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이후의 세계 이미 시작된 미래
금철영 지음, 강인경 그림 / 이든하우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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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미국-이란 전쟁이 시작된 지 3주 즈음이었던 지난 3월 중순, 자칭 '세계의 보스'이자 타칭 '트러블 메이커'인 트럼프가 특유의 장대한 분노를 쏟아냈다. 그 상대는 이란이 아니라 어이없게도 오랜 우방인 나토 동맹국들이었다. 지난 수십년 동안 미국의 안보 우산에 무임승차한 주제에 미국이 급박할 때에는 돕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그는 나토 탈퇴까지 운운하면서 앞으로는 당신네들끼리 잘 해보라며 으름짱을 놓았다. 나토 동맹국들에게는 그야말로 적반하장이자 배은망덕일 것이다. 걸프전쟁을 비롯하여 아프간-이라크 침공 등 그동안 미국의 전쟁에 부지런히 동참하면서 적지 않은 비용과 인명희생까지 감당해 왔다는 점에서 트럼프의 주장은 사실 왜곡일 뿐더러, 정작 바이든 행정부는 2021년 아프간에서 철수할 때 아무런 사전협의나 정보공유도 없이 일방적으로 손을 떼기로 결정하여 미국만 믿고 있던 동맹국들을 곤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게다가 트럼프가 중동의 문제아 이스라엘과 야합하여 멋대로 사고치는 바람에 전 세계가 피해를 보고 있는데 이제와서 뒷수습은 나토를 들먹이고 있으니 뻔뻔함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안그래도 그동안 나토를 가리켜 종이 호랑이라며 공공연히 무시한 트럼프에게 쌓인 것이 많은 이들로서는 "뭐 우리는 베알도 없는 줄 아냐?"라고 할 듯.

전쟁은 일으키기는 쉬워도 끝내기는 어렵다는 만고의 진리를 무시한 트럼프는 한층 기고만장해진 이란이 이참에 해협 통행료를 뜯겠다고 하자 남이 삥 뜯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내가 뜯겠다는 부동산 투기꾼다운 기똥찬 발상 전환으로 가뜩이나 기름값 상승에 격앙된 인류의 염장에 불을 질렀다. 고집센 성격에 입만 열면 허세지만 속내는 자기가 사고치기 전으로 로드 신공을 하고 싶은 심정 아닐지.


한편으로 트럼프의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제아무리 아니꼽다고 한들, 나토는 미국 없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의 엄포가 전적으로 틀렸다고 할 수도 없다는 점이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나토 동맹국들의 딜레마이다. 네덜란드 전 총리이자 나토 사무총장인 마르크 뤼터(Mark Rutte)는 트럼프가 유럽을 무시한다며 분노한 일부 회원국들의 자강론에 대해 "꿈같은 소리"라면서 일축했다. 냉전 종식 이후 평화에 젖어 전쟁을 잊은 결과였다. 유럽 국가들은 국방비를 대폭 줄이는 대신 경제 성장과 복지에 지출했고 젊은 세대의 표를 얻을 요량으로 징병제를 폐지했다. 군대는 최소한의 수준으로 억제되었으며 무기와 장비는 노후화되었다. 냉전 시절 소련의 위협에 맞서 각기 수천대의 전차를 보유했던 영국, 프랑스, 독일은 이제 탈탈 털어봐야 200~300여대 남짓에 불과하다. 해공군의 사정도 다를 바 없다. 사실상 무장을 해제한 셈이다. 구소련이 무너진 이상 더 이상 유럽에서 과거와 같은 전면 총력전이 벌어질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저널리스트가 쓴 <노르트스트림의 덫>은 서방 지도자들이 푸틴을 얼마나 안이하게 여겼는지를 신랄하게 지적한다. 이들은 푸틴이 구소련 지도자들과 달리 말이 통하는 상대라고 여겼고 그가 값싸게 공급하는 러시아산 에너지는 유럽인들을 방심시켰다. 심지어 프랑스는 자국 최신 기술이 집약된 미스트랄급 강습상륙함 2척을 러시아에 판매하려고 했을 정도였다. 서방과 푸틴의 밀월은 2014년 우크라이나 마이단 혁명과 러시아의 크림 반도 전격 합병과 함께 끝났다. 서방 지도자들은 그제야 푸틴이 무해하기는 커녕 속이 시커먼 야심가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알맹이 없는 비난과 경제제재 외에 서방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토 가입을 호소하는 우크라이나의 요구는 거부되었다. 이들로서는 오랜 평화와 값싼 러시아산 에너지를 포기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우크라이나만 눈딱감고 희생하면 우리한테 불똥 튈 일은 없을 거라는 게 서방의 믿음이었다. 아프간과 이라크의 수렁에서 10년 넘게 허우적거리던 미국도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시절도 있었다며. 2001년 9월 25일 독일 의회에서 기립 박수를 받는 푸틴. 러시아의 젊은 신임 대통령이었던 그는 철지난 대결 대신 화해와 협력을 강조하여 그때까지 러시아를 경계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서방에게 자신이 무해한 존재임을 각인시켰다. 서방 지도자들은 자신들만 코트를 벗으면 '우리 시대의 평화'가 올 거라고 믿었지만 정작 푸틴이 코트를 벗지 않았다는 사실은 간과했다.


