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인간에게 무엇인가 - 인간이 바꾼 전쟁, 전쟁이 바꾼 역사
마거릿 맥밀런 지음, 천태화 옮김 / 공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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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근래 이른바 이대남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 일각에서 병역의 남녀 형평성과 저출산 시대 자원 확보를 명목으로 여성 징병론이 제기되고 있지만 그런 주장이 가장 부담스러운 쪽은 이대녀들이 아니라 그녀들을 받아들여야 할 군 간부들이 아닐까 싶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2000년에만 해도 불과 0.3%였던 대한민국 여군의 비율은 이제는 9% 가까이 늘어났으며 2027년에는 15%까지 늘릴 계획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금녀의 벽이 만만치 않은 것이 대한민국 군대의 현실이다. 하긴 군대만이 아니다. 여성들의 영역에 남자가 들어오고 남성들의 영역에 여자가 들어오면 환영보다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이물질 취급이다. 나만 해도 동네 의원에서 남자가 간호사를 하고 있다거나 우연히 택시를 탔는데 운전 기사가 여자라면 위화감부터 앞선다. "우리 때에는 말이야, 당연히 남자 의사, 여자 간호사였다고." 그것이 잘못된 편견인 줄 알면서도 말이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있다고 해도 우리 머리 속에 단단히 박힌 고정 관념을 깨기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우크라이나의 여군들. 전장에서 여성들이 직접 전사가 되어 싸운 것은 역사가 오래된 일이다. 문제는 남자들 스스로 여자들을 자신들과 동등한 전우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독소전쟁에서 스탈린은 국가의 필요에 따라 여성들을 징집하면서도 그녀들의 처지나 권리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필요가 없어지자 내버렸다. 남녀가 함께 복무하기로 유명한 이스라엘만 해도 여군의 비중은 30%가 넘지만 남성중심 분위기 속에서 온갖 차별과 인권침해를 감수한다는 사실은 사람들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한다.


학계도 마찬가지이다. 대학에는 역사학과마다 여학생은 그렇게 많은데 다들 졸업 후에 어디로 가는지 끝까지 남아서 역사 연구에 일생을 바치거나 그 분야에서 이름을 떨치는 여성 교수는 흔치 않다. 다들 점수 맞춰 가기 때문인가. JTBC의 <벌거벗은 세계사>만 해도 주제마다 강사가 달라지지만 여자는 거의 보지 못한 듯. (게스트 빼고) 하물며 시중의 전쟁사와 군사 서적에서 국내 저자가 여성인 경우가 있었던가. 적어도 내가 기억나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금녀의 벽이 높아선지, 여자들 스스로 전쟁사와 인연이 없다고 여기는 탓인지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긴 울 와이프부터 전쟁사는 덮어놓고 여자가 가까이 할 것이 못된다고 지레 결론을 내릴 정도이니. 우리보다 앞서가는 서구 역시 전쟁사는 남자들의 영역이다. 하지만 때때로 여성 저자가 눈에 띌 때가 없지는 않다. 거의 희귀종이지만. 얼마 전에 서평한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룬 <8월의 포성>만 해도 저자가 바바라 터크먼 여사이고 열린 책들 출판사에서 나온 <세상을 바꾼 전쟁의 모든 것>에서도 여러 저자들 중에서 여성이 몇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도 시간이 지나면 그리 될지도. 유튜브에서 보니까 20대 여성 BJ가 <콜 오브 듀티>를 하고 있더라. 여자가 뭔 총 싸움 게임을 하겠냐는 나부터 꼰대 마인드를 버려야.



공존 출판사 신작 도서인 <전쟁은 인간에게 무엇인가>는 흔히 남자들의 전유물이라는 전쟁을 여성의 시각에서 쓴 보기 드문 책이다. 저자 마거릿 맥밀런 교수는 캐나다 출신 베스트셀러작가이자 역사 학자로 옥스퍼드 대학 명예 역사 교수라고 한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 전시 총리로서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었던 것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의 후손이라고. 외할머니가 조지의 딸이라고 하니 외증조할배인가. 금수저일세.


이 할머니. 1943년생이니 올해로 80세인데 정정하신 듯. 사람은 역시 많이 배워야 한다는. 조카도 BBC의 유명한 역사 강사라고.


인간은 왜 전쟁을 하는가. 소위 성선설, 성악설과 더불어 인간 본성의 가장 근원적인 궁금증 중 하나이자 수천년 동안 수많은 철학자들이 수없이 질문을 던졌지만 여전히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주제이다. 인간은 전쟁이 초래하는 파괴를 두려워하고 혐오하면서도 한편으로 전쟁에 매료되는 것이 인간의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이기도 하다. 전쟁 영화와 전쟁사 서적은 시대와 세대, 국적을 불문하고 꾸준한 인기를 누리며 전 세계 수많은 게이머들은 가상 세계에서 군인이 되어 적군을 사살하는 게임을 하면서 희열감과 대리만족을 느낀다. 알렉산더 대왕, 카이사르, 나폴레옹은 자신의 욕망에 눈이 멀어 수십만명을 희생시킨 학살자가 아니라 희대의 군사적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누군가는 총을 살인 무기로 여기고 AK 소총을 만든 미하일 칼라시니코프를 살인마라며 비난하지만 반대로 그것을 숭배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본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칼을 사무라이의 영혼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어차피 내가 진짜 전쟁을 겪을 일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겠지만 인간의 마음 한 구석에서는 전쟁의 폭력을 막연히 동경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이성으로 누를 뿐.


"우리는 이러고 논다." 덕후 중의 진정한 덕후는 역시 양덕이라던가. 군복부터 총에 이르기까지 죄다 핸드 메이드로 만들어 주말에는 모여서 라인배틀로 여가를 보내는 양반들. 만만찮은 비용은 물론이고 집에 계신 마눌님들이 남편 취미활동을 내버려 둔다는 것이 더 신기하다는. 포기했나.


이 책은 저자인 맥밀런 여사가 2017년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정년 퇴임 후 영국 BBC 방송국에서 주관하는 리스 강연(The Reith Lectures)에 출연하여 5회에 걸쳐서 전쟁을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전쟁에 대한 다양하면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짐과 함께 자신만의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함으로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다른 전쟁 연구가들과의 첨예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언제부터 전쟁을 시작했고 무엇 때문에 싸우며 그것이 과연 인간의 진정한 본성인가. 전쟁은 파괴만을 낳는가, 반대로 전쟁 덕분에 인간은 발전하여 오늘날 문명이 탄생할 수 있었던가. 현대에 와서 전쟁은 줄어들고 있는가. 앞으로 인류가 더욱 이성적이고 문명화된다면 언젠가 전쟁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이 올 것인가. 역덕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궁금해하고 막연하게 생각하지만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이란 평화라는 일상이 붕괴되면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인간의 역사에서 보편적인 일상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전쟁의 일상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


전쟁은 가급적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상책인 잠깐의 일탈이 아니다. 전쟁은 단순히 평화의 부재가 아니다. 사실은 평화의 부재가 정상 상태이다. 전쟁과 인간 사회가 서로 얼마나 깊이 얽히고 설켜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놓칠 수밖에 없다. 우리 세계가 어떻게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지 이해하기 원한다면 전쟁이 인간 사회의 발전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해서 안 된다. - p.8

우수한 육군과 해군을 양성하려면 더 나은 교육과 영양 공급도 필요했다. 영국 정부와 국민들은 1899 ~ 1902년에 벌어진 보어전쟁에 지원한 사람 중 1/3이 신체 부적격 판단을 받았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불우 아동에 대한 학교 무상 급식 제공 같은 개혁과 공중 보건 향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 p.64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이데올로기가 개입된 전쟁은 대개 극도로 잔혹하다. 천국이나 지상낙원이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것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걸림돌이 되는 인간을 제거하는 것도 포함한다. 그릇된 이념이나 신념을 고수하는 자들은 마치 병마가 퇴치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여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 p.92

기원전 6세기 중국의 손무는 최소한의 희생으로 상대를 정복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상대의 군대를 보전하는 것이 최선이고, 파괴하는 것은 차선이다." 그래서 손무 이후의 왕조들은 북방 기마 민족을 장벽과 회유로 막았고 군사력은 최후의 수단이었다. 19세기 영국은 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고 나서야 그와 비슷한 전략이 아프가니스탄에 적합함을 깨달았다. - p.121

로마의 도로 체계가 상당 부분 붕괴되어 물류가 원활하지 않고 무장 비용이 비쌌기 때문에 기병의 규모는 비교적 작을 수밖에 없었다. 기사 한명을 무장하고 유지하는데 1.2~1.8㎢에 달하는 비옥한 농장이 필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사와 말에 착용하는 갑옷이 더 화려하고 무거워지면서 기동력이 떨어졌고 보병들의 새로운 무기와 전술에 매우 취약해졌다. - p.137

히틀러의 여러 착오 중 하나는 독일이 한때 세계를 주도했던 분야인 과학의 가치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나치는 기초 과학을 등한시했다. 우수한 과학자들이 징집되어 각자의 전문성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전장에서 희생되는 경우도 많았다. 나치는 또한 유태인 과학자들을 추방했다. 망명 과학자들은 독일의 적들에게 자신의 재능을 제공했다. 이들의 역할이 없었다면 연합국이 그렇게 빨리 원자폭탄을 개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름 끼치는 가정이지만 히틀러가 인종 정책을 고집하지 않았다면 원폭을 먼저 수중에 넣었을지도 모른다. - p.183

프랑스에서는 출산율 저하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독일의 어느 유명한 지식인이 프랑스 기자에게 눈치없이 말했다. "남자는 군인이 되기 싫어하고 여자는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민족은 활력을 잃기 마련입니다. 그런 민족은 더 활기차고 생동감 있는 민족에게 지배당할 운명입니다." - p.209

대체로 남자가 싸움을 하고 여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전쟁의 기원 만큼이나 커다란 논쟁거리이며 생물학적 이유부터 문화적 이유까지 설명의 범주 또한 다양하다. 평균적인 성적 차이로 본다면 남자가 체력과 체격에서 우월하고 더 공격적일 수 있지만 남자에 버금가거나 남자를 능가할 정도로 크고 강한 여자들도 많다. 남자가 여자보다 테스토스테론을 더 많이 분비한다는 사실로 남자의 공격적 성향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천성이 온화하여 싸움을 싫어하는 남자도 많다. 싸우기로 결심하거나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할 경우 여자도 남자만큼 사나워질 수 있다. - p.229

최근 몇 십년 간 대부분의 서구 군대들은 여성을 정규군에 서서히 편입시켜 왔다. 하지만 케케묵은 사고방식은 변하기 어려운 법이다. 1990년대 러시아 해군의 한 장교는 해군사관학교 입학 허가를 받은 첫 여성 사관생도에게 이런 환영의 인사를 건넸다. "여자애 하나 있다고 해군이 망할 리 있나." 모든 군대 중 가장 힘들다는 해병대에 들어간 미국 여성들은 적대와 여성 혐오, 심지어 성적 학대까지 당했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사회 전반에서 강한 반감을 보였다. 모순되게도 군복 입은 여성은 성적 매력이 없거나 아니면 철철 넘쳐 보였다. 2차 세계대전 때 미 여군은 매춘부나 다름없다는 중상모략이 나돌았다. - p.235

전방과 후방 사이의 간극을 벌이는 또 다른 차이는 대개 민간들이 전쟁터의 군인들보다 더 적을 증오한다는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독일의 공습을 받지 않은 시골 사람들이 실제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도시 사람들보다 더 독일 도시들에 대한 보복 폭격을 원했다. 미군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는 아직 전쟁터로 떠나지 않은 군인들이 태평양에 배치된 군인들보다 일본군을 '전멸'시켜야 한다는 의견에 더 많이 동의했다. - p.289

양차 세계대전 중에 여성 근로자들, 특히 전통적으로 남자의 자리로 여겨진 직종에 있었던 여성들은 작업장에서 남성 동료들 때문에 고초를 겪었다. 남성들은 고용주가 임금 낮은 여성들을 빌미로 자신들의 임금을 삭감하거나 동결할까 우려했다. 2차 세계대전 중 영국 버밍엄의 군수 공장에서는 이전 근무조의 남성들이 다음 근무조 여성들의 작업 속도를 떨어뜨릴 요량으로 선반의 너트를 느슨하게 풀어놓았다. 항공기 제작사 보잉은 너무 꽉 끼는 스웨터를 입었다는 이유로 53명의 여성을 해고하자 강한 반발이 일어났다. 사측은 꽉 끼는 스웨터는 기계에 걸려 안전사고를 일으킬 위험이 있다는 핑계를 늘어놓았다. - p.348

