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가족 - 최태민, 임선이, 그리고 박근혜
조용래 지음 / 모던아카이브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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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고기가 땅에 있으면 물만 보면 찾아가듯이 딱 그런 관계였다"
- 최태민의 의붓아들 조순제가 말하는 최태민과 박근혜

1973년 5월 13일자 대전일보에 〈영세계에서 알리는 말씀〉이라는 내용의 광고가 실렸다고 한다.

"영세계 주인이신 조물주께서 보내신 칙사님이 이 고장에 오시어 수천 년 간 이루지 못하던 불교에서의 깨침과 기독교에서의 성령강림, 천도교에서의 인내천 이 모두를 조물주께서 주신 조화로서 즉각 실천하신다 하오니 모두 참석하시와 칙사님의 조화를 직접 보시라 한다. 난치병으로 고통 받으시는 분은 극시 오시어 상담하시라."

얼핏 보기에도 사이비교의 냄새가 풀풀 나는 사람 낚는 광고이다. 국민의 일거수 일투족까지 정부가 관여하던 서슬 퍼런 독재 정권 시절에도 이런 광고가 잘도 신문 일면에 나올 수 있었던 모양이다.

영세교 또는 영생교는 1973년 최태민이라는 사람이 불교, 천도교, 기독교 등을 적당히 섞어서 만든 잡탕 종교로, 2000년대 초반 신도들을 암매장한 사건으로 한창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조희성의 영생교와는 다르다. 그는 스스로를 "주물주의 칙사"이니 "단군"이니 자처하면서 신통력으로 난치병을 고치겠다는 둥, 대한민국이 곧 세계 주도국이 될 것이라는 둥의 헛소리로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한국판 라스푸틴" 최태민. 하지만 그가 라스푸틴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뒤에는 권력자의 어리석음과 비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있을 법한일인가. 지금이라면 웃음거리가 될 일이다. 실제로 당시에도 그런 허황된 말에 넘어간 추종자들은 많아야 수십명에 불과했던 것같다. 사람 낚는 사기꾼이야 예나 지금이나 있는 일이고 그런 사기질이 얼마나 오래가겠냐만은 문제는 그 중의 한 사람이 박근혜였다는 사실이다. 한때 날던 새도 떨어뜨렸던 중앙정보부장이었으나 박정희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프랑스로 망명한 후 의문의 죽음을 당한 김형욱의 회고록에는 최태민이 1975년에 박근혜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것도 있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주기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는 걸 네가 왜 모르느냐? 너를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자리만 옮겼을 뿐이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 육 여사가 꿈에 나타나 내 딸이 우매해 아무 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면서 이런 뜻을 전해 달라고 했다"

당시 박근혜는 23살. 제아무리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죽은 지 얼마되지 않았고 정신이 없었던 시절이라고 해도 일면식도 없고 정체도 알 수 없는 사이비 교주의 허황된 소리에 넘어갈 수 있을까. 실로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박근혜는 최태민을 정말로 불러들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시작이었다.

보름 전 대한민국 헌장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현직 대통령이 자리에서 쫓겨난 것이다. 전직 대통령이 퇴임 후 이런저런 비리 문제가 불거지면서 검찰에 불러다닌 것은 항상 반복되어온 모습이라고 해도 현직 대통령이 임기 도중에 자리에서 물러난 것은 60년 전 이승만의 하야 이래 처음이다. 게다가 이것은 야당의 정치 공세 때문도 아니고 대다수 국민들이 대통령 불신임을 외친 결과이다. 그만큼 대통령의 신임이 땅에 떨어졌다는 얘기이다. 소위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조사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지만 이미 대통령 비서실장 김기춘, 조윤선 문광부 장관을 비롯하여 십수명에 달하는 굵직굵직한 정권 실세들이 굴비마냥 엮어서 구속되었다. 명색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과연 이런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는가. 그리고 사건의 뒤에는 최순실이라는 여인이 있다.