2022년 2월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했을 때 서방 내 친러 좌파 지식인들은 그의 상투적인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면서 "유럽의 위기는 푸틴 때문이 아니라 나토의 동진 탓"으로 돌렸지만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다. 서방의 진짜 실수는 나토를 동진시키지 말라는 푸틴의 경고를 한귀로 흘려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자극할까봐 저자세로 일관하면서 전쟁을 대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남을 위협하지 않으면 남도 나를 위협하지 않을 거라는 안이한 발상이었고 그 댓가를 푸틴의 공갈과 트럼프의 멸시로 단단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유럽의 처지는 대공황 이후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영국과 프랑스가 주변국들을 거침없이 집어삼키는 히틀러의 야망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던 1930년대 말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저출산 고령화와 코로나의 여파로 극심한 경제 불황에 시달리는 유럽의 여론은 분열되고 뒤늦은 군비 확충과 징병제를 부활하려는 시도는 기성세대가 수혜만 누리고 책임은 우리에게 떠넘긴다는 젊은 세대의 거센 저항에 부딪치는 판국이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자신들의 피로서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지만 정작 서방은 어영부영하면서 날리고 있다. 인간이란 바로 옆집에 불이 나도 내집에 옮겨 붙기 전까지는 절박감이 없는 법이니 말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는 "되풀이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어리석음"이라고 했던가.


이든하우스 출판사에서 나온 신작도서 <전쟁 이후의 세계, 이미 시작된 미래>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바꾸어놓은 유럽의 모습, 그리고 지구 반대편 우리에게는 또 어떤 여파가 미치고 있는지를 다룬 책이다. 저자는 KBS 베테랑 종군기자로 30여년 동안 이라크, 우크라이나, 중동 등 세계 각지의 분쟁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우리가 TV로만 보는 전쟁의 잔혹한 참상과 그 속의 비극을 몸소 체험했다고 한다. 덧붙여, 작년 KBS 시사기획창에서 <우크라이나 임팩트>라는 제목으로 2부작을 방영한 것이 유튜브에도 올라와 있던데 봐야 할 듯.


<우크라이나 임팩트>에서 러시아의 드론 공격으로 파괴된 키이우 도심을 촬영하는 저자와 취재팀. 미국이 내전에 빠진다는 가상 영화 <시빌워>에서는 전장에서 비무장한 언론인들이라고 해서 결코 안전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저자 또한 현장을 취재하는 동안 위험천만한 경우가 많았으며 그로 인한 트라우마가 만만치 않다고 한다.


이 책은 제일 먼저 전쟁이 바꾸어놓은 우크라이나의 일상을 다룬다. 그러고보니 우크라이나 전쟁도 어느새 4년 반이 지났다. 한국전쟁의 3년 1개월과 제1차 세계대전의 4년 4개월을 갱신한 것이다. 그러고도 여전히 끝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도 어마어마한 파괴와 살육이 벌어졌지만 우크라이나 전쟁보다 나은 점은 있었다. 적어도 전후방의 구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서는 잠깐의 안식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로 날아올지 모르는 미사일과 드론 공격, 밤낮없이 울리는 공습 경보, 폭격이 내 머리에도 떨어질지 모른다는 극한의 공포심, 공습이 지나간 뒤 돌무더기로 변한 건물과 그 안에서 구조대원들이 필사적으로 꺼내는 시신과 부상자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울음소리. 전쟁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하기는 쉬워도 그 난장판 속에서 과연 이성을 유지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럼에도 우크라이나인들은 견뎌내고 있다. 그들은 푸틴에게 굴복할 생각이 없다. 그게 이 전쟁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이 아닐까 싶다.

