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에도 말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흥미로운 일곱가지의 기이한 이야기들


   최근 지속적인 인기몰이중인 [맏물 이야기]의 여파로 "에코인의 모시치" 대장을 주인공으로 한 또 다른 이야기인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혼조 후카가와"라는 지역명이 영 입에 잘 붙지 않더군요. 도데체 여기는 어디인가? 옛날 지명은 분명한데 지금 일본의 어느 지역인가 궁금했습니다. 이래저래 찾아보니 "혼조 후카가와"라는 지역은 현제 도쿄의 변두리로 '스미다 구?' 정도 되나 봅니다. 그리고 이 지역이 1960년생 미야베 미유키 여사가 태어난 지역이라는 것을 알고나니 '아, 그래서 초반작에 해당하는 이 작품은 작가가 나고 자란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지역이나 옛날부터 전해내려오는 괴담 같은 것이 있기 마련인데 아무래도 섬나라인 일본은 특히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혼조의 괴담 중 일곱가지의 미스터리에 해당하는 불가사의를 중심으로 에피소드가 진행됩니다. [맏물 이야기]에서는 사실 음식 미스터리라고 표방한 것에 비해 음식의 역할이 그저 사건의 문제를 푸는 단초나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하는 아주 단순한 역할 밖에 하지 않는 반면 혼조의 일곱가지 불가사의는 직접적으로 사건자체가 되기도 하고 사건을 해결하는데 핵심적인 내용이 됩니다. 한쪽으로만 잎이 나는 갈대라던가, 한밤중에 길을 걷는 사람을 뒤따라오는 등롱, 낙엽이 지지 않는 나무 등 불가사의의 내용들이 무시무시하거나 대단하지가 않고 말그대로 기이한 정도입니다. 이런 불가사의 현상에 덧입혀진 당시 시대를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삶과 애환이야말로 소설을 끌고 나가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2. 외모는 대단치 않지만 참으로 훌륭한 이상적인 오갓피키 모시치의 위엄


   이 기이한 일곱가지의 이야기를 한 작품으로 엮어주는 것은 [맏물 이야기]로 이미 그 매력을 충분히 느낀 이 지역의 오갓피키 "모시치"의 존재입니다. 우리로 치면 파출소장 정도가 되려나 모르겠습니다. 가장 와닿는 것은 보안관 정도가 아닐까 싶어요. 어쨌거나 강력범죄가 발생하면 항상 나타나서 사건을 해결하고 범인을 잡는 주체이니 말입니다.


   이 "모시치"가 단지 사건을 파헤치고 범인을 잡는 형사나 경찰 정도의 역할만 했다면 그다지 매력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모시치는 생긴 것에 비해서는 훨씬 마음 씀씀이가 따뜻하고 배려가 깊은 인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의 행동을 보면 카리스마가 있고, 똑똑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존중하는 굉장히 아이디얼한 이상적인 캐릭터입니다. "모시치"의 존재 만으로도 에도 시리즈의 특징인 사람중심의 이야기, 따뜻하고 애틋한 사람사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범인을 찾는 과정은 허접하다 싶은 부분도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함정수사를 사용해서 함정에 걸린 범인이 자백을 하도록 유도하고, 범법은 아니더라도 편법에 가까운 방식의 수사를 거침없이 사용하기도 합니다. 수사방법 자체가 특별할 것이 없는 옛날이야기이다보니 미스터리적 요소가 크게 작용하기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적인 한계를 감안하면 정말 능력있고 훌륭한 주인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력과 인격이 동시에 갖추어진 캐릭터라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겠죠. 중년의 아저씨인데도 막연한 호감이 가는 것은 어쩔수가 없습니다.




#3. 호러, 미스터리를 빙자한 전원일기형 사랑이야기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는 에시당초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한 응징이라던가, 범행수법 등에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사회파 미스터리의 특성처럼 오히려 "누가 무엇때문에?", 혹은 "어쩌다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것에 작가의 시선이 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소재는 불가사의한 일곱가지 괴담이 등장하지만 괴담을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등장인물의 과거라던가, 관계속에서 일어났던 숨겨진 이야기 등이 때로는 쓸쓸하게, 때로는 따스하게 나타납니다.


   살인도 있고, 피해를 입는 사람도 있지만 어쩌면 그런 사고는 이야기를 끌어내는 기본적인 설정으로 작용할 뿐, 오히려 당시 시대의 시대상을 묘사하는 부분의 비중이 큰편입니다. 시대상, 생활상이 사건을 풀어나가는데 이해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묘사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이야기나 가슴에 맺혀 있던 응어리의 해소과정에서 발생하는 우발적인 범죄 등이 다루어 지는 것입니다.