모던 아카이브에서 주목할만한 신작 도서가 나왔다. 『또 하나의  가족 - 최태민, 임선이, 그리고 박근혜』 이 책의 저자는 놀랍게도 최태민의 의붓아들이었으며 최태민 왕국에 직접 가담한 바 있었던  故 조순제 씨이다. 조순제 씨는 최태민의 부인이었던 임선이가 전 남편 사이에 낳은 자식이다. 의붓 아버지인 최태민과는 썩 사이가 좋지는 못했으나 박근혜에게 접근하는데 성공한 최태민이 권력을 이용하여 대한구국선교단을 수립하자 조순제는 단체의 홍보실장을 하였다. 그 이후에도 박근혜가 소유한 영남재단 등에 관여하면서 박근혜의 전위 세력으로 앞장섰으나 최태민과 사이가 나빠지고 최순실을 비롯한 배다른 동생들이 등장하면서 밀려난 채 말년에는 사업 실패 등으로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작년 가을 우리 사회에서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과 박근혜의 해괴한 관계에 대해서는 "그것이 알고 싶다" "썰전"을 비롯하여 여러 방송에서 다루어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준 바있다.

이 책에서는 조순제가 죽기 직전에 남긴 녹취록을 근거로 한국전쟁 당시 유부남이었던 최태민과 과부 임선이가 어떻게 만나게 되었으며, 최태민의 온갖 엽기적인 행적, 최태민과 박근혜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더욱이 명색이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가 지적 수준도 결코 높다 말할 수 없는 최태민에게 그토록 빠지게 된 이유,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의혹과 최순실을 비롯한 최씨 일가의 부정비리를 낱낱이 폭로한다. 심지어 이른바 박정희 시해 사건을 일으켰던 김재규는 재판 당시 자신이 박정희를 죽인 이유 중에는 최태민의 불법적인 행각를 눈감아 주는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최태민은 단순히 한 여성을 농락한 일개 사기꾼이 아니라 대한민국 역사를 송두리채 흔들어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 후로 박근혜와 최태민은 서로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교주가 되었다.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최태민과 만나는 박근혜는 욕망과 야망, 그리고 어떤 집착과 맹신같은 요소들이 뒤섞여 만드는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 p.38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개인 성령이 뭔지 아무리 얘기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최태민이 한심하기까지 했다. 자신이 주창하고 떠드는 영세교에 대해서도 무슨 의미를 가진 종요인지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 p.59

"김경옥이 박근혜에게 링거 주사를 놓는 동안 곁에 있는 최태민이 박근혜의 팔다리를 주무르고 뒤로 돌아가서는 어깨를 주무르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깊은 관계를 알고는 있었지만 눈앞에서 직접 자연스럽고 다정한 모습을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 p.74

"지금 네 할머니가 가진 돈은 너를 편히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죽게 할 수 있다. 할머니가 가진 돈에 대해서는 전혀 아쉽게 생각하지 말아라." - p.102