전쟁 전에도 다큐멘타리 제작을 위해 우크라이나를 두 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모두 겨울철이었다. 그때 사람들은 미소를 지으며 한결같이 말했다. "아름다운 5월에 오세요." 하지만 2022년 2월 이후 그런 5월은 오지 않았다. - p.28


미사일과 드론 공습으로 사이렌이 울리면 방공호로 달려가야 한다. 그게 싫다면 집안에 그대로 머물며 운이 좋기를 바라야 한다. 어떤 형태로든 긴장 속의 밤은 계속된다. 무엇보다도 전쟁 기간에는 뭐든 익숙해진다고 해도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 사이렌 소리이다. '에에엥' 하는 사이렌 소리의 그 기묘한 음색은 들을 때마다 생경하고 소름이 끼친다. 특히 자신이 머무는 집이나 호텔 등에서 공습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면 사이렌 소리에 대한 공포는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 - p.31


전쟁이 없었다면 그저 하루하루의 고된 일상을 마치고 맥주 한잔 또는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겼을 것이다. 아니면 거리에 즐비한 멋진 책방들이 늦게까지 문을 여는 만큼 그곳에서 고즈넉하게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고 드론의 기계음으로 뒤범벅이 된 전장 한복판에서 스러져가고 있는 것이다. 수도 키이우를 벗어나 한적한 마을이나 지방 소도시에 가면 남편이나 자식, 손주들을 전장에 보낸 사람들을 더 자주 만나게 된다.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은 가족 전체가 온 몸으로 전쟁의 비극을 맞닥뜨린다. - p.45


귀환병들은 허리를 굽혀 사진을 자세히 쳐다보고 가급적이면 어떤 말이라도 하려고 애를 써본다. 간혹 어떤 귀환병들은 실종자 가족들이 들고 있는 사진 속의 주인공을 알아보고 어디서 함께 싸웠는지, 실종되었다면 어디로 끌려갔을 것이라고 얘기해 주기도 한다. 가족과 관련된 아무런 정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고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다. 곳곳에 비통함과 울음 소리가 가득하다. 함께 따라온 어린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우크라이나 깃발을 펼치고 우크라이나어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훗날 이 아이들이 자라서 돌아오지 않은 아빠를 기다렸던 이 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또 어떤 상흔으로 간직하게 될지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도 먹먹할 수밖에 없다. - p.89


그러나 우크라이나인들에 대한 연민을 떠나서 우리가 정말로 주목할 부분은 이 전쟁이 우크라이나의 일상만 바꾸어놓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책의 2부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보여준 최초의 '드론전쟁'이다. 1991년 걸프전에서 미군이 순항미사일과 스텔스 전투기같은 최첨단 병기와 고도로 훈련된 병사들을 결합시킨 기동전으로 이라크군을 단숨에 분쇄함으로서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면 이번전쟁의 주인공은 우크라이나군의 드론들이다. 전쟁 초반에만 해도 서방을 향해 무기를 달라며 애걸했던 우크라이나는 서방의 원조에만 의존하는 대신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무기를 만들어냈다. 이점이 미국에만 매달리다가 폭망한 남베트남이나 아프간과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하늘에서 쏜살처럼 날아오는 드론들은 러시아군의 기갑부대들을 괴멸시키고 이제는 모스크바 상공까지 위협하여 푸틴에게 잠 못 드는 밤을 선사하고 있다. 엊그제에는 독일에서 열린 미국과 나토 동맹국 간의 '컴파인드 리졸브(Combined Resolve)'훈련에서 우크라이나 드론부대가 미 기갑부대를 일방적으로 쓸어버렸다는 뉴스 기사가 떴더라. 물론 어디까지나 가상 훈련이며 미군이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니기에 '천지이변'이라도 일어난 양 호들갑을 떠는 국내 언론들의 행태는 걸러 읽어야겠지만 전쟁 이전이라면 우크라이나군이 미군을 이기는 것은 결단코 상상할 수 없다는 점에서 틀린 말도 아니랄까.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드론만큼이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로봇이다. 푸틴이 보이스 피싱으로 멋 모르는 외국인들을 낚아서 용병으로 쓰거나 심지어 김정은에게 손을 벌여서 북한군으로 머릿수를 채움으로서 체면 깎이는 꽁수를 부린다면 그런 방법을 쓸 수 없는 우크라이나군은 로봇으로 대체하고 있다. 심지어 로봇이 러시아군 진지를 점령하고 인간 병사들을 포로로 잡아서 세상을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아직은 드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조종하지만 요근래 급성장하는 AI가 대체하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터미네이터가 현실화되는 것이다. 히틀러의 야망이 인류로 하여금 핵무기라는 금단의 무기에 손대게 했다면 푸틴이 또 다른 금