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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개척자 ㅣ 불새 과학소설 걸작선 7
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안태민 옮김 / 불새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1.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작품적 특징이 잘 나타나는 지극히 미국적인 SF 대작..
믿고 보는 SF의 그랜드마스터 하인라인 선생님의 [우주의 개척자]는 상당히 미국적인 작품입니다. 이 이야기의 전개 자체가 미국의 개척자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은 각각 배우자가 없고 아이가 있는 남녀가 합쳐진 가정의 성장기 남자 아이가 화자입니다. 아무래도 이런 조건이다보니 가정문제가 덩달아 끼어드는데, 이 부분 때문에 더욱 성장소설 같은 늬앙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미 우주 왕복선이 활발하게 여러별들로 왕복을 하고 있던 시기, 지구 인구의 수용한계가 넘어서는 상황에서 목성의 위성인 "가니메데"로 이민을 떠나 그곳에 정착하고자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짧게 요약된 스토리를 대하면 벌써 영국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던 메이플라워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미국이 영국과의 식민지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전쟁을 벌여 독립을 쟁취하는데까지 생각이 미칩니다. 게다가 미국에 이주한 이주민들은 그곳에 버젓이 토착 인디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뚝만 박으면 내땅이라고 우기며 땅을 넓혀갔던 것까지 막 중첩되어 떠오릅니다.
미국의 이런 개척사와 하인라인의 [우주의 개척자]의 이야기는 거의 평행이론이라 할 만큼 닮아 있습니다. 그저 미국의 초기 역사의 배경을 우주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심지어 우주 이민자들을 "가니메데"로 옮겨줄 우주선의 이름도 '메이플라워' 호니 말다했습니다. 내용을 보면 개척지에 도착해서 제일 많이 하는 일이 자영농이 되어 돌덩어리인 땅을 농지로 만들어 작물을 재배하는 일입니다. 미국인들의 개척정신과 땅따먹기에 대한 개념이 너무나도 극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또 하나의 특징은 소설에 등장하는 과학적 이론이나 표현들이 그다지 신선하거나 놀랍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이 소설이 1953년 작인데다가 SF계의 그랜드 마스터 님이시니 얼마나 많은 후배 작가들이 영향을 받아서 이 이론들을 접목하고 발전시켰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소설이 여지껏 살아남아 출간된 것을 생각하면 하인라인 선생이 우주의 개척자는 아닐지라도 SF의 개척자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오래되도 너무 오래된 이 소설이 지금 시점에서 읽으면 식상할 수도 있는 내용들이지만 그 당시의 과학수준이나 환경을 생각하면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우주여행에 관한 이론들은 지금도 거의 실현되지 않고 있지만 전혀 생뚱맞게 들리지 않는 것은 과학적 이론들이 탄탄하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읽히기 보다는 '아, 그런가보다..' 정도의 설득력은 충분히 있다는 의미입니다. 엉뚱한 이야기이지만 소설 초반에 등장하는 조리기구 "퀵소"같은 것은 흥미롭습니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쓸 당시는 전자레인지가 발명되지 않았을 시절인데 이 "퀵소"라는 조리기구는 딱 지금의 전자레인지 같은 역할을 합니다.
#2. 지극히 현실적인 아이러니한 특징이 돋보이는 SF
다른 SF 작가들의 글을 별로 접해보지 못해 어떻다고 단정하기 어렵지만 하인라인 선생의 SF는 그야말로 딱 Science Fiction입니다. 통상 SF에 원플러스 원처럼 끼어드는 환타지가 거의 없습니다. 이 부분이 저에게는 굉장한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SF에서 과학적이고 이론적인 내용에 설득력을 부여하는데 가장 쉬운 방법이 환타지를 접목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이해하기 어렵지만 "와쿠와쿠족이라는 우주의 생명체가 와서 만들어줬다."라고 하면 세상 누가 "와쿠와쿠족이 그걸 어떻게 만드냐?"라고 따질수가 있겠습니까? 만나본 적도 없는데.. 뭔가 미심쩍지만 그렇다치고 읽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하인라인의 [우주의 개척자]에는 미지의 존재가 전혀 등장하지 않(막판에 미지의 존재가 만든 물건은 등장함)습니다.
개척지 우주 "가니메데"로 떠나기 위해 우주선이 발사되는 순간부터 벌써 돌아가겠다고 싸우는 사람이 등장하고, 지구나 달을 구경하기 위해 창가를 독점하고, 우주선 선장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막무가내 인원들이 등장합니다. 그 와중에 우주선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자치기구를 만들어서 규칙을 정하고 우주여행기간 동안 생활수칙을 만들고 서로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비단 우주선을 통한 우주여행이 아니더라도 인간세상 어디를 들여다봐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설정과 묘사들이 이 작품의 리얼리티를 유지해줍니다. '딴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 인간세상인데 지금보다 미래의 이야기다.' 이런 인식 말입니다.