   이 일곱가지 이야기속에 조금을 쓸쓸한 사람들의 아픔도 있고, 그저 그런 삶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찬찬히 바라보면 의외로 그 속에 연애코드가 드러가 있는 사랑이야기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읽고나면 뭔가 으스스한 기분이 아니라 살짝 가슴 따뜻한 느낌이 더 깊이 와 닿는 것이겠지요. 모시치 시리즈의 전편에 해당하는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는 기이한 괴담을 빙자한 사람사는 전원일기이자 따뜻한 애정이 넘치는 연애소설과도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리온 - 새벽의 주검
디온 메이어 지음, 강주헌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1. 남아공출신 작가 디온 메이어의 독특함이 넘치는 범죄 스릴러


   남아공 작가의 작품은 처음 읽은 것 같습니다. 남아공 출신의 작가 디온 메이어는 [오리온]을 통해 자국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약간은 생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신선했습니다. 남아공의 역사나 특징을 잘 알았다면 이 작품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오히려 잘 몰라서 더 미스터리적인 요소를 많이 느낄 수 있었던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오리온]이라는 작품이 단순히 남아공의 특수성이 많이 반영된 것이라면 전세계에 번역되고 출간될 일은 없었겠지만 다행히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느 누가 접해도 공감할 만큼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본적인 본성과 심리적 고뇌를 디테일하게 잘 표현해주고 있었습니다. 사실상 표면적으로는 범죄 소설이고 이런 스릴러적인 스토리가 굉장한 가독성을 제공해주지만 [오리온]이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지점은 오히려 심리, 병리학적인 관점에서 깊이있게 다루어지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벼운 스릴러소설에 그치지 않고 묵직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2. 입체적인 캐릭터 묘사를 통해 던지는 작가의 근본적 질문


   [오리온]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전형적인 면을 가지고 있어 독자입장에서 받아들이기 무척 간편한 면이 있습니다만 주요 캐릭터들의 내면에 감추어진 또 다른면에 주목하게 만듦으로써 캐릭터들의 다면적인 요소를 잘 살려주고 있습니다. 이런 기교는 독자로 하여금 긴 장편소설을 읽는 과정에 작가가 의도한 인간 내면의 문제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통상 사람들은 흑과 백으로 명확히 나뉘는 이분법적인 인식을 편안해하는 편입니다. 소설속에서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선역이 있고, 이에 대항하는 악인이 있습니다. 또는 악인이 있고 차악인이 있는 형식입니다. 통상 악인이 먼저 공격을 하고 선역이 이를 어렵게 어렵게 방어해내고 승리함으로써 소설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이야기는 해피앤딩으로 끝납니다. 독자는 조마조마하며 읽다가 시원한 감정적 해소를 느끼며 '재미있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이런 일반적인 흐름과 상당히 다른 양상입니다. 선역과 악역의 대립으로 보여지다가 어느순간 선악이 무엇인지 헤깔리게 만듭니다. 작가는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이길래 딱잘라 구별하려고 하냐고 의문을 제시하는 듯 합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선과 악에 대해 끝없이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선악의 모호함을 지속적으로 고민합니다. 작가는 독자들에게 "당신들도 사실 아닌척하고 있지만 주인공과 비슷한거 아니냐?"라고 묻는 것만 같습니다


"모두가 악하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런 사실을 몰랐다. 올바른 선택은 살아남는 것이었다. 누구도 그에게 수작 부릴 수 없다는 걸 확실하게 알려주는 것이었다." p260


"나는 예전에는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내면의 공격성을 발견했다.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알코올의 힘을 빌렸고, 그 결과 사회적으로 위축되고 제한적이며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경찰의 동료애라는 안전한 품을 피난처로 삼았다.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그리고 매 순간 악을 사냥하며 선을 위해 싸운다는 생각으로 그런 변화를 합리화 했다." p403


"그는 그녀와 함께 기꺼이 타락의 수렁으로 떨어지려 했지만, 자신의 내면에는 그처럼 사악한 면이 없다는 걸 깨닫고 자신이 본질적으로 선한 존재라는 생각에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고 새로운 깨달음이었다."p409


"오랜 시간 동안 악마를 뒤쫓았지만, 바로 내 안에 사악한 악마가 도사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나 자신은 모든 악을 초월해 있다고 오만하게 생각했던 까닭에 그런 결과는 자업자득이었다." p589


   이작품이 가지고 있는 교차구성이 이러한 문제를 더욱 극명히 고민하게 만드는 훌륭한 장치 역할을 해줍니다. 기본적인 살인사건과 그 범인을 쫓는 스토리에 무척이나 빈번하게 주인공의 아주 어린시절부터의 과거사를 교차해서 두가지의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이죠. 초반에는 왜 굳이 이렇게까지 어린시절 이야기까지 구구절절 하는 것인가 의아했지만, 읽어나가다보면 역시나 주인공에 대한 깊은 이해를 위해 작가가 의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좀더 근본적으로 인간의 선악의 모호함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범죄 사건과 그 추적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남아공사회의 특수성


