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인 블랙니스 - 아프리카, 아프리카인, 근대 세계의 형성, 1471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하워드 프렌치 지음, 최재인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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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세계는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고 아프리카인이 완성했다. - 본문 중.


우리는 아프리카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5대양 6대주를 통틀어 우리 한국인들에게 아프리카만큼 인연을 가지기 어려운 대륙도 없지 않을까 싶다. 평생 살면서 어지간해서 아프리카를 여행할 기회도 없을뿐더러, 아프리카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공부하지도 않는다. 특별한 사람들만이 업무나 선교, 봉사 활동을 위해서 아프리카를 찾을 뿐이다.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야 아프리카에 가고 싶어도 일단 치안과 위생부터 걱정되니까 말이다. TV에서 아프리카에 대해 나오는 것이라고는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광활한 대자연과 그 위에서 뛰어노는 야생 동물들이 등장하는 다큐멘터리, 굶주림에 허덕이는 불쌍한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기부하라는 국제봉사단체의 광고 정도이다. 내가 어릴 적에 본 어느 만화에서는 주인공이 아프리카에 갔다가 벌거벗은 식인종들에게 붙잡혀서 잡아먹힐 뻔했던 장면이 기억난다. 아프리카에는 식인종 따위는 없음에도 말이다. 그 시절 한국인들의 아프리카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셈이다. 우리만이 아니라 여전히 많은 사람은 아프리카인들이 수천 년 동안 문명도 나라도 없이 부족 단위의 원시적인 삶을 살았으며 유럽인들의 노예사냥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갔을 것이라고 믿는다. 아프리카의 역사는 서양의 침략과 함께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말이다. 이러한 관념은 19세기 인종 차별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던 유럽 우생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서울 둘리 뮤지움에 있는 포토존이라는데 1980년대에 방영했을 때 둘리 애니메이션에서 나온 바 있는 아프리카 식인종에게 잡혀서 국거리가 되기 직전의 둘리 패거리들. 애들용 만화라고는 하지만 엄연한 인종 차별이다. 뭐 얘네들은 인간이 아니라서 상관없나.


유럽인들 역사에서 때때로 동방에서 아시아인들이 밀고 들어왔지만, 그 이상으로 피 터지는 경쟁을 벌였던 쪽은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있는 아프리카였다. 우리는 람세스와 클레오파트라가 통치했던 이집트만을 기억하지만 유럽 대륙의 3배 크기인 아프리카에는 오랜 역사와 광대한 영토를 자랑했던 많은 제국과 왕국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15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초까지 150여 년 동안 존재했던 송가이 제국(Songhai Empire)은 한때 서부 아프리카 대부분을 지배하면서 올망졸망한 유럽국가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번영을 누렸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대항해시대에 뛰어들게 된 계기도 송가이 제국을 상대로 노예와 황금 교역을 위해서였다. 아시아로 후추를 찾아서 나선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신대륙으로 보내진 1천만 명이 넘는 흑인 노예들의 대부분은 백인들이 아프리카를 침공하여 잡아들인 것이 아니라 현지 흑인 노예상들로부터 구입했다.


어벤져스에서는 아프리카에 '와칸다 포에버'를 외치면서 천조국조차 능가하는 SF적인 국가가 있다는 설정이지만 이쪽은 만화인지라.


더욱이 대항해시대는 유럽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개척하고 흑인 노예들을 대서양 너머로 보내고 있을 때, 북아프리카에서 위세를 떨치던 바르바리 해적들은 유럽 해안가를 침략했고 100만 명 이상의 유럽인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부렸다. 대니얼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에서도 영국 태생의 주인공이 항해에 나섰다가 바르바리 해적에게 붙잡혀 노예 생활을 하다가 탈출하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양쪽의 대우는 전혀 달랐다. 백인 노예들은 유럽인들에게 붙들려서 신대륙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끌려간 흑인 노예들마냥 지독한 강제 노동에 시달리지 않았고 훨씬 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아프리카와 오스만 제국에서 노예 출신이 운 좋게 관대한 주인을 만나 자유민이 되고 나중에는 출세하여 고관대작이 되는 것도 드물지 않았지만 신대륙의 흑인 노예들에게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야만적인 쪽은 문명인을 자처하던 백인이었다. 유럽인들은 다른 대륙들을 모조리 정복한 뒤인 19세기 말에야 아프리카를 손에 넣었다. 말라리아와 같은 풍토병 탓도 있지만 아프리카인들이 그만큼 강적이었다는 얘기이다. 오늘날 가난과 기근, 폭력, 정치적 혼란이라는 아프리카의 어두운 모습은 원래 그랬다기보다 유럽 식민지 시절이 남겨놓은 후유증이다.


