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우크라이나 - 역사 속 러시아와 갈등으로 보는 우크라이나 전쟁
김병호 지음 / 마음친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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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2월 푸틴의 전격 침공으로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써 1년하고도 7개월이 지났다. 사흘이면 수도 키이우가 함락되고 우크라이나의 완패로 끝날 것이라던 전 세계 호사가들의 예측과는 달리, 우크라이나군은 놀라운 투혼으로 위기를 극복하는데 성공했다. 개전 초반에 빼앗긴 영토의 60%를 되찾고 지금도 꾸준히 러시아군을 밀어내며 조금씩이나마 전진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선전은 단순히 러시아를 견제하기 원하는 미국과 서방의 원조 덕분만이 아니라 전시 지도자인 젤렌스키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우크라이나인들의 강력한 항전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전 이전에만 해도 나이도 젊은데다 비천한 코메디언 출신이 감히 정치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편견과 조롱거리의 대상이었던 젤렌스키는 오히려 겉만 번드르하고 제 잇속만 챙길 줄 아는 3류 정치꾼들보다 훨씬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만약 그가 개전 초반 미국의 망명 권유를 받아들여 아프간의 가니 대통령처럼 제 가족만 챙겨서 국민과 군대를 버리고 달아났거나 푸틴과 대화로 해결하겠다면서 군대가 저항하지 못하도록 했다면 우크라이나의 운명 또한 그기서 끝났을 것이다. 원래 푸틴이 침공을 강행한 것은 수개월 전 아프간에서 쫓겨난 바이든 행정부가 말로는 뭐라고 한들 쉽사리 우크라이나의 편을 들지 못할 것이라고 낙관했기 때문이었다. 바꾸어 말해서 미국만 끼어들지 않는다면 우크라이나 따위는 막강한 러시아군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침공 초반에만 해도 어차피 질 싸움이라며 배팅에 주저했지만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의 공세를 격퇴하는데 성공하자 뒤늦게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다. 푸틴으로서는 자신보다 26살이나 어린 젤렌스키를 너무 얕봤다는 것이 유일한 계산 착오였다.


젤렌스키는 이렇다할 정치 경력도 없었을 뿐더러 <국민의 일꾼>이라는 TV 시트콤을 통해서 얻은 유명세로 어쩌다보니 대통령에 당선된 특이한 인물인지라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온갖 산전수전과 치열한 권력 투쟁 끝에 그 자리까지 올라온 고루하고 노회한 정치인들이 보기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구 소련 시절이 남겨놓은 부패와 보신주의, 파벌싸움이라는 우크라이나의 진흙탕 정치판에 때가 묻지 않은 지도자이기에 푸틴에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지금의 항전을 이끌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more


한편으로,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서방 일각에서 이쯤에서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목소리 또한 커지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적당히 영토를 내주어 푸틴의 체면을 세워주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원조부터 중단해야 한다는 것. 대표적인 인물이 헨리 키신저. 미국 우파의 대변인이자 그 옛날 남베트남을 희생시킨 대가로 자신은 뻔뻔하게도 노벨 평화상을 걸머쥐었던 키신저는 훈수를 둔답시고 "대(미국의 이익)를 위해서 소(약소국의 주권)를 버려야 한다."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있다. 어차피 푸틴을 설득할 방법은 없으니까 약자인 우크라이나가 양보하는 게 당연하다는 식인데 남의 일이라고 참 쉽게 얘기한다 싶다. 아니꼬우면 너거도 '노오력'해서 강대국이 되던가라는 건가. 돈 있고 힘 있는 양반들의 천박한 선민 사상을 보여주는 셈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그저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며 강 건너 불구경할 수만은 없는 이유는 단순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두 나라만의 분쟁이 아니라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아프간, 이라크 침공은 그것이 옳았건 그릇되었건간에 일단 미군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속전속결로 끝냈다는 점이다. 탈레반과 후세인은 자국 내에서도 워낙 인기 없는 독재 정권이었기에 현지의 저항은 거의 없었고 오히려 미군을 해방군으로 여겼을 정도였다. 그 이후의 전후 처리가 막장이었다고 하지만 어쨌든 그로 인하여 제3차 세계대전의 위기가 고조되거나 전 세계 경제가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고통은 전적으로 그곳에 사는 애꿎은 현지인들의 몫이었다. 혼란이 20여년 가까이 이어졌음에도 사람들이 무관심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반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식량과 석유 수출국이다보니 당장 밀가루값과 기름값, 가스값이 폭등하고 있다. 그동안 러시아의 값싼 석유와 천연가스를 펑펑 쓰던 서방 사람들은 어째서 우크라이나 때문에 우리가 추운 겨울을 보내야 하느냐, 너거만 눈 딱 감고 양보하면 다 끝날 일이 아니냐라고 볼멘 소리를 내고 있다. 남의 불행을 동정할 수는 있어도 그 때문에 내가 피해를 보는 것은 싫다는 것이 야박한 세상 인심이니 말이다.