2차 세계대전 후의 여성 운동가들은 1950년대와 1960년대의 핵무장 해제운동에 참여했다. 1980년대에는 영국 버크셔주 그리넘코먼 공군 기지에 미군의 핵탄두 순항 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에 항의하는 여성들만의 반대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전쟁을 부추기는 치어리더 노릇을 한 여성들도 있었다는 사실 또한 항상 기억해야 한다. - p.398

전쟁에 대한 과거의 예측을 보면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많이 틀렸는지 알 수 있다. 군사 전략가들은 1차 세계대전이 공격적인 기동전이 될 것으로, 2차 세계대전은 방어형 전쟁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양차 세계대전에서 해군 전문가들은 강력한 해군 전력끼리 맞붙어 전쟁의 승패가 갈릴 것으로 내다봤고 잠수함이나 어뢰, 소형 기뢰는 과소평가했다. 미국 육군전쟁대학원장을 지낸 로버트 밥 스케일스 장군은 최근 미래 전쟁의 본질과 특성을 규정하려는 시도에 대해 "워싱턴 D.C의 가장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같은 시도는 멈추지 않으며 멈추어서도 안 된다. - p.468

남북전쟁 당시 북군 장군이자 '바다를 향한 셔먼의 대행진(Sherman's March to the Sea)'으로 남부를 초토화시킨 것으로 유명한 윌리엄 테쿰세 셔먼 장군은 말년에 미시간 군사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생도들을 향해 "전쟁은 지옥이다"라면서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강조했다. 반대로 조지 패튼 장군은 아마도 전쟁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았던 인물이다. 그는 평화로운 시절에 잉여 인간 취급을 받으면서 방황했고 전쟁이 터지자 제일 먼저 전장으로 향했다. 그에게는 죽음이 난무하는 그곳이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남과 함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참호에서 보낸 1460일>라는 책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지옥같은 참호전에서 시달렸던 한 대령이 휴가를 나와서 가족들과 안락한 시간을 보내고 귀대하는 날 자살했다는 대목이 있다. 누군가는 전장터에서 PTSD를 얻어 평생 끔찍한 악몽에 고통받는다면, 다른 누군가는 오히려 전장터에서 안도감을 찾기도 한다. 하물며 전쟁의 공포가 지속될 때에는 평화를 외치다가도 평화가 오면 다시 전쟁을 거론하면서 미지의 공포를 만들어내어 전쟁 준비에 혈안이 되는 것이 인간의 이해할 수 없는 양면성이다. 과연 어느 쪽이 인간의 진짜 모습인지는 영원한 의문이 아닐까.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아메리칸 스나이퍼> 이라크에서 250여명을 사살한 네이비 씰의 전설적인 스나이퍼였던 크리스 카일의 실화를 다룬 영화이지만 할리우드 액션과 로맨스 밖에 없는 <에너미 앳더 게이트>와는 달리 전장 PTSD에 시달리면서도 가족과 헤어져 전장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인간적인 고뇌에 포커스를 맞춘다. 한번 손에 피를 묻힌 사람은 그것을 쉽게 잊지 못하기 때문일까.


저자는 전쟁이란 인간과 뗄 수 없으며 전쟁을 통해서 인류 사회를 진화시켰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류 사회가 아무리 발전해도 전쟁은 계속 벌어질 것이라는 얘기이다. 충분히 논란이 있을 만한 발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상은 적어도 이전보다는 더 평화로워진 것은 분명하다. 평화주의자들이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는 것은 수백년 전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일단 전쟁이 발발하면 이전과 비교가 안 될 만큼 파괴적이고 대량 살육이 벌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화력이 그만큼 강력해졌기 때문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는 단 한 발의 원폭으로 도시가 지워졌고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은 무차별적인 폭격을 퍼부었다.

전쟁은 인간에게 필요악인가. 소말리아에서 수십년 째 이어지고 있는 내전은 온 나라를 폐허로 만들었다.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터전은 물론이고 희망을 빼앗았다. 언제나 전쟁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는 쪽은 약자들의 몫이다. 가족을 잃고 팔다리가 날아간 사람들에게 인간의 본성이 어쩌구 진화가 어쩌구 하는 말은 책상물림 교수의 개 풀 뜯는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푸틴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있는 우크라이나인들은 전쟁 덕분에 자신들이 거듭날 수 있었다고 말할지 모른다. 2014년 크름 반도를 빼앗길 때만 해도 한없이 무기력했던 그들은 처음으로 싸우기 위해서 스스로 무기를 들었고 러시아군의 전진을 막음으로서 비로소 패배주의를 벗어나 자신감을 되찾았다. 이 전쟁이 푸틴의 야심이 아닌 서방의 음모라고 믿는 국내외 친러 좌파들은 서방과 결탁한 젤렌스키의 아집 탓에 무고한 우크라이나인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당장 저항을 멈추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이 남베트남과 다른 점은 미국의 용병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에게는 러시아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독립전쟁이다. 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지만 푸틴으로서는 우크라이나를 손쉽게 지배하리라는 욕심은 버려야 할 것이다.

전쟁이 고통스럽다면 패전의 대가는 훨씬 고통스러우며 평화가 인간을 나태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또한 고려 시대에는 거란과 몽골에 침략에 용맹스레 맞섰던 민족이 조선 시대에 와서는 오랜 평화로 타성에 젖어 임진왜란과 두번의 호란에서 한없이 무기력했고 결국 변변히 저항도 하지 못하고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던가. 그런 점에서 때로는 전쟁도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물론 전쟁 장사꾼은 경계해야 하지만 말이다.

전반적으로 번역이 매끄럽다고 생각하지만 중간중간에 오역이 아닐까 의심스러운 부분이 눈에 띄더라.

프랑스 혁명가들이 국민은 국가와 민족에 대해 의무를 진다는 '국민개병' 제도로 세운 기본 전제가 1945년 독일에서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나치 고위 지도부는 독일 국민의 생명을 구할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국제 적십자위원회가 베를린 시민들이 임박한 전투를 피해 모일 수 있는 피란처를 마련하자고 제안했을 때 독일군 참모총장은 코웃음 치며 거절했다. 그에게 그 제안은 독일 국민의 저항 의지를 시험하려는 수작이었을 뿐이었다. "그 제안에 동의했다가는 이내 사기가 꺾이고 말 것이다."

→ 베를린 전투 직전의 독일 육군참모총장이라면 우리가 잘 아는 구데리안(1945년 3월 27일에 해임되었다.)이거나 아니면 후임자인 한스 크렙스 장군인데 이들은 전형적인 프로이센 군인으로서 나치가 아니었으며 크렙스는 오히려 히틀러의 자멸 작전을 반대하는 쪽이었다. 원문을 보지 않고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참모총장(Chief of the General Staff)이 아니라 히틀러의 딸랑이었던 국방군 최고사령관(Chief of the Wehrmacht High Command) 빌헬름 카이텔 원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보다 말하는 걸로 봐서는 히틀러 자신이거나 베를린 방위 총감이었던 괴벨스 같은데. 저자가 착각했을지도.

p.358 북부군 원수였던 헨리 할렉 → 북부군의 소장이었던 헨리 할렉

※ 남북전쟁 당시 미 연방군(북군)의 최고 계급은 중장이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 총사령관이었던 율리시스 그랜트가 대장으로 승진했다. 미군 역사에서 원수 계급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와서 제정되었다.

전쟁의 근원을 짚어본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수준 높은 책이다.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국내에서도 이런 강의를 들어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대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교양 수준의 역사 강의인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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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전, 최강국의 탄생 - 제2차 세계대전의 운명을 가른 해양패권 흥망사
폴 케네디 지음, 이언 마셜 그림, 강주헌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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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부시가 9.11테러를 핑계로 무솔리니급으로 일을 벌여놓은 후유증 덕분에 근래 와서 리즈 시절이 지났다고 의심을 받는 미국이지만 여전히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다. 경제력은 물론이고 군사력에서 다른 열강들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 중에서도 압도적인 피지컬을 보여주는 것이 해군력이다. 그나마 미 육군과 공군이 아프간과 이라크에서의 지상전에서 게릴라들의 비대칭 전략에 휘말려서 고전을 면치 못한 것이나 베트남전쟁에서 공산군의 막강한 대공망에 수많은 항공기를 상실했던 것처럼 흑역사라고 할 만한 나름의 오점이 있다면, 미 해군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무적 함대이다.


워낙 넘사벽적인 존재인지라 전 세계 해군이 연합하여 한꺼번에 덤벼도 승산이 없을 정도. 미국이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지구 어디건 원하는대로 군사력을 투사할 수 있는 것이나 어느 나라도 감히 미국 본토를 침공할 생각을 할 수 없는 것 또한 해군력이 독보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항공모함 전력에 있어서는 10만톤급 이상 핵추진 슈퍼 캐리어를 보유한 유일한 나라이며 그것도 무려 11척이나 양산. 다른 나라에서는 정규 항모랍시고 1~2척 가지고도 허덕거리는 4만톤급 강습상륙함까지 합하면 20척. 군사력에서 미국 다음을 자랑하는 중국과 러시아조차 미국과 싸우려면 정면 대결은 불가능하고 ICBM과 SSBN을 이용한 핵전쟁을 벌여야 할 판. 물론 그건 다같이 죽자는 얘기이니.

2019년 자료라서 4년이 지난 지금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중국은 2022년에 8만5천톤급 항모를 진수하여 항모 숫자가 3척으로 늘어났고 미국 다음의 해군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미국의 상대가 될 정도는 아니라도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월등한 것은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인도가 같은 해에 비크란트급 항모를 진수하여 항모가 한척 늘었지만 배수량이 4만5천톤에 불과하다. 그나마 중국과 인도, 일본, 한국 정도가 해군력 증강에 돈을 쏟아넣고 있으며 나머지 나라들은 경제 침체로 현상 유지도 버거운 판국인지라. 쇼미더머니~~.


"전하~~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항모가 남아 있나이다." 그 12척의 항모만으로도 전 세계를 쑥대밭으로 만들 판.


오늘날 미 해군의 절대적인 파워는 한 세기 전에 세계의 바다를 지배했다는 영국 해군과도 비할 바가 아니다. 섬나라인 영국은 육군 대신 해군에 올인했음에도 여러 라이벌들의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야 했으며 때때로 바다에서 패배한 적도 있었다. 양차 대전에서는 독일 유보트의 해상 봉쇄로 거의 고사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최대의 해상 결전이었던 유틀란트 해전에서는 독일 해군을 상대로 숫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전술적 패배에 가까운 무승부를 벌임으로서 체면이 실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지들이 이탈하자 그저그런 이류 강국으로 전락했다. 영국은 무적 함대를 건설하기에 체급이 따라주지 않은게 비운.


반면, 미국은 영국보다 훨씬 유리한 처지이다. 풍부한 자원과 영토, 주변에 이렇다할 위협 세력이 없고 국토 양쪽에는 외부의 침략을 막아주는 천연의 해상방벽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세계 유일의 기축 통화인 달러를 앞세워 지구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경제력까지 갖추었다. 영국은 물론이고 역사상 어느 세계 제국도 꿈만 꾸었을 뿐 감히 누리지 못했던 이점이다. 그러나 아무리 가진게 많아도 쓸 줄 모르면 무용지물이듯, 따지고 보면 오늘날 천조국이라고 불리는 미국의 위상이라는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만약 한 세기나 두 세기 전의 미 해군 수장들이 거대한 항모 전단의 위용을 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실로 격세지감일 것이다.