   이 소설의 제목 [오리온]은 상당히 잘지어진 느낌입니다. 이 제목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이병헌이 등장했던 드라마 "아이리스"와 그 후속편 "아테나"였습니다. 모두 메인 스토리의 문제를 일으키는 특징적인 조직의 명칭입니다. 이런 제목으로 사용된 단어의 집단을 밝혀나가면서 집단과의 대립이 묘사되어 가는 과정을 통해 지금 진행되는 이야기가 단순히 간단한 범인잡기 수준의 스케일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음모이론을 떠올리며 흥미를 더욱 느끼는 장점도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오리온]이라는 명칭을 쓰는 조직이 그다지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조직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사회속에 뿌리내린 이런 조직들의 의도와 내막을 밝혀가는 과정을 그리는 것은 그 사회의 명암을 드러내기에 아주 좋은 도구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아주 조금씩 조금씩 이 조직이 어떤 조직이며 왜 생겨났는지 어떤 위해를 가했는지 등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남아공 사회의 역사적 독특함과 정치상황등이 잘 나타납니다. 자세히는 알수 없지만 예사롭지 않음을 어렴풋이 느끼게 해줍니다. 이 소설 한권 때문에 남아공의 역사와 사회, 정치적 특수성, 세계 정세속에서의 위치 등을 알고 싶게 만들어줍니다. 아주 일반적인 상식으로 남아공하면 "다이아몬드"와 "인종차별"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이 소설에는 두가지 특징 모두를 맛볼 수 있습니다. 맛만 보여줍니다. 더 자세한건 범죄 스릴러인 이 책 말고 다른책으로 읽으라는 것이겠죠?


   작가의 다른 작품[프로테우스]에는 [오리온]에서도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하는 거구의 흑인 용병 "음파이펠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모양인데 아무래도 흑인이다보니 이 캐릭터가 주인공인 작품이라면 [오리온]보다도 좀더 "인종차별"문제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프로테우스]도 읽어봐야 겠습니다. 사실은 주인공 "판 헤이르던"보다는 후반부에만 등장하는 "음파이펠리"가 저에게는 훨씬 더 매력적인 존재였거든요.



 

#덧1 : 인간의 악한 본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싶었던지 이 소설에서는 성적인 코드, 불륜 등의 묘사가 많았는데 역시나 저에게는 감정요인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착한 척"을 더덕더덕 붙여둔 사람인가 봅니다.


#덧2 : 최근에 읽은 두 작품이 모두 배경은 전혀 다르지만 비슷한 양상인데 가노 료이치의 "환상의 여자"와 스케일 차이는 있지만 이래저래 비슷한 점이 참으로 많습니다. 두 작품 모두 매력적이지만 개인적으론 일본 작품이 읽기에 편안했고, 재미면에서는 "오리온"에 조금더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덧3 : 교차진행이 흥미롭고 좋았지만 인간적으로 너무 자주 교차되어서 그것은 단점이 아닐까 합니다. 한페이지 만에도 넘어가고 그러니까요. 적당한게 좋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환상의 여자 밀리언셀러 클럽 137
가노 료이치 지음, 한희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1. 남자는 '못먹어도 고다', 험프리 보가트식 하드보일드가 빛나는 미스터리 소설


   남자와 여자의 사랑법에 대한 차이를 흔히 화성인 Vs 금성인으로 표현하곤 합니다. 그만큼 남녀의 사랑법에는 차이가 큰 법인데, 보통 남자들의 사랑법은 이런 식이라고 합니다.


- 사랑에 아주 쉽게 빠진다 : 지나가는 여자의 향기와 뒷모습만으로도 사랑에 빠진다.

- 사랑에 빠지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 그만큼 뜨거운 반면에 빨리 식는다

- 이별앞에서 울지 않는다 : 이별을 아쉬워 하지만 또 다른 사랑을 준비하느라 바쁘고 울고 있을 새가 없다.


   그런데 적다보니 이거 진짜 일반화된 이야기들이 맞나 의심이 갑니다. 내 스스로도 전혀 동의가 안되고 주변의 남자들이 이런가 하면 별로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런 식의 정의는 남성에게 상처가 많은 여성이(?) 만든게 아닌가 싶습니다. 가노 료이치의 [환상의 여자]에 등장하는 남자주인공 '스모토 세이지'는 위의 정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인물입니다. 잠시 만났던 한 여성(그것도 심지어 불륜녀)을 5년이 지난 후에도 전혀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남자입니다.


   5년만에 잠시 스치듯 만난 그녀, 그리고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 죽음에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음을 발견하는 주인공은 사건의 한가운데에 뛰어들어 진상을 파헤치는 험난하고 복잡한 과정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나갑니다. 그 결과로 맞닥드린 진실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대면하고 받아들이며 결국은 원하는 진실에 이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끝없이 달리고 달리다 맞고 다치고 죽을 뻔하는 위험에 처하기도 하는  주인공의 활극을 그린 이 작품은 하드보일드 로드노블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뽑을 만합니다. 재미있게도 보통 하드보일드 주인공들은 나름 주먹질도 곧잘하곤 하는데(아니면 총이라도 들고 다닌다) 우리의 주인공은 검도도 하고 건강에 이상도 없는데도 상대가 주먹쓰는 사람들이다보니 계속 얻어터집니다. 그래서 좀더 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장점도 있습니다.


