어느정도 알게 된 느낌입니다. 경찰 조직과 생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 풍부한 경험이 배어나는 서술들이 돋보입니다. 등장하는 캐릭터 한 명도 소홀히 다루지 않는 치밀하고 세심함, 인물들간의 팽팽한 신경전과 긴장감 역시 데뷔작부터 잘 살아있었습니다. 단순히 누가 범인인가?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나에 그치지 않고 왜 범죄가 일어났는지, 살해당한자를 둘러싼 인간들의 면면은 어떠한가를 상세히 잘 묘사하고 있는 부분도 놓쳐서는 안되는 부분입니다.

 

 

 

#2. 공소시효 만료를 앞둔 미스터리의 미덕...

 

   공소시효는 많은 미스터리에 등장하지만 유독 요코야마 히데오가 좋아하는 설정으로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특징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일단은 공소시효 만료를 기본적인 설정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듯 합니다. 다른 작품들을 더 읽어봐야 알 수 있겠지만 공소시효를 활용하는 장점은 명확합니다. 미스터리적 긴장감과 동시에 사회파 미스터리에 반드시 필요한 휴머니즘적 스토리를 비교적 자유롭게 포함시킬 수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루팡의 소식]에서도 오래된 15년전 자살로 마무리된 사건을 공소시효를 하루 앞둔 시점에 새삼 타살이었다는 구체적인 제보를 기점으로 재수사하게 되는 설정을 사용했는데, 이렇게 되면 읽는 이에게 극적 긴장감을 제공하기 용이해집니다. 시간에 쫒기다보니 복잡한 수사절차를 하나하나 밟지 않고 생략해가며 빠른 전개가 가능합니다. 또한, 다소 무리한 진행도 용인되는 장점이 있습니다.

 

   반면 사건자체가 오래전 과거에 일어났다는 점은 용의자들의 신체적, 정신적, 환경적 변화를 통해 휴머니즘적인 요소를 충분히 자유도 높게 설정해줄 수 있습니다. 비록 그 당시에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이후에 얼마나 반성했는지, 아니면 지속적으로 악행을 저질렀는지 등을 작가의 의도에 맞게 정해줄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이를 통해 가해자를 동정하기도 하고, 어느정도 입장을 이해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설정은 사회파 미스터리적 요소를 충분히 강화해주는 도구로 활용되기에 좋습니다.

 

 

 

#3. 아직은 치밀하지 못한 완성도에서 느껴지는 아쉬움

 

   이 작품은 전형적인 본격 미스터리도, 그렇다고 사회파 미스터리의 원형을 갖추었다고 보기에도 애매한 지점에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뭔가 정체성이 모호하면서 실험적인 느낌도 조금 듭니다. 게다가 배경도 주로 고등학교다보니 약간 성장소설같은 느낌도 나고 말이죠..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가있어요. 이것저것 좋은 재료를 너무 많이 섞었습니다. 그리고 말미에 대단원의 막이 깔끔하게 내려져야 하는데, 내려가는 막에 사회자가 머리를 내밀고 '사실 이이야기는 말입니다~~~'하고 한참을 다시 설명하는 형국입니다.

   이 상황을 대하면서 일전에 보았던 인디밴드의 공연이 떠올랐습니다. 밴드 이름도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말이죠. 왜 잊지 못하냐면 노래가 좋았는데 무척이나 무거웠고, 사회비판에 가까웠는데 노래자체에는 분위기는 알겠지만 뭘 말하려고 하는지 무척이나 모호하더란 말입니다. 노래가 끝나고 나니 가수가 노래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이 노래는 왜 만들었고 어떤 의미이고 어떤 의도로 이러저러하게 만들었습니다.'라고 하더군요. 좀 안타까웠습니다. 좋은 노래라면 설명없이도 누구나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시디나 라디오에 나온다면 누군가 이런 구구절절한 설명을 덧붙여주어야 청취자들이 이해를 한다는 말이 되니까 말이죠...

 

   이런 연유로 사족과도 같이 길고긴 대화를 통한 저자의 의도설명이 아쉬웠습니다. 이미 사건은 종결되었으니 가볍고 즐겁게 마무리해주던가, 임팩트 있게 딱 끝내야 기분좋게 책을 덮는건데 말이죠. 어찌나 이러쿵 저러쿵 길게 설명을 하는지 좋은 내용이 좋게 들리지가 않고 작품성을 해친다는 생각만 자꾸 드는 겁니다. 서사 중에 끝냈어야할 설명들이니까요.  