흔히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를 가리키는 '검은 아프리카(Black Africa)'라는 표현 자체가 인종 차별적이고 편견 가득한 것이기도 하다. 단순히 피부색이 검은 사람들이 살기 때문이 아니라(다른 대륙은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르네상스 시절 중세를 싸잡아 '암흑기'라고 불렀던 것 마냥 야만적이고 암울하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 중세가 알고보면 그렇게 암흑은 아니었다고 재평가하는 것처럼 우리 상상속의 아프리카와 진짜 아프리카가 얼마나 일치하는가는 별개의 얘기일 것이다.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책과 함께에서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주목할 만한 신작 도서가 나왔더라. <본 인 블랙니스(Born in Blackness)>는 국내에서는 보기 드물게도 대항해시대가 열리는 1471년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아프리카의 근대사를 다룬 책이다. 저자인 하워드 프렌치(Howard W. French)는 언론인 출신 저명한 미국인 작가이자 아프리카 전문가이다. 2022년에는 두 차례 비소설 분야에서 수상하기도.


스스로 자신에게는 아프리카에서 붙잡혀 온 흑인 노예의 피가 흐른다고 하는데 이렇게 봐서는 백인 같기도. 혼혈이라서 그런지.


언젠가 읽었던 주경철 교수의 <그 해 역사가 바뀌다, 21세기 북스>에서는 '인류사의 결정적인 변곡점'이라고 하여 그 첫번째 사건을 1492년, 즉 콜롬부스의 신대륙 발견을 꼽는다. 그로 인하여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우리네 세상은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유럽인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원주민들은 죽어나갔지만 원래 대업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니 말이다. 이것은 서구 학자들이 만들어낸 지극히 유럽 편의적인 역사관이다. 우리가 교실에서 배우는 소위 '근대사'란 식민지 개척에 뛰어든 일부 유럽 국가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삼아서 다른 나라들을 어떻게 침략하고 노예로 삼아서 세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 대한 것이다. 그 나머지 세계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따위는 한낱 곁가지이거나 관심 밖이다. 하지만 그 시절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발견이 죄다 유럽에서만 벌어졌던가. 애초에 중요하고 말고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책은 유럽이 전부라는 식의 그런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내용이다.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항해시대가 처음 열리게 된 것은 유럽이 아시아와 관계 맺기를 열망했기 때문이라고 배웠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유럽이 수 세기 동안 상업적 유대를 원했던 쪽은 아시아가 아니라 전설로 오르내렸던 유명한 부자 흑인 사회, 즉 '가장 어두운' 서아프리카 중심부 어딘가에 숨어 있다고 알려진 부유한 흑인 사회들이었다. 유명한 이베리아 반도의 항해자들은 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모색하면서가 아니라 서아프리카 해안을 왕래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이곳에서 콜럼버스는 대서양의 해풍과 조류의 기능을 충분히 익혔기에 훗날 대서양 서쪽 끝까지 항해할 수 있었다. - p.15


저자는 14세기 말리 제국을 통치했던 황제 아부 바크르 2세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바크르 2세는 콜롬부스보다 150년이나 먼저 함대를 편성하여 대서양을 넘으려고 했다는 인물이다. 단순한 도시 전설로 치부하기에는 실제로 말리 제국의 영토는 무려 프랑스의 두 배 크기였고 그 시절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크고 부유했다. 바크르 2세의 뒤를 이어 옥좌에 앉은 만사 무사는 '아프리카의 황금왕'이라고 불리었을 정도였다. 아프리카에 황금이 많다는 것을 안 유럽인들은 대박의 꿈을 꾸면서 너도나도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프리카와의 무역이 확대됨과 비례하여 유럽인들은 점점 더 멀리 나아갔고 어느 순간 정신 차리고 보니 전 세계 바다를 지배하고 있었다. 저자는 아프리카의 이권을 놓고 벌어진 경쟁이 우리가 아는 근대 세계를 열었다고 말한다. 그만큼 아프리카가 부유한 세계였다는 것. 대표적인 예가 서부 아프리카의 해안가를 지배했던 말리 제국, 가나제국, 송가이 제국이었고 어마어마한 황금의 나라이기도 했다. 대항해시대의 선도자인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인들과의 황금 거래를 통해서 막대한 부를 쌓았고 그 돈이 훗날 더 먼 세계, 즉 신대륙 개척의 밑천이 되었다. 그 시절 아프리카는 꿈도 희망도 없는 검은 대륙이기는 커녕, 금빛으로 반짝반짝하는 신천지였던 셈이다.