국내에서도 우크라이나 전쟁을 놓고 정치권과 학계, 언론들은 특유의 진영 논리에 따라 서로 편가르기를 하고 국민들을 선동하기에 여념이 없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우파언론에서는 오늘도 해냈다면서 우크라이나군의 멈추지 않는 활약상과 죽을 쑤고 있는 러시아군의 모습을 연일 보도하는 반면, 프레시안같은 좌파언론에서는 노암 촘스키같은 소위 세계적 석학이라는 좌파 지식인들의 입을 빌려서 전쟁 책임이 푸틴에게만 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나토를 동진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먼저 깨뜨린 서방과 포퓰리즘에만 눈이 먼 우크라이나 정치인들이 표를 얻을 요량에 쓸데없이 나토 가입을 운운하여 푸틴의 침공을 자초한 책임이 더 크다는 식이다. 한마디로 푸틴이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은 잘못이지만 우크라이나도 잘한 것은 없다는 전형적인 양비론이자 물타기. 폭력 남편에게 매맞는 아내더러 매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는 거 아니냐고 하는 격이다.


이해영 교수가 쓴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세계질서>라는 책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미국이 감독하고 젤렌스키가 연기하는 드라마'라고 주장하더라. 푸틴을 대변한다면서 정작 푸틴의 배역은 쏙 빼놓고 있으니 우리들의 푸틴 "나 무시하냐?"면서 기분 나쁠 듯. 나토의 동진이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했기 때문이라느니, 우크라이나가 민스크 협정을 어긴 것이 잘못이니, 우크라이나도 돈바스에서 친러 주민들을 상대로 학살과 만행을 저질렀으니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자격이 없다느니라는데, 상식적으로 푸틴 입장에서 미국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미국을 상대로 따질 일이지 우크라이나를 때리는 것은 결국 만만한 놈한테 화풀이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민스크 협정 위반이 어쩌구, 돈바스 학살이 어쩌구한들 우크라이나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는 있어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직접 공격한 것이 아닌 이상 러시아의 침공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더욱이 푸틴은 돈바스 보호를 넘어서 아예 이참에 우크라이나 전체를 정복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쏙 빼놓는다. 이것은 엄연히 침략 전쟁임에도 말이다. 이해영 교수만이 아니라 '진보'를 자처하는 국내 친러 좌파들의 눈에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침략자에 맞서 죽기로 싸우는게 죄다 뒤에서 미국과 서방이 부추긴 탓이고 우리같은 일반인들은 서방의 가짜 뉴스에 속아 넘어가서 어릿광대마냥 춤추는 어리석은 존재로 보이는 모양이다. 본인들만이 진실을 알고 있으며 우매한 대중을 각성시키는 것이 자신들의 숭고한 의무인양 여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책상 앞에서 젠체하는 지식인들이야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전쟁의 기원을 알아야 한다고 한가롭게 떠들지 몰라도 오늘도 푸틴의 미사일 공격으로 자신의 몸이 불구가 되고 소중한 가족을 잃어야 하는 우크라이나인들 입장에서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지 않을까 싶다.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집을 잃고 오열하는 우크라이나 할머니의 눈물. 서구 좌파 지식인들은 침략전쟁을 일으킨 푸틴보다 푸틴에게 게기다가 얻어맞고도 여전히 버티는 젤렌스키의 무능함이 더 나쁘게 보일지 몰라도 자신들이 같은 일을 당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가. 전황을 알리는 기사는 매일같이 신문 한쪽을 장식하는 반면, 시중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다룬 책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말로는 균형적인 시각을 운운하면서 주로 러시아의 입장을 대변하고 서방 책임론을 부각하는 식이다. 다들 우크라이나 편을 들어주고 있으니 자기들이라도 푸틴 편을 들어주고픈 마음일까. 국제 사회가 우크라이나를 응원하는 이유는 단순히 친서방이라서가 아니라 구소련 국가 중에는 보기 드물게도 독재 대신 서구식 민주주의 정착에 노력하는 몇 안 되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만약 러시아가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카자흐스탄이나, 니야조프가 수도 한복판에 자신의 황금 동상을 세우고 개인 우상화에 혈안이 되었던 투르크메니스탄같은 독재 국가를 침공했더라면 과연 그 나라 국민들이 죽기살기로 싸웠을 것이며 국제 사회가 이들을 돕기 위해 나섰을까. 정작 푸틴과 코드가 맞는 쪽은 이런 독재국가들이다. 우크라이나가 호된 댓가를 치르고 있는 것도 푸틴이 정해준 대로 살기를 거부한 덕분이다.