1812년의 미영전쟁에서 보잘 것 없는 해군력 탓에 수도 워싱턴이 영국 해군의 침공으로 불바다가 되고 대통령이 달아나는 수모를 겪었던 미 해군은 20세기 초반만 해도 여전히 2류에 지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워싱턴 해군조약에서는 몰락한 독일을 대신하여 영국 다음의 지위를 차지했지만 세계 바다를 지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랜 평화와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군비가 억제되면서 주력함들의 대부분은 20년 이상 된 구식이었고 항모의 숫자는 일본보다 열세했으며 수병들은 실전 경험이 없었다. 그 결과가 진주만 기습이었다. 이 순간 미국의 힘을 '각성'시킨 것은 루스벨트였다. 무능하고 부패한 아들 부시는 911테러 이후 소위 '테러와의 전쟁'을 몇몇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챙겨주는데 낭비하여 미국 국민들에 엄청난 빚만 안겨다 주었지만 루스벨트는 미국의 무한한 잠재 파워를 끌어내는데 성공했고 유럽에서는 독일과 싸우면서 태평양에서 일본의 도전을 분쇄했다. 추축국들은 물론 다른 열강들 입장에서 미국은 그야말로 다른 차원에서 튀어나온 사기 캐릭터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미국은 자원의 일부만을 해군에 투자했음에도 영국 해군조차 보잘 것 없게 만들었다. 어떤 의미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미국을 위한 전쟁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



물론 전쟁 이전부터 미국의 공업력이 월등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진주만 기습을 계기로 미국의 깨어난 포스는 자신을 억제하던 봉인을 깨뜨린 격이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전적으로 루스벨트의 리더십이었다. 그는 스탈린처럼 무작정 국민들을 갈아넣은 것이 아니라 유능한 경제 전문가들을 대거 영입하고 효율적인 정책을 수립했으며 자유분방한 미국민들의 국론을 하나로 결집시켜 진정한 풀파워를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게다가 천문학적인 군비 지출과 어마어마한 물자를 동맹국들에게 퍼주었으며 전후에는 패전국들을 삥 뜯는 대신 오히려 재건시켰다. 그러고도 초인플레이션은 커녕 경제가 더 성장했다는 기적.(임진왜란에서 명나라의 운명을 생각해보라) 같은 승전국인 영국과 소련은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도대체 무슨 마법을 썼나 싶을 정도.


진주만 기습을 시작으로 미국의 변신은 이런 느낌이랄지.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과 달리 베트남전쟁은 잘나가던 미국 경제를 탈탈 털어먹어 극심한 후유증을 겪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전쟁이 미국을 각성시켰다고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지도자가 중요하다는.


제아무리 미국이 신의 축복을 받은 나라라고 한들, 1941년에 미국 대통령이 루스벨트가 아니라 그 이전의 나태하고 고리타분한 고립주의자들이나 이후의 신통찮은 얼간이들이었다면 지금의 미국이 존재했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루스벨트 존재 자체가 미국에게 축복이자 세번째 터닝 포인트라고 할 만하다.(첫번째가 독립전쟁, 두번째가 남북전쟁) 그런 미국조차 요즘에 와서는 트럼프같은 뻔뻔하고 욕심많은 어릿광대가 욕을 쳐 얻으면서도 그 자리에 앉고 그렇다고 딴 놈들도 별 수 없는 것을 보면 갈 데까지 간 느낌이지만 말이다. 하긴 미국이라는 나라가 대부분은 범용하면서 때때로 3류 소인배가 튀어나와서 거의 바닥까지 말아먹은 다음 아주 가끔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이 포텐셜을 단단히 터뜨리는 식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축복이야, 장난이야.



한국경제신문에서 금년 가장 주목할 책 중 하나가 나왔다. 영국 출신의 역사학자로서 국내에서도 <강대국의 흥망>으로 잘 알려진 폴 케네디 교수의 따끈따끈한 최신작 <대해전, 최강국의 탄생(Victory at Sea)>이다.


폴 케네디 영감님. 그가 32살이었던 1987년에 쓴 <강대국의 흥망>은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여러 열강들의 흥망성쇠를 정치, 군사, 경제 등 전방위적으로 다룸으로서 단숨에 세계적인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올해로 78살인데 여전히 왕성한 저술과 강의 활동을 하는 것을 보면 놀라울 따름. 나는 벌써부터 노안이 와서 눈이 침침한데. 일반인들과는 신체구조가 다른지도.


폴 영감님의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강대국의 흥망>은 서양이 처음으로 인류 역사에 떠오르는 근세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백년 동안 동서양에 등장했던 수많은 제국들이 겪었던 부침을 통해서 강대국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몰락했는지를 다루고 있다. 대학 시절에 샀는데 워낙 재미있고 흥미진진하여 10번은 읽었을 듯. 삼국지와 더불어 내가 가장 많이 읽은 책이다. 이제는 완전히 누더기가 되어서 책장 한켠을 차지하고 있다. 2015년에 21세기 북스에서 나온 <제국을 설계한 사람들>은 시간적 무대를 제2차 세계대전으로 국한하여 연합군의 승리 비결이 어디서 있는지를 분석한다. 문제는 매끄럽지 않은 번역과 오탈자의 난무. 21세기 북스가 수많은 번역서를 낸 대형 출판사라는 점에서 이해되지 않을 정도. 폴 케네디 이름만 믿고 방심했나.


국내 출간으로는 세번째인 <대해전, 최강국의 탄생>은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6대 해군국(미, 영, 일, 프, 이, 독)의 치열한 경쟁과 미국이 다른 열강들의 도전을 누르고 오늘날의 절대적인 해상 패권을 쥐게 되는 과정을 700여 페이지에 걸쳐서 다루고 있다. 강대국의 흥망 제2차 세계대전 버전이랄까. 역자의 후기에 따르면 저자가 처음에는 지인이 수채화로 그린 53점의 군함 화보집에 가벼운 마음으로 서문이나 몇 장 써줄 생각이었는데 '기왕' 쓰는 김에 그림을 삽화로 활용하여 제2차 세계대전 해전사를 내게 되었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주력 중순양함이었던 자라와 피우메, 폴라 세 자매. 중간중간 들어간 삽화만 해도 미려하여 소장할 가치가 충분하다.


오늘날 팍스 아메리카의 등장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해상 패권 장악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역덕이라면 알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의 해전은 불과 20년의 차이가 있는 제1차 세계대전이나 그 이전과 비교하여 큰 차이가 있다. 더 이상 트라팔가르 해전이나 유틀란트 해전처럼 거함들로 구성된 대함대들이 서로 정면에서 맞부딪치며 함포를 겨누지 않았다. 태평양의 주역은 항공모함과 함재기였고 대서양에서는 잠수함이었다. 바꾸어 말해서 이것은 어마어마한 소모전으로 이어졌다. 이전의 해전이란 육지처럼 일정한 전선이 형성되기 어렵기에 양측 함대가 광활한 바다에서 서로 접촉하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대개 상당한 거리를 두고 포격전을 벌이다가 이기기 어렵다 싶으면 재빨리 물러나는 식이었다. 자칫 오판하거나 괜한 오기 부리다가 그 타이밍 잘 못 놓치면 러일전쟁에서 러시아 발틱 함대가 한방에 전멸한 쓰시마 해전 꼴이 나니까 말이다.

유틀란트 해전만 해도 도합 250척이 참여했지만 격침된 것은 전함 5척을 포함해 20여척에 불과했다. 요동치는 바다에서 육안으로 보면서 어림 짐작으로 쏘는 원거리 포격으로는 명중률이 극히 낮아 적 함대에 치명타를 주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물론 맞으면 일격필살) 하지만 함재기들은 적 함대를 발견하는 즉시 날아가서 어디에 있건 말그대로 쓸어버렸다. 아무리 막강한 방공망이 있어도 수백대의 함재기가 달라붙으면 무용지물이었다. 게다가 군함은 전차나 비행기, 대포에 비하여 훨씬 고가인데다 건조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인력 양성도 어려운 법이다. 개전 직후에만 해도 강력한 함대와 우수한 파일럿을 대거 보유했던 일본이 1년도 되지 않아 수세에 몰린 것이나 영국조차 미국에게 두손 들고 넘버 원 자리를 양보한 것 또한 이 소모전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서양에서는 독일 잠수함들이 20년 전보다 훨씬 파괴적으로 연합군 수송선단을 사냥함으로서 영국을 거의 고사직전까지 몰아넣었음에도 침몰시키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빨리 찍어내는 미국의 압도적인 물량 앞에서 백기를 들어야 했다. 미국만이 그 싸움을 감당할 인력과 자원, 무엇보다 돈이 있었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인 1938년부터 1945년까지 태평양과 대서양에서 벌어진 주요 해전이 전후의 미국 전성시대를 어떻게 탄생시키게 되는지 풍부한 자료와 함께 예리하면서 흥미롭게 분석한다.


1938년 여름, 지중해의 따뜻한 물이 물타의 역사적인 자연항 그랜드 하버에 나란히 정박한 두 전함의 측면을 살짝살짝 때렸다. 두 전함 뒤로는 성 요한 기사단이 15세기에 병원으로 사용하던 건물의 주량 현관이 보였다. 해군 예인선 한척이 가까이 다가왔고 여러 척의 작은 배가 부지런히 부두를 오갔지만 다른 움직임은 눈에 띄지 않았다. 당시 세계는 조용했다. - p.25

다른 면에서 태평양 전쟁은 순양함에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다. 태평양에서는 경쟁적으로 확보해야 할 수송 항로가 없었다. 미국은 구형 전함 외에도 순양함을 침공을 앞두고 포격을 퍼붓기 위한 용도로 꾸준히 사용했고 항공모함을 적군의 폭격기에서 보호하는 역할로도 활용했다. - p.74

미국-스페인 전쟁과 러일전쟁의 결과에서 머헨의 가르침이 확인됐다. 달리 말하면 해전에서 승리한 국가가 전쟁에서 이겼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머핸의 가르침은 퇴색되지 않았다. 1918년의 패전국은 해군력이 약한 동맹국이었고 승전국은 전투 함대를 보유한 영국과 미국, 일본이었다. - p.168

무솔리니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1940년 6월에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이탈리아 해군 최고 사령부에게 장밋빛을 의미하지 않았다. 당시 영국의 전략적 지점에 치명타가 되리라 판단되는 군사 행위가 이탈리아 제독들에게는 반드시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이탈리아가 지중해에 갇힌 신세라는 점은 전쟁 전과 달라진 게 없었고 영국 해군은 그들에게 여전히 두려운 존재였다. 제독들이 나폴리 만에 서서 밖을 바라보면 장애물 밖에 보이지 않았다. 영국 항공대와 잠수함, H-부대의 중후한 해상 전투함, 더욱이 그 뒤에 포진한 본국 함대의 절반을 물리치고 지브롤러로 진격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 p.272

일본 함대가 길버트 제도를 지키려고 움직였다면 레이테만 전투보다 11개월 빨리 두 해군 강국이 맞붙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 해군은 반응하지 않았다. 일본 해군이 이 순간 싸우지 않기로 결정한 주된 이유는 일시적으로 홀시 제독의 남태평양 사령부 휘하의 항공모함 전단이 라바울에 주둔한 일본 해공군력에 11월 5일 가한 타격 때문이었다. 그 때 중순양함을 비롯한 많은 군함이 입은 피해도 컸지만 무엇보다도 헬켓 전투기 편대의 공격에 대체불가의 노련한 함재기 조종사를 너무 많이 잃었기 때문이었다. - p.441

강대국들이 부담한 군비를 비교해 측정해보면 1943년에 영국은 국민소득의 55퍼센트를 군사비에 지출했고 소련은 60퍼센트 이상, 나치 독일은 동서 양쪽의 이웃 국가들로부터 엄청난 자원을 약탈했는데도 70퍼센트를 지출했다. 미국은 다른 모든 강대국보다 훨씬 많은 돈을 전쟁에 쏟아부었지만 군사비가 국민소득에서 차지한 비율은 42퍼센트에 불과했다. 어떤 분야에서나 똑같지만 예컨대 영양 쉽취에 대한 전쟁의 경제 사회적인 비용을 조사해보면 다른 강대국은 혹독한 비용을 치른 반면 미국은 그렇지 않았다는 증거가 뚜렷하다. 독일은 식량 배급량이 줄었으나 미국인들은 배불리 먹었다. - p.499

1945년 4월 1일 부활절이던 일요일, 1200척의 상륙함이 오키나와 중부의 해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200척의 구축함과 18척의 전함, 40척이 넘는 항공모함이 그들을 엄호했다. 일본 함대의 저항이 없었는데 이때 18척의 전함과 40여척의 항공모함은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을까?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표현대로 당시 미 해군은 '세계 최강'이었고 머헨의 정의에 따르며 여태껏 존재한 세계 최강의 전함 부대로 대적할 수 있는 적이 없을 정도였다. - p.597

