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의 전쟁 1939-1945 - 편지와 일기에 담긴 2차대전, 전쟁범죄와 폭격, 그리고 내면
니콜라스 스타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몰락(Der Untergang)>이라는 영화가 있다. 독일 출신 영화 감독인 올리버 히르슈비겔이 2004년에 제작한 이 영화는 히틀러의 여비서였던 트라우들 융에(Traudl Junge)의 관점에서 나치 최후의 14일을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 아주 인상적으로 본 명작 중 하나이다. 오직 상업성만을 따지는 할리우드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영화. 전쟁 영화이면서도 전투신은 거의 없지만 영화 내내 극적인 긴장감이 가득하다. 파멸을 앞두고 벼랑 끝에 몰린 인간들이 어떻게 망가질 수 있는지 절망과 광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패전 직전 히틀러와 나치 일당들의 처지는 드라마 <오징어게임>에서 자기들끼리 미친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을 듯. 인간이 이판사판에 내몰리면 무슨 짓을 못하겠느냐를 보여주는 셈.


국내에서 정식 상영한 적은 없지만(솔직히 국내 정서에서는 망하기 딱 좋은 영화라) 덕후들 사이에서는 알음알음 잘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짤방 중 하나가 히틀러의 최측근이자 대중계몽 선전부 장관이었던 괴벨스의 막말. 전쟁 말기 베를린 대관구 지휘자로서 사실상 수도 방위와 대중 동원을 총괄하고 있었던 그에게 무장 친위대 소속의 빌헬름 몽케 소장이 괴벨스 휘하의 국민 돌격대가 변변한 무기도 없이 개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지적하자 괴벨스는 내가 알 바냐는 식으로 대꾸한다. 국민들이 우리를 선택했으니 그 책임도 그들 몫이라는 얘기이다.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자신들에게 권력을 안겨다 준 우민들을 향한 경멸감을 숨기지 않으면서 마지막에는 썩소까지 날리는 그의 뻔뻔한 모습은 소름이 돋을 정도이지만 아픈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나치는 레닌이나 마오쩌둥, 탈레반처럼 총칼이 아니라 1933년에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았으니 말이다. 1년 뒤 힌덴부르크가 죽자 민주주의를 중단하고 히틀러에게 절대 권력을 몰아주는데 압도적인 찬성을 했던 것도 독일 국민들이었다. 침략전쟁을 일으킨 히틀러가 승리할 때에는 그토록 열광했으면서 이제와서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서 괴벨스 말마따나 누구를 원망하겠음.



오늘날까지도 히틀러와 나치가 그토록 욕을 먹는 이유는 단순히 독재 정권이라거나 역사의 운 없는 패배자라서가 아니라 앞으로 두 번 다시 등장해서는 안 될 정신병자들의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나치의 만행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수백만 명의 유태인 대량 절멸이지만 빙산의 일각일 뿐, 폴란드인과 러시아인을 비롯하여 나치가 하등하다고 규정한 모든 인종, 독일 사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긴 장애인, 유전 질환자들도 피해자들이었다. 프랑스 전역에서 포로로 잡힌 프랑스군 출신의 아프리카인들 역시 대량 학살을 당했다.


게다가 나치의 광기는 패전 직전으로 갈수록 도를 더했다. 막판에 오면 히틀러는 자포자기한 나머지 아예 독일의 모든 것을 철저히 파괴하라는 '네로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청야전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패전의 책임이 자신의 무능함 탓이 아니라 독일 국민이 열등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독일이라는 나라 자체가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일종의 분풀이였다. 심지어 괴멜스가 부인은 물론, 자신의 아이들까지 총통을 위하여 순교하겠다고 말했을 때 히틀러는 말리기는 커녕 그의 비뚤어진 충성심을 칭찬했다. 정치인으로서의 책임감은 고사하고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심성이 의심스러울 정도. 도대체 전생의 뭔 인연이길래 이런 뇌가 고장난 작자들끼리 잘도 모였나 싶다. 정권 잡기 전에는 평범했는데 권력이 그렇게 만든 건지.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독일인들이 뭘 믿고 정신나간 미치광이들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백지위임했는가. 물론 이들도 그 선택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 줄 알았더라면 나치를 찍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1933년의 실수는 나치의 실체를 몰랐기 때문이라고 쳐도 무솔리니를 자기들 손으로 쫓아낸 이탈리아인들과 달리 독일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나치에 순종했다. 초로의 노인부터 어린 아이들까지 히틀러의 병사가 되어 열성적으로 연합군에 맞서 싸웠다. 소련군은 말할 것도 없고, 영미 연합군이 라인강을 넘어 독일 본토로 들어왔을 때에도 독일인들이 1941년의 일부 러시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독재자를 타도하겠다면서 적군에게 부역하는 일은 없었다. 하물며 참다 못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히틀러를 향해 전쟁을 멈추라고 외치지도 않았다.

나치 정권이 이전의 독일 제국이나 여느 독재 정권들과 다른 점은 단순한 총칼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여태껏 본 적 없는 거대한 전당 운동을 통해서 독일 국민들을 나치와 결합시켰다는 점이다. 독일 국민들은 나치가 벌이는 모든 일에 열광했고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


히틀러의 무모한 전쟁으로 제1차 세계대전 때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겪었음에도 1918년 카이저를 끌어내렸던 킬 군항의 혁명은 나치 치하에서 되풀이되지 않았다. 그게 히틀러의 선동에 집단 가스라이팅되었기 때문이건, 나치의 탄압이 무서웠기 때문이건, 소련의 보복만은 막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건 말이다. 어쩌면 세계 제일을 자처하던 사람들 입장에서 자신들이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음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대다수 독일인들은 "모든 것은 나치가 나빴기 때문"이라며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이유를 대건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침략 전쟁을 초래했으며 약자들을 학살하는데 동조하거나 묵인했다는 사실에 대한 변명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오랜만에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신작이 나왔다.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교유서가에서 나온 논픽션 역사서인 <독일인의 전쟁 1939~1945>이다. "전쟁 속의 민족(A Nation Under Arms)"라는 영어 부제처럼 평범했던 독일 국민들이 나치의 침략전쟁 아래에서 민간인으로서, 병사로서 겪어야 했던 전쟁 이야기이다. 저자인 니콜라스 스타가르트(Nicholas Stargardt)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 역사학 교수로 그의 아버지는 독일계 유태인이라고 한다. 아마도 나치 치하에서 홀로코스트를 직접 경험해 보았을지도. 분량만도 1천 페이지에 달하는 대작이다보니 역자 또한 여느 번역서와 달리 국내에서는 보기 드물게 평생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홀로코스트 연구에만 매달린 김학이 동아대 사학교 교수가 직접 맡았다고. 국내 몇 안 되는 나치통인 분.