세상 만사가 미국의 검은 손이 좌지우지한다고 믿는 음모론 신봉론자들의 생각과 달리, 우크라이나 전쟁의 당사자는 엄연히 우크라이나인들이며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그들의 의지에 따라 싸우고 있다. 미국의 원조와 개입은 부차적일 뿐이다. 그렇다면 구 소련 시절에만 해도 한 지붕 한 가족이었고 소련이 와해된 뒤에도 러시아와 함께 독립국가연합을 결성하기도 했던 우크라이나는 어쩌다가 이혼한 마누라마냥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는가. 만약 미국과 서방이 처음부터 러시아를 견제할 생각이었다면 어째서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대항마로 키우기는 커녕 오히려 모든 핵무기를 러시아에게 넘기도록 했던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경계하면서도 제 손으로 그 많은 핵무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적극적인 회유와 원조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핵무기의 일부만 남아 있었어도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무력 침공하지 못했을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음모론 신봉자들은 서방이 나토를 동진시켜 약속을 어겼다 운운하면서도 그동안 서방과 러시아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는지는 쏙 빼놓는다. 어째서 푸틴은 러시아와 함께 하기 싫다면서 버티는 우크라이나를 굳이 굴복시키겠답시고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어 스스로를 악의 축으로 몰아넣는가. 반대로 우크라이나는 어째서 러시아에 그토록 악착같이 저항하고 있는가. 이것을 죄다 미국의 음모로 돌린다면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이 아닌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의 복잡한 역사부터 들여다 보아야 한다.


마음 친구 출판사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다룬 신작 도서가 나왔다. 저자는 매일경제 기자 출신의 언론인으로 2004년 친러 여당의 부정선거에 반발하는 오렌지 혁명, 10년 뒤 푸틴식 장기집권을 꿈꾸던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시민들의 손으로 축출한 마이단 혁명, 뒤이은 러시아군의 크름반도 점령을 직접 취재했다고 한다.


그동안 시중에 나온 책들이 하나같이 가해자를 두둔하고 피해자도 당할 짓을 했다는 식의 양비론적인 내용인데 이 책의 출판사 소개글을 보니까 "원인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핍박과 압제"라길래 이제야 제대로 된 책이 나왔다 싶어서 골라보았다. 그런데 첫장을 보니까 마찬가지 뻔한 레파토리의 반복이라서 급실망.