이탈리아의 전략 지도 자체가 엉망진창이었다고 해서, 이탈리아 해군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부정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탈리아 군함들은 강력하고 인상적이었으며 속도가 빨랐다. 하지만 1940~1942년의 억눌린 작전 상황에서 본래의 능력을 좀처럼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 이탈리아 해군의 대잠 초계 능력은 영국 해군의 잠수함 부대에 적지 않은 피해를 가한 반면, 이탈리아의 소형 잠수함들은 알렉산드리아에 주둔한 커닝엄의 전투 함대를 공격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커닝엄의 함대를 공격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탈리아의 전략적 오판을 보여주었다. 당시 전쟁은 세계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었기에 키닝엄의 함대를 공격한다고 해서 제해권을 확보하기는 커녕 대서양과 수에즈 동쪽에서 활동하는 영국 함대를 지중해로 끌어들이는 역효과만 낳았다. 따라서 레지아 마리나(이탈리아 해군)이 1943년 9월 지휘권을 넘겼을 때 대연합의 전력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았다. 그저 연합군의 병력을 분산시키는 세력이 제거되고 런던의 압박감이 사라진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일본보다 약하고 프랑스보다 약하며 진정한 열강에 비할 수 없었던 국가의 해군이 그 이상의 것을 해낼 수 있을 지 의심스럽다. - p.639




리델 하트는 '진정한 승리'를 가리켜 "한 국가가 전쟁을 치른 뒤에 전쟁 전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게 되는 승리"라고 정의했다. 1945년 이후의 미국은 분명히 그런 국가였다. 미국은 아무런 상처도 없이 승리를 쟁취한 유일한 강대국이었다. 소련 또한 승전국으로 떠올랐지만 엄청난 희생을 대가로 얻은 보상이었다. 미국은 여섯 교전국 중에서 자국이 폭격받지 않고 민간인 사상자도 거의 없는 유일한 국가였다. 미 해군은 2위였던 영국 해군보다 컸을 뿐더러, 나머지 모든 국가의 해군 규모를 합한 것보다도 컸다. - p.655






어떤 사람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광활한 러시아 평원을 놓고 강철과 강철이 맞부딪치는 독소전쟁의 거대함에 비하면 바다에서 벌어진 전투는 부차적일 뿐이라고 말할 지 모른다. 어쨌든 독일군을 불도저마냥 밀어내고 제3제국의 심장부를 점령한 것은 수백만명에 달하는 소련 지상군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찮은 막간극으로 취급하는 것 또한 어폐가 있다. 라이프치히 전투와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몰락시켰다고 해서 트라팔가르 해전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 없듯 말이다. 미국과 영국 해군은 독일 유보트의 위협에 맞서 어마어마한 물자를 영국과 소련으로 실어날랐다. 히틀러 입장에서 제해권의 상실은 영국 봉쇄에 실패한 것은 물론이고 나폴레옹이 그러했듯 물자 수송에 심각한 부담을 줌으로서 한층 불리한 싸움을 강요받았다. 만약 독일 해군이 미, 영을 꺾을 수 있었다면 영국과 소련은 봉쇄당한 채 굶어 죽어갔을 것이고 미국은 대서양 너머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물론 냉전 시절 소련이나 오늘날 국수주의에 사로잡힌 러시아 학자들은 서방의 랜드리스 원조가 소련 생산량의 4%에 불과했다는 둥, 별거 아니었다는 식으로 깎아내리지만 필요할 때에는 실컷 도움 받고 전쟁 끝나니까 우리 힘만으로 이길 수 있었다 운운하는 것은 뻔뻔한 소리일 뿐더러, 그런 논쟁이 벌어진다는 사실 자체가 연합군의 도움이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해전이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결정짓지 않았더라도 한축이라고 하기에 충분하다.


이 책은 개별 해전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부터 일본이 항복하기까지 전체적인 해전의 흐름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 해전의 통사라고 할 수 있다. 제일 먼저 프랑스 해군이 나가떨어지고 이탈리아 해군이 1943년 9월에 항복했으며 미드웨이 해전을 시작으로 일본 해군이 수세에 내몰리고 독일 유보트들이 괴멸하며 전쟁이 끝났을 때 영국 해군이 미 해군의 거대한 위용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지, 그리고 어째서 미 해군이 진정한 승자가 되는지 그 과정을 흥미롭게 설명한다. 저자는 그것이 결코 원래부터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이 초래한 결과라고 단언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없었다면 오늘날 미국의 해상 패권 또한 없었다는 얘기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잠재능력을 해방시켰다.


밀덕으로서 워낙 흥미진진하여 퇴근 후 독서 삼매경에 빠지는 바람에 1주일만에 완독했다. 아쉬운 점은 이번에도 오역과 오탈자가 상당하다는 점. 앞서 언급한 21세기 북스의 <제국을 설계한 사람들>만큼이나 어색한 번역투는 아니지만 중간중간 오역이 눈에 띄더라. 그 중 몇개를 언급하자면,

p.39 바럼호 측면 전체의 무게는 7톤에 가까웠고(The full broadside of the Barham weighed fifteen thousand pounds) -> 바럼호 현측 부포의 무게는 7톤에 가까웠고

※ 상식적으로 배수량 3만5천톤의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 바럼호의 측면 무게가 7톤 밖에 될 리 없다. 이것은 현측에 배치된 6인치(152mm) 부포를 가리킨다.

p.59 탄창을 비롯해 -> 탄약고를 비롯해

※ magazines은 '탄창'이라는 뜻도 있지만 문맥상 '탄약고'라고 번역해야 한다.

p.71 카운티급 순양함이 탄창을 단단한 철판으로 두른 정도에 그쳤을 만큼 보호 장치가 허술했다는 것은(the County-class’s light-armored protection—only the magazines had solid “box” armor around them) -> 카운티급 순양함의 빈약한 장갑 방호는 단지 탄약고 주변만을 철판으로 단단히 둘러싼 정도였기에

p.169 10만척의 전함을 목표로(occasional vision of 100,000-ton battleships) -> 10만톤급 전함을 목표로

※ 실제로 독일 해군의 Z계획에 따르면 해군판 마우스 전차라 할 수 있는 H-44/45급 전함은 10만톤을 넘어섰다. 물론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 밖에도 '정규 항공모함(Fleet carrier)'을 '플리트 항공모함'이라고 하거나 p.179에는 아예 '프리트'라고 오타를 내기도 하고 '독일 제10항공군단(X. Fliegerkorps)'을 '제10항공대'라고 한 점, p.331에서는 소련 '근위사단(Guards Division)'을 '경비사단'으로, 듀크 오브 요크(HMS Duke of York)를 p.68에서는 요크 공작호라고 했다가 뒷쪽에서는 듀크 오브 요크라고 하는 등 용어가 잘못되거나 통일되지 않는 등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제법 있더라. 또한 p.595에서는 '20미국톤(907킬로그램)'이라고 되어 있는데 20미국톤(18.1톤)이 아니라 1미국톤이 907킬로그램이라는 점에서 독자에게 혼동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역자가 그 유명한 <총균쇠>를 비롯하여 그동안 수많은 번역서를 낸 베테랑이라고 하는데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나 싶을 정도. 물론 역자도 사람이다보니 완벽할 수는 없는 노릇이며 내 경험으로 볼 때 이런 것은 편집자가 잡아주어야 할 역할이기도 하다. 앞뒤 문맥이 맞지 않으면 대개는 오역이니 말이다.

오역보다 진짜 지적받아 마땅한 부분은 오탈자. 조금 과장하여 말하면 페이지를 한장 넘길 때 오타 하나. 오타 없는 책은 없다지만 이쯤되면 너무 무성의하여 어떨 때에는 짜증이 치밀어 당장 반품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을 정도. 출판사에서 의욕이 앞선 나머지, 너무 급하게 책을 내려고 지나치게 서두른 것은 아닌가 싶다. 이런 경우를 막기 위해서 대개는 최종 탈고 전에 출판사 서평단을 통하여 대부분 걸러내던데 말이다. 그것만 아니면 나무랄 데가 없는 책이다. 출판사에서 오탈자 교정할 때까지 잠시 기다리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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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우크라이나 - 역사 속 러시아와 갈등으로 보는 우크라이나 전쟁
김병호 지음 / 마음친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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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2월 푸틴의 전격 침공으로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써 1년하고도 7개월이 지났다. 사흘이면 수도 키이우가 함락되고 우크라이나의 완패로 끝날 것이라던 전 세계 호사가들의 예측과는 달리, 우크라이나군은 놀라운 투혼으로 위기를 극복하는데 성공했다. 개전 초반에 빼앗긴 영토의 60%를 되찾고 지금도 꾸준히 러시아군을 밀어내며 조금씩이나마 전진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선전은 단순히 러시아를 견제하기 원하는 미국과 서방의 원조 덕분만이 아니라 전시 지도자인 젤렌스키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우크라이나인들의 강력한 항전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전 이전에만 해도 나이도 젊은데다 비천한 코메디언 출신이 감히 정치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편견과 조롱거리의 대상이었던 젤렌스키는 오히려 겉만 번드르하고 제 잇속만 챙길 줄 아는 3류 정치꾼들보다 훨씬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만약 그가 개전 초반 미국의 망명 권유를 받아들여 아프간의 가니 대통령처럼 제 가족만 챙겨서 국민과 군대를 버리고 달아났거나 푸틴과 대화로 해결하겠다면서 군대가 저항하지 못하도록 했다면 우크라이나의 운명 또한 그기서 끝났을 것이다. 원래 푸틴이 침공을 강행한 것은 수개월 전 아프간에서 쫓겨난 바이든 행정부가 말로는 뭐라고 한들 쉽사리 우크라이나의 편을 들지 못할 것이라고 낙관했기 때문이었다. 바꾸어 말해서 미국만 끼어들지 않는다면 우크라이나 따위는 막강한 러시아군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침공 초반에만 해도 어차피 질 싸움이라며 배팅에 주저했지만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의 공세를 격퇴하는데 성공하자 뒤늦게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다. 푸틴으로서는 자신보다 26살이나 어린 젤렌스키를 너무 얕봤다는 것이 유일한 계산 착오였다.


젤렌스키는 이렇다할 정치 경력도 없었을 뿐더러 <국민의 일꾼>이라는 TV 시트콤을 통해서 얻은 유명세로 어쩌다보니 대통령에 당선된 특이한 인물인지라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온갖 산전수전과 치열한 권력 투쟁 끝에 그 자리까지 올라온 고루하고 노회한 정치인들이 보기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구 소련 시절이 남겨놓은 부패와 보신주의, 파벌싸움이라는 우크라이나의 진흙탕 정치판에 때가 묻지 않은 지도자이기에 푸틴에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지금의 항전을 이끌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more


한편으로,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서방 일각에서 이쯤에서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목소리 또한 커지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적당히 영토를 내주어 푸틴의 체면을 세워주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원조부터 중단해야 한다는 것. 대표적인 인물이 헨리 키신저. 미국 우파의 대변인이자 그 옛날 남베트남을 희생시킨 대가로 자신은 뻔뻔하게도 노벨 평화상을 걸머쥐었던 키신저는 훈수를 둔답시고 "대(미국의 이익)를 위해서 소(약소국의 주권)를 버려야 한다."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있다. 어차피 푸틴을 설득할 방법은 없으니까 약자인 우크라이나가 양보하는 게 당연하다는 식인데 남의 일이라고 참 쉽게 얘기한다 싶다. 아니꼬우면 너거도 '노오력'해서 강대국이 되던가라는 건가. 돈 있고 힘 있는 양반들의 천박한 선민 사상을 보여주는 셈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그저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며 강 건너 불구경할 수만은 없는 이유는 단순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두 나라만의 분쟁이 아니라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아프간, 이라크 침공은 그것이 옳았건 그릇되었건간에 일단 미군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속전속결로 끝냈다는 점이다. 탈레반과 후세인은 자국 내에서도 워낙 인기 없는 독재 정권이었기에 현지의 저항은 거의 없었고 오히려 미군을 해방군으로 여겼을 정도였다. 그 이후의 전후 처리가 막장이었다고 하지만 어쨌든 그로 인하여 제3차 세계대전의 위기가 고조되거나 전 세계 경제가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고통은 전적으로 그곳에 사는 애꿎은 현지인들의 몫이었다. 혼란이 20여년 가까이 이어졌음에도 사람들이 무관심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반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식량과 석유 수출국이다보니 당장 밀가루값과 기름값, 가스값이 폭등하고 있다. 그동안 러시아의 값싼 석유와 천연가스를 펑펑 쓰던 서방 사람들은 어째서 우크라이나 때문에 우리가 추운 겨울을 보내야 하느냐, 너거만 눈 딱 감고 양보하면 다 끝날 일이 아니냐라고 볼멘 소리를 내고 있다. 남의 불행을 동정할 수는 있어도 그 때문에 내가 피해를 보는 것은 싫다는 것이 야박한 세상 인심이니 말이다.


