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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온 - 새벽의 주검
디온 메이어 지음, 강주헌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1. 남아공출신 작가 디온 메이어의 독특함이 넘치는 범죄 스릴러
남아공 작가의 작품은 처음 읽은 것 같습니다. 남아공 출신의 작가 디온 메이어는 [오리온]을 통해 자국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약간은 생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신선했습니다. 남아공의 역사나 특징을 잘 알았다면 이 작품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오히려 잘 몰라서 더 미스터리적인 요소를 많이 느낄 수 있었던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오리온]이라는 작품이 단순히 남아공의 특수성이 많이 반영된 것이라면 전세계에 번역되고 출간될 일은 없었겠지만 다행히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느 누가 접해도 공감할 만큼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본적인 본성과 심리적 고뇌를 디테일하게 잘 표현해주고 있었습니다. 사실상 표면적으로는 범죄 소설이고 이런 스릴러적인 스토리가 굉장한 가독성을 제공해주지만 [오리온]이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지점은 오히려 심리, 병리학적인 관점에서 깊이있게 다루어지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벼운 스릴러소설에 그치지 않고 묵직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2. 입체적인 캐릭터 묘사를 통해 던지는 작가의 근본적 질문
[오리온]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전형적인 면을 가지고 있어 독자입장에서 받아들이기 무척 간편한 면이 있습니다만 주요 캐릭터들의 내면에 감추어진 또 다른면에 주목하게 만듦으로써 캐릭터들의 다면적인 요소를 잘 살려주고 있습니다. 이런 기교는 독자로 하여금 긴 장편소설을 읽는 과정에 작가가 의도한 인간 내면의 문제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통상 사람들은 흑과 백으로 명확히 나뉘는 이분법적인 인식을 편안해하는 편입니다. 소설속에서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선역이 있고, 이에 대항하는 악인이 있습니다. 또는 악인이 있고 차악인이 있는 형식입니다. 통상 악인이 먼저 공격을 하고 선역이 이를 어렵게 어렵게 방어해내고 승리함으로써 소설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이야기는 해피앤딩으로 끝납니다. 독자는 조마조마하며 읽다가 시원한 감정적 해소를 느끼며 '재미있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이런 일반적인 흐름과 상당히 다른 양상입니다. 선역과 악역의 대립으로 보여지다가 어느순간 선악이 무엇인지 헤깔리게 만듭니다. 작가는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이길래 딱잘라 구별하려고 하냐고 의문을 제시하는 듯 합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선과 악에 대해 끝없이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선악의 모호함을 지속적으로 고민합니다. 작가는 독자들에게 "당신들도 사실 아닌척하고 있지만 주인공과 비슷한거 아니냐?"라고 묻는 것만 같습니다
"모두가 악하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런 사실을 몰랐다. 올바른 선택은 살아남는 것이었다. 누구도 그에게 수작 부릴 수 없다는 걸 확실하게 알려주는 것이었다." p260
"나는 예전에는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내면의 공격성을 발견했다.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알코올의 힘을 빌렸고, 그 결과 사회적으로 위축되고 제한적이며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경찰의 동료애라는 안전한 품을 피난처로 삼았다.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그리고 매 순간 악을 사냥하며 선을 위해 싸운다는 생각으로 그런 변화를 합리화 했다." p403
"그는 그녀와 함께 기꺼이 타락의 수렁으로 떨어지려 했지만, 자신의 내면에는 그처럼 사악한 면이 없다는 걸 깨닫고 자신이 본질적으로 선한 존재라는 생각에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고 새로운 깨달음이었다."p409
"오랜 시간 동안 악마를 뒤쫓았지만, 바로 내 안에 사악한 악마가 도사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나 자신은 모든 악을 초월해 있다고 오만하게 생각했던 까닭에 그런 결과는 자업자득이었다." p589
이작품이 가지고 있는 교차구성이 이러한 문제를 더욱 극명히 고민하게 만드는 훌륭한 장치 역할을 해줍니다. 기본적인 살인사건과 그 범인을 쫓는 스토리에 무척이나 빈번하게 주인공의 아주 어린시절부터의 과거사를 교차해서 두가지의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이죠. 초반에는 왜 굳이 이렇게까지 어린시절 이야기까지 구구절절 하는 것인가 의아했지만, 읽어나가다보면 역시나 주인공에 대한 깊은 이해를 위해 작가가 의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좀더 근본적으로 인간의 선악의 모호함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범죄 사건과 그 추적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남아공사회의 특수성
이 소설의 제목 [오리온]은 상당히 잘지어진 느낌입니다. 이 제목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이병헌이 등장했던 드라마 "아이리스"와 그 후속편 "아테나"였습니다. 모두 메인 스토리의 문제를 일으키는 특징적인 조직의 명칭입니다. 이런 제목으로 사용된 단어의 집단을 밝혀나가면서 집단과의 대립이 묘사되어 가는 과정을 통해 지금 진행되는 이야기가 단순히 간단한 범인잡기 수준의 스케일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음모이론을 떠올리며 흥미를 더욱 느끼는 장점도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오리온]이라는 명칭을 쓰는 조직이 그다지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조직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사회속에 뿌리내린 이런 조직들의 의도와 내막을 밝혀가는 과정을 그리는 것은 그 사회의 명암을 드러내기에 아주 좋은 도구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아주 조금씩 조금씩 이 조직이 어떤 조직이며 왜 생겨났는지 어떤 위해를 가했는지 등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남아공 사회의 역사적 독특함과 정치상황등이 잘 나타납니다. 자세히는 알수 없지만 예사롭지 않음을 어렴풋이 느끼게 해줍니다. 이 소설 한권 때문에 남아공의 역사와 사회, 정치적 특수성, 세계 정세속에서의 위치 등을 알고 싶게 만들어줍니다. 아주 일반적인 상식으로 남아공하면 "다이아몬드"와 "인종차별"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이 소설에는 두가지 특징 모두를 맛볼 수 있습니다. 맛만 보여줍니다. 더 자세한건 범죄 스릴러인 이 책 말고 다른책으로 읽으라는 것이겠죠?
작가의 다른 작품[프로테우스]에는 [오리온]에서도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하는 거구의 흑인 용병 "음파이펠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모양인데 아무래도 흑인이다보니 이 캐릭터가 주인공인 작품이라면 [오리온]보다도 좀더 "인종차별"문제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프로테우스]도 읽어봐야 겠습니다. 사실은 주인공 "판 헤이르던"보다는 후반부에만 등장하는 "음파이펠리"가 저에게는 훨씬 더 매력적인 존재였거든요.
#덧1 : 인간의 악한 본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싶었던지 이 소설에서는 성적인 코드, 불륜 등의 묘사가 많았는데 역시나 저에게는 감정요인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착한 척"을 더덕더덕 붙여둔 사람인가 봅니다.
#덧2 : 최근에 읽은 두 작품이 모두 배경은 전혀 다르지만 비슷한 양상인데 가노 료이치의 "환상의 여자"와 스케일 차이는 있지만 이래저래 비슷한 점이 참으로 많습니다. 두 작품 모두 매력적이지만 개인적으론 일본 작품이 읽기에 편안했고, 재미면에서는 "오리온"에 조금더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덧3 : 교차진행이 흥미롭고 좋았지만 인간적으로 너무 자주 교차되어서 그것은 단점이 아닐까 합니다. 한페이지 만에도 넘어가고 그러니까요. 적당한게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