   단순히 미스터리가 등장하고 그것이 풀려가는 과정과 결말이 흥미롭다기 보다는 주인공이 보여주는 사랑의 맹목성과 이기적 태도, 언듯 이해할 수 없는 끈질긴 모습, 그러니까 '도데체 이렇게 까지하는 이유가 뭔가?' 하는 생각이 날만큼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모습, 자신에게 생소한 어둠의 세계와의 조우,  사랑의 본질에 대한 고뇌 등의 일련의 과정은 읽는 내내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습니다.


#2. 어그러진 사랑의 짧은 환상, 그 회복을 위한 눈물나는 투쟁에서 배어나는 인간의 속성

 


   주인공은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사건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폭력조직들의 파워게임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의 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맹목적으로 사건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채로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자기 필요만 채워왔다는 후회, 적어도 5년이상 지속해왔던 그 죄책감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것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녀를 항상 내가 보고싶은 대로밖에 보지 않았던 것이다. 딱딱한 껍질 속에 너무나도 부드러운 웃음을 지닌 여자. 하지만 그 웃는 얼굴 속에서 나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했을 뿐이다. 누구에게서 아무것도 기대받지 않는, 마음 놓을 수 있는 곳, 기대받고 있는 것은 단지 일정한 시간뿐. 내가 그곳에 있은 것뿐. 그것은 내가 멋대로 그리고 있었을 뿐인 곳이었다." p.403


"나와 만났을 때 그녀는 고독했다. 그전부터 계속 고독했고, 나와 만났을 때도 고독했고, 그리고 나와 함께 보내고 있어도 또한 고독했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고독을 몇 분의 1만큼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 자신만을 밀어붙이려 했을 뿐."p549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녀를 둘러싼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계속해왔던 고민이 깔끔하게 해소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는 자신이 귀만 남아서 이 자리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흘러 들어오는 말을 정리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바라서 안 것임에도 불구하고 비겁하게도 후회감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 (중략) 이것이 당신이 알고 싶었던 사실이라는 녀석이지. 이만큼 들었으면 만족하시나?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어진 내게 가오루코는 다시 한 번 "만족해?"라고 도발하는 듯이 물었다." p.662~3


   그녀의 주변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을 모두 정리하고 나서야 받게 된 그녀의 편지를 통해 죽음 직전 그녀의 진심을 뒤늦게 읽게되는 주인공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자신에게 일어났던 혼란을 어떻게 정리할지 ​마음을 어느정도 정하게 됩니다.


"가슴의 아픔이 당분간은 낫지 않겠다는 것을 깨달은 한편, 나는 또 하나의 사실도 깨달았다. 자신의 마음에 억지로 마무리를 지을 필요 따위 없었다. 억지로 잊어버리려고 애쓸 것도, 그녀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할 것도, 하물며 안녕을 고하려고 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내 안에 살아 있다. 울고 싶으면 울고, 몸부림치고 싶으면 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내 안에서 죽어버린 누군가가 계속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거는 결코 사라지지는 않고, 조금씩 멀어져 갈뿐이다. 그렇게 지독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눈을 감고 바라기만 하면 언제든 그녀를 만날 수 있다." p685

   저는 이런식의 결착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3. 어쩌면 치명적인 약점이 될지도 모를 치밀하고 섬세한 주인공의 심리묘사와 동기 



   한 남자의 대 활극이자 모험담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 [환상의 여자]는 주인공의 심리묘사와 독백, 각종 정보들을 정리하고 판독하는 과정들을 촘촘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과정이 지나치게 디테일하다는 인상이 들었습니다.  과유불급이라고 이런 디테일한 묘사와 전개를 받아들이는 독자의 성향에 따라서는 상당히 지루해지거나 흥미를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반 정도 들어서면 슬슬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아니 자기 부인도 아니고 처자식도 있는 사람이 술집 여자와 불륜을 저질렀던 일인데 오히려 잊고 싶고, 묻어버리고 싶은 기억인 것이 상식적이지 그 여자가 누구인지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찾고 싶어한다는게 말이 되는건가?' 하는 의문 말입니다. 주인공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라고 받아들이면서 이야기에 끌려가지만 한 순간 근본적인 이 활극의 동기가 납득이 안되면 이 책을 읽는 리듬이 바로 무너지게 되는 작품입니다. 게다가 700페이지에 달하는 긴 내용이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30대 중반의 남성이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이런 과정과 그속에서 갈등하고 의지를 불태우는 과정들이 무척이나 공감이 되고 대리만족이 되었습니다한 남자의 악착같은 노력이 섬세하게 묘사되는 이 작품은 끈적끈적한 하드보일드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마치 나의 분신이 책속에서 끝없이 돌아다니며 진실을 알려고 하는 느낌이 들어 너무 몰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한 여자의 죽음 뒤에 감춰진 사실이 하나하나 밝혀지는 과정도 미스터리적 요소를 충분히 만족시키고도 남을 만큼 빈틈없이 잘 짜여져 있어 그것 만으로도 무척 훌륭한 작품입니다. 저에게는 역시 성인 남성이 주인공인 1인칭 소설이 제 취향에 잘 맞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주의 개척자 불새 과학소설 걸작선 7
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안태민 옮김 / 불새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1.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작품적 특징이 잘 나타나는 지극히 미국적인 SF 대작..