국내에서도 우크라이나 전쟁을 놓고 정치권과 학계, 언론들은 특유의 진영 논리에 따라 서로 편가르기를 하고 국민들을 선동하기에 여념이 없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우파언론에서는 오늘도 해냈다면서 우크라이나군의 멈추지 않는 활약상과 죽을 쑤고 있는 러시아군의 모습을 연일 보도하는 반면, 프레시안같은 좌파언론에서는 노암 촘스키같은 소위 세계적 석학이라는 좌파 지식인들의 입을 빌려서 전쟁 책임이 푸틴에게만 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나토를 동진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먼저 깨뜨린 서방과 포퓰리즘에만 눈이 먼 우크라이나 정치인들이 표를 얻을 요량에 쓸데없이 나토 가입을 운운하여 푸틴의 침공을 자초한 책임이 더 크다는 식이다. 한마디로 푸틴이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은 잘못이지만 우크라이나도 잘한 것은 없다는 전형적인 양비론이자 물타기. 폭력 남편에게 매맞는 아내더러 매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는 거 아니냐고 하는 격이다.


이해영 교수가 쓴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세계질서>라는 책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미국이 감독하고 젤렌스키가 연기하는 드라마'라고 주장하더라. 푸틴을 대변한다면서 정작 푸틴의 배역은 쏙 빼놓고 있으니 우리들의 푸틴 "나 무시하냐?"면서 기분 나쁠 듯. 나토의 동진이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했기 때문이라느니, 우크라이나가 민스크 협정을 어긴 것이 잘못이니, 우크라이나도 돈바스에서 친러 주민들을 상대로 학살과 만행을 저질렀으니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자격이 없다느니라는데, 상식적으로 푸틴 입장에서 미국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미국을 상대로 따질 일이지 우크라이나를 때리는 것은 결국 만만한 놈한테 화풀이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민스크 협정 위반이 어쩌구, 돈바스 학살이 어쩌구한들 우크라이나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는 있어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직접 공격한 것이 아닌 이상 러시아의 침공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더욱이 푸틴은 돈바스 보호를 넘어서 아예 이참에 우크라이나 전체를 정복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쏙 빼놓는다. 이것은 엄연히 침략 전쟁임에도 말이다. 이해영 교수만이 아니라 '진보'를 자처하는 국내 친러 좌파들의 눈에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침략자에 맞서 죽기로 싸우는게 죄다 뒤에서 미국과 서방이 부추긴 탓이고 우리같은 일반인들은 서방의 가짜 뉴스에 속아 넘어가서 어릿광대마냥 춤추는 어리석은 존재로 보이는 모양이다. 본인들만이 진실을 알고 있으며 우매한 대중을 각성시키는 것이 자신들의 숭고한 의무인양 여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책상 앞에서 젠체하는 지식인들이야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전쟁의 기원을 알아야 한다고 한가롭게 떠들지 몰라도 오늘도 푸틴의 미사일 공격으로 자신의 몸이 불구가 되고 소중한 가족을 잃어야 하는 우크라이나인들 입장에서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지 않을까 싶다.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집을 잃고 오열하는 우크라이나 할머니의 눈물. 서구 좌파 지식인들은 침략전쟁을 일으킨 푸틴보다 푸틴에게 게기다가 얻어맞고도 여전히 버티는 젤렌스키의 무능함이 더 나쁘게 보일지 몰라도 자신들이 같은 일을 당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가. 전황을 알리는 기사는 매일같이 신문 한쪽을 장식하는 반면, 시중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다룬 책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말로는 균형적인 시각을 운운하면서 주로 러시아의 입장을 대변하고 서방 책임론을 부각하는 식이다. 다들 우크라이나 편을 들어주고 있으니 자기들이라도 푸틴 편을 들어주고픈 마음일까. 국제 사회가 우크라이나를 응원하는 이유는 단순히 친서방이라서가 아니라 구소련 국가 중에는 보기 드물게도 독재 대신 서구식 민주주의 정착에 노력하는 몇 안 되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만약 러시아가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카자흐스탄이나, 니야조프가 수도 한복판에 자신의 황금 동상을 세우고 개인 우상화에 혈안이 되었던 투르크메니스탄같은 독재 국가를 침공했더라면 과연 그 나라 국민들이 죽기살기로 싸웠을 것이며 국제 사회가 이들을 돕기 위해 나섰을까. 정작 푸틴과 코드가 맞는 쪽은 이런 독재국가들이다. 우크라이나가 호된 댓가를 치르고 있는 것도 푸틴이 정해준 대로 살기를 거부한 덕분이다.


세상 만사가 미국의 검은 손이 좌지우지한다고 믿는 음모론 신봉론자들의 생각과 달리, 우크라이나 전쟁의 당사자는 엄연히 우크라이나인들이며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그들의 의지에 따라 싸우고 있다. 미국의 원조와 개입은 부차적일 뿐이다. 그렇다면 구 소련 시절에만 해도 한 지붕 한 가족이었고 소련이 와해된 뒤에도 러시아와 함께 독립국가연합을 결성하기도 했던 우크라이나는 어쩌다가 이혼한 마누라마냥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는가. 만약 미국과 서방이 처음부터 러시아를 견제할 생각이었다면 어째서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대항마로 키우기는 커녕 오히려 모든 핵무기를 러시아에게 넘기도록 했던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경계하면서도 제 손으로 그 많은 핵무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적극적인 회유와 원조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핵무기의 일부만 남아 있었어도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무력 침공하지 못했을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음모론 신봉자들은 서방이 나토를 동진시켜 약속을 어겼다 운운하면서도 그동안 서방과 러시아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는지는 쏙 빼놓는다. 어째서 푸틴은 러시아와 함께 하기 싫다면서 버티는 우크라이나를 굳이 굴복시키겠답시고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어 스스로를 악의 축으로 몰아넣는가. 반대로 우크라이나는 어째서 러시아에 그토록 악착같이 저항하고 있는가. 이것을 죄다 미국의 음모로 돌린다면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이 아닌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의 복잡한 역사부터 들여다 보아야 한다.


마음 친구 출판사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다룬 신작 도서가 나왔다. 저자는 매일경제 기자 출신의 언론인으로 2004년 친러 여당의 부정선거에 반발하는 오렌지 혁명, 10년 뒤 푸틴식 장기집권을 꿈꾸던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시민들의 손으로 축출한 마이단 혁명, 뒤이은 러시아군의 크름반도 점령을 직접 취재했다고 한다.


그동안 시중에 나온 책들이 하나같이 가해자를 두둔하고 피해자도 당할 짓을 했다는 식의 양비론적인 내용인데 이 책의 출판사 소개글을 보니까 "원인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핍박과 압제"라길래 이제야 제대로 된 책이 나왔다 싶어서 골라보았다. 그런데 첫장을 보니까 마찬가지 뻔한 레파토리의 반복이라서 급실망.

미국 좌파 지식인 노엄 촘스크 교수는 "이번 전쟁의 원인은 푸틴에게 있지 않고 당시 우크라이나와 조지를 나토의 일부로 만들기로 한 서방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푸틴은 동유럽을 넘어 우크라이나로 나토 확대 논의가 진전되자 과거에 서방으로부터 당한 배신과 기만을 떠올렸을 것이고 그러한 불만이 누적되는 와중에 더 이상 참기 힘든 계기들이 몰려오면서 키이우 공습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 p.50

러시아로서는 나토가 추가 확대를 멈춤으로서 CIS 지역이 러시아의 세력권임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지만 서방이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함으로서 전쟁 발발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푸틴이 특별군사작전의 배경으로 제시한 이유들 가운데 상당 부분도 나토 확대 문제였다. - p.55


위에서 언급한 이해영 교수를 비롯하여 푸틴 옹호자들이 빼놓지 않고 강조하는 것이 "나토의 동진탓"이다. 냉전 말기 동독과 서독이 통일하고 미-소 데탕트가 한창일 때 서방은 고르바초프더러 나토를 동진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달콤하게 약속하여 소련의 협조를 얻어놓고서 이제와서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위반했다, 푸틴은 나토의 위협에서 러시아를 지키기 위해 부득이 무력 사용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침략전쟁의 명분을 뭐든 갖다 붙이려는 푸틴의 입장을 맹목적으로 답습하는 것일 뿐이다.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는 냉혹한 국제 사회에서 강대국 지도자들끼리 밀실야합하여 정한 약속이 도대체 언제부터 무슨 전가의 보도라도 되는 양 그렇게 잘도 지켜졌으며 그러는 푸틴은 얼마나 남과의 약속을 잘 지켰던가.

옐친 시절 서방과 체결한 부다페스트 안전각서는 우크라이나의 모든 핵무기를 러시아에 넘기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영토를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푸틴은 자기가 직접 서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생까버렸다. 우크라이나에 친러 정권을 세우겠답시고 남의 선거에 공공연히 개입했으며 러시아계와 우크라이나계의 갈등을 부추겨서 혼란을 가중시키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크름 반도가 원래 자기네 땅이라면서 무력으로 빼앗지 않았던가. 푸틴의 대표적인 꼭두각시가 젤렌스키의 전전임자이자 마이단 혁명으로 쫓겨난 빅토르 야누코비치였다. 푸틴을 등에 업고 온갖 사치와 향략을 즐기면서 푸틴처럼 장기 독재하려다가 성난 국민들을 피해서 러시아에 달아난 뒤 푸틴의 비호를 받으면서 호의호식하는 양반이다. 우크라이나판 이완용이랄까. 남들한테는 구두 약속도 지키라면서 자신은 문서에 서명한 것조차 무시하는 것이 푸틴이다. 푸틴이 크름 반도를 가져가겠다면 그 역시 가져갔던 핵무기를 우크라이나에게 돌려주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더욱이 푸틴이 나토의 동진 탓을 하기에는 궁색하다. 서방이 이들 나라에게 나토에 가입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면서 위협하고 회유했던가. 그건 푸틴이 하는 짓이 아닌가. 구소련의 압제에 시달렸던 동유럽 국가들은 물론이고, 우크라이나와 조지아, 발트3국같은 구소련의 일원들조차 러시아로부터 등을 돌리고 나토에게 보호해 달라고 손을 벌리는 것은 그만큼 러시아에 대한 반감과 불신이 크기 때문이다. 애초에 주변국들과 잘 지낼 궁리는 하지 않고 아직도 구소련 시절의 영화에 눈이 멀어서 시대착오적인 세력권을 내세워서 어떻게든 강대국 행세를 하려는 푸틴의 썩어빠진 사고 방식부터 바꾸는 것이 우선 아닐까 싶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 나토의 동진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인가. 푸틴 덕분에 핀란드처럼 가만히 있던 나라들조차 너도나도 나토에 가입하는 형국인데 말이다. 과연 푸틴은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말인가. 모르는게 더 이상하다.

러시아가 제고하는 서방의 대표적인 이중 잣대의 사례는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가 분열하는 와중에 세르비아의 '인종청소'에 대항해 나토가 개입한 일이다. 미국은 코소보 주민들의 대량 학살과 실향이 민주주의와 인권, 인도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인 만큼 세르비아에 대한 나토의 공습은 정당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나토의 공격은 UN의 승인이나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 없이 이뤄져 불법적인 무력행사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미국과 나토는 우크라이나의 생존권과 자결권을 강조하며 지금의 러시아의 침공을 비판하지만 자신들도 30년 전 세르비아에서 똑같은 일을 저질렀다. 특히 유고 연방 구성국들에 대한 세르비아의 무차별 공격이 미국과 나토의 안보에 직접적이고 특별한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닌 반면 나토를 끌어들이려는 우크라이나의 전략은 러시아에 직접적인 위해가 된다는 점에서 러시아의 선제적 공격의 타당성은 세르비아 공습 때보다 수긍할 여지가 더 있는 것이다. - p.79


저자는 1998년 코소보 사태 당시 나토의 개입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동일선상에서 놓으면서 서방의 이중 잣대를 비판한다. 어차피 어느 나라이건 자국의 이익이 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 현실 정치이고 서방이 코소보를 도와서 세르비아를 응징한 것도 순수한 인도주의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간과해서 안 되는 점은 적어도 나토는 돈바스 점령지를 자국 영토로 잽싸게 병합한 푸틴마냥 코소보를 자기들끼리 나눠먹지는 않았다. 또한 푸틴처럼 훈련을 빙자하여 기습 침공한 것이 아니라 회원국들끼리 공식적으로 무력 사용을 결의하는 절차를 밟았고 세르비아가 스스로 물러날 시간을 충분히 주었으며 그래도 물러나지 않자 비로소 공습에 나섰다. 무력 사용은 공습에 국한되었으며 이참에 세르비아에 친서방 정권을 세우겠다고 설치지도 않았다. 단순히 코소보만이 아니라 1990년부터 시작된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극심한 폭력과 학살이 자행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전범재판이 열려서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전범으로 처벌받기도 했다. 나토의 개입은 푸틴마냥 자국 이기주의에 나온 것이 아니다. UN이 아니라 나토가 개입한 것은 의도적으로 UN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UN 안보리에 포진한 중국과 러시아가 세르비아의 편을 들어서 개입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동일선상에 놓일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따지면 김일성이 남침했을 때 미국 주도의 유엔군 개입도 서방의 이중잣대라고 할 참인가.