미국 좌파 지식인 노엄 촘스크 교수는 "이번 전쟁의 원인은 푸틴에게 있지 않고 당시 우크라이나와 조지를 나토의 일부로 만들기로 한 서방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푸틴은 동유럽을 넘어 우크라이나로 나토 확대 논의가 진전되자 과거에 서방으로부터 당한 배신과 기만을 떠올렸을 것이고 그러한 불만이 누적되는 와중에 더 이상 참기 힘든 계기들이 몰려오면서 키이우 공습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 p.50

러시아로서는 나토가 추가 확대를 멈춤으로서 CIS 지역이 러시아의 세력권임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지만 서방이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함으로서 전쟁 발발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푸틴이 특별군사작전의 배경으로 제시한 이유들 가운데 상당 부분도 나토 확대 문제였다. - p.55


위에서 언급한 이해영 교수를 비롯하여 푸틴 옹호자들이 빼놓지 않고 강조하는 것이 "나토의 동진탓"이다. 냉전 말기 동독과 서독이 통일하고 미-소 데탕트가 한창일 때 서방은 고르바초프더러 나토를 동진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달콤하게 약속하여 소련의 협조를 얻어놓고서 이제와서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위반했다, 푸틴은 나토의 위협에서 러시아를 지키기 위해 부득이 무력 사용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침략전쟁의 명분을 뭐든 갖다 붙이려는 푸틴의 입장을 맹목적으로 답습하는 것일 뿐이다.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는 냉혹한 국제 사회에서 강대국 지도자들끼리 밀실야합하여 정한 약속이 도대체 언제부터 무슨 전가의 보도라도 되는 양 그렇게 잘도 지켜졌으며 그러는 푸틴은 얼마나 남과의 약속을 잘 지켰던가.

옐친 시절 서방과 체결한 부다페스트 안전각서는 우크라이나의 모든 핵무기를 러시아에 넘기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영토를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푸틴은 자기가 직접 서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생까버렸다. 우크라이나에 친러 정권을 세우겠답시고 남의 선거에 공공연히 개입했으며 러시아계와 우크라이나계의 갈등을 부추겨서 혼란을 가중시키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크름 반도가 원래 자기네 땅이라면서 무력으로 빼앗지 않았던가. 푸틴의 대표적인 꼭두각시가 젤렌스키의 전전임자이자 마이단 혁명으로 쫓겨난 빅토르 야누코비치였다. 푸틴을 등에 업고 온갖 사치와 향략을 즐기면서 푸틴처럼 장기 독재하려다가 성난 국민들을 피해서 러시아에 달아난 뒤 푸틴의 비호를 받으면서 호의호식하는 양반이다. 우크라이나판 이완용이랄까. 남들한테는 구두 약속도 지키라면서 자신은 문서에 서명한 것조차 무시하는 것이 푸틴이다. 푸틴이 크름 반도를 가져가겠다면 그 역시 가져갔던 핵무기를 우크라이나에게 돌려주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더욱이 푸틴이 나토의 동진 탓을 하기에는 궁색하다. 서방이 이들 나라에게 나토에 가입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면서 위협하고 회유했던가. 그건 푸틴이 하는 짓이 아닌가. 구소련의 압제에 시달렸던 동유럽 국가들은 물론이고, 우크라이나와 조지아, 발트3국같은 구소련의 일원들조차 러시아로부터 등을 돌리고 나토에게 보호해 달라고 손을 벌리는 것은 그만큼 러시아에 대한 반감과 불신이 크기 때문이다. 애초에 주변국들과 잘 지낼 궁리는 하지 않고 아직도 구소련 시절의 영화에 눈이 멀어서 시대착오적인 세력권을 내세워서 어떻게든 강대국 행세를 하려는 푸틴의 썩어빠진 사고 방식부터 바꾸는 것이 우선 아닐까 싶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 나토의 동진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인가. 푸틴 덕분에 핀란드처럼 가만히 있던 나라들조차 너도나도 나토에 가입하는 형국인데 말이다. 과연 푸틴은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말인가. 모르는게 더 이상하다.