지구에서 떠날때는 많은 사람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황금빛 약속을 해주지만 막상 "가니메데"에 도착한 사람들은 현실의 매서움에 당황합니다. 그러나 곧 그곳의 일원이 되어 무책임한 지구와 이곳 "가니메데"사이의 엄연한 입장차이를 확인하게 됩니다. 서로를 위해 자급자족을 실현해 독립하고자 본토를 적대시하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개척 당시 미국과 영국의 대립이 떠오르게 합니다. '인간사 어디가나 똑같구만'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개척지인 "가니메데" 내의 문제에서도 선 이주민과 후발 이주민과의 소유물 차이에서 오는 빈부격차, 갈등에 대한 설정들이 무척이나 현실적입니다. 먼저 농지를 일구고 그 생산수단을 발판으로 지속적으로 땅을 넓혀가는 초기 이주민과 위원회에 큰 빚을 진채로 거친 돌과 큰 바위 밖에 없는 황무지를 개간해야하고 정해진 기간내에 개간한 농토를 갚아야 하는 후발 이주민간의 간극은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생산수단의 소유 유무 때문에 도저히 격차를 좁히기 힘든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와 비교해도 전혀 차이를 느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이런 문제는 적어도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한 끝없이 지속될 문제라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하인라인의 [우주의 개척자]에 나타나는 이런 당면 현실과 그 속에서 가진 것없이 맨몸으로 부딪히고 고군분투하는 주인공 가족의 이야기는 세계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이 가장 부유하고 번창하며 개척자 정신이 빛났던 1950년대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로 치면 IMF 이전 한창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던 1980년대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나라도 한창 안정된 직장보다는 벤처창업 등의 새로운 도전과 개척을 추구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게 해 주었던 작품입니다. 다만, 화자가 어린 아이이다보니 서술 내용을 완전히 공감하기에 방해가 된 건 사실입니다. 작가의 의도는 이해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달을 판 사나이"때처럼 성인 남성이 주인공이자 화자였다면 더욱 공감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3. Home..
이 작품에서 주요한 테마 중 하나는 "Home", 고향입니다. 인간이 개척자 정신을 폼내며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용기와 동시에 가지게 되는 근원적인 마음은 고향으로의 회귀가 아닐까 합니다. 내가 돌아갈 고향을 잊는 인간은 자신 본연의 기반을 잊는 것일 수 있습니다. 새로운 도전을 통해 성취감을 누리기도 하지만 도전의 결과가 좋지 않을 때, 그리고 도전 중 극복하기 어려운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는 돌아갈 고향을 떠올리며 용기를 얻고 다시 나아갈 힘을 받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미 떠나온 개척지가 각자의 새로운 고향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태어난 후세는 그 곳이 실질적인 고향이 되는 것이지요. 이 작품에는 이러한 고향에 대한 향수, 의미, 새로운 의미부여 등이 깊이있게 표현됩니다.
"아빠, 우리는 왜 이곳에 왔을까요?" "으음.. 네가 원해서 온 거잖니. 기억 나지 않니?". "저도 기억은 해요." "뭐, 네가 이곳에 온 진짜 이유, 근본 이유를 말해보자면 아마 네 후손들에겐 굶주림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겠지. 지구는 이미 너무 인구가 많으니까. 빌" 나는 하늘의 지구를 다시 쳐다보고 말했다. "아빠, 제가 알게 된 것이 있어요. 인생에는 하루 세 끼를 풍족하게 먹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야만 한다는 걸요. 분명 이곳에서는 먹는 건 풍족할 거예요. 이곳에서는 당구공에서도 풀이 자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곳으로 온 것이 후손들에게 좋은 결정이 될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그들도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이제야 제 실수를 했다는 걸 알게 됐어요." p183
지구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목성의 한 위성에 마련된 개척지에 도착하고 우리의 고향과는 전혀 다른 환경을 몸소 접한 주인공 빌은 단지 먹고사는 문제만으로 인간이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자연재해와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이겨냅니다. 그리고 자신이 서있는 바로 그곳이 새로운 고향임을 인식합니다.
"태양의 빛줄기는 이제 농장의 집들의 지붕 꼭대기까지 닿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검게 보이던 <고요의 호수> 수면 위로 퍼져나가 호수를 보라색으로, 그리고 다시 파란색으로 변화시켰다. 이곳이 내가 사는 별이며, 이곳이 내 고향이었다. 나는 이곳을 절대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p256
로버트 A. 하인라인의 1953년작 [우주의 개척자]는 시대적 한계로 인해 가부장적인 가정의 묘사, 현재시점에서는 다소 진부한 이론, 다분히 미국적인 발상과 전개 등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읽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SF의 명작임은 분명합니다. 이 작품을 통해 환타지가 쏙 빠진 오리지날 SF의 매력을 다시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