이 책은 에른스트 귀킹이라는 이름의 한 무명 병사가 여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작한다. 1939년 8월 25일 그는 갑작스럽게 귀대 명령을 받고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복귀해야 했다. 다음날 독일은 동원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과연 그 소식을 들은 독일인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1년 전만 해도 히틀러가 연합군을 상대로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무모한 도박을 벌이는 모습에 독일인들은 잔뜩 겁을 먹었다. 이들은 1914년 오만한 정치인과 장군들이 초래한 전쟁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게 했으며 이른바 '순무의 겨울'이라고 불리는 궁핍한 전시 생활과 패전 이후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뮌헨에서 극적인 타협이 실현되자 독일인들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이들은 동시에 연합군을 깔보게 되었고 자만심에 사로잡혔다. 상대의 양보에 우쭐해진 나머지, 싸우기만 하면 이길 수 있다는 자기 최면에 빠진 것이었다. 자신들은 언제나 베르사유 체제의 부당한 피해자였고 이제는 되갚아 줄 때였다.


문제는 '복수' 한마디로 합리화하기에는 그들이 보여준 만행은 너무 난폭하고 잔혹했다는 점이었다. 독일인들에게는 승자의 아량이나 관용이 없었다. 저항할 수 없는 약자들을 향해 그동안 쌓인 현실의 불만과 울분을 한꺼번에 해소하는 양 무제한적인 폭력을 행사했고 많은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 대신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어떤 의미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고삐 풀린 독일인들의 광란이기도 했다. 나중에는 그것을 부추겼던 히틀러조차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저자는 독일인들이 어떤 식으로 인간성과 도덕적 감각을 상실하는지, 폴란드의 승리에서 베를린 함락까지 6년의 시간을 그들이 남긴 수많은 편지와 일기, 다양한 기록을 통해서 재구성한다. 여기에는 신에게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오만함과 히틀러에 대한 기대감, 전쟁 초반 놀라운 승리와 열병 같은 흥분이 가라앉은 뒤의 불안감, 탐욕, 광기, 패닉, 그리고 죄책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1914년 8월과 달리 1939년 9월 1일에는 애국 행진이나 대중 집회같은 것이 없었다. 길거리는 무섭도록 조용했다. 예비군들은 집합 장소에 가서 신고를 했고 민간인들은 건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모든 사람들이 '다가오는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오직 그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다고 보도했다. 니콜라스 호수 교외에 사는 요헨 클레퍼는 그 기사를 읽고 기이함을 느꼈다. '사람들이 어떻게 아무런 열광도 없이 착 가라앉은 채 전쟁을 바라볼 수 있는 걸까?" - p.60

독일인들에게 애국주의 헌선이나 정의로운 민족 대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결정적인 오류는 고도로 분화되고 종종 내적 모순을 일으키는 근대 사회를 상투적인 제스처만으로 산업화 이전의 정겹고 전근대적인 '황금시대'라는 낭만적인 상상물로 바꿀 수 있다는 사고 방식 그 자체였다. 전쟁이 지속될수록 중앙집권적인 정부와 나치, 나치당 산하의 대중조직, 지방 정부, 교회는 민족적 연대의 결핍분을 상쇄하기 위해서 한층 노력해야 했다. - p.91

한 여대생 자원봉사자는 자신의 활동을 고향집에 전하면서 친위대가 폴란드 촌민들을 헛간에 몰아넣은 작전을 다음과 같이 썼다. "저 짐승들에 대한 동정심요? 아뇨. 나는 저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에 소름이 돋아요. 그들 존재 자체가 너무나 낯설어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도 그들에게 닿는 것조차 불가능해요. 내 생애 처음으로 그들이 죽든 살든 알 바 아니어요." - p.204

가족들이 탈영을 지지하지 않은 것은 2차 대전에서 독일군 병사들의 탈영이 대량으로 발생하지 않은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2차 대전 당시 동맹국 군대에서 대량 탈영이 발생한 사례들, 1943년의 이탈리아 병사들, 독일에 병합된 폴란드와 룩셈부르크, 알자스에서 징집된 병사들, 그리고 1943~1944년 보스니아 무장 친위대 병사들의 탈영은 그곳 시민 사회가 탈영병들을 흡수하고 숨겨줌으로서 군 당국을 상대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충성심과 애국심은 나치 정권이 강요하던 외적 요구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독일 시민사회 모든 계층에서 반복되었고 어머니와 아버지, 아내와 연인의 강력한 1차적 호소를 통해서 되풀이되었던 보편적 규범이었다. - p.313

독일인들은 미국이 독일계 혈통들에게 겉옷에 하켄크로이츠를 달도록 강요했다고 상상하기 시작하자 독일에게 유대인들에게 가해진 조치들은 그리 독특하게 보이지 않았다. 독일인들 생각으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의 복수는 진작부터 진행되어온 것이기도 했다. 1933년 4월 1일 나치가 유대인 상점들을 보이콧하자 미국에게 독일 수출품 불매 운동이 벌어졌다. 유대인 학살 작전이 여전히 동부전선에 국한되어 있었던 그 국면에 독일인들은 유대인의 운명에 국제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그것은 소련 민간인들에 대한 대량 학살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의미였다. 유대인은 워싱턴과 런던의 중요한 권력자들이고 그 유대인들이 연합국 동맹이 구축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 p.342

남편의 귀가가 늦어지자 그녀는 스스로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이별 선물로 받은 낡은 리볼버 권총을 주머니에 넣고 아이들을 숲속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아이들을 유대인들이 사살된 것으로 알려진 구덩이 앞에 줄지어 세워놓고 뒷머리에 차례로 권총을 발사했다. 이르나는 훗날 기억했다. 두명의 아이를 처리하자 나머지 아이들이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큰소리를 내지 않고 그저 훌쩍였다. - p.412

