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어떻게 기술을 발전시켰나?
김영서 지음 / 팬덤북스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새 전쟁 영화의 고전이 된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비교적 최근작인 <미드웨이> <퓨리> <그레이 하운드> 등 제2차 세계대전 영화를 보면 그야말로 화려하고 스펙타클하다. 하늘을 끝없이 메운 비행기들이 치열한 공중전을 벌이거나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고, 지상에서는 강철과 강철이 맞부딪치며 바다에서는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수백여대의 함재기들이 쏟아지는 대공포화를 뚫고 적 함대에 폭탄의 비를 쏟아붓는다. 여기에 비하면 참호에서 고작 소총 하나 들고 우루루 뛰어나가다가 기관총과 포격 앞에서 수수다발처럼 쓰러져 나갈 뿐인 제1차 세계대전은 아무래도 따분하다. 물론 사람 죽는 광경을 재미 어쩌구 할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무기들은 대부분 이미 그 전부터 있었던 것들이다. 흔히 제1차 세계대전하면 독가스와 드레드노트 전함 정도를 떠올리지만 전차와 장갑차, U-보트, 비행기, 드론, 화염방사기, 위장복, 철모 등 제2차 세계대전은 물론, 오늘날까지도 현대 군대의 주요 장비로 사용되고 있는 상당수가 제1차 세계대전이 만들어 낸 발명품들이다. 세계 바다를 주름잡는 항공모함의 시대가 처음 열린 것도 1차대전 말기였다. 배수량 2만5천톤의 커레이저스급 순양전함 퓨리어스는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으로 개조되었고 1918년 7월 19일 7대의 솝위드 카멜(Sopwith Camels) 복엽기가 출격하여 유틀란드 반도에 있는 독일 톤데른(Tondern)의 비행선 기지를 공습했다. 20여년 뒤 진주만 기습의 서막인 셈이다.


2차 대전은 1차 대전 때 등장한 무기를 발전시켜 싸웠다. 예외라고 한다면 레이더와 핵무기 정도일까. 제1차 세계대전은 <1917>같은 영화에 나오는 것마냥 지루한 참호전과 분별없는 장군들에게 떠밀린 병사들의 구태의연한 닥돌이 전부가 아니라 처음으로 전쟁의 패러다임을 사람에서 기술로 바꾸어 놓은 전쟁이기도 했다. 1914년 9월 마른 전투에서 연합군이 풍전등화의 파리를 지켜내고 독일군의 슐리펜 계획을 무산시킨 비결은 차량 덕분이었다. 파리에 있는 수백여대의 택시와 트럭으로 예비군을 전선으로 신속하게 수송하여 전선의 구멍을 막았다. 2년 뒤 베르뎅에서도 프랑스군은 대량의 트럭을 투입하여 수십만명의 병력과 물자를 실어나름으로서 철도의 한계를 극복했다. 장군들은 나름대로 사상자를 최소화하고 전선의 교착화를 극복하기 위해서 신무기 경쟁에 도전했다. 그들이라고 무턱대고 닥돌만 고집한 것은 아닌 셈이다. 일본군에 비하면야.


베르뎅 전투 당시 꼬리에 꼬리를 문 채 병력과 물자를 실어나르는 프랑스군 트럭 행렬. 군대가 마차 대신 차량에 의존하면서 기동력은 크게 향상되었다. 2차 대전은 1차 대전이 만들어낸 발명품을 누가 더 잘 활용하고 더 많이 찍어낼 수 있는가로 승패를 결정한 셈이다.


전쟁 말기에 오면 땅에서는 육중한 지상 전함들이 공세의 주역을 맡았고 하늘에서는 비행기들이 제공권의 장악을 다투었으며 바다에서는 잠수함들이 전통적인 수상함대의 아성을 위협했다. 화려한 군복은 보다 실용적인 위장복으로 바뀌었고 병사들이 철모를 쓰기 시작했으며 소독약의 개선과 X-선의 등장은 부상병들의 생존율을 극적으로 높였다. 전쟁 역사상 처음으로 군인은 전투보다 비전투로 죽을 가능성이 낮아졌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그 기술들은 민간으로 넘어갔고 우리의 삶은 달라졌다. 전쟁이 없었다고 해서 그런 혁신적인 발명품들이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시간을 앞당긴 것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과학이 전쟁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과학에 봉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영원한 딜레마이다.