러시아가 제고하는 서방의 대표적인 이중 잣대의 사례는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가 분열하는 와중에 세르비아의 '인종청소'에 대항해 나토가 개입한 일이다. 미국은 코소보 주민들의 대량 학살과 실향이 민주주의와 인권, 인도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인 만큼 세르비아에 대한 나토의 공습은 정당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나토의 공격은 UN의 승인이나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 없이 이뤄져 불법적인 무력행사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미국과 나토는 우크라이나의 생존권과 자결권을 강조하며 지금의 러시아의 침공을 비판하지만 자신들도 30년 전 세르비아에서 똑같은 일을 저질렀다. 특히 유고 연방 구성국들에 대한 세르비아의 무차별 공격이 미국과 나토의 안보에 직접적이고 특별한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닌 반면 나토를 끌어들이려는 우크라이나의 전략은 러시아에 직접적인 위해가 된다는 점에서 러시아의 선제적 공격의 타당성은 세르비아 공습 때보다 수긍할 여지가 더 있는 것이다. - p.79


저자는 1998년 코소보 사태 당시 나토의 개입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동일선상에서 놓으면서 서방의 이중 잣대를 비판한다. 어차피 어느 나라이건 자국의 이익이 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 현실 정치이고 서방이 코소보를 도와서 세르비아를 응징한 것도 순수한 인도주의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간과해서 안 되는 점은 적어도 나토는 돈바스 점령지를 자국 영토로 잽싸게 병합한 푸틴마냥 코소보를 자기들끼리 나눠먹지는 않았다. 또한 푸틴처럼 훈련을 빙자하여 기습 침공한 것이 아니라 회원국들끼리 공식적으로 무력 사용을 결의하는 절차를 밟았고 세르비아가 스스로 물러날 시간을 충분히 주었으며 그래도 물러나지 않자 비로소 공습에 나섰다. 무력 사용은 공습에 국한되었으며 이참에 세르비아에 친서방 정권을 세우겠다고 설치지도 않았다. 단순히 코소보만이 아니라 1990년부터 시작된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극심한 폭력과 학살이 자행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전범재판이 열려서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전범으로 처벌받기도 했다. 나토의 개입은 푸틴마냥 자국 이기주의에 나온 것이 아니다. UN이 아니라 나토가 개입한 것은 의도적으로 UN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UN 안보리에 포진한 중국과 러시아가 세르비아의 편을 들어서 개입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동일선상에 놓일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따지면 김일성이 남침했을 때 미국 주도의 유엔군 개입도 서방의 이중잣대라고 할 참인가.

그 밖에도 젤렌스키가 인기영합을 위해서 나토 가입을 운운하여 푸틴을 자극했다는 둥, 우크라이나가 민스크 협정을 위반하고 돈바스에서 도발을 일삼았다는 둥, 제국주의 시절 미국과 서방은 지금의 러시아보다 더 잔혹하고 나쁜 짓을 했으며 냉전 때에는 미국이 남미 정권을 얼마나 많이 무너뜨렸는지 아느냐는 둥. 크름 반도 점령을 시작으로 푸틴이 본격적으로 우크라이나의 목줄을 죄어오는 상황에서 젤렌스키가 외부의 도움을 호소하는 것을 과연 포퓰리즘으로 치부할 일인가 싶다. 고종이 분별없이 헤이그에 밀사를 보내어 일본을 자극하는 바람에 조선이 병탄되었다고 하는 꼴이 아닌가. 국가 지도자가 자력으로 나라를 지킬 수 없다면 뭐라도 해야 하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저자가 여기에 대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 그저 이런 주장도 있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불분명하다. 저자의 입장이 어떠한지 분명해야 독자에게 혼란을 주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책임론을 다룬 1부가 다소 중구난방이라는 느낌이라면,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역사와 러시아 혁명 시절 어째서 우크라이나는 핀란드와 달리 독립하지 못한 채 구소련의 일부로 남게 되었는지, 러시아와 한지붕에서 살면서 우크라이나가 뼈저리게 겪어야 했던 고난,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동거 대신 별거를 선택하게 되는 배경, 그리고 껄끄럽지만 썩 나쁘지 않은 이웃 사촌에서 오늘날 철천지 원수가 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과정과 우크라이나가 어떤 실책을 저질렀고 우리는 무엇을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지는 그 방면의 전문가답게 매우 예리하면서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굶주린 우크라이나 땅은 외부로부터 먹을 것마저 공급받을 수 없는 무인도 신세가 되어버렸다. 기록에 따르면 1933년 2월 소련 비밀 경찰은 배고픔에 마을을 떠나려는 22만명의 우크라이나 농민들을 체포했다. 일부는 원래 살던 곳으로 강제 이송되었고 반역의 정도가 크다고 판단된 자들은 시베리아의 집단수용소인 굴락으로 추방했다. 각종 자료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에서 1932~1933년 직접적인 아사나 이후 합병증으로 사망한 사망은 600만명에서 최대 1천만명에 이른다. 1분에 17명, 하루에 2만5천명이 배고픔과 영양부족, 그에 따른 질병으로 죽은 것이다. - p.224