1944년 9월에 서부전선의 독일군이 심각한 공황 상태에 사로잡혔던 것과 비교하면 불과 한 달만에 독일군은 전혀 다른 군대가 되어 있었다. 연합군 사령관들은 붕괴 직전에 몰려 있다고 믿었던 적군이 오히려 갈수록 강력하게 저항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아이젠하워는 1944년 11월에 연합군 최고 사령부에 사령관 회의를 소집해서는 어째서 독일군의 저항 의지를 깨뜨리지 못하는지 물었다. 그는 서부전선 독일군 전쟁 포로 절반 이상이 '지도자에 대한 충성'을 지키고 있으며 소련군이 기진맥진한 패잔병의 무리라고 확신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 p.638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이 마지막 순간까지 보여준 투지는 실로 경이로울 정도였다. 히틀러는 불과 수년 만에 카이사르나 나폴레옹, 알렉산더 대왕이 평생 일군 것보다도 훨씬 넓은 땅을 정복했으며 거의 모든 유럽을 지배했다. 그의 진정한 실체가 무엇이었건간에 독일인들이 한때나마 살아있는 신처럼 떠받들었던 것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의 그 지리한 싸움을 기억하는 사람들로서는 말이다. 하지만 히틀러는 나폴레옹처럼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이 아니라 치졸한 복수와 편협한 인종주의를 앞세운 파괴, 광기, 방종을 남겼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말이다. 심지어 나폴레옹은 죽은 뒤에도 경외의 대상으로 남았지만 히틀러는 인류 문명의 야만성을 보여준 악마이자 두번 다시 등장해서 안 될 독재자로 낙인찍혔다. 무엇보다도 그는 단순히 파멸적인 전쟁을 일으킨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간성을 마비시키고 끝없는 증오심을 심어주었으며 마음껏 폭력을 행사하라며 부추김으로서 독일 전체를 나치의 집단 공범으로 만들었다. 일부 독일인들은 히틀러가 허용한 무제한의 자유 속에서 방종을 즐겼고 유태인에게, 전쟁 포로들에게, 마지막에는 같은 독일인들을 상대로 살인 게임을 벌였다. 그리고 대다수 독일인들은 침묵하거나 방관했다.


2023년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원래는 평범했던 인간이 외부의 위협과 생존을 핑계로 무제한의 권력을 부여받았을 때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상황이 인간을 악마로 만드는지 원래 악마였던 인간이 그 상황을 의도적으로 이용하여 자신의 숨겨진 본성을 드러내는지는 쉽게 얘기할 부분은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런 짓을 저질러도 보복이나 처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일탈을 부추긴다는 점이다. 특히 나 혼자보다 남들과 함께 저지를 때 인간은 덜 죄책감을 받는다. 이것이 집단 광기의 무서움이다.


일탈의 시간은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의 총통 벙커에서 히틀러의 자살과 함께 끝났다. 그때까지 악귀처럼 싸우던 독일인들은 그 순간 히틀러가 걸어놓은 집단 최면에서 풀려난 것마냥 모든 저항의 의지를 잃었다. 정신이 번쩍 든 그들은 자신들이 여태껏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앞으로 돌아올 응분의 결과를 두려워 하면서도 반성과 죄책감 대신 "전쟁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며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 역시 똑같이 고통을 겪은 양 피해자 코스프레로 전쟁 범죄를 물타기했다. 자신들이 승자일 때에는 패배자들에게 온갖 횡포를 부렸음에도 남들은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뻔뻔함이자 이중성이었다.


1945년 11월 20일 뉘른베르크에서 전범재판이 열리자 국제 여론의 전례없는 관심이 쏟아졌다. 그 날 세 아이를 둔 한 어머니가 미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남편에게 이렇게 썼다. "죄는 언제나 양쪽 모두에 있는 법입니다. 승자의 권리를 앞세워 한 민족 전체를 죄악시하고 그들의 모든 자유를 빼앗을 권리는 없어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나는 전쟁과 수용소에서 일어난 모든 악행과 우리 이름으로 자행된 수치스러운 행동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의 많은 이들은 결코 죄가 없습니다. " - p.771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전쟁이 끝난 뒤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과오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는지를 설명한다. 그들은 모든 잘못을 히틀러와 나치 지도자들 탓으로 떠넘겼다. 자신들은 시키는대로 했을 뿐, 오히려 나치의 압제 속에서 함께 고통받았다고 합리화했다. 이들에게 국가 사회주의 시절은 잠깐의 악몽에 지나지 않았고 피해자들은 그저 재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지나간 과거에 연연하기보다 앞날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히틀러에 복종하여 침략전쟁의 선봉에 섰던 독일군은 전쟁범죄를 모조리 무장친위대에게 돌림으로서 자신들의 명예를 '세탁'했다. 여기에는 미-소 냉전이 격화되면서 미국이 뉘렌베르크에서 몇몇 거물들을 상징적으로 처단한 것 이외에 대다수 나치 부역자들에게 면죄부와 함께 새로운 체제로 복권시킨 덕분이기도 했다. 물론 미국에 충성하는 조건으로 말이다. 전범 재판은 사법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으로 변질되었다. 그 밖에 그들 입장에서 불리하거나 불편한 역사는 집단 망각하는 쪽을 선택했다.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그나마 독일은 일본처럼 역사의 승자 행세를 하면서 분별없는 소리로 주변국들의 감정을 자극하지는 않으니 조금쯤 낫다고 할까.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히틀러가 없었더라면, 미대에 합격하여 평범한 미술 교사로 인생을 마쳤다면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광기어린 전쟁 범죄는 벌어지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한다면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라는 희대의 악마를 재수없게 만난 죄밖에 없을 것이다. 반대로 히틀러가 없었어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 거라고 한다면 그 역시 시류의 흐름에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간 역사의 피해자라는 얘기가 된다. 진실은 아마도 그 중간 쯤이 아닐까 싶다. 과연 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일까. 이책도 여기까지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책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라도 빨리 읽어볼 욕심에 출판사 북 펀드에 응모하여 책을 받자말자 퇴근 후 탐독했다. 1천여 페이지의 만만찮은 분량임에도 일주일 만에 다 읽었다. 그만큼 내용이 흥미롭고 술술 읽힌다. 제2차 세계대전 덕후라면 필히 읽어볼 책이다. 올해 최고의 역사서 중 하나로 꼽을 만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일인의 전쟁 1939-1945 - 편지와 일기에 담긴 2차대전, 전쟁범죄와 폭격, 그리고 내면
니콜라스 스타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책은 많다. 하지만 독일인들이 단순히 히틀러라는 선동 정치인에게 억지로 떠밀려서 패망직전까지 싸운 것이 아니라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한 책. 여러모로 짚어볼만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암살자의 밤 -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을 암살하고자 했던 히틀러의 극비 작전
하워드 블룸 지음, 정지현 옮김 / 타인의사유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43년 11월 28일 이란 테헤란에서 세계사에 남을 빅 이벤트가 열렸다. 이른바 연합국의 '빅3', 즉 루스벨트와 처칠, 스탈린이 개전 이후 처음으로 한 자리에 만나는 순간이었다. 바로 이틀 전에는 카이로에서 장제스와 회담이 있었다. 하지만 루스벨트의 거듭된 재촉에도 불구하고 장제스를 껄끄럽게 여기던 스탈린은 카이로에 오기를 끝까지 거부했고 결국 테헤란에서 스탈린을 위한 별도의 모임을 가져야 했다. 전쟁이 한창일 때 굳이 수도를 떠나서 세 사람이 모인 것은 단순히 친분을 쌓거나 히틀러가 흔히 그러했듯 우리편의 승리를 의심하면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동맹국 지도자들을 억지로 끌어다가 알맹이 없는 연설을 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제2전선의 구축과 함께 나치에게 이긴 뒤 전후 구상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였다. 바꾸어 말해서 이미 다 이긴 싸움이라는 얘기였다. 여전히 유럽 대륙의 대부분을 나치가 지배하고 있었지만 전쟁의 주도권을 쥔 쪽은 연합군이었다. 1943년 초 독일군은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완패했다. 여름에는 독일 최후의 전략적 공세였던 치타텔 작전이 소련군의 방어선 앞에서 가로막혔다. 그 사이 서방 연합군은 북아프리카에서 승리하고 이탈리아에 상륙하여 무솔리니 정권을 끝장냈다. 히틀러의 운명도 초읽기였다.