팬덤북스 출판사에서 밀덕이라면 눈여겨 볼 만한 책이 나왔다. <전쟁은 어떻게 기술을 발전시켰나? - 기술이 불러온 파괴와 창조의 무대, 제1차 세계대전>은 제목 그대로 제1차 세계대전이 어떻게 우리네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저자는 역사 교수가 아니라 나 같은 블로거 출신의 밀덕 작가. 티스토리에서 <비둘기의 레퀴엠>이라는 전쟁사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을 주제로 연재하는 모양.

이 책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한 세대 전인 '벨 에포크(Belle Époque)' 시대에서 시작한다. 흔히 빅토리아 시대라고도 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은 유럽 열강들의 리즈 시절이자 모처럼 평화로운 한 때였다. 오랫동안 자기들끼리 치고박던 유럽인들은 산업혁명의 엄청난 힘을 외부로 돌림으로서 전 세계 90%를 지배했으며 지구의 모든 부와 자원을 독점했다. 때때로 유색 인종 군대가 낙후된 무기로 부질없는 저항에 나서기도 했지만 진보된 과학이 만들어낸 최신 무기로 무장한 유럽 군대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중국, 인도와 같은 가장 강성하고 오래된 제국조차 감히 맞설 수 없었다. 하지만 산업혁명은 전쟁 도구만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생활 또한 윤택하게 만들었다. 자동차가 마차를 대신하고 비행선이 대서양을 건너 대륙을 오가면서 사람들을 실어날랐다. 전기는 세상을 밝혔고 전화기와 무선통신이 등장했다. 농업 혁명이 실현되면서 인구 증가가 기근을 불러와 인류를 멸망시킬 것이라던 멜서스의 예언을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백인 문명의 번영은 절정이었지만 열강들은 어리석게도 평화에 만족하지 못하고 넘쳐나는 힘을 새로운 전쟁의 준비에 돌렸다. 인간이 두번의 대전쟁에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화력으로 수천만명을 죽였으며 그 폐허를 딛고 오늘날 더욱 발전된 현대 문명이 탄생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다름아닌 벨 에포크 시대의 산물이었다는 것.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서 유럽 강대국들은 낙관과 환희에 가득 차 있었다. 심지어 고된 삶을 사는 노동자들도 부르주아처럼 사치스럽게 살지는 못해도 사회 투쟁 덕분에 18세기 산업혁명 초기보다는 어느 정도 먹고 살만 하다고 위안했다. 새로운 것이 발명되어 세상이 바뀌는 현상을 보면서 조금만 더 있으면 창조주와 같은 능력을 갖추어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유토피아가 열릴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실제로 우리 일생 생활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물건은 19세기, 20세기 초에 나온 것들이 많다. - p.26

18세기에 증기로 움직이는 자동차가 등장했지만 너무 무거워 상용화되지 못했다. 그러다 1885년 독일에서 벤츠와 다임러 자동차가 처음 등장하여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이후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도 자동차 개발에 뛰어들었으며 휘발유 엔진을 자전거에 탑재한 오토바이도 등장했다. - p.36

트랙터는 농경지에서 사용하기 최적화되었으며 가축보다 더 큰 힘과 에너지 지속성을 뽐내면서 더 많은 농경지를 한번에 처리했다. 이 덕분에 농업생산력은 수많은 말과 가축을 가지고 있을 때보다 트랙터 하나일때 효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농촌 인구는 줄어드는데도 쏟아져 나오는 농작물에 강대국들은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게다가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산업발전에 집중할 수 있었다. - p.105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본문은 총 4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 챕터는 벨 에포크 시대의 발명과 진보, 두번째 챕터는 신무기들의 등장, 세번째 챕터는 이전 세기와 전혀 달라진 육해공 입체전의 양상, 네번째 챕터는 당시의 전쟁 기계가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문명의 이기로 어떻게 바뀌게 되었는지를 다룬다. 저자가 블로그에서 연재했던 내용을 책으로 엮였다고 하는데 각각의 에피소드는 짧지만 흥미롭다.

프랑스군이 보유한 공랭식 기관총에 다른 나라들도 관심을 보였지만 프랑스군은 공랭식 기관총의 기술을 절대 알려주지 않았다. 유일하게 일본 제국에 알려줬지만 그마저도 불완전해서 일본 제국이 사용했던 기관총은 고장이 잦았다. - p.187

드레드노트 전함은 전 드레드노트 전함처럼 각각의 함포들이 제각기 조준하고 발포하던 것과 달리, 동시에 발포하는 협차사격을 할 수 있었다. 조타실에서 적이 맞을 확율을 계산한 후 좋은 조건일 때 주포들이 일제히 함포를 발포해 포탄의 비를 내리는 방식이었다. 적함은 확률에 따라 몇 발은 피할 수 있어도 한 발이라도 맞으면 치명적이었다. 이런 전투방식 덕분에 드레드노트 전함은 기존 전함의 포격 능력을 압도했다. 기존 전함 10척이 드레드노트 전함 1척을 이기지 못하는 판국이 된 것이다. - p.226