   믿고 보는 SF의 그랜드마스터 하인라인 선생님의 [우주의 개척자]는 상당히 미국적인 작품입니다. 이 이야기의 전개 자체가 미국의 개척자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은 각각 배우자가 없고 아이가 있는 남녀가 합쳐진 가정의 성장기 남자 아이가 화자입니다. 아무래도 이런 조건이다보니 가정문제가 덩달아 끼어드는데,  이 부분 때문에 더욱 성장소설 같은 늬앙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미 우주 왕복선이 활발하게 여러별들로 왕복을 하고 있던 시기, 지구 인구의 수용한계가 넘어서는 상황에서 목성의 위성인 "가니메데"로 이민을 떠나 그곳에 정착하고자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짧게 요약된 스토리를 대하면 벌써 영국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던 메이플라워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미국이 영국과의 식민지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전쟁을 벌여 독립을 쟁취하는까지 생각이 미칩니다. 게다가 미국에 이주한 이주민들은 그곳에 버젓이 토착 인디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뚝만 박으면 내땅이라고 우기며 땅을 넓혀갔던 것까지 막 중첩되어 떠오릅니다.


   미국의 이런 개척사와 하인라인의 [우주의 개척자]의 이야기는 거의 평행이론이라 할 만큼 닮아 있습니다. 그저 미국의 초기 역사의 배경을 우주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심지어 우주 이민자들을 "가니메데"로 옮겨줄 우주선의 이름도 '메이플라워' 호니 말다했습니다. 내용을 보면 개척지에 도착해서 제일 많이 하는 일이 자영농이 되어 돌덩어리인 땅을 농지로 만들어 작물을 재배하는 일입니다. 미국인들의 개척정신과 땅따먹기에 대한 개념이 너무나도 극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또 하나의 특징은 소설에 등장하는 과학적 이론이나 표현들이 그다지 신선하거나 놀랍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이 소설이 1953년 작인데다가 SF계의 그랜드 마스터 님이시니 얼마나 많은 후배 작가들이 영향을 받아서 이 이론들을 접목하고 발전시켰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소설이 여지껏 살아남아 출간된 것을 생각하면 하인라인 선생이 우주의 개척자는 아닐지라도 SF의 개척자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오래되도 너무 오래된 이 소설이 지금 시점에서 읽으면 식상할 수도 있는 내용들이지만 그 당시의 과학수준이나 환경을 생각하면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우주여행에 관한 이론들은 지금도 거의 실현되지 않고 있지만 전혀 생뚱맞게 들리지 않는 것은 과학적 이론들이 탄탄하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읽히기 보다는 '아, 그런가보다..' 정도의 설득력은 충분히 있다는 의미입니다. 엉뚱한 이야기이지만 소설 초반에 등장하는 조리기구 "퀵소"같은 것은 흥미롭습니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쓸 당시는 전자레인지가 발명되지 않았을 시절인데 이 "퀵소"라는 조리기구는 딱 지금의 전자레인지 같은 역할을 합니다.




#2. 지극히 현실적인 아이러니한 특징이 돋보이는 SF


   다른 SF 작가들의 글을 별로 접해보지 못해 어떻다고 단정하기 어렵지만 하인라인 선생의 SF는 그야말로 딱 Science Fiction입니다. 통상 SF에 원플러스 원처럼 끼어드는 환타지가 거의 없습니다. 이 부분이 저에게는 굉장한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SF에서 과학적이고 이론적인 내용에 설득력을 부여하는데 가장 쉬운 방법이 환타지를 접목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이해하기 어렵지만 "와쿠와쿠족이라는 우주의 생명체가 와서 만들어줬다."라고 하면 세상 누가 "와쿠와쿠족이 그걸 어떻게 만드냐?"라고 따질수가 있겠습니까? 만나본 적도 없는데.. 뭔가 미심쩍지만 그렇다치고 읽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하인라인의 [우주의 개척자]에는 미지의 존재가 전혀 등장하지 않(막판에 미지의 존재가 만든 물건은 등장함)습니다.