테헤란 회담이 열릴 때부터 독일 항복까지 연합군의 공세. 1943년 말에 오면 나치가 완전히 수세에 내몰리면서 사실상 승패는 결정난 셈이었다. 이제부터는 어느 쪽이 이기느냐, 지느냐의 싸움이 아니라 나치가 얼마나 오랫동안 버티느냐의 싸움이었다.


히틀러가 제아무리 장군들을 닥달한들, 이제와서 자신의 운명이 바뀌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빅3가 한 자리에 모인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이들을 한꺼번에 날려버릴 수 있다면 과연 그 천재일우의 기회를 마다했을까. 히틀러같은 모사꾼이 워털루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 나폴레옹을 저격하겠다는 병사를 향해 "장군들은 서로를 쏘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다"라면서 기사도 정신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단호하게 거부했던 웰링턴마냥 물렁하게 굴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빅3가 모이는 장소는 워싱턴도, 런던도, 모스크바도 아니었다. 연합국의 심장부와는 거리가 먼 이란의 수도 테헤란이었다. 레자 샤 팔레비(Reza Shah Pahlavi)가 1925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이후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이름이 바뀐 이 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이 폭발하자 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1941년 8월 25일 영국과 소련은 이란이 독일 편에 서는 것을 예방한다는 명목으로 '카운터넌스 작전(Operation Countenance)'을 발동하고 무력 침공했다. 이란군은 9개 사단 20만명에 달했지만 훈련과 무장이 빈약한 오합지졸이었던 이들로서는 압도적인 영국, 소련 연합군의 공격 앞에서 변변한 저항도 못해본 채 무너졌고 6일 만에 정복당했다.


이란 침공 당시 소련군 BA-10M 장갑차와 영국군 수송차량 행렬. 제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양국 군대의 유일한 연합작전이었다.


반년 뒤인 1942년 1월 29일 영국, 소련은 전쟁이 끝나고 6개월 내에 이란에서의 철수를 약속했다. 1943년 9월 9일에는 이란 정부가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명목상 연합국의 일원이 되었다. 실제로 이란군이 추축군을 상대로 싸우는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빅3 입장에서 이란은 여전히 안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란인들은 침략자들에게 적개심을 감추지 않았고 독일 스파이들은 이란에 침투하여 연합국에 대한 무장 저항을 선동하면서 지지세력을 확보했다. 게다가 경제적 어려움과 식량난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독일군 해외방첩국 아프베어(Abwehr)는 1943년 여름에 튀르크계열의 유목민인 카슈카이족을 이용하여 서방의 대소 랜드리스 수송을 방해하는 계획을 시도했다. 작전명은 '프랑수아(Operation François)'였고 지휘 책임자는 얼마 뒤 무솔리니 구출로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오토 스코르체니(Otto Scorzeny) 소령이었다.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는 무장친위대 소속 제502저격대대 소속의 정예요원 몇명을 뽑아서 선발대로 이란에 보냈지만 낙하 도중에 영국군에게 발각되어 모조리 일망타진당했다.

그리고 더욱 야심찬 시도가 빅3 암살 계획이었던 '멀리뛰기 작전(Operation Long Jump)'이었다. 친위대의 2인자이자 힘러의 라이벌이기도 한 에른스트 칼덴부르너(Ernst Kaltenbrunner)는 빅3가 모이는 장소가 테헤란이라는 사실을 알아냈고 히틀러는 철천지 원수와 같은 세 지도자를 한방에 몰살시킬 것을 지시했다. 이 작전 역시 스코르체니가 맡았다. 성공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하다고만 할 수도 없었다. 전쟁 이전에도 언제나 쿠데타나 암살 위험에 대한 극단적인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스탈린이야 크렘린 궁전 깊숙한 곳에 숨어 있으니 접근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손 치더라도, 서방 지도자들은 훨씬 덜 조심스러웠다. 심지어 미국인들은 미국 한복판에서 자기네 대통령을 몇번이나 암살하지 않았던가. 그것도 충분한 인력과 자금도 없이 말이다. 1933년에 대통령 당선인이었던 루스벨트를 거의 살해할 뻔 했던 사람은 주세페 장가라(Giuseppe Zangara)라는 과대망상증에 시달리는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 벽돌공이었다.