홀로도모르가 일어나던 시기에 소련의 전략 곡물 비축분은 300만 톤으로 우크라이나의 굶주린 인민을 긴급 구호하는데 쓰일 수 있었지만 소련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더욱 개탄스러운 일은 자국민이 죽어가는 가운데서도 스탈린은 소련의 산업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외국과 체결한 곡문 수출 계약은 끝까지 이행했다는 것이다. 1933년만 해도 소련의 곡물 수출량은 180만 톤에 달했다. 이것만 봐도 소련 정부가 의도적으로 특정 민족을 말살하려고 했던 정황이 충분하다. - p.229

레닌 사후 고르바초프에 이르기까지 소련 최고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공화국마다 독립을 기도하지 못하도록 철저한 감시와 탄압 체제를 유지했다. 이로 인해 민족주의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다수의 우크라이나 지식인들이 소련 시절 내내 체포와 처형, 유배 조치를 당했고 일부 인사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밖에 없는 극도의 상황에 내몰렸다. - p.230

스탈린은 전쟁 기간 나치에 부역했다는 꼬투리를 잡아 말을 잘 듣지 않는 우크라이나 전체를 몰살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스탈린에 대하 격하 연설이 있었던 1956년 2월 제20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는 "전쟁이 끝난 뒤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인 전부를 강제 이주시키려고 했지만 인구가 너무 많아서 단념했다"라고 털어놓았다. - p.237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폴란드와 핀란드는 독립을 쟁취한 반면, 우크라이나는 구소련의 일원으로 남았다. 그것은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볼셰비키의 강력한 공세를 막아낼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우크라이나를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걸출한 지도자가 없었다. 폴란드에는 피우스트스키가 있었고 핀란드에는 만네르하임이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그렇지 못했다. 세계 최대의 흑토이자 '짜르의 빵바구니'라고 불리었던 우크라이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던 레닌은 사탕과 채찍을 병행하여 우크라이나를 손에 넣었다. 우크라이나인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고 민족간 평등과 자치를 강조하여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 의지를 빼앗았다. 그래도 저항하는 자들은 가차없이 분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시절 우크라이나에 근대적인 민족주의가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환상은 레닌이 죽고 스탈린이 집권하자 산산히 깨졌다.

스스로 국가를 세우는 어려운 길보다 남이 세워놓은 국가에 합류하는 쉬운 길을 선택한 댓가는 컸다. 스탈린은 러시아가 아니라 소수민족인 조지아 출신이지만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러시아인이라고 여기는 인간이었다. 그에게는 오직 러시아만 있었고 다른 민족들은 러시아를 위해 봉사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인들을 먹여 살리고 외화 벌이를 위한 식량 창고로 전락하여 온갖 수탈을 당해야 했다.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스탈린의 압제에 반발한 일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나치에 붙었다는 이유로 우크라이나 전체가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다. 스탈린에게 찍힌 다른 소수민족들은 아예 민족 전체가 통째로 시베리아 굴라그 행을 당하고 그 와중에 절멸한 경우도 있다는 점에서 그나마 우크라이나는 운이 좋았다랄까.

1933년 우크라이나 제2의 도시인 하르키우 거리 한복판에 굶어죽은 시신과 무심하게 지나가는 시민들. 우크라이나에서는 세계 최초의 인종청소라고 주장하는 '홀로도모르(Holodomor)'는 1959년 3천만명이 굶어죽었다는 중국 대기근에 필적하는 참사이자 자연재해가 아니라 스탈린이 러시아의 지배에 항거하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요량으로 의도적으로 저지른 폭정이었다. 소련 공산주의 체제는 명목상으로 민족간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러시아가 다른 민족들을 식민지인 취급하는 식이었다.