   전체적으로 굳이 평가를 해보자면 이 작품은 읽는 재미면에서 중반과 중후반이 가장 재미있는 사다리꼴 형태의 그래프를 보여줍니다. 초반에 설정이나 전개가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진행이 더디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만 어느새 흠뻑 빠져들게 되더군요. 역시나 히데오야!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고 등장인물들 제각각의 속사정이 드러나면서 무난하게 잘 끝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무리는 임팩트 넘치기보다는 조금 흐지부지한 느낌이어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히데오옹 작품세계의 원형과 욕심이 넘치게 반영된 작품으로, 전반적으로는 아주 훌륭한 장르소설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 양반 책은 다 사모아보는 것으로다가... 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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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끝에 다시 - 소설로 만나는 낯선 여행
함정임 외 지음 / 바람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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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돋보이는 기획의 '도시와 나'를 그대로 닮아있는 개성 가득한 이야기들의 향연

   

   처음 '도시와 나'를 읽으며 일본소설에서나 만나는 독특한 기획의 소설집이라 반갑고 신선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도시와 나'가 해외의 여러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이야기 모음이라 신선했다면, 이번 소설집 '그 길 끝에 다시'는 국내의 여러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보니 신선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이 가장 큰 특징이었습니다.

   

   이러한 단편 소설집의 가장 큰 유익은 정해진 한정된 테마를 담아내는 작가들 제각각의 개성이 작품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독자들은 이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풍성하게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 길 끝에 다시'는 역시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너무도 개성 넘치는 작품들이 오롯이 담겨 있었습니다. 기본 테마인 '도시'와 '여행' 두가지를 기본으로 짧은 이야기속에 함축적으로 표현해 내는 작가들의 역량을 대하며 감탄하게 되고, 또 서로 너무 다른 방식의 설계와 접근과 풀이를 대하면서 진심으로 놀라게 되었습니다.

 

 

 

#2. 흔히 단편 소설들을 만나는 수상작 모음집과 차별되는 편안하고 특색있는 이야기들의 매력

 

   어차피 기본적으로 해외의 도시와 독특한 문화를 접목시킨 이야기가 펼쳐졌던 ‘도시와 나’를 읽을 때는 잘 못 느꼈던 부분입니다만, 익숙한 국내 도시를 배경으로 쓰여진 이번 작품집 ‘그 길 끝에 다시’를 읽다보니 확실히 차별화된 특색을 느꼈습니다. 흔히 다양한 문학상 수상 작품집을 읽을 때면 느끼는 것은 작품들이 하나같이 지나치게 무겁다는 것이었습니다. 문학상 마다 평가 포인트가 있고, 역량을 평가하기 위한 우리 평단의 일관성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해야 할까요? 그 코드에 맞추다보니 기본적인 무거움이 한결같이 존재하고 거기에 약간의 차별화된 부분이 들어갈 때 높은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그것이 독자들의 기대와는 별개로 변함없이 흘러가는 평단의 강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문학상과는 관계없이 발표되는 이 소설집에서는 그러한 강박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파격적인 느낌의 작품도 있고 참신한 느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지나치게 무겁지 않아 잘 읽어지고 편안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한 감동까지 발견하게 되어 참으로 행복한 기분으로 책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개인의 취향에 따라 골라 읽을 수 있는 재미

 

   물론 골라 읽지는 않았지만 쭈욱 읽다보니 좀 더 취향에 맞아 좋았던 작품이 있고, 약간은 기대에 못미치는 느낌 또는 이건 뭐지? 하는 느낌이 약간 남는 작품도 있었습니다. 완전히 소화가 안되는 느낌의 작품을 만나면 살짝 좌절하기도 하고 말이죠.

 

   제 취향에 너무 잘 맞아 흡족했던 작품은 첫 번째 백영옥 작가님의 ‘결혼기념일’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정말 정말 너무 좋았습니다. 이 작품에서 개인적으로 빵 터지면서 이 책 전체에 대한 기대치를 극한으로 올려놓았습니다. 주인공의 상황 설정과 여정, 감정표현들이 너무 좋았고 공감이 갔습니다. 전체적인 구도가 너무 좋았습니다. 물론 그래서 다음 단편에서 실망을....