만약 빅3 중의 한 사람이라도 암살에 성공한다면 당장 전쟁의 향방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연합국의 결속을 흔드는 것은 물론이고, 모처럼 독일인들의 사기를 높이고 연합국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 것이었다. 정말로 성공했다면 진주만 기습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 최대의 충격적인 사건이 되었겠지만, 결론만 말하면 이번에도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테헤란의 독일 첩보망과 스코르제니가 보낸 특수부대는 소련 NKVD의 철통같은 보안을 뚫는데 실패했고 빅3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깨달을 일 없이 테헤란의 소련 대사관에서 화기애애한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히틀러가 두번 다시 그런 시도를 벌이는 일 또한 없었다. 다음 회담은 1년 뒤 소련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열렸고 그 때쯤이면 독일은 베를린 코앞까지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트형 주연의 영화 <바스터즈> 이쪽은 연합군이 히틀러 암살부대를 보낸다는 내용.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양측이 서로의 지도자나 주요 인사를 암살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보안이 워낙 철통같다보니 소위 '참수작전'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유일한 효과는 적에게 겁을 줄 수는 있다는 심리적인 것에 있다. 우리나 중국이 참수작전을 숨기는 대신 대놓고 떠드는 것도 이 때문.


이것이 러시아인들이 주장하는 소위 "빅3 암살미수사건"의 전모이다.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소재이지만 막상 서구 쪽에서는 믿지 않는다고. "우리가 너희를 구했다"라는 러시아인들의 일방적인 주장 이외에 그것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는 이유이다. 스코르체니는 그런 작전에 관여하기는 커녕 들어본 적도 없다면서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작전"이라고 일축했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영원히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타인의 사유 출판사에서 나온 신작도서 <암살자의 밤(원저 : Night of the Assassins)>은 제2차 세계대전의 히든 스토리이자 나치판 바스터즈가 될 뻔한 멀리뛰기 작전의 전모를 파헤친 책이다. 저자인 하워드 블룸(Howard Blum)는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으로 퓰리처 상에 두번이나 노미네이트했다는데 수상은 못 한 모양. 또한 논픽션 역사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그 중에서도 이 책은 2020년에 나온 따끈따끈한 최신작.


이 분. 1948년생이라고 하니 올해로 75살. 아직 정정하신 듯. 저서로 볼 때 주로 다루는 분야는 제2차 세계대전과 범죄, 스파이물.


이 책은 테헤란 회담이 열리기 반년 전인 1943년 6월 포르투칼의 한 사건에서 시작한다. 총리이자 철권 독재자인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António de Oliveira Salazar)가 통치하는 포르투칼은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제1차 세계대전 때와는 달리 명목상 중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오랜 친영 국가로서 히틀러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연합국을 물밑에서 지원했고 100만명에 달하는 난민들이 이곳을 통해서 나치 치하의 유럽을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있다. 빅3 중에서 최고령자로서 일흔을 앞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전쟁 내내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하며 쉬지 않고 온 세상을 돌아다녔던 처칠은 몇 번이나 포르투갈을 은밀하게 방문했고 살라자르를 면담하여 연합국 진영에 끌어들이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물론 포르투갈에는 독일 스파이들이 득실대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런 여행은 그야말로 목숨 건 도박이었다. 어느날 독일 스파이는 리스본에서 출발하는 런던행 미제 더글라스 DC-3 여객기에 거물이 탄다는 정보를 알아냈고 그 거물이 처칠임을 알아낸다. 독일 공군의 Ju-88 중전투기들이 즉각 출동하여 그 불운한 비행기를 격추시키지만 독일군을 따돌리기 위한 눈속임이었고 그 사이 처칠은 다른 비행기를 타고 잽싸게 무사히 빠져나옴으로서 독일의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물론 독일은 여기서 좌절하지 않았고 연합국 지도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새로운 기회를 찾아나선다. 어차피 궁지에 내몰린 그들로서는 자신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합국은 머리가 셋 달린 괴물과 같았다. 고전적인 교육을 받은 아프베어의 수장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은 사무실에서 동료 스파이들과 나눈 대회에서 연합국을 '히드라'에 비유했다. 그는 동료들을 위해 사려깊게도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났는지 말해 주었다. 헤라클레스가 그 짐승의 머리를 모두 잘라낸 후에야 죽이는데 성공했다고 말이다. - p.24

그 순간 갑자기 군중의 깊은 틈새에서 칼이 날아왔다. 빠르게 움직이는 칼날이 대통령의 가슴으로 직행했다. 루스벨트는 칼이 날아오는 것을 보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다리는 제자리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마이크가 할 수 있는 일도 전혀 없었다. 그는 군중 사이에 서서 무력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 p.36

루스벨트는 전시든 아니든 백악관의 일이 평소와 다름없이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악관의 일이란 정치이므로 공무원들이 백악관 복도를 수시로 들락날락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또한 2주 앞으로 다가온 크리스마스에는 백악관 문이 활짝 열리고 나무에 불을 밝히는 행사에 군중이 몰려든다는 것을 의미했다.추축국 요원이나 무장 단체 대원이 수많은 낯선 이들 가운데에 껴서 보스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마이크를 초조하게 했다. - p.53

빅3의 만남이라니! 셀렌베르크는 이것이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가 3인의 표적을 노릴 수도 있는 매력적인 기회라는 것을 즉각 알아차렸다. 이들의 죽음이 전쟁의 최종 결과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가장 열렬한 나치들 - 히틀러나 괴벨스 - 이었다. 독일의 패배는 암울하지만 확실했다. 하지만 루스벨트와 처칠, 스탈린이 사라진다면 다른 평화가 있을 수 있었다. - p.72

셀렌베르크는 평소답지 않게 공격적으로 보일 수 있을 만큼 열정적으로 그것은 단순히 장거리 작전이 아니라고 맞섰다. 훨씬 더 야심찬 작전이라고. 이것은 멀리뛰기와 같다고. 결국 그가 주장한 이름이 받아들여졌다. 이제 연합국 지도자 3명을 암살하려는 작전은 공식적으로 '롱 점프'라고 불리게 되었다. - p.139