그 밖에도 젤렌스키가 인기영합을 위해서 나토 가입을 운운하여 푸틴을 자극했다는 둥, 우크라이나가 민스크 협정을 위반하고 돈바스에서 도발을 일삼았다는 둥, 제국주의 시절 미국과 서방은 지금의 러시아보다 더 잔혹하고 나쁜 짓을 했으며 냉전 때에는 미국이 남미 정권을 얼마나 많이 무너뜨렸는지 아느냐는 둥. 크름 반도 점령을 시작으로 푸틴이 본격적으로 우크라이나의 목줄을 죄어오는 상황에서 젤렌스키가 외부의 도움을 호소하는 것을 과연 포퓰리즘으로 치부할 일인가 싶다. 고종이 분별없이 헤이그에 밀사를 보내어 일본을 자극하는 바람에 조선이 병탄되었다고 하는 꼴이 아닌가. 국가 지도자가 자력으로 나라를 지킬 수 없다면 뭐라도 해야 하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저자가 여기에 대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 그저 이런 주장도 있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불분명하다. 저자의 입장이 어떠한지 분명해야 독자에게 혼란을 주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책임론을 다룬 1부가 다소 중구난방이라는 느낌이라면,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역사와 러시아 혁명 시절 어째서 우크라이나는 핀란드와 달리 독립하지 못한 채 구소련의 일부로 남게 되었는지, 러시아와 한지붕에서 살면서 우크라이나가 뼈저리게 겪어야 했던 고난,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동거 대신 별거를 선택하게 되는 배경, 그리고 껄끄럽지만 썩 나쁘지 않은 이웃 사촌에서 오늘날 철천지 원수가 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과정과 우크라이나가 어떤 실책을 저질렀고 우리는 무엇을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지는 그 방면의 전문가답게 매우 예리하면서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굶주린 우크라이나 땅은 외부로부터 먹을 것마저 공급받을 수 없는 무인도 신세가 되어버렸다. 기록에 따르면 1933년 2월 소련 비밀 경찰은 배고픔에 마을을 떠나려는 22만명의 우크라이나 농민들을 체포했다. 일부는 원래 살던 곳으로 강제 이송되었고 반역의 정도가 크다고 판단된 자들은 시베리아의 집단수용소인 굴락으로 추방했다. 각종 자료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에서 1932~1933년 직접적인 아사나 이후 합병증으로 사망한 사망은 600만명에서 최대 1천만명에 이른다. 1분에 17명, 하루에 2만5천명이 배고픔과 영양부족, 그에 따른 질병으로 죽은 것이다. - p.224

홀로도모르가 일어나던 시기에 소련의 전략 곡물 비축분은 300만 톤으로 우크라이나의 굶주린 인민을 긴급 구호하는데 쓰일 수 있었지만 소련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더욱 개탄스러운 일은 자국민이 죽어가는 가운데서도 스탈린은 소련의 산업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외국과 체결한 곡문 수출 계약은 끝까지 이행했다는 것이다. 1933년만 해도 소련의 곡물 수출량은 180만 톤에 달했다. 이것만 봐도 소련 정부가 의도적으로 특정 민족을 말살하려고 했던 정황이 충분하다. - p.229

레닌 사후 고르바초프에 이르기까지 소련 최고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공화국마다 독립을 기도하지 못하도록 철저한 감시와 탄압 체제를 유지했다. 이로 인해 민족주의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다수의 우크라이나 지식인들이 소련 시절 내내 체포와 처형, 유배 조치를 당했고 일부 인사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밖에 없는 극도의 상황에 내몰렸다. - p.230

스탈린은 전쟁 기간 나치에 부역했다는 꼬투리를 잡아 말을 잘 듣지 않는 우크라이나 전체를 몰살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스탈린에 대하 격하 연설이 있었던 1956년 2월 제20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는 "전쟁이 끝난 뒤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인 전부를 강제 이주시키려고 했지만 인구가 너무 많아서 단념했다"라고 털어놓았다. - p.237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폴란드와 핀란드는 독립을 쟁취한 반면, 우크라이나는 구소련의 일원으로 남았다. 그것은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볼셰비키의 강력한 공세를 막아낼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우크라이나를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걸출한 지도자가 없었다. 폴란드에는 피우스트스키가 있었고 핀란드에는 만네르하임이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그렇지 못했다. 세계 최대의 흑토이자 '짜르의 빵바구니'라고 불리었던 우크라이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던 레닌은 사탕과 채찍을 병행하여 우크라이나를 손에 넣었다. 우크라이나인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고 민족간 평등과 자치를 강조하여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 의지를 빼앗았다. 그래도 저항하는 자들은 가차없이 분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시절 우크라이나에 근대적인 민족주의가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환상은 레닌이 죽고 스탈린이 집권하자 산산히 깨졌다.

스스로 국가를 세우는 어려운 길보다 남이 세워놓은 국가에 합류하는 쉬운 길을 선택한 댓가는 컸다. 스탈린은 러시아가 아니라 소수민족인 조지아 출신이지만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러시아인이라고 여기는 인간이었다. 그에게는 오직 러시아만 있었고 다른 민족들은 러시아를 위해 봉사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인들을 먹여 살리고 외화 벌이를 위한 식량 창고로 전락하여 온갖 수탈을 당해야 했다.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스탈린의 압제에 반발한 일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나치에 붙었다는 이유로 우크라이나 전체가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다. 스탈린에게 찍힌 다른 소수민족들은 아예 민족 전체가 통째로 시베리아 굴라그 행을 당하고 그 와중에 절멸한 경우도 있다는 점에서 그나마 우크라이나는 운이 좋았다랄까.

1933년 우크라이나 제2의 도시인 하르키우 거리 한복판에 굶어죽은 시신과 무심하게 지나가는 시민들. 우크라이나에서는 세계 최초의 인종청소라고 주장하는 '홀로도모르(Holodomor)'는 1959년 3천만명이 굶어죽었다는 중국 대기근에 필적하는 참사이자 자연재해가 아니라 스탈린이 러시아의 지배에 항거하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요량으로 의도적으로 저지른 폭정이었다. 소련 공산주의 체제는 명목상으로 민족간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러시아가 다른 민족들을 식민지인 취급하는 식이었다.


스탈린의 공포정치와 홀로도모르, 그 이후에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민족주의를 말살하여 영원한 러시아의 머슴 노릇을 하기를 원하는 소련 지도자들, 그리고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결코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원한을 남겨 놓았다. 러시아의 지배가 흔들리자 우크라이나인들이 저항에 나서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70여년 내내 악몽을 겪었던 우크라이나는 1991년 12월 1일 국민 투표를 통해서 처음으로 독립을 쟁취했다. 하지만 그것은 베트남이나 알제리인들처럼 외세를 상대로 총을 들고 싸워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 어쩌다보니 굴러들어온 것이기도 했다. 독립은 했으되, 자립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은 대부분 구 소련 시절의 관료들이었고 러시아인들을 대신하여 권력을 차지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정치는 부패했고 정책은 부재했으며 외세에 빌붙을 궁리만 했다. 장군들은 창고에 쌓여 있는 막대한 무기를 외국에 팔아먹어 국가를 무방비로 만들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이 푸틴이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말년의 쿠치마처럼 순응적인 지도자가 나와야 우크라이나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국제사회에서 한 목소리를 내며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야누코비치는 크렘린이 주무르기 편한 후보였다. 러시아 당국은 대선 전부터 쿠치마 진영에 비밀리에 거액을 제공했고 우크라이나 정부와 여당에 유리한 다양한 선심성 공약을 쏟아내며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2004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갖고 있던 26억 달러의 천연가스 대금 부채를 14억 달러로 탕감하고 우크라이나산 철강 파이프의 러시아 내 수출 쿼터 한도를 풀어준 것이 그러한 사례 중 하나였다. 우크라이나 대선 전략 총책임자에 푸틴의 최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테프 크렘린 행정실장이 맡은 것을 러시아가 정권 차원에서 우크라이나 대선에 얼마나 특별한 공을 들였는지 잘 보여준다. - p.289

EU와의 결별 소식에 키이우와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정권 퇴진을 외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었다. 정부는 경찰력을 동워해 시위 해산에 나섰다가 특수부대를 투입하는 등 진압의 수위를 높였다. 2014년 2월 20일 정부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민심은 야당과 혁명 세력 쪽으로 급격히 돌아섰다. 오렌지 혁명 때에도 총기 진압이 거론되었지만 당시 쿠치마 대통령은 "국민을 죽이고서는 정권이 버틸 수 없다"며 무력 개입을 막았다. 오렌지 혁명이 총알 없이 무혈로 이뤄진 반면 10년 뒤 유로마이단 혁명은 다급해진 정부가 민간인들을 살상하면서 권력을 보전할 최소한의 정당성을 스스로 잃어버렸다. - p.306


구소련이 붕괴하고 우크라이나가 독립한지 30여년이 지났다. 길다고도, 짧다고도 말하기 쉽지 않은 시간 동안 그동안 우크라이나가 보여준 모습은 결코 모범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국민들은 친러냐, 반러냐를 놓고 분열되었으며 정치적 혼란은 여전하다. 하지만 죄다 우크라이나인들이 무능한 탓으로 돌릴 일도 아니다. 어느 나라이건 외세의 오랜 지배에서 벗어나면 극심한 진통을 겪기 마련이다. 우리만 해도 한국전쟁과 두 번의 군부 쿠데타가 있지 않았던가.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피하게 겪어야 하는 성장통이기도 하다. 더욱이 우크라이나는 푸틴이라는 탐욕스럽고 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 우크라이나의 성장을 방해하기 위해 어떤 것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독재자를 이웃에 두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우크라이나는 다른 구소련 국가들과 달리 서툴지만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나라이다.

약소국일수록 덩샤오핑 중국 전 최고지도자가 주창한 '도광양회'야말로 우크라이나인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금과옥조일 것이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리며 실력부터 쌓는 도광양회의 정신을 우크라이나들이 실천했더라면 수백 년 전부터 러시아에게 당해온 수모를 지금쯤은 해소하고 2022년 발발한 전쟁의 참상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 - p.328


저자는 우크라이나가 덩샤오핑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일리 있는 말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이기도 하다. 덩샤오핑은 독재자로서 누구의 반대도 신경쓸 필요가 없었을 뿐더러, 중국은 실력을 숨긴다고 해서 수모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미국과 서방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국에 우호적이었고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반대로 청조가 수모를 당한 것은 인내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적대적인 제국주의 국가들이 중국을 집어삼킬 기회만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우크라이나가 처한 처지는 덩샤오핑의 중국이 아니라 청조 시절의 중국에 더 가깝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민주국가로서 지도자들은 짧은 임기 동안 여론의 추이에 항상 신경써야 하며 반대파들의 견제를 받아야 한다. 도광양회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구조라는 얘기이다.

우크라이나인들이 정말로 반성해야 마땅한 것은 푸틴 옹호자들의 주장마냥 분별없이 서방에게 붙어서 러시아를 적대하고 자치를 요구하는 돈바스의 친러 주민들을 탄압하여 푸틴의 침공을 자초했다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더 빨리 지금처럼 러시아의 횡포에 맞서 싸우려고 노력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입장 바꾸어 일제 시대에 일본이 조선의 민족지도자들과 엘리트 지식인 계층 수십만명을 잠재적인 반항 세력이라며 모조리 몰살 시키거나 머나먼 사할린으로 쫓아보내고 의도적으로 모든 식량 공급을 차단하여 수백만명을 굶겨 죽었다면 과연 우리는 그 역사를 잊을 수 있을까. 비록 구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 아내를 둔 흐루쇼프가 우크라이나에 잠시 선심성 정책을 쓰고 우크라이나 출신인 브레즈네프가 소련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올랐다고 하지만 이것이 우크라이나가 모든 차별에서 벗어나 러시아와 동등한 지위를 누렸다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얘기이다.