   개척지 우주 "가니메데"로 떠나기 위해 우주선이 발사되는 순간부터 벌써 돌아가겠다고 싸우는 사람이 등장하고, 지구나 달을 구경하기 위해 창가를 독점하고, 우주선 선장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막무가내 인원들이 등장합니다. 그 와중에 우주선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자치기구를 만들어서 규칙을 정하고 우주여행기간 동안 생활수칙을 만들고 서로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비단 우주선을 통한 우주여행이 아니더라도 인간세상 어디를 들여다봐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설정과 묘사들이 이 작품의 리얼리티를 유지해줍니다. '딴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 인간세상인데 지금보다 미래의 이야기다.' 이런 인식 말입니다. 


   지구에서 떠날때는 많은 사람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황금빛 약속을 해주지만 막상 "가니메데"에 도착한 사람들은 현실의 매서움에 당황합니다. 그러나 곧 그곳의 일원이 되어 무책임한 지구와 이곳 "가니메데"사이의 엄연한 입장차이를 확인하게 됩니다. 서로를 위해 자급자족을 실현해 독립하고자 본토를 적대시하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개척 당시 미국과 영국의 대립이 떠오르게 합니다. '인간사 어디가나 똑같구만'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개척지인 "가니메데" 내의 문제에서도 선 이주민과 후발 이주민과의 소유물 차이에서 오는 빈부격차, 갈등에 대한 설정들이 무척이나 현실적입니다. 먼저 농지를 일구고 그 생산수단을 발판으로 지속적으로 땅을 넓혀가는 초기 이주민과 위원회에 큰 빚을 진채로 거친 돌과 큰 바위 밖에 없는 황무지를 개간해야하고 정해진 기간내에 개간한 농토를 갚아야 하는 후발 이주민간의 간극은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생산수단의 소유 유무 때문에 도저히 격차를 좁히기 힘든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와 비교해도 전혀 차이를 느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이런 문제는 적어도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한 끝없이 지속될 문제라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하인라인의 [우주의 개척자]에 나타나는 이런 당면 현실과 그 속에서 가진 것없이 맨몸으로 부딪히고 고군분투하는 주인공 가족의 이야기는 세계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이 가장 부유하고 번창하며 개척자 정신이 빛났던 1950년대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로 치면 IMF 이전 한창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던 1980년대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나라도 한창 안정된 직장보다는 벤처창업 등의 새로운 도전과 개척을 추구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게 해 주었던 작품입니다. 다만, 화자가 어린 아이이다보니 서술 내용을 완전히 공감하기에 방해가 된 건 사실입니다. 작가의 의도는 이해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달을 판 사나이"때처럼 성인 남성이 주인공이자 화자였다면 더욱 공감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3. Home..

 

   이 작품에서 주요한 테마 중 하나는 "Home", 고향입니다. 인간이 개척자 정신을 폼내며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용기와 동시에 가지게 되는 근원적인 마음은 고향으로의 회귀가 아닐까 합니다. 내가 돌아갈 고향을 잊는 인간은 자신 본연의 기반을 잊는 것일 수 있습니다. 새로운 도전을 통해 성취감을 누리기도 하지만 도전의 결과가 좋지 않을 때, 그리고 도전 중 극복하기 어려운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는 돌아갈 고향을 떠올리며 용기를 얻고 다시 나아갈 힘을 받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미 떠나온 개척지가 각자의 새로운 고향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태어난 후세는 그 곳이 실질적인 고향이 되는 것이지요. 이 작품에는 이러한 고향에 대한 향수, 의미, 새로운 의미부여 등이 깊이있게 표현됩니다.

 

"아빠, 우리는 왜 이곳에 왔을까요?" "으음.. 네가 원해서 온 거잖니. 기억 나지 않니?". "저도 기억은 해요." "뭐, 네가 이곳에 온 진짜 이유, 근본 이유를 말해보자면 아마 네 후손들에겐 굶주림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겠지. 지구는 이미 너무 인구가 많으니까. 빌" 나는 하늘의 지구를 다시 쳐다보고 말했다. "아빠, 제가 알게 된 것이 있어요. 인생에는 하루 세 끼를 풍족하게 먹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야만 한다는 걸요. 분명 이곳에서는 먹는 건 풍족할 거예요. 이곳에서는 당구공에서도 풀이 자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곳으로 온 것이 후손들에게 좋은 결정이 될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그들도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이제야 제 실수를 했다는 걸 알게 됐어요." p183

 

   지구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목성의 한 위성에 마련된 개척지에 도착하고 우리의 고향과는 전혀 다른 환경을 몸소 접한 주인공 빌은 단지 먹고사는 문제만으로 인간이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자연재해와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이겨냅니다. 그리고 자신이 서있는 바로 그곳이 새로운 고향임을 인식합니다.