이번 전쟁 뿐만 아니라 역사를 통틀어 중대한 특공대 작전은 그를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로 만들어 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전사다운 방법으로 적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루스벨트와 처칠, 스탈린이 최후의 순간에 오토 스코르체니가 자신들을 끝장내러 왔다는 것을 꼭 알게 할 것이었다. 그는 그들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고 그들이 죽는 순간을 지켜봐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별한 폭탄이 필요했다. - p.200

나치가 처음 빅3암살을 계획하는 순간부터 테헤란 회담까지 약 반년의 시간 동안 벌어지는 긴박한 상황을 400여 페이지에 걸쳐서 드라마틱하게 풀어쓰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라고 불리는 스코르체니가 침투시킨 독일 특수부대와 이들을 막기 위한 연합군 첩보부대간의 추적과 대결은 그야말로 한편의 할리우드 액션 영화같은 느낌이다. 과연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논픽션인지 그 경계가 모호하지만 말이다. 저자는 후기에서 냉전 이후 기밀 해제된 구 소련의 정보 문서와 미국 OSS, CIA, FBI, 영국 정보부 보고서, 개인 회고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를 참고했다고 하지만 상당부분은 자신의 상상력에 의존했음이 틀림없다. 그는 마지막에서 KGB 제1총국장의 말을 빌려서 이렇게 덧붙인다. "저는 전 세계 어떤 정보기관도 마지막 문서까지는 공개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독자가 알아서 판단하라는 얘기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과 연합은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했지만 막상 적의 지도자를 제거하기 위한 암살부대를 보내는 일은 없었다. 전시에 적진 한가운데에 특수부대를 침투시켜 철통같은 보안을 뚫고 적의 지도자에게 접근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거동이 조금만 수상해도 대번에 체포될 것이니 말이다. 실제로 독일 특수부대가 대서양을 넘어서 미국 본토에 침투한 유일한 사례는 1942년 6월 파스토리우스 작전(Operation Pastorius)이었다. 그나마도 뭘 해보지도 못한 채 상륙하자말자 모조리 체포되어 간첩죄로 전기 의자행이 되었다. 하물며 히틀러와 스탈린처럼 평소 남의 원한을 많이 산 인간들일수록 결벽에 가까울 만큼 경계심이 철저한 법이다. 나치 킬러를 자처하는 몇몇 미친 또라이들이 히틀러를 제거한다는 <바스터즈>는 영화에서나 가능한 스토리이다. 어차피 영화 자체가 블랙 코메디이니. 히틀러가 거의 죽을 뻔했던 순간은 연합군이 아니라 독일 장교들이 설치했던 폭탄이 터졌을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멀리뛰기 작전이 실존했고 성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멀리뛰기 작전이 아니라 처칠과 루스벨트, 스탈린 세 사람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어떤 식으로든 1943년에 죽었다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불과 1년여 뒤에 뇌출혈로 사망하는 루스벨트의 수명이 좀 더 짧았을 수도 있고, 스탈린이 과로사했을 수도 있으며 처칠이 비행기 추락으로 죽었을 수도 있었다. 그 시절에는 결코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루스벨트가 1945년 4월에 죽었을 때 히틀러는 미친 듯이 기뻐했지만 전쟁의 전환점이 되기에는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다. 하지만 1943년이었다면 얘기는 다를 수도 있었다. 루스벨트의 부통령이었던 헨리 월리스(Henry Agard Wallace)가 과연 전시 체제에서 루스벨트에 비견하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미국인들을 하나로 이끌 수 있었을 것인가. 민주당 내에서도 가장 좌파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는 나름의 추진력은 있었지만 정적이 많았다. 더욱이 루스벨트 이상으로 소련에 지나치게 유화적인 태도는 보수파들의 반감을 사서 국론을 분열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처칠이 죽었다고 해서 독일에게 지독하게 두들겨 맞은 영국이 히틀러에게 유화적으로 바뀔 리는 없겠지만 오랫동안 서로를 적대했던 서방과 소련이 힘을 모으는데에는 처칠의 외교술이 컸다. 스탈린의 죽음은 확실히 소련 지도부를 대혼란에 빠뜨렸을 것이다. 공산 독재국가인 소련은 영국과 달리 제아무리 나치가 자국민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했어도 그 원한을 풀기보다 지도자들끼리 권력 투쟁에 열을 올릴 나라였다. 실제로 1917년에 레닌은 국내의 동포들과 싸우기 위해서 독일에게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맺고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서부의 광대한 영토를 포기한 바 있었다. 언제나 인민보다 당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공산주의자들이 또 한번 그 짓을 반복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히틀러를 꺾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 세 사람이 힘을 모았기 때문이었고 어느 한 사람이라도 없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히틀러의 불운은 하필이면 이들과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일까. 애초에 미대에 합격했으면 온 세상이 조용했을 것이고 히틀러도 제 손으로 자기 머리에 총알 박을 일은 없었을 것이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일인의 전쟁 1939-1945 - 편지와 일기에 담긴 2차대전, 전쟁범죄와 폭격, 그리고 내면
니콜라스 스타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1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인들이 왜 히틀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분석한 책으로 기대가 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쟁은 어떻게 기술을 발전시켰나?
김영서 지음 / 팬덤북스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새 전쟁 영화의 고전이 된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비교적 최근작인 <미드웨이> <퓨리> <그레이 하운드> 등 제2차 세계대전 영화를 보면 그야말로 화려하고 스펙타클하다. 하늘을 끝없이 메운 비행기들이 치열한 공중전을 벌이거나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고, 지상에서는 강철과 강철이 맞부딪치며 바다에서는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수백여대의 함재기들이 쏟아지는 대공포화를 뚫고 적 함대에 폭탄의 비를 쏟아붓는다. 여기에 비하면 참호에서 고작 소총 하나 들고 우루루 뛰어나가다가 기관총과 포격 앞에서 수수다발처럼 쓰러져 나갈 뿐인 제1차 세계대전은 아무래도 따분하다. 물론 사람 죽는 광경을 재미 어쩌구 할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무기들은 대부분 이미 그 전부터 있었던 것들이다. 흔히 제1차 세계대전하면 독가스와 드레드노트 전함 정도를 떠올리지만 전차와 장갑차, U-보트, 비행기, 드론, 화염방사기, 위장복, 철모 등 제2차 세계대전은 물론, 오늘날까지도 현대 군대의 주요 장비로 사용되고 있는 상당수가 제1차 세계대전이 만들어 낸 발명품들이다. 세계 바다를 주름잡는 항공모함의 시대가 처음 열린 것도 1차대전 말기였다. 배수량 2만5천톤의 커레이저스급 순양전함 퓨리어스는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으로 개조되었고 1918년 7월 19일 7대의 솝위드 카멜(Sopwith Camels) 복엽기가 출격하여 유틀란드 반도에 있는 독일 톤데른(Tondern)의 비행선 기지를 공습했다. 20여년 뒤 진주만 기습의 서막인 셈이다.