대목마다 실로 충격이다. 여색에 눈이 먼 최태민의 엽기 행각, 여기다 박근혜와 가까워지면서 권력까지 얻게 되었고 그는 이를 이용하여 별의별 추문을 뿌리고 다녔다. 돈이 된다 싶으면 달려들어서 거머리마냥 달라붙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뜯어내었다. 그렇게 축적한 재산이 수천억인지 수조인지 아무도 모른다. 게다가 박근혜는 최태민과 나이 차이도 아버지와 딸 뻘이지만 더욱이 박정희의 영애이기도 하다. 그 때만 해도 박정희의 서슬이 퍼런 시절에 누가 감히 넘볼 존재인가. 박정희는 과연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하여 전혀 몰랐는가. 충언을 해야 할 측근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들로서는 가족일에 주제넘게 끼어들였다가 눈밖에 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봉건적인 독재 정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최태민이 죽은 뒤 그 역할은 최순실이 맡았고 최순실은 킹 메이커 역할을 맡아서 박근혜를 국회의원에서, 그리고 대통령으로 만들어주었다. 만약 박근혜에게 대통령으로서의 역량이 있었다면, 최순실이 좀 더 현명한 여자였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훨씬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는데 대한민국의 불행이 있다. 장차관의 인사권부터 재벌들과의 정경유착, 비자금의 형성, 그 과정에서의 불법적인 권력 남용과 협박 등. 대한민국 국가 기강은 완전히 땅에 떨어졌고 민주주의는 30년 이상 후퇴하였다. 이들은 우리 사회를 1970년대로 되돌려 놓으려고 했던 것이다.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얻는 것도 어렵지만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민주주의조차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하면 소수의 기득 세력들에 의해 금새 중우정치로 전락한다. 서구 선진국들은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서 수백년에 걸쳐서 군주, 귀족들과 같은 기득 세력들과 투쟁을 하였다. 2차대전 이후 많은 나라들이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제도적으로 서구식 민주주의를 수용했지만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정한 의미에서 국민에 의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나라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런 점에서 촛불집회와 탄핵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이 보여준 모습은 세계 역사상 전례가 없다. 어떤 이들은 "대통령을 끌어낸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냐"라고 함부로 폄하하지만, 대통령은 봉건 군주도 아니고 특권을 누리는 절대 권력자도 아니다. 부끄러워 할  사람은 정치를 잘 못하여 국민의 신뢰를 저버린 대통령에게 있지, 당당하게 민주주의의 힘을 보여준 국민이 아니다. 만약 국민이 무관심으로 일관했더라면 이는 대통령에 대한 면죄부가 되었을 것이며 다음 대통령, 그 다음 대통령도 얼마든지 탈법, 불법을 저질러도 된다는 얘기이다. 국가 수장인 대통령이 대놓고 탈법, 불법을 저지르는데 아랫 사람들에게만 청렴하라고 강요할 수 있는가. 결국 국가 기강이 전반적으로 땅에 떨어졌을 것이며, 가장 힘 없는 서민들에게 모든 피해가 돌아갔을 것이다. 

조순제는 이미 10여년 전인 2007년 이명박과 박근혜가 한나라당 경선을 벌이고 있을 때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된다"라면서 이른바 "조순제 녹취록"을 이명박 캠프에 전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경선에서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던 이명박 진영은 경선 이후 박근혜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이를 터뜨리기보다는 그냥 덮는 쪽을 택했다. 오히려 "터뜨려야 한다"고 끝까지 고집을 부렸던 사람들이 명예훼손 등으로 구속되었다. 2012년 대선 때에도 최순실 게이트는 세간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이는 우리의 정치판이 정책 대결과 개인의 도덕성을 따지기보다는 이념 대결, 진영 대결로 흐르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또한 서로 선거의 승패에 자신들의 사활을 걸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흑색 선전과 선동으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린다. 심지어 엄중하게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국정원이 권력과 결탁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 책이 매우 불편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또한 조순제라는 사람의 일방적인 얘기일 뿐,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 현 시국에 편승하여 악의적인 흑색선전은 아니냐, 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어차피 누가 알겠는가. 사람이란 보고 싶은대로 보고 믿고 싶은대로 믿는 동물이다. 사실이라서 진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었으면 하기에 진실이 되는 것이다. 이 책이 과연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읽는 이가 스스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분량이 적은 것이 아쉽다. 녹취록까지 합하여 200여 페이지 정도이다. 또한 조순제가 과거 최태민-박근혜의 주변에 있으면서 자신의 기억을 근거로 쓴 회고록이기에 주관적인 부분이 많고 우리가 궁금해 하는 수많은 의혹을 상세하게 파헤치지는 않는다. 이 책 하나로 모든 궁금증을 풀기에는 한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삼자가 아닌 <최순실 게이트>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사람이 폭로하는 이야기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호기심을 가지기에 충분하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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