 

"태양의 빛줄기는 이제 농장의 집들의 지붕 꼭대기까지 닿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검게 보이던 <고요의 호수> 수면 위로 퍼져나가 호수를 보라색으로, 그리고 다시 파란색으로 변화시켰다. 이곳이 내가 사는 별이며, 이곳이 내 고향이었다. 나는 이곳을 절대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p256

 

로버트 A. 하인라인의 1953년작 [우주의 개척자]는 시대적 한계로 인해 가부장적인 가정의 묘사, 현재시점에서는 다소 진부한 이론, 다분히 미국적인 발상과 전개 등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읽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SF의 명작임은 분명합니다. 이 작품을 통해 환타지가 쏙 빠진 오리지날 SF의 매력을 다시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광금지, 에바로드 - 2014 제2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연합뉴스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오덕들의 세계를 들여다 보다


   이 책 [열광금지, 에바로드]는 수림문학상 심사위원이셨던 정이현 작가님이 진행중인 팟캐스트 낭만서점에 소개되어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이 하도 독특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소문으로만 들었지 직접 정주행해본 적이 없던 "에반게리온"에 대한 내용이라는 점과 고액의 비용을 들여 별 대단할 것도 없는 스탬프 랠리를 국제적으로 참여하는 청년의 이야기는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제목에서도 풍기듯이 오타쿠 들을 위한 소설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읽기전에 준비해야할 사전 작업이 좀 있었습니다. 먼저, 이 책의 발단이 되는 일본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을 봐야했습니다. 몰라도 어느정도 이해하고 재미는 있을거라 예상은 했지만 어차피 뭐가 되었건 잘 알고 보는 것과 모르면서 보는 것은 분명 다르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요. 일단 전편을 준비는 했는데 초기작인 TV판 시리즈만 겨우 보았습니다. 그림이 훌륭한 것도 아니었고 나름의 고민과 철학이 묻어 있었습니다만 그야말로 오타쿠적인 내용이다보니 이나이에 저를 뒤흔들거나 빠져들게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13세 소년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기에는 년식이 너무 많이 된 것도 같습니다. 오히려 부모들에게 감정이입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않겠습니까?


   다음으로 이 소설의 발단이 된 다큐멘터리를 먼저 보아야 했습니다. 에반게리온 오덕인 두 청년이 앞서 설명한 4개국 스탬프 랠리를 참여하는 과정을 제작한 다큐멘터리 [에바로드]가 바로 그 문제의 영상이었습니다. 작가는 이 다큐와 다큐의 주인공들을 대상으로 취재를 해서 사실 7 : 상상 3의 황금비율로 [열광금지, 에바로드]라는 독특한 형식의 소설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된 다큐를 안보고 이 책을 읽는 건 어불성설이었습니다. 네이버 VOD로 서비스 중이어서 2000원을 지불하고 다큐를 보았습니다.


에바로드

감독
박현복
출연
박현복, 이종호, 양승석
개봉
2013 대한민국

리뷰보기


   의외로 상당히 잘 만들어진 다큐였고, 충분히 재미가 있었습니다. 오덕이 생소한 제 입장에서는 어처구니 없기도 하고, 한편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하면서 잘 봤습니다. 이런 저런 준비과정을 거치느라 사다놓고 꽤나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의 애니메이션도 보고, 다큐도 보고, 소설도 읽으면서 잘 몰랐던 분야에 대해 눈을 떠서 좋았습니다. 배움이란 시기도 한계도 없는 것이지요. 오덕들의 세계를 조금 들어다보고 그들을 통해 저 자신의 욕망을 돌아보게 되어 아주 유익했습니다. 이 책은 쉬지않고 한번에 읽었을 만큼 흡입력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오덕들의 세계에 슬쩍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2. 오덕이란 무엇인가?


   오덕이라하면 '다섯가지의 덕'을 떠올리시는 분은 참으로 고상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지금의 오덕은 '오타쿠' 또는 '오덕후'의 준말입니다. 오덕후는 특별한 의미, 이를테면 "자신의 덕을 두텁게 하자" 뭐 이런 훌륭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마니아를 뜻하는 일본어 "오타쿠"를 한국식으로 편하게 발음하고 쓰다보니 파생한 단어입니다. 아무 의미없습니다. 굳이 뜻을 더한다면 "국산", "토종 오타쿠" 정도의 의미를 더할 수 있겠습니다. 일상적으로는 오덕이나 덕후라고도 부릅니다. 그렇답니다. 제 주변엔 이런게 오덕이니 덕후니 이런 단어를 써서 바로 알아들을 분이 별로 없습니다.


"'덕'이라는 단어를 이런 식으로 활용한다. 덕심=오타쿠들의 심리. 덕부심=오타쿠들의 자부심. 덕질=오타쿠 활동. 덕력=오타쿠인 정도. 덕친=오타쿠 친구. 양덕=서양인 오타쿠. 밀덕=밀리터리 오타쿠. 탈덕=오타쿠이기를 그만둠" p9

  