2차 대전은 1차 대전 때 등장한 무기를 발전시켜 싸웠다. 예외라고 한다면 레이더와 핵무기 정도일까. 제1차 세계대전은 <1917>같은 영화에 나오는 것마냥 지루한 참호전과 분별없는 장군들에게 떠밀린 병사들의 구태의연한 닥돌이 전부가 아니라 처음으로 전쟁의 패러다임을 사람에서 기술로 바꾸어 놓은 전쟁이기도 했다. 1914년 9월 마른 전투에서 연합군이 풍전등화의 파리를 지켜내고 독일군의 슐리펜 계획을 무산시킨 비결은 차량 덕분이었다. 파리에 있는 수백여대의 택시와 트럭으로 예비군을 전선으로 신속하게 수송하여 전선의 구멍을 막았다. 2년 뒤 베르뎅에서도 프랑스군은 대량의 트럭을 투입하여 수십만명의 병력과 물자를 실어나름으로서 철도의 한계를 극복했다. 장군들은 나름대로 사상자를 최소화하고 전선의 교착화를 극복하기 위해서 신무기 경쟁에 도전했다. 그들이라고 무턱대고 닥돌만 고집한 것은 아닌 셈이다. 일본군에 비하면야.


베르뎅 전투 당시 꼬리에 꼬리를 문 채 병력과 물자를 실어나르는 프랑스군 트럭 행렬. 군대가 마차 대신 차량에 의존하면서 기동력은 크게 향상되었다. 2차 대전은 1차 대전이 만들어낸 발명품을 누가 더 잘 활용하고 더 많이 찍어낼 수 있는가로 승패를 결정한 셈이다.


전쟁 말기에 오면 땅에서는 육중한 지상 전함들이 공세의 주역을 맡았고 하늘에서는 비행기들이 제공권의 장악을 다투었으며 바다에서는 잠수함들이 전통적인 수상함대의 아성을 위협했다. 화려한 군복은 보다 실용적인 위장복으로 바뀌었고 병사들이 철모를 쓰기 시작했으며 소독약의 개선과 X-선의 등장은 부상병들의 생존율을 극적으로 높였다. 전쟁 역사상 처음으로 군인은 전투보다 비전투로 죽을 가능성이 낮아졌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그 기술들은 민간으로 넘어갔고 우리의 삶은 달라졌다. 전쟁이 없었다고 해서 그런 혁신적인 발명품들이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시간을 앞당긴 것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과학이 전쟁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과학에 봉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영원한 딜레마이다.


팬덤북스 출판사에서 밀덕이라면 눈여겨 볼 만한 책이 나왔다. <전쟁은 어떻게 기술을 발전시켰나? - 기술이 불러온 파괴와 창조의 무대, 제1차 세계대전>은 제목 그대로 제1차 세계대전이 어떻게 우리네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저자는 역사 교수가 아니라 나 같은 블로거 출신의 밀덕 작가. 티스토리에서 <비둘기의 레퀴엠>이라는 전쟁사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을 주제로 연재하는 모양.

이 책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한 세대 전인 '벨 에포크(Belle Époque)' 시대에서 시작한다. 흔히 빅토리아 시대라고도 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은 유럽 열강들의 리즈 시절이자 모처럼 평화로운 한 때였다. 오랫동안 자기들끼리 치고박던 유럽인들은 산업혁명의 엄청난 힘을 외부로 돌림으로서 전 세계 90%를 지배했으며 지구의 모든 부와 자원을 독점했다. 때때로 유색 인종 군대가 낙후된 무기로 부질없는 저항에 나서기도 했지만 진보된 과학이 만들어낸 최신 무기로 무장한 유럽 군대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중국, 인도와 같은 가장 강성하고 오래된 제국조차 감히 맞설 수 없었다. 하지만 산업혁명은 전쟁 도구만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생활 또한 윤택하게 만들었다. 자동차가 마차를 대신하고 비행선이 대서양을 건너 대륙을 오가면서 사람들을 실어날랐다. 전기는 세상을 밝혔고 전화기와 무선통신이 등장했다. 농업 혁명이 실현되면서 인구 증가가 기근을 불러와 인류를 멸망시킬 것이라던 멜서스의 예언을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백인 문명의 번영은 절정이었지만 열강들은 어리석게도 평화에 만족하지 못하고 넘쳐나는 힘을 새로운 전쟁의 준비에 돌렸다. 인간이 두번의 대전쟁에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화력으로 수천만명을 죽였으며 그 폐허를 딛고 오늘날 더욱 발전된 현대 문명이 탄생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다름아닌 벨 에포크 시대의 산물이었다는 것.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서 유럽 강대국들은 낙관과 환희에 가득 차 있었다. 심지어 고된 삶을 사는 노동자들도 부르주아처럼 사치스럽게 살지는 못해도 사회 투쟁 덕분에 18세기 산업혁명 초기보다는 어느 정도 먹고 살만 하다고 위안했다. 새로운 것이 발명되어 세상이 바뀌는 현상을 보면서 조금만 더 있으면 창조주와 같은 능력을 갖추어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유토피아가 열릴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실제로 우리 일생 생활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물건은 19세기, 20세기 초에 나온 것들이 많다. - p.26

18세기에 증기로 움직이는 자동차가 등장했지만 너무 무거워 상용화되지 못했다. 그러다 1885년 독일에서 벤츠와 다임러 자동차가 처음 등장하여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이후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도 자동차 개발에 뛰어들었으며 휘발유 엔진을 자전거에 탑재한 오토바이도 등장했다. - p.36