브레즈네프는 어디까지나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러시아인 또는 러시아화된 우크라이나 출신일 뿐, 우크라이나인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일본이나 서구 열강들의 식민 지배가 가혹했다고 하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한 짓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구 소련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푸틴이 한번이라도 과거사에 대해 진솔하게 인정하고 주변국들을 동등한 파트너로서 존중했던가. 오히려 나라도 없던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독립을 선물로 선사한 것은 러시아의 관용이며 배은망덕하게도 그 은혜를 모르고 서방에게 빌붙으려 한다고 질타하는 것이 푸틴의 사고 방식이다. 우리가 일본에게 분노한다면 우크라이나인들은 그 이상으로 러시아인들에게 분노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독립 이후 지난 30여년 동안 우크라이나 정치인들은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양다리 외교를 펼치면서 눈치 보기에 급급했다. 그러한 우유부단함이 푸틴으로 하여금 우크라이나를 '배알도 없는 놈들'이라면서 만만하게 여기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 결과가 이번 전쟁이다. 하지만 강한 놈 앞에서 지레 주눅드는 모습이 한심하게 보일지 몰라도 오랫동안 남의 노예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생존 본능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쟁은 비극이기는 해도 어쨌든 우크라이나인들이 다시 태어날 기회이기도 하다. 흔히 말하는 '진정한 사내'로서 말이다.

반면, 푸틴의 모습은 말하자면 진작에 이혼한 마누라에게 아직도 미련 못 버리고 재결합을 요구하면서 쫓아다니는 남편같은 꼴이다. 전 마누라는 정나미 떨어진 지 오래인데 말이다.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는다고 제 분을 참지 못해 폭력마저 서슴치 않은 게 우크라이나 전쟁의 실체이다. 정작 본인은 독재자 아니랄까봐 조강지처 쫓아내고 이 여자 저 여자 갈아치우면서 인생을 만끽하고 있지만 말이다. 여기서 더 뭔 말이 필요할까.




여러모로 생각할 것이 많은 책이다. 제목 그대로 러시아 때문에 슬픈 우크라이나이다. 구성이 불편하고 논리에서 지적할 부분이 없지 않지만 시중에서는 그나마 균형적인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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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인 블랙니스 - 아프리카, 아프리카인, 근대 세계의 형성, 1471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하워드 프렌치 지음, 최재인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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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세계는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고 아프리카인이 완성했다. - 본문 중.


우리는 아프리카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5대양 6대주를 통틀어 우리 한국인들에게 아프리카만큼 인연을 가지기 어려운 대륙도 없지 않을까 싶다. 평생 살면서 어지간해서 아프리카를 여행할 기회도 없을뿐더러, 아프리카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공부하지도 않는다. 특별한 사람들만이 업무나 선교, 봉사 활동을 위해서 아프리카를 찾을 뿐이다.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야 아프리카에 가고 싶어도 일단 치안과 위생부터 걱정되니까 말이다. TV에서 아프리카에 대해 나오는 것이라고는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광활한 대자연과 그 위에서 뛰어노는 야생 동물들이 등장하는 다큐멘터리, 굶주림에 허덕이는 불쌍한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기부하라는 국제봉사단체의 광고 정도이다. 내가 어릴 적에 본 어느 만화에서는 주인공이 아프리카에 갔다가 벌거벗은 식인종들에게 붙잡혀서 잡아먹힐 뻔했던 장면이 기억난다. 아프리카에는 식인종 따위는 없음에도 말이다. 그 시절 한국인들의 아프리카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셈이다. 우리만이 아니라 여전히 많은 사람은 아프리카인들이 수천 년 동안 문명도 나라도 없이 부족 단위의 원시적인 삶을 살았으며 유럽인들의 노예사냥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갔을 것이라고 믿는다. 아프리카의 역사는 서양의 침략과 함께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말이다. 이러한 관념은 19세기 인종 차별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던 유럽 우생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서울 둘리 뮤지움에 있는 포토존이라는데 1980년대에 방영했을 때 둘리 애니메이션에서 나온 바 있는 아프리카 식인종에게 잡혀서 국거리가 되기 직전의 둘리 패거리들. 애들용 만화라고는 하지만 엄연한 인종 차별이다. 뭐 얘네들은 인간이 아니라서 상관없나.


유럽인들 역사에서 때때로 동방에서 아시아인들이 밀고 들어왔지만, 그 이상으로 피 터지는 경쟁을 벌였던 쪽은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있는 아프리카였다. 우리는 람세스와 클레오파트라가 통치했던 이집트만을 기억하지만 유럽 대륙의 3배 크기인 아프리카에는 오랜 역사와 광대한 영토를 자랑했던 많은 제국과 왕국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15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초까지 150여 년 동안 존재했던 송가이 제국(Songhai Empire)은 한때 서부 아프리카 대부분을 지배하면서 올망졸망한 유럽국가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번영을 누렸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대항해시대에 뛰어들게 된 계기도 송가이 제국을 상대로 노예와 황금 교역을 위해서였다. 아시아로 후추를 찾아서 나선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신대륙으로 보내진 1천만 명이 넘는 흑인 노예들의 대부분은 백인들이 아프리카를 침공하여 잡아들인 것이 아니라 현지 흑인 노예상들로부터 구입했다.


어벤져스에서는 아프리카에 '와칸다 포에버'를 외치면서 천조국조차 능가하는 SF적인 국가가 있다는 설정이지만 이쪽은 만화인지라.


더욱이 대항해시대는 유럽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개척하고 흑인 노예들을 대서양 너머로 보내고 있을 때, 북아프리카에서 위세를 떨치던 바르바리 해적들은 유럽 해안가를 침략했고 100만 명 이상의 유럽인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부렸다. 대니얼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에서도 영국 태생의 주인공이 항해에 나섰다가 바르바리 해적에게 붙잡혀 노예 생활을 하다가 탈출하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양쪽의 대우는 전혀 달랐다. 백인 노예들은 유럽인들에게 붙들려서 신대륙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끌려간 흑인 노예들마냥 지독한 강제 노동에 시달리지 않았고 훨씬 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아프리카와 오스만 제국에서 노예 출신이 운 좋게 관대한 주인을 만나 자유민이 되고 나중에는 출세하여 고관대작이 되는 것도 드물지 않았지만 신대륙의 흑인 노예들에게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야만적인 쪽은 문명인을 자처하던 백인이었다. 유럽인들은 다른 대륙들을 모조리 정복한 뒤인 19세기 말에야 아프리카를 손에 넣었다. 말라리아와 같은 풍토병 탓도 있지만 아프리카인들이 그만큼 강적이었다는 얘기이다. 오늘날 가난과 기근, 폭력, 정치적 혼란이라는 아프리카의 어두운 모습은 원래 그랬다기보다 유럽 식민지 시절이 남겨놓은 후유증이다.


흔히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를 가리키는 '검은 아프리카(Black Africa)'라는 표현 자체가 인종 차별적이고 편견 가득한 것이기도 하다. 단순히 피부색이 검은 사람들이 살기 때문이 아니라(다른 대륙은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르네상스 시절 중세를 싸잡아 '암흑기'라고 불렀던 것 마냥 야만적이고 암울하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 중세가 알고보면 그렇게 암흑은 아니었다고 재평가하는 것처럼 우리 상상속의 아프리카와 진짜 아프리카가 얼마나 일치하는가는 별개의 얘기일 것이다.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책과 함께에서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주목할 만한 신작 도서가 나왔더라. <본 인 블랙니스(Born in Blackness)>는 국내에서는 보기 드물게도 대항해시대가 열리는 1471년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아프리카의 근대사를 다룬 책이다. 저자인 하워드 프렌치(Howard W. French)는 언론인 출신 저명한 미국인 작가이자 아프리카 전문가이다. 2022년에는 두 차례 비소설 분야에서 수상하기도.


스스로 자신에게는 아프리카에서 붙잡혀 온 흑인 노예의 피가 흐른다고 하는데 이렇게 봐서는 백인 같기도. 혼혈이라서 그런지.


언젠가 읽었던 주경철 교수의 <그 해 역사가 바뀌다, 21세기 북스>에서는 '인류사의 결정적인 변곡점'이라고 하여 그 첫번째 사건을 1492년, 즉 콜롬부스의 신대륙 발견을 꼽는다. 그로 인하여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우리네 세상은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유럽인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원주민들은 죽어나갔지만 원래 대업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니 말이다. 이것은 서구 학자들이 만들어낸 지극히 유럽 편의적인 역사관이다. 우리가 교실에서 배우는 소위 '근대사'란 식민지 개척에 뛰어든 일부 유럽 국가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삼아서 다른 나라들을 어떻게 침략하고 노예로 삼아서 세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 대한 것이다. 그 나머지 세계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따위는 한낱 곁가지이거나 관심 밖이다. 하지만 그 시절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발견이 죄다 유럽에서만 벌어졌던가. 애초에 중요하고 말고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책은 유럽이 전부라는 식의 그런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내용이다.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항해시대가 처음 열리게 된 것은 유럽이 아시아와 관계 맺기를 열망했기 때문이라고 배웠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유럽이 수 세기 동안 상업적 유대를 원했던 쪽은 아시아가 아니라 전설로 오르내렸던 유명한 부자 흑인 사회, 즉 '가장 어두운' 서아프리카 중심부 어딘가에 숨어 있다고 알려진 부유한 흑인 사회들이었다. 유명한 이베리아 반도의 항해자들은 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모색하면서가 아니라 서아프리카 해안을 왕래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이곳에서 콜럼버스는 대서양의 해풍과 조류의 기능을 충분히 익혔기에 훗날 대서양 서쪽 끝까지 항해할 수 있었다. - p.15


저자는 14세기 말리 제국을 통치했던 황제 아부 바크르 2세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바크르 2세는 콜롬부스보다 150년이나 먼저 함대를 편성하여 대서양을 넘으려고 했다는 인물이다. 단순한 도시 전설로 치부하기에는 실제로 말리 제국의 영토는 무려 프랑스의 두 배 크기였고 그 시절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크고 부유했다. 바크르 2세의 뒤를 이어 옥좌에 앉은 만사 무사는 '아프리카의 황금왕'이라고 불리었을 정도였다. 아프리카에 황금이 많다는 것을 안 유럽인들은 대박의 꿈을 꾸면서 너도나도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프리카와의 무역이 확대됨과 비례하여 유럽인들은 점점 더 멀리 나아갔고 어느 순간 정신 차리고 보니 전 세계 바다를 지배하고 있었다. 저자는 아프리카의 이권을 놓고 벌어진 경쟁이 우리가 아는 근대 세계를 열었다고 말한다. 그만큼 아프리카가 부유한 세계였다는 것. 대표적인 예가 서부 아프리카의 해안가를 지배했던 말리 제국, 가나제국, 송가이 제국이었고 어마어마한 황금의 나라이기도 했다. 대항해시대의 선도자인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인들과의 황금 거래를 통해서 막대한 부를 쌓았고 그 돈이 훗날 더 먼 세계, 즉 신대륙 개척의 밑천이 되었다. 그 시절 아프리카는 꿈도 희망도 없는 검은 대륙이기는 커녕, 금빛으로 반짝반짝하는 신천지였던 셈이다.



16세기 대항해시대 초반을 무대로 하는 코에이사의 고전 게임 <대항해시대2>에서는 5명의 유럽 상인들과 그 시절 유럽의 최대 경쟁국이었던 오스만 상인 1명이 등장하는게 전부이다. 아프리카는 은과 후추, 육두구를 찾아서 머나먼 아시아로 항해하는 도중에 물과 식량을 보급하기 위해 잠시 들리는 중간 기착지이거나 신기한 발견물을 찾는 곳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황금 교역은 짭짤하지만.


황금 무역과 더불어 아프리카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노예 무역이다. 노예제 자체는 아프리카의 전유물이기는 커녕,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고 옆동네 일본만 하더라도 전국시대에 최대 수출품이 인간이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이다. 그 시절 인간을 팔아서 총을 구매한 것은 아프리카만이 아니었다. 우리 역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수십만명이 노예로 끌려간 아픈 역사가 있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면 아프리카 노예들은 인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신대륙 개척지에서 원주민들을 병균과 가혹한 강제 노동으로 몰살시킨 유럽인들은 그 빈자리를 아프리카 노예들로 메꾸어 놓았다. 유럽인들이 원주민들의 저항을 분쇄하면서 광대한 신대륙을 개척하고 거대한 플랜테이션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무한정 수입하여 끝없이 갈아넣은 덕분이었다. 신대륙은 사실상 '제2의 아프리카'가 되었다.