스탈린의 공포정치와 홀로도모르, 그 이후에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민족주의를 말살하여 영원한 러시아의 머슴 노릇을 하기를 원하는 소련 지도자들, 그리고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결코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원한을 남겨 놓았다. 러시아의 지배가 흔들리자 우크라이나인들이 저항에 나서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70여년 내내 악몽을 겪었던 우크라이나는 1991년 12월 1일 국민 투표를 통해서 처음으로 독립을 쟁취했다. 하지만 그것은 베트남이나 알제리인들처럼 외세를 상대로 총을 들고 싸워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 어쩌다보니 굴러들어온 것이기도 했다. 독립은 했으되, 자립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은 대부분 구 소련 시절의 관료들이었고 러시아인들을 대신하여 권력을 차지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정치는 부패했고 정책은 부재했으며 외세에 빌붙을 궁리만 했다. 장군들은 창고에 쌓여 있는 막대한 무기를 외국에 팔아먹어 국가를 무방비로 만들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이 푸틴이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말년의 쿠치마처럼 순응적인 지도자가 나와야 우크라이나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국제사회에서 한 목소리를 내며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야누코비치는 크렘린이 주무르기 편한 후보였다. 러시아 당국은 대선 전부터 쿠치마 진영에 비밀리에 거액을 제공했고 우크라이나 정부와 여당에 유리한 다양한 선심성 공약을 쏟아내며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2004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갖고 있던 26억 달러의 천연가스 대금 부채를 14억 달러로 탕감하고 우크라이나산 철강 파이프의 러시아 내 수출 쿼터 한도를 풀어준 것이 그러한 사례 중 하나였다. 우크라이나 대선 전략 총책임자에 푸틴의 최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테프 크렘린 행정실장이 맡은 것을 러시아가 정권 차원에서 우크라이나 대선에 얼마나 특별한 공을 들였는지 잘 보여준다. - p.289

EU와의 결별 소식에 키이우와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정권 퇴진을 외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었다. 정부는 경찰력을 동워해 시위 해산에 나섰다가 특수부대를 투입하는 등 진압의 수위를 높였다. 2014년 2월 20일 정부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민심은 야당과 혁명 세력 쪽으로 급격히 돌아섰다. 오렌지 혁명 때에도 총기 진압이 거론되었지만 당시 쿠치마 대통령은 "국민을 죽이고서는 정권이 버틸 수 없다"며 무력 개입을 막았다. 오렌지 혁명이 총알 없이 무혈로 이뤄진 반면 10년 뒤 유로마이단 혁명은 다급해진 정부가 민간인들을 살상하면서 권력을 보전할 최소한의 정당성을 스스로 잃어버렸다. - p.306


구소련이 붕괴하고 우크라이나가 독립한지 30여년이 지났다. 길다고도, 짧다고도 말하기 쉽지 않은 시간 동안 그동안 우크라이나가 보여준 모습은 결코 모범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국민들은 친러냐, 반러냐를 놓고 분열되었으며 정치적 혼란은 여전하다. 하지만 죄다 우크라이나인들이 무능한 탓으로 돌릴 일도 아니다. 어느 나라이건 외세의 오랜 지배에서 벗어나면 극심한 진통을 겪기 마련이다. 우리만 해도 한국전쟁과 두 번의 군부 쿠데타가 있지 않았던가.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피하게 겪어야 하는 성장통이기도 하다. 더욱이 우크라이나는 푸틴이라는 탐욕스럽고 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 우크라이나의 성장을 방해하기 위해 어떤 것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독재자를 이웃에 두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우크라이나는 다른 구소련 국가들과 달리 서툴지만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나라이다.

