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여자 밀리언셀러 클럽 137
가노 료이치 지음, 한희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1. 남자는 '못먹어도 고다', 험프리 보가트식 하드보일드가 빛나는 미스터리 소설


   남자와 여자의 사랑법에 대한 차이를 흔히 화성인 Vs 금성인으로 표현하곤 합니다. 그만큼 남녀의 사랑법에는 차이가 큰 법인데, 보통 남자들의 사랑법은 이런 식이라고 합니다.


- 사랑에 아주 쉽게 빠진다 : 지나가는 여자의 향기와 뒷모습만으로도 사랑에 빠진다.

- 사랑에 빠지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 그만큼 뜨거운 반면에 빨리 식는다

- 이별앞에서 울지 않는다 : 이별을 아쉬워 하지만 또 다른 사랑을 준비하느라 바쁘고 울고 있을 새가 없다.


   그런데 적다보니 이거 진짜 일반화된 이야기들이 맞나 의심이 갑니다. 내 스스로도 전혀 동의가 안되고 주변의 남자들이 이런가 하면 별로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런 식의 정의는 남성에게 상처가 많은 여성이(?) 만든게 아닌가 싶습니다. 가노 료이치의 [환상의 여자]에 등장하는 남자주인공 '스모토 세이지'는 위의 정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인물입니다. 잠시 만났던 한 여성(그것도 심지어 불륜녀)을 5년이 지난 후에도 전혀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남자입니다.


   5년만에 잠시 스치듯 만난 그녀, 그리고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 죽음에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음을 발견하는 주인공은 사건의 한가운데에 뛰어들어 진상을 파헤치는 험난하고 복잡한 과정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나갑니다. 그 결과로 맞닥드린 진실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대면하고 받아들이며 결국은 원하는 진실에 이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끝없이 달리고 달리다 맞고 다치고 죽을 뻔하는 위험에 처하기도 하는  주인공의 활극을 그린 이 작품은 하드보일드 로드노블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뽑을 만합니다. 재미있게도 보통 하드보일드 주인공들은 나름 주먹질도 곧잘하곤 하는데(아니면 총이라도 들고 다닌다) 우리의 주인공은 검도도 하고 건강에 이상도 없는데도 상대가 주먹쓰는 사람들이다보니 계속 얻어터집니다. 그래서 좀더 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장점도 있습니다.


   단순히 미스터리가 등장하고 그것이 풀려가는 과정과 결말이 흥미롭다기 보다는 주인공이 보여주는 사랑의 맹목성과 이기적 태도, 언듯 이해할 수 없는 끈질긴 모습, 그러니까 '도데체 이렇게 까지하는 이유가 뭔가?' 하는 생각이 날만큼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모습, 자신에게 생소한 어둠의 세계와의 조우,  사랑의 본질에 대한 고뇌 등의 일련의 과정은 읽는 내내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습니다.


#2. 어그러진 사랑의 짧은 환상, 그 회복을 위한 눈물나는 투쟁에서 배어나는 인간의 속성

 


   주인공은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사건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폭력조직들의 파워게임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의 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맹목적으로 사건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채로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자기 필요만 채워왔다는 후회, 적어도 5년이상 지속해왔던 그 죄책감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것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녀를 항상 내가 보고싶은 대로밖에 보지 않았던 것이다. 딱딱한 껍질 속에 너무나도 부드러운 웃음을 지닌 여자. 하지만 그 웃는 얼굴 속에서 나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했을 뿐이다. 누구에게서 아무것도 기대받지 않는, 마음 놓을 수 있는 곳, 기대받고 있는 것은 단지 일정한 시간뿐. 내가 그곳에 있은 것뿐. 그것은 내가 멋대로 그리고 있었을 뿐인 곳이었다." p.403


"나와 만났을 때 그녀는 고독했다. 그전부터 계속 고독했고, 나와 만났을 때도 고독했고, 그리고 나와 함께 보내고 있어도 또한 고독했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고독을 몇 분의 1만큼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 자신만을 밀어붙이려 했을 뿐."p549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녀를 둘러싼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계속해왔던 고민이 깔끔하게 해소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는 자신이 귀만 남아서 이 자리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흘러 들어오는 말을 정리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바라서 안 것임에도 불구하고 비겁하게도 후회감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 (중략) 이것이 당신이 알고 싶었던 사실이라는 녀석이지. 이만큼 들었으면 만족하시나?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어진 내게 가오루코는 다시 한 번 "만족해?"라고 도발하는 듯이 물었다." p.662~3


   그녀의 주변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을 모두 정리하고 나서야 받게 된 그녀의 편지를 통해 죽음 직전 그녀의 진심을 뒤늦게 읽게되는 주인공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자신에게 일어났던 혼란을 어떻게 정리할지 ​마음을 어느정도 정하게 됩니다.


"가슴의 아픔이 당분간은 낫지 않겠다는 것을 깨달은 한편, 나는 또 하나의 사실도 깨달았다. 자신의 마음에 억지로 마무리를 지을 필요 따위 없었다. 억지로 잊어버리려고 애쓸 것도, 그녀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할 것도, 하물며 안녕을 고하려고 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내 안에 살아 있다. 울고 싶으면 울고, 몸부림치고 싶으면 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내 안에서 죽어버린 누군가가 계속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거는 결코 사라지지는 않고, 조금씩 멀어져 갈뿐이다. 그렇게 지독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눈을 감고 바라기만 하면 언제든 그녀를 만날 수 있다." p685

   저는 이런식의 결착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3. 어쩌면 치명적인 약점이 될지도 모를 치밀하고 섬세한 주인공의 심리묘사와 동기 



   한 남자의 대 활극이자 모험담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 [환상의 여자]는 주인공의 심리묘사와 독백, 각종 정보들을 정리하고 판독하는 과정들을 촘촘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과정이 지나치게 디테일하다는 인상이 들었습니다.  과유불급이라고 이런 디테일한 묘사와 전개를 받아들이는 독자의 성향에 따라서는 상당히 지루해지거나 흥미를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반 정도 들어서면 슬슬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아니 자기 부인도 아니고 처자식도 있는 사람이 술집 여자와 불륜을 저질렀던 일인데 오히려 잊고 싶고, 묻어버리고 싶은 기억인 것이 상식적이지 그 여자가 누구인지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찾고 싶어한다는게 말이 되는건가?' 하는 의문 말입니다. 주인공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라고 받아들이면서 이야기에 끌려가지만 한 순간 근본적인 이 활극의 동기가 납득이 안되면 이 책을 읽는 리듬이 바로 무너지게 되는 작품입니다. 게다가 700페이지에 달하는 긴 내용이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30대 중반의 남성이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이런 과정과 그속에서 갈등하고 의지를 불태우는 과정들이 무척이나 공감이 되고 대리만족이 되었습니다한 남자의 악착같은 노력이 섬세하게 묘사되는 이 작품은 끈적끈적한 하드보일드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마치 나의 분신이 책속에서 끝없이 돌아다니며 진실을 알려고 하는 느낌이 들어 너무 몰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한 여자의 죽음 뒤에 감춰진 사실이 하나하나 밝혀지는 과정도 미스터리적 요소를 충분히 만족시키고도 남을 만큼 빈틈없이 잘 짜여져 있어 그것 만으로도 무척 훌륭한 작품입니다. 저에게는 역시 성인 남성이 주인공인 1인칭 소설이 제 취향에 잘 맞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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