16세기 대항해시대 초반을 무대로 하는 코에이사의 고전 게임 <대항해시대2>에서는 5명의 유럽 상인들과 그 시절 유럽의 최대 경쟁국이었던 오스만 상인 1명이 등장하는게 전부이다. 아프리카는 은과 후추, 육두구를 찾아서 머나먼 아시아로 항해하는 도중에 물과 식량을 보급하기 위해 잠시 들리는 중간 기착지이거나 신기한 발견물을 찾는 곳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황금 교역은 짭짤하지만.


황금 무역과 더불어 아프리카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노예 무역이다. 노예제 자체는 아프리카의 전유물이기는 커녕,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고 옆동네 일본만 하더라도 전국시대에 최대 수출품이 인간이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이다. 그 시절 인간을 팔아서 총을 구매한 것은 아프리카만이 아니었다. 우리 역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수십만명이 노예로 끌려간 아픈 역사가 있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면 아프리카 노예들은 인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신대륙 개척지에서 원주민들을 병균과 가혹한 강제 노동으로 몰살시킨 유럽인들은 그 빈자리를 아프리카 노예들로 메꾸어 놓았다. 유럽인들이 원주민들의 저항을 분쇄하면서 광대한 신대륙을 개척하고 거대한 플랜테이션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무한정 수입하여 끝없이 갈아넣은 덕분이었다. 신대륙은 사실상 '제2의 아프리카'가 되었다.


만약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대량의 노예를 구할 수 없었다면 신대륙 개척 또한 결코 오래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력이 부족한 백인들만으로 도전하기에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물론 산업혁명도 없었을 것이고 오늘날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도 없었을 것이다. 비록 노예로 끌려간 흑인들에게는 비극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 책에서는 저자가 직접 신대륙과 아프리카의 유적지를 좇아가면서 대항해 시대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어떻게 노예를 획득했으며, 어째서 아프리카는 유럽의 신대륙 개척을 위한 노예 공급처가 되었던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두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에스파냐 왕 카를로스 2세는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식민지에서의 노동 현황에 대한 보고서를 의뢰했다. 그리고 이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제시했다. 노예 무역이 없다면 "거의 흑인 노예가 경작하고 있는 토지 재산을 상실하는 격이며 아메리카는 완전히 파산하게 될 것이다." - p.318

세계적으로 인정하는 교환 수단은 원래 금이었다. 그런데 17세기 중엽부터 아프리카 사회들이 외부와의 교역에서 지불 수단으로 노예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노예는 신세계에서 귀중품 생산의 기초로 자신들의 가치를 이미 증명했다. 그 대가로 황금해안의 사회들이 얻은 것은 오래가지 않고 금방 가치가 사라지는 물품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내놓은 상품은 거의 보편적인 가치의 저장소인 금이나 노예처럼 상당한 생산 잠재력을 가진 인간이었다. 이런 교환의 본질적 성격으로 인해 교역조건은 꾸준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프리카 대륙에 불리한 방향으로 기울어갔다. - p.325

해안 지대에 살던 아프리카인들은 유럽인이 가장 탐내는 것이 흑인의 육체라는 사실을 점차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해안을 따라 작은 나라들로 갈라져 있던 사회 지도자들 대부분은 포로를 판매하는 것에 도덕적 가책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프리카로 되돌아오는 아프리카인이 거의 없었고 아프리카인을 신세계로 데려간 목적에 대해 거의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단합된 혹은 하나의 아프리카인이라는 의식과 정체성이 없던 시대였음을 고려해야 한다. 오늘날 아프리카인과 아프리카인 디아스포라의 구성들이 널리 선전하며 공유하는 정체성 따위는 없었다. - p.335


1415년 지브롤타 너머 모로코 북쪽의 세우타를 포르투갈이 처음 정복하여 아프리카 진출의 발판으로 삼고 15세기 말에는 스페인이 서 서하라의 카나리아 제도를 손에 넣은 이후,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서 꾸준히 남쪽으로 향해했다. 1488년에는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했고 9년 뒤에는 바스코 다가마가 희망봉을 넘어서 인도로 향하는 동방 항로를 개척했으며 1521년에는 마젤란이 지구를 거의 한바퀴 도는데 성공한다. 유럽인들은 인도, 중국과 무역했고 신대륙을 정복했으며 동남아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정작 유럽에서 가장 가까운 아프리카에 대해서는 정복은 커녕, 거의 발을 들이지 못했다. 아프리카 노예는 유럽인들에게 붙잡힌 포로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만한 대가를 주고 현지에서 구입한 것이었다. 콜롬버스가 히스파니올라 섬을 처음 발견한 지 불과 한 세대 만에 광대한 잉카, 아즈텍 제국을 무너뜨린 것과는 대조적이다.