트랙터는 농경지에서 사용하기 최적화되었으며 가축보다 더 큰 힘과 에너지 지속성을 뽐내면서 더 많은 농경지를 한번에 처리했다. 이 덕분에 농업생산력은 수많은 말과 가축을 가지고 있을 때보다 트랙터 하나일때 효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농촌 인구는 줄어드는데도 쏟아져 나오는 농작물에 강대국들은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게다가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산업발전에 집중할 수 있었다. - p.105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본문은 총 4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 챕터는 벨 에포크 시대의 발명과 진보, 두번째 챕터는 신무기들의 등장, 세번째 챕터는 이전 세기와 전혀 달라진 육해공 입체전의 양상, 네번째 챕터는 당시의 전쟁 기계가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문명의 이기로 어떻게 바뀌게 되었는지를 다룬다. 저자가 블로그에서 연재했던 내용을 책으로 엮였다고 하는데 각각의 에피소드는 짧지만 흥미롭다.

프랑스군이 보유한 공랭식 기관총에 다른 나라들도 관심을 보였지만 프랑스군은 공랭식 기관총의 기술을 절대 알려주지 않았다. 유일하게 일본 제국에 알려줬지만 그마저도 불완전해서 일본 제국이 사용했던 기관총은 고장이 잦았다. - p.187

드레드노트 전함은 전 드레드노트 전함처럼 각각의 함포들이 제각기 조준하고 발포하던 것과 달리, 동시에 발포하는 협차사격을 할 수 있었다. 조타실에서 적이 맞을 확율을 계산한 후 좋은 조건일 때 주포들이 일제히 함포를 발포해 포탄의 비를 내리는 방식이었다. 적함은 확률에 따라 몇 발은 피할 수 있어도 한 발이라도 맞으면 치명적이었다. 이런 전투방식 덕분에 드레드노트 전함은 기존 전함의 포격 능력을 압도했다. 기존 전함 10척이 드레드노트 전함 1척을 이기지 못하는 판국이 된 것이다. - p.226

제1차 세계대전은 트럭이 빛을 발하던 전쟁이었다. 무거운 것을 탑재할 수 있고 어디든 빠르게 달릴 수 있는 트럭은 사륜 구동과 공기압 타이어가 더해지면서 어디서나 빠지지 않았으며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어 빠르게 도로를 차지했다. 미국 농촌에서 픽업트럭으로 자리잡은 포드 모델 TT이 농산물과 가축을 수송하는 덕분에 농산물 유통 속도가 빨라졌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독일 제국이 전쟁에서 패한 이유를 분석한 결과 트럭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 P.270

장갑차는 작아서 참호를 넘기에 부적합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장갑차는 참호를 공격하는 용도보다는 적의 허점을 빠르게 비집고 들어가 공격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주로 드넓은 동부전선과 중동전선에서 장갑차가 활약했다. 하지만 빽빽한 참호와 장애물로 가득한 서부전선이나 험준한 알프스 산맥이 가로막는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장갑차의 역할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캐나다 원정군은 장갑차가 참호를 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병력을 참호까지 안전하게 수송할 수 있다는 장점을 활용했다. - p.331

1915년 여름 아드리안 철모는 처음으로 프랑스군에 보급되었다. 당시 절반 정도만 보급되었음에도 사상자가 무려 44%나 감소하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아드리안 철모는 연합군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프랑스군 뿐만 아니라 영국 원정군, 이탈리아군, 나중에는 타이원정군이 즐겨 쓰는 철모가 되었다. 심지어 동맹군도 연합군의 아드리안 철모를 노획하여 대충 자기네 색으로 칠한 후 사용할 정도였다. - p.398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연합군 출신 남성들은 질레트 안전 면도기를 선호했다. 이 때 대부분의 남자들은 면도기 상표명을 잘 몰랐기에 질레트 초상화가 그려진 제품을 찾아다녔다. 동맹군 병사들도 포로 생활을 하면서 질레트 면도기에 감탄했다. 질레트는 이 점을 적극 활용하여 세계적인 면도기 기업으로 성장했다. - p.430

러시아 내전으로 많은 교훈을 얻은 소련군은 공수부대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게다가 공수부대의 임무를 수행할 병력이 넘쳐나다보니 이들이 추락사해도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그래서 비행기 날개에 공수부대원들을 매달아서 낙하를 시켰다. 당연히 비행기 날개에 매달렸다가 공기 저항을 못 이기고 추락한 병사들도 많았다. 이러한 무모한 작전이 공수부대 전용의 비행기를 설계하는 계기가 되었다. - p.454

19세기 때만 해도 동서를 막론하고 남자들이 수염을 풍성하게 기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음에도 현대인들 대부분이 깔끔하게 깎거나 짧게 기르게 된 계기는 제1차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독가스에 질식당하여 죽고 싶지 않으면 방독면을 쓸 때 수염이 방해되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 일회용 면도기의 대명사인 질레트의 등장이었다. 이 책을 읽다보면 1차 대전 때 발명품들이 20년 뒤의 전쟁에 등장하는 것보다 훨씬 실용적인 느낌이다. 적어도 히틀러의 비밀무기랍시고 태양광선포 조넨게베어(Sonnengewehr)라던가 연합군의 초거대 얼음 항공모함인 하버쿡 프로젝트(Project Habakkuk), 호모 폭탄 따위의 황당하면서 돈 지랄하는 오버 테크놀리지는 없다. 그 시절 사람들은 후대보다 좀 더 상식적이랄지, 상상력이 부족하달지. 찾아보면 있을지도.

주경철 교수를 비롯하여 대학 교수들이 쓴 일반 교양서적들이 흔히 현학적이면서 강의실 노트같은 느낌이라면 이 책은 밀덕들의 관심사를 제대로 꿰뚫는다랄까. 분량이 짧고 디테일한 부분이 다소 부족하지만 그만큼 읽는데 부담이 적다. 무엇보다도 재미있다. 나로서도 같은 작가로서 여러모로 참고가 된다.


사람들이 방송에 나오는 유명 저자, 유명 유튜버의 이름만 보고 책을 고르는 것이 요즘 분위기이다. 하지만 저자의 유명세에만 기대어 알맹이라고는 없는 책보다 이런 책이야말로 진흙 속의 진짜 구슬이 아닐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