 

   제목처럼 결혼생활과 이혼 후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결혼생활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큰 성공이 큰 행복을 의미하진 않는다. 돈을 많이 벌면, 집을 넓히면, 좋은 가구를 들여놓으면 행복해질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던 그때의 우리가 알 리 없는 진실이었다”p.21

 

"지금 돌이켜보면 행복은 무료함 그 자체, 아무 일도 없음에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p.22

 

"이혼할 지음, 호탕하던 그의 성격도, 웃음도, 그에게선 점점 사라져버렸다. 남편은 해파리처럼 투명한 인간으로 변해갔다. 위선도 위악도 없는 투명한 인간, 겉과 속이 똑같아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인간, 보호색도, 어떤 색깔도 가지지 않는 무색 무취의 인간, 그는 그저 본능에 충실한 인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p.26~27

 

   인생에 많은 행과 불행이 있지만 결혼생활에 있어 경제적 파탄은 사실상 관계를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어렵게 만드는 큰 불행입니다. 함께 힘을 합쳐 이겨내야 하는 것이 인생의 지혜이지만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신뢰하고 이겨내는 부부는 사실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런 불행과 잊혀지는 것들에 대해 감각적으로 잘 표현해주고 있어 너무 좋았습니다.

 

   정말 마음에 들었던 또 하나의 작품은 바로 함정임 작가님의 ‘꿈꾸는 소녀’ 였습니다. 외국인 소녀의 몽환적인 독백과 상실감을 품고 있는 노총각 G의 건조한 서사가 교차 진행되는 방식이 정말 독특하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제가 살던 부산이 배경이었던 점, 그 익숙함이 더욱 좋았습니다.

 

이기호 작가님의 ‘말과 말사이’는 꽤나 충격적이었습니다. 흐흐... 미녀 작가 윤고은님의 ‘오두막’은 솔직히 좀 익숙한 죄의식과 치유코드라 신선함이 떨어졌는데 마지막 상징적 장면이 임팩트 있게 와닿았습니다. 한창훈 작가님의 ‘여수 친구’도 또 한가지 충격적이고 황당한 한 인물에 대한 묘사가 특징있었습니다. 김미월 작가님의 ‘만보걷기’는 마무리가 약간 약하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4. 기타 등등 남겨야 할 말

   1) 작품의 후반부에 첨부되어 있는 ‘작가 인터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의 50페이지에 육박하는 ‘작가 인터뷰’는 작품에 대한 작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작가들만의 독특한 상황과 시각, 생각을 조금 훔쳐보는 기분이어서 무척 신선하고 좋았습니다. 제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작품속 의미들을 설명해주는 느낌도 있어서 좋기도 했는데, 이거 참, 저의 역량부족이겠지만 정말 좋은 작품은 따로 설명을 안해도 쉽게 이해해야하는 것인데 말입니다.(라고 남탓으로 마무리를...)

   2) 표지는 개인적으로 취향이 아닙니다...

   3) 책은 그린라이트지로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하는 지질입니다. 가볍고 느낌이 좋은 편입니다.

   4) 여러작가님들이 참여한 단편 소설집은 참 다양한 맛이 있어서 좋습니다.

   5) 느낌좋고 의미있는 이런 기획 소설집은 앞으로도 시리즈로 쭈욱 출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문학상 수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독자를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다음편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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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린 1 - 사도세자 이선, 교룡으로 지다
최성현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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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력은 누구에게나 달콤하지만 더러운 흔적을 남긴다.

 

   권력(權力)은 권세와 힘을 합친 단어로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타인을 복종시키고 지배하여 좌지우지 하며 달콤해 하는 것은 역사 이래로 변함이 없는 듯 합니다. 이런 권력의 사용은 자기존재의 확인과도 직접 연결되다보니 이 땅에 태어나 뜻을 펼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여겨온 것이 인간이고 그 결과로 빚어진 역사가 우리의 권력 투쟁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승자들의 역사속에 조차 권력을 위한 암투는 끝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그 권력이라는 것의 위력은 크고 한없이 강력해서 단 한번도 제대로 나누어 가졌던 역사가 없습니다. 흔히 "The Winner Takes it all"1이라고 부르는 이 현상은 필연적으로 반대세력에 대한 피나는 숙청과 처단으로 이어집니다.