아프리카가 신대륙의 운명과 달랐던 이유는 물론 <총 균 쇠>에 나오는 것처럼 이곳에서는 병균이 유럽인들의 편이 아니었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도 아프리카인들이 유럽인들 못지 않게 용맹하면서 근대 전쟁에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인도에서 세포이들의 반란을 무력 진압하고 아편전쟁에서는 청의 보잘 것 없는 함대를 격파하여 서구 문명의 위세를 떨쳤던 영국조차 아프리카인들을 상대로 패배를 거듭했을 정도였다. 1879년 1800여명의 영국군이 2만명의 줄루족에게 포위되어 괴멸한 이산들와나 전투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이상으로 고전을 면치 못한 쪽은 지금의 가나에 있었던 정복 국가 아샨티 제국과의 싸움이었다. 1823년 제1차 영국-아샨티 전쟁에서 영국군은 대패하여 찰스 매카시 장군이 전사했으며 그의 해골은 술잔이 되었다. 영국은 1901년에야 아샨티 제국을 멸망시켰다. 1885년에는 수단 마흐디 군대에게 대패했고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여 명성을 떨쳤던 찰스 고든 장군이 전사하기도 했다. 아프리카는 근대 내내 유럽과 동등한 지위를 누렸다. 유럽 국가들은 아프리카 국가와 동맹을 맺었고 유럽 군인들은 아프리카에서 용병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아프리카가 유럽인들에게 완전히 정복된 것은 20세기 초에 와서였다. 더욱이 에티오피아는 1896년에 이탈리아를 상대로 아두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서 끝까지 누구도 정복하지 못한 나라로 남았다.

19세기까지 어떤 규모의 아프리카 국가도 유럽인들에게 정복된 적은 없다. 유럽인과의 접촉이 단단하고 지속적으로 이어져 노예 무역으로까지 치닫게 되었지만, 어떤 정치 체제도 복속되지 않았다. 캉이 콩고 왕국을 처음 발견한 이후 150여년 동안 콩고는 포루트갈과 전반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 p.379

콩고 군대는 다시 결집하여 이듬해 1월 음반다카시 마을 부근에서 포르투갈-임방갈라 군대와 맞붙어 완승을 거두었다. 콩고 왕 페드로 1세는 특출난 외교적 능력을 발휘하여 승리를 굳혀 나갔다. 그는 에스파냐 왕과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포르투갈의 공격과 임방갈라의 찬혹행위들을 비난했고 노예로 브라질에 보내진 콩고 귀족 등을 되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2년 뒤 그의 항위가 결실을 맺어 1천여명이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귀국했다. - p.398


불과 두 세기 전만 해도 유럽인들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아프리카가 어째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빈곤하고 낙후한 세계로 전락했는가. 이것은 무엇보다 가장 핵심적인 질문일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동남아시아와 비교해도 아프리카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어느 연구에 따르면, 프랑스 식민 치하의 베트남에서도 인구의 10% 가까이 문자 교육을 받았다. 이는 동 시대 아프리카 어떤 식민 체계가 이룬 교육적 성과보다도 열 배는 큰 규모이다. 남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기반 시설에 대한 투자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정말 얼마 안 되는 철도도 대부분 작은 궤도로 지어졌고 그마저도 광물을 광산에서 항구로 이송하는데 집중되었다.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이 독립 이후 발전하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경제적으로 발전하지 못했던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 p.415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를 지배한 시간은 아시아나 신대륙에 비하여 훨씬 짧다. 인도만 해도 19세기 초부터 이미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1877년에는 영국의 직할령이 되었다. 여기에 비하면 북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를 제외하고 아프리카 대륙이 본격적으로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19세기 말부터였다. 그리고 1950년부터 시작하여 1960년대에 오면 대부분의 나라들이 독립을 쟁취했다. 길어야 70여년 남짓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은 아프리카의 역사를 왜곡시키기에 충분했다. 아예 원주민이 절멸당하고 백인들과 흑인 노예로 메운 신대륙과 달리 아프리카에서는 여전히 흑인들이 주류 집단으로 남았지만 유럽 국가들은 기존 왕국들의 경계를 무시한 채 제멋대로 국경을 그어서 흑인들끼리 서로 피터지게 싸우도록 만들었다. 이런 모습은 그럭저럭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한 채 독립했던 아시아 국가들이 겪지 않은 일이다. 아프리카는 유럽인들에게 오직 수탈의 대상이었고 교육이나 인프라 건설에 아무런 투자도 하지 않았다. 식민 지배만이 아니라 수백년 동안 지속된 노예 무역 또한 막대한 인구 유출로 이어지면서 아프리카의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한마디로 아프리카의 불운은 하필이면 유럽 옆에 있었다는 것.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프리카를 놓고 첨예하게 벌어진 미-소 냉전의 대결 또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아프리카에서 쿠데타를 조장하고 독재자들을 후원했으며 무기를 팔아먹었다. 1960년대만 해도 건실하게 성장하던 에티오피아에서 공산 혁명이 일어나 막장으로 만든 것도 냉전의 불똥이 튀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독립과 함께 시작된 폭발적인 인구 증가는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새로운 가능성보다는 또 다른 재앙이 되었다.