제1차 세계대전은 트럭이 빛을 발하던 전쟁이었다. 무거운 것을 탑재할 수 있고 어디든 빠르게 달릴 수 있는 트럭은 사륜 구동과 공기압 타이어가 더해지면서 어디서나 빠지지 않았으며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어 빠르게 도로를 차지했다. 미국 농촌에서 픽업트럭으로 자리잡은 포드 모델 TT이 농산물과 가축을 수송하는 덕분에 농산물 유통 속도가 빨라졌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독일 제국이 전쟁에서 패한 이유를 분석한 결과 트럭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 P.270

장갑차는 작아서 참호를 넘기에 부적합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장갑차는 참호를 공격하는 용도보다는 적의 허점을 빠르게 비집고 들어가 공격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주로 드넓은 동부전선과 중동전선에서 장갑차가 활약했다. 하지만 빽빽한 참호와 장애물로 가득한 서부전선이나 험준한 알프스 산맥이 가로막는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장갑차의 역할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캐나다 원정군은 장갑차가 참호를 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병력을 참호까지 안전하게 수송할 수 있다는 장점을 활용했다. - p.331

1915년 여름 아드리안 철모는 처음으로 프랑스군에 보급되었다. 당시 절반 정도만 보급되었음에도 사상자가 무려 44%나 감소하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아드리안 철모는 연합군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프랑스군 뿐만 아니라 영국 원정군, 이탈리아군, 나중에는 타이원정군이 즐겨 쓰는 철모가 되었다. 심지어 동맹군도 연합군의 아드리안 철모를 노획하여 대충 자기네 색으로 칠한 후 사용할 정도였다. - p.398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연합군 출신 남성들은 질레트 안전 면도기를 선호했다. 이 때 대부분의 남자들은 면도기 상표명을 잘 몰랐기에 질레트 초상화가 그려진 제품을 찾아다녔다. 동맹군 병사들도 포로 생활을 하면서 질레트 면도기에 감탄했다. 질레트는 이 점을 적극 활용하여 세계적인 면도기 기업으로 성장했다. - p.430

러시아 내전으로 많은 교훈을 얻은 소련군은 공수부대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게다가 공수부대의 임무를 수행할 병력이 넘쳐나다보니 이들이 추락사해도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그래서 비행기 날개에 공수부대원들을 매달아서 낙하를 시켰다. 당연히 비행기 날개에 매달렸다가 공기 저항을 못 이기고 추락한 병사들도 많았다. 이러한 무모한 작전이 공수부대 전용의 비행기를 설계하는 계기가 되었다. - p.454

19세기 때만 해도 동서를 막론하고 남자들이 수염을 풍성하게 기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음에도 현대인들 대부분이 깔끔하게 깎거나 짧게 기르게 된 계기는 제1차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독가스에 질식당하여 죽고 싶지 않으면 방독면을 쓸 때 수염이 방해되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 일회용 면도기의 대명사인 질레트의 등장이었다. 이 책을 읽다보면 1차 대전 때 발명품들이 20년 뒤의 전쟁에 등장하는 것보다 훨씬 실용적인 느낌이다. 적어도 히틀러의 비밀무기랍시고 태양광선포 조넨게베어(Sonnengewehr)라던가 연합군의 초거대 얼음 항공모함인 하버쿡 프로젝트(Project Habakkuk), 호모 폭탄 따위의 황당하면서 돈 지랄하는 오버 테크놀리지는 없다. 그 시절 사람들은 후대보다 좀 더 상식적이랄지, 상상력이 부족하달지. 찾아보면 있을지도.

주경철 교수를 비롯하여 대학 교수들이 쓴 일반 교양서적들이 흔히 현학적이면서 강의실 노트같은 느낌이라면 이 책은 밀덕들의 관심사를 제대로 꿰뚫는다랄까. 분량이 짧고 디테일한 부분이 다소 부족하지만 그만큼 읽는데 부담이 적다. 무엇보다도 재미있다. 나로서도 같은 작가로서 여러모로 참고가 된다.


사람들이 방송에 나오는 유명 저자, 유명 유튜버의 이름만 보고 책을 고르는 것이 요즘 분위기이다. 하지만 저자의 유명세에만 기대어 알맹이라고는 없는 책보다 이런 책이야말로 진흙 속의 진짜 구슬이 아닐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