약소국일수록 덩샤오핑 중국 전 최고지도자가 주창한 '도광양회'야말로 우크라이나인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금과옥조일 것이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리며 실력부터 쌓는 도광양회의 정신을 우크라이나들이 실천했더라면 수백 년 전부터 러시아에게 당해온 수모를 지금쯤은 해소하고 2022년 발발한 전쟁의 참상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 - p.328


저자는 우크라이나가 덩샤오핑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일리 있는 말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이기도 하다. 덩샤오핑은 독재자로서 누구의 반대도 신경쓸 필요가 없었을 뿐더러, 중국은 실력을 숨긴다고 해서 수모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미국과 서방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국에 우호적이었고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반대로 청조가 수모를 당한 것은 인내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적대적인 제국주의 국가들이 중국을 집어삼킬 기회만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우크라이나가 처한 처지는 덩샤오핑의 중국이 아니라 청조 시절의 중국에 더 가깝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민주국가로서 지도자들은 짧은 임기 동안 여론의 추이에 항상 신경써야 하며 반대파들의 견제를 받아야 한다. 도광양회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구조라는 얘기이다.

우크라이나인들이 정말로 반성해야 마땅한 것은 푸틴 옹호자들의 주장마냥 분별없이 서방에게 붙어서 러시아를 적대하고 자치를 요구하는 돈바스의 친러 주민들을 탄압하여 푸틴의 침공을 자초했다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더 빨리 지금처럼 러시아의 횡포에 맞서 싸우려고 노력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입장 바꾸어 일제 시대에 일본이 조선의 민족지도자들과 엘리트 지식인 계층 수십만명을 잠재적인 반항 세력이라며 모조리 몰살 시키거나 머나먼 사할린으로 쫓아보내고 의도적으로 모든 식량 공급을 차단하여 수백만명을 굶겨 죽었다면 과연 우리는 그 역사를 잊을 수 있을까. 비록 구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 아내를 둔 흐루쇼프가 우크라이나에 잠시 선심성 정책을 쓰고 우크라이나 출신인 브레즈네프가 소련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올랐다고 하지만 이것이 우크라이나가 모든 차별에서 벗어나 러시아와 동등한 지위를 누렸다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얘기이다.

브레즈네프는 어디까지나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러시아인 또는 러시아화된 우크라이나 출신일 뿐, 우크라이나인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일본이나 서구 열강들의 식민 지배가 가혹했다고 하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한 짓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구 소련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푸틴이 한번이라도 과거사에 대해 진솔하게 인정하고 주변국들을 동등한 파트너로서 존중했던가. 오히려 나라도 없던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독립을 선물로 선사한 것은 러시아의 관용이며 배은망덕하게도 그 은혜를 모르고 서방에게 빌붙으려 한다고 질타하는 것이 푸틴의 사고 방식이다. 우리가 일본에게 분노한다면 우크라이나인들은 그 이상으로 러시아인들에게 분노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독립 이후 지난 30여년 동안 우크라이나 정치인들은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양다리 외교를 펼치면서 눈치 보기에 급급했다. 그러한 우유부단함이 푸틴으로 하여금 우크라이나를 '배알도 없는 놈들'이라면서 만만하게 여기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 결과가 이번 전쟁이다. 하지만 강한 놈 앞에서 지레 주눅드는 모습이 한심하게 보일지 몰라도 오랫동안 남의 노예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생존 본능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쟁은 비극이기는 해도 어쨌든 우크라이나인들이 다시 태어날 기회이기도 하다. 흔히 말하는 '진정한 사내'로서 말이다.

반면, 푸틴의 모습은 말하자면 진작에 이혼한 마누라에게 아직도 미련 못 버리고 재결합을 요구하면서 쫓아다니는 남편같은 꼴이다. 전 마누라는 정나미 떨어진 지 오래인데 말이다.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는다고 제 분을 참지 못해 폭력마저 서슴치 않은 게 우크라이나 전쟁의 실체이다. 정작 본인은 독재자 아니랄까봐 조강지처 쫓아내고 이 여자 저 여자 갈아치우면서 인생을 만끽하고 있지만 말이다. 여기서 더 뭔 말이 필요할까.




여러모로 생각할 것이 많은 책이다. 제목 그대로 러시아 때문에 슬픈 우크라이나이다. 구성이 불편하고 논리에서 지적할 부분이 없지 않지만 시중에서는 그나마 균형적인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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