수백만 명의 사람을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빼앗아간 대서양 노예 무역 때문에, 인류 사회가 처음으로 지구화되던 바로 그 시기에 아프리카는 세계 다른 지역들과의 경쟁에서 크게 뒤쳐진 상태로 남게 되었다. 이 시대 어디에서든, 급속한 인구 증가는 도시화를 촉진했고 도시화는 모든 종류의 근대화 과정을 차례로 이끌어냈다. 인구 증가는 시장의 엄청난 확대와 무역이 성장할 잠재력을 의미했다. 그러나 노예제로 아프리카에서 이 모든 것이 빠져나가게 되면서 외부 경쟁자와 공격자, 특히 유럽인 앞에서 더 취약해졌다. 유럽은 아프리카 노동력을 활용하여 더 큰 부자가 되었다. 사실상 아프리카 인구는 식민화 초기인 20세기 초반까지도 지속적으로 감소했을 것이다. - p.418


유럽인들이 대항해시대를 연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어느 세계도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중국인들은 명나라 시절 정화 또한 아프리카에 당도했으며 그가 지휘했던 대함대에 비하면 콜롬부스의 함대 따위는 보잘 것 없다면서 자화자찬하지만 일회성 이벤트로 끝났을 뿐이다.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를 연결하는 항로를 개척하여 세상을 하나로 만든 쪽은 유럽인이지 아프리카인도, 아시아인도 아니었다. 유럽을 제외한 대다수 국가들은 자국 연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먼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더 큰 배와 숙련된 선원이 필요했고 막대한 돈이 들 뿐더러 위험이 너무 컸다. 한마디로 남는 장사가 아니라는 얘기이다. 바꾸어 말해서 유럽인들이 원양으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나 그들이 남들보다 호기심이 더 많아서가 아니라 돈벌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 아프리카 덕분이었다는게 이 책의 결론이다. 그로 인한 수혜는 모두 유럽인의 몫이었고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재앙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우리에게 아프리카는 달나라만큼이나 멀고도 먼 세상이다. 시중에는 중국 관련 책은 하늘의 별만큼 많지만 그 밖의 나라들, 특히 아프리카에 대한 책은 여행 에세이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더욱이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일어나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다는 자부심에 가득한 우리는 그렇지 못한 나라들을 가리켜 "너희는 왜 우리처럼 하지 못하느냐"라면서 실패자나 낙오자로 낙인찍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사정 따위는 알 바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성공은 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인 것이며 상당부분 운이 따랐다는 점도 간과해서 안 된다. 소위 가진 자들이 취업난과 열정페이, 생계난에 허덕이는 청년들을 가리켜 "너희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소리이다. 어느 사회이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빈부 격차는 단순히 개인의 노력보다도 차별과 기회의 불평등이라는 구조적 모순이 더 크기 때문이다.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아프리카나 아이티와 같은 중남미의 흑인 국가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근본적으로 유럽의 식민지가 남겨놓은 유산이다. 아프리카인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배울 기회도 없었고 유럽인들은 서로 적대적인 민족들을 한 자리에 모아두고 서로 싸움을 부추겼다. 유럽의 식민 지배는 아프리카인들에게 근대화의 선물은 커녕, 아프리카인들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박탈했다. 물론 어떤 이유로건 결국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아프리카인들의 몫이지만 말이다. 세계의 중심은 서양이라는 캐캐묵은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여러모로 아프리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책이다. 세상을 보는 눈을 한 단계 넓혀 주리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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