만약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대량의 노예를 구할 수 없었다면 신대륙 개척 또한 결코 오래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력이 부족한 백인들만으로 도전하기에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물론 산업혁명도 없었을 것이고 오늘날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도 없었을 것이다. 비록 노예로 끌려간 흑인들에게는 비극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 책에서는 저자가 직접 신대륙과 아프리카의 유적지를 좇아가면서 대항해 시대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어떻게 노예를 획득했으며, 어째서 아프리카는 유럽의 신대륙 개척을 위한 노예 공급처가 되었던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두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에스파냐 왕 카를로스 2세는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식민지에서의 노동 현황에 대한 보고서를 의뢰했다. 그리고 이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제시했다. 노예 무역이 없다면 "거의 흑인 노예가 경작하고 있는 토지 재산을 상실하는 격이며 아메리카는 완전히 파산하게 될 것이다." - p.318

세계적으로 인정하는 교환 수단은 원래 금이었다. 그런데 17세기 중엽부터 아프리카 사회들이 외부와의 교역에서 지불 수단으로 노예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노예는 신세계에서 귀중품 생산의 기초로 자신들의 가치를 이미 증명했다. 그 대가로 황금해안의 사회들이 얻은 것은 오래가지 않고 금방 가치가 사라지는 물품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내놓은 상품은 거의 보편적인 가치의 저장소인 금이나 노예처럼 상당한 생산 잠재력을 가진 인간이었다. 이런 교환의 본질적 성격으로 인해 교역조건은 꾸준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프리카 대륙에 불리한 방향으로 기울어갔다. - p.325

해안 지대에 살던 아프리카인들은 유럽인이 가장 탐내는 것이 흑인의 육체라는 사실을 점차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해안을 따라 작은 나라들로 갈라져 있던 사회 지도자들 대부분은 포로를 판매하는 것에 도덕적 가책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프리카로 되돌아오는 아프리카인이 거의 없었고 아프리카인을 신세계로 데려간 목적에 대해 거의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단합된 혹은 하나의 아프리카인이라는 의식과 정체성이 없던 시대였음을 고려해야 한다. 오늘날 아프리카인과 아프리카인 디아스포라의 구성들이 널리 선전하며 공유하는 정체성 따위는 없었다. - p.335


1415년 지브롤타 너머 모로코 북쪽의 세우타를 포르투갈이 처음 정복하여 아프리카 진출의 발판으로 삼고 15세기 말에는 스페인이 서 서하라의 카나리아 제도를 손에 넣은 이후,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서 꾸준히 남쪽으로 향해했다. 1488년에는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했고 9년 뒤에는 바스코 다가마가 희망봉을 넘어서 인도로 향하는 동방 항로를 개척했으며 1521년에는 마젤란이 지구를 거의 한바퀴 도는데 성공한다. 유럽인들은 인도, 중국과 무역했고 신대륙을 정복했으며 동남아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정작 유럽에서 가장 가까운 아프리카에 대해서는 정복은 커녕, 거의 발을 들이지 못했다. 아프리카 노예는 유럽인들에게 붙잡힌 포로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만한 대가를 주고 현지에서 구입한 것이었다. 콜롬버스가 히스파니올라 섬을 처음 발견한 지 불과 한 세대 만에 광대한 잉카, 아즈텍 제국을 무너뜨린 것과는 대조적이다.


아프리카가 신대륙의 운명과 달랐던 이유는 물론 <총 균 쇠>에 나오는 것처럼 이곳에서는 병균이 유럽인들의 편이 아니었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도 아프리카인들이 유럽인들 못지 않게 용맹하면서 근대 전쟁에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인도에서 세포이들의 반란을 무력 진압하고 아편전쟁에서는 청의 보잘 것 없는 함대를 격파하여 서구 문명의 위세를 떨쳤던 영국조차 아프리카인들을 상대로 패배를 거듭했을 정도였다. 1879년 1800여명의 영국군이 2만명의 줄루족에게 포위되어 괴멸한 이산들와나 전투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이상으로 고전을 면치 못한 쪽은 지금의 가나에 있었던 정복 국가 아샨티 제국과의 싸움이었다. 1823년 제1차 영국-아샨티 전쟁에서 영국군은 대패하여 찰스 매카시 장군이 전사했으며 그의 해골은 술잔이 되었다. 영국은 1901년에야 아샨티 제국을 멸망시켰다. 1885년에는 수단 마흐디 군대에게 대패했고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여 명성을 떨쳤던 찰스 고든 장군이 전사하기도 했다. 아프리카는 근대 내내 유럽과 동등한 지위를 누렸다. 유럽 국가들은 아프리카 국가와 동맹을 맺었고 유럽 군인들은 아프리카에서 용병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아프리카가 유럽인들에게 완전히 정복된 것은 20세기 초에 와서였다. 더욱이 에티오피아는 1896년에 이탈리아를 상대로 아두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서 끝까지 누구도 정복하지 못한 나라로 남았다.

19세기까지 어떤 규모의 아프리카 국가도 유럽인들에게 정복된 적은 없다. 유럽인과의 접촉이 단단하고 지속적으로 이어져 노예 무역으로까지 치닫게 되었지만, 어떤 정치 체제도 복속되지 않았다. 캉이 콩고 왕국을 처음 발견한 이후 150여년 동안 콩고는 포루트갈과 전반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 p.379

콩고 군대는 다시 결집하여 이듬해 1월 음반다카시 마을 부근에서 포르투갈-임방갈라 군대와 맞붙어 완승을 거두었다. 콩고 왕 페드로 1세는 특출난 외교적 능력을 발휘하여 승리를 굳혀 나갔다. 그는 에스파냐 왕과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포르투갈의 공격과 임방갈라의 찬혹행위들을 비난했고 노예로 브라질에 보내진 콩고 귀족 등을 되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2년 뒤 그의 항위가 결실을 맺어 1천여명이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귀국했다. - p.398


불과 두 세기 전만 해도 유럽인들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아프리카가 어째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빈곤하고 낙후한 세계로 전락했는가. 이것은 무엇보다 가장 핵심적인 질문일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동남아시아와 비교해도 아프리카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어느 연구에 따르면, 프랑스 식민 치하의 베트남에서도 인구의 10% 가까이 문자 교육을 받았다. 이는 동 시대 아프리카 어떤 식민 체계가 이룬 교육적 성과보다도 열 배는 큰 규모이다. 남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기반 시설에 대한 투자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정말 얼마 안 되는 철도도 대부분 작은 궤도로 지어졌고 그마저도 광물을 광산에서 항구로 이송하는데 집중되었다.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이 독립 이후 발전하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경제적으로 발전하지 못했던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 p.415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를 지배한 시간은 아시아나 신대륙에 비하여 훨씬 짧다. 인도만 해도 19세기 초부터 이미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1877년에는 영국의 직할령이 되었다. 여기에 비하면 북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를 제외하고 아프리카 대륙이 본격적으로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19세기 말부터였다. 그리고 1950년부터 시작하여 1960년대에 오면 대부분의 나라들이 독립을 쟁취했다. 길어야 70여년 남짓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은 아프리카의 역사를 왜곡시키기에 충분했다. 아예 원주민이 절멸당하고 백인들과 흑인 노예로 메운 신대륙과 달리 아프리카에서는 여전히 흑인들이 주류 집단으로 남았지만 유럽 국가들은 기존 왕국들의 경계를 무시한 채 제멋대로 국경을 그어서 흑인들끼리 서로 피터지게 싸우도록 만들었다. 이런 모습은 그럭저럭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한 채 독립했던 아시아 국가들이 겪지 않은 일이다. 아프리카는 유럽인들에게 오직 수탈의 대상이었고 교육이나 인프라 건설에 아무런 투자도 하지 않았다. 식민 지배만이 아니라 수백년 동안 지속된 노예 무역 또한 막대한 인구 유출로 이어지면서 아프리카의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한마디로 아프리카의 불운은 하필이면 유럽 옆에 있었다는 것.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프리카를 놓고 첨예하게 벌어진 미-소 냉전의 대결 또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아프리카에서 쿠데타를 조장하고 독재자들을 후원했으며 무기를 팔아먹었다. 1960년대만 해도 건실하게 성장하던 에티오피아에서 공산 혁명이 일어나 막장으로 만든 것도 냉전의 불똥이 튀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독립과 함께 시작된 폭발적인 인구 증가는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새로운 가능성보다는 또 다른 재앙이 되었다.

수백만 명의 사람을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빼앗아간 대서양 노예 무역 때문에, 인류 사회가 처음으로 지구화되던 바로 그 시기에 아프리카는 세계 다른 지역들과의 경쟁에서 크게 뒤쳐진 상태로 남게 되었다. 이 시대 어디에서든, 급속한 인구 증가는 도시화를 촉진했고 도시화는 모든 종류의 근대화 과정을 차례로 이끌어냈다. 인구 증가는 시장의 엄청난 확대와 무역이 성장할 잠재력을 의미했다. 그러나 노예제로 아프리카에서 이 모든 것이 빠져나가게 되면서 외부 경쟁자와 공격자, 특히 유럽인 앞에서 더 취약해졌다. 유럽은 아프리카 노동력을 활용하여 더 큰 부자가 되었다. 사실상 아프리카 인구는 식민화 초기인 20세기 초반까지도 지속적으로 감소했을 것이다. - p.418


유럽인들이 대항해시대를 연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어느 세계도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중국인들은 명나라 시절 정화 또한 아프리카에 당도했으며 그가 지휘했던 대함대에 비하면 콜롬부스의 함대 따위는 보잘 것 없다면서 자화자찬하지만 일회성 이벤트로 끝났을 뿐이다.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를 연결하는 항로를 개척하여 세상을 하나로 만든 쪽은 유럽인이지 아프리카인도, 아시아인도 아니었다. 유럽을 제외한 대다수 국가들은 자국 연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먼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더 큰 배와 숙련된 선원이 필요했고 막대한 돈이 들 뿐더러 위험이 너무 컸다. 한마디로 남는 장사가 아니라는 얘기이다. 바꾸어 말해서 유럽인들이 원양으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나 그들이 남들보다 호기심이 더 많아서가 아니라 돈벌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 아프리카 덕분이었다는게 이 책의 결론이다. 그로 인한 수혜는 모두 유럽인의 몫이었고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재앙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우리에게 아프리카는 달나라만큼이나 멀고도 먼 세상이다. 시중에는 중국 관련 책은 하늘의 별만큼 많지만 그 밖의 나라들, 특히 아프리카에 대한 책은 여행 에세이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더욱이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일어나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다는 자부심에 가득한 우리는 그렇지 못한 나라들을 가리켜 "너희는 왜 우리처럼 하지 못하느냐"라면서 실패자나 낙오자로 낙인찍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사정 따위는 알 바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성공은 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인 것이며 상당부분 운이 따랐다는 점도 간과해서 안 된다. 소위 가진 자들이 취업난과 열정페이, 생계난에 허덕이는 청년들을 가리켜 "너희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소리이다. 어느 사회이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빈부 격차는 단순히 개인의 노력보다도 차별과 기회의 불평등이라는 구조적 모순이 더 크기 때문이다.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아프리카나 아이티와 같은 중남미의 흑인 국가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근본적으로 유럽의 식민지가 남겨놓은 유산이다. 아프리카인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배울 기회도 없었고 유럽인들은 서로 적대적인 민족들을 한 자리에 모아두고 서로 싸움을 부추겼다. 유럽의 식민 지배는 아프리카인들에게 근대화의 선물은 커녕, 아프리카인들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박탈했다. 물론 어떤 이유로건 결국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아프리카인들의 몫이지만 말이다. 세계의 중심은 서양이라는 캐캐묵은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여러모로 아프리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책이다. 세상을 보는 눈을 한 단계 넓혀 주리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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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모른다 - 이분법을 넘어 한 권으로 이해하는 우크라이나 전쟁
메데아 벤자민.니컬러스 J.S. 데이비스 지음, 이준태 옮김 / 오월의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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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뭐가 균형잡힌 시각이라는 것인지. 젤렌스키가 피해자가 아니면 푸틴이 피해자라는 건가. 나토가 동유럽 국가들을 침략했던가. 지금 침략하는 쪽은 나토인가, 푸틴인가. 민스크 협정이 파토난 것에 푸틴의 책임은 없는가. 푸틴이 악당으로 낙인찍힌게 서방의 음모 탓인가. 질문을 던지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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