   이를 반대입장에서 본다면 참으로 억울한 희생의 역사입니다. 최성현 작가의 [역린1 교룡에 지다]에서는 사도세자로 잘 알려진 이선의 억울한 희생에 초점을 맞춥니다. 역사적으로 사도세자 이선이 문제가 있는 인물이라는 평, 즉 '죽을만 했다'는 의견과 영조와 노론세력의 견제에 억울한 희생양이라는 평, 다시 말하면 아버지 영조의 권력에 대한 병적 집착, 정치적 정적으로써 아들을 대하는 과도한 불안감과 이를 교묘히 이용한 정치세력 노론의 합작의 결과로 빚어진 슬픈 역사라는 시각이 공존하는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는 역사를 잘 모르고 그저 예전에 사극을 통해서나 접했던 내용이다보니 사극에서 묘사된 내용을 그냥 사실로 받아들인 꼴이 되었는데 제가 보았던 내용은 그저 사도세자가 어리버리하여 결국은 죽임을 당하는 정도의 스탠스였고 그저 그 '뒤주 속에서의 죽음까지가 처절하고 슬프고 아타까웠다' 정도의 기억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쪽이건 이선은 억울한 희생의 역사에 최대 희생양입니다. 뒤주속에서 일주일을 넘게 굶어가며 처절하게 죽어갔으니 참으로 인간적으로 있어서는 안될 역사입니다.

   ​이렇듯 권력은 늘 더러운 흔적을 남깁니다. 감추려 하면 할수록 결국엔 흔적이 남기 마련입니다. 최성현 작가님은 작품속에서 권력을 쫒는 각 세력들의 형편과 입장을 놀랍게도 입체적으로 그려냅니다. 각자의 입장이 상당히 설득력있게 그려집니다. 그 더러운 흔적이 [역린]이라는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2. ​이기는 자가 선이요, 패배는 악이다.

   권력을 위해 잔인한 학살을 자행하는 인간들의 행보는 참으로 잔혹하고 비인간적이기 그저없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미시적인 관점에서 각 세력들, 아니 한사람, 한사람을 잔잔히 들여다보면 단순하게 단정짓기 어려워집니다. 각 사람들마다 생존을 위해, 성공을 위해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사정들을 알게되면 그 나름대로 명분이 있고, 그럴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각자의 행동에 정당성을 얻기 시작하면 문제는 복잡해집니다. 명확히 선과 악을 구별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형국에는 결국 결과로 말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 결과는 승자에 의해 덧칠되고 기록되어 집니다. 역사는 사실이라기 보다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된 승전보인 경우가 많습니다. 보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꿈을 꾸던 무리가 역도가 되고 악한이 되는 것이 승자의 역사입니다. 이들의 논리대로 따라가다보면 역사적 패자는 무조껀 악의 무리가 되어집니다.

   이쯤되면 역사속에 드러난 사건의 선과 악을 바라보는 우리의 입장에 혼란이 생깁니다. 세자를 살해하려는 살수는 누가봐도 절대 악이겠지만 살수가 어떻게 살수가 되어 그자리에 서 있는지 한 사람의 역사를 돌아보면 또 그럴수 밖에 없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게다가 워낙 정교하고 힘있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상황이 되면 저도 모르게 '음.. 그래, 그럴수도 있겠군..'하고 생각하고 마는 것입니다.

#3. 데자뷰와 같은 희생자들의 진혼곡...

   도데체 최성현 작가님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역사이야기가 원래 재미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완전히 몰입하도록 빼어난 구성력을 보여줍니다. 게다가 각각 등장하는 캐릭터가 특색있고, 명확해 이해가 쉽고 제각각의 매력이 넘칩니다. 각각의 문장에는 힘이 있고 전통적인 느낌인데도 세련됩니다. '문장이 좋다'니 '문장력이 뛰어나다'라는 식의 평가를 좋아하지 않는 저이지만 문장이 좋습니다. 문장력이 뛰어납니다. 자연스럽게 끝까지 잘 읽었습니다.

   작가가 어느정도 의도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제각각의 입장과 환경과 필연을 바라보며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를 느낍니다. 악한 욕망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한없이 잔인해지는 속성을 돌아보게 됩니다.

   작가의 표현대로 영조와 거대일당 노론 사이에서 짓이겨지는 이선의 잔인하도록 슬프고 억울한 죽음의 진혼곡이 왠지 그 당시에 국한된 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저만의 착각은 아닐 것입니다. 역사속에 끝없이 억울한 희생자가 생겨났고, 지금도 권력 앞에 힘없이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진혼곡이 끊이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작품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공감을 받는 것은 그런 희생이 우리에게도, 우리주변에도 언제든 닥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직, 간접적으로 겪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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