   그러니까 무언가에 빠져있는 것을 "덕"이라고 해야하나 싶습니다. 그밖에도 어떤 계기로 덕질에 입문하게 되는 경우를 "입덕", 덕질을 쉬는 경우를 "휴덕", 덕질은 그만두는 경우를 "탈덕"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밖에 부적절한 "씹덕"이니 "씹덕후" 뭐 이런 나쁜 표현도 있나 봅니다. 이런 덕에 관련된 내용을 하나하나 알아가니 놀라운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그런거죠. 그동안 모르던 은밀한 무언가를 조금씩 엿보는 기분같은거? '나도 오덕기질은 있는데..'하는 생각도 들고 말입니다. 어차피 책에 관련해서는 뒤늦게 오덕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시도 합니다. 아직은 초보지만 덕력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노여사는 서서히 탈덕의 경지에 이르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이중에 가장 좋았던 단어가 바로 '덕업일치'였습니다. 그러니까 덕질을 하는 대상이 바로 직업이 되는 환상의 경지죠. 무언가를 너무 좋아해서 오덕질을 해오다보니 유명해지거나 전문가가 되어서 그대로 직업으로 연결되어서 덕질로 밥을 벌어먹는 상황 말입니다. 책을 좋아해서 읽다가 급기야 책을 만들어서 돈을 벌거나, 소설이나 에세이 또는 전문서적을 써서 전업작가가 되는 것이죠. 아 물론 좋아서 하는 일이 직업이 되어 버리면 즐겁게 계속 할 수 있을지의 문제 때문에 덕업일치가 좋은거냐 안좋은 거냐에 논란이 있을 수는 있는데 기본적으로 직업적으로 돈을 많이 벌어버려서 전전긍긍하지 않는다면 좋은일이라고 봅니다. 솔직히 돈이 안되도 입에 풀칠할 수만 있다면 직장에서 스트레스 받고 얼마 안되는 시간에 힘들게 덕질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나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처럼 크게 치우치지 않고 무난하게 살아온 사람에게는 '어릴때 뭔가 대책없이 덕질을 좀 해볼껄 그랬나?'하는 ​생각을 종종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이 책의 내용에 많이 몰입했습니다.


 


#3. 열광금지, 에바로드! 그는 왜 오덕이 되어 덕질을 하는가?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이 소설이 에반게리온에 빠진 청년의 행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초반에는 그래서 스탬프 랠리에 대해서는 언제 나오나 싶었는데 정작 작가의 관심은 주인공이 오덕질을 하게 된 근본 원인부터 그것이 한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 등에 주목하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은 전형적이지 않지만 결국 주인공의 성장스토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는 오덕이 되어 덕질을 일삼는 것일까요? 그것도 상당한 비용을 들여서 전세계 그 많은 에반게리온 오덕들 중 유일하게 혼자만 4개국 순방 스탬프 랠리를 성공한 것일까요? 중간에 보면 회사에서 중요한 마감일이니 휴가를 쓰지 않는 것이 어떤가 하는 상사의 압박에 '휴가 결재 해주지​ 않으면 사표를 쓰겠다.'라는 결심까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에반게리온 스탬프 랠리가 뭐라고 말입니까? 회사까지 때려치울 결심을 하고 내 생돈을 써서 통장을 바닥내면서까지 악착같이 한 것일까요? 그것은... 그 이유는... 역시나 각자가 읽어보셔야 합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작가의 의도와 힌트만 있을 뿐입니다.

   선명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주인공의 성장과정과 가정사, 그리고 주변환경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 사회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지만 작금의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이 열정을 불태울 일자리도, 환경도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더 나아가 기득권층의 울타리만 점점 높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현재 사회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성세대가 성장할 때에 비하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낭만따위는 생각도 못할만큼 세상에 편입하려는 혹독한 노력을 함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자리잡기가 너무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그런 세상을 만들어 놓은 것은 기성세대의 선택이자 책임입니다. 그리고 조금은 다른 모양새로 살아가는 젊은 인생에 대한 "평가의 잣대"가 무척 가혹하기도 합니다.

   [열광금지, 에바로드]의 주인공은 어려운 형편속에 때로는 방황도 해가며 악착같이 살아온 자신의 20대에 무언가 보상을 해주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지나온 과거와 이별하고 새로운 30대를 맞이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속에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선언하는 과정을 겪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탬프 랠리를 통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저는 독립 저예산 다큐멘터리 제작감독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순간, 스스로도 자신이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그는 굳게 닫힌 세상의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장강명 작가가 소설속에서 인물의 세밀한 내면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원래 원작인 다큐멘터리 [에바로드]는 실제로 두명의 청년이 각자 영상제작과 OST를 나눠 맡았고 스탬프 랠리도 두명이 함께 떠납니다. 그러나 소설화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의 인생여정과 내면의 변화, 갈등과 고뇌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주인공을 한명으로 설정하고 두 사람을 적당히 섞습니다. 이러한 선택은 참으로 적절했다는 생각입니다. 주인공이 원작처럼 두명이었다면 독자들이 감정이입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읽다보니 금방 결말에 도달해 있다는 걸 깨닫게 된 이 소설 [열광금지, 에바로드]는 적당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재에 깊이 있는 주제의식과 적절한 내용진행이 무척이나 좋았던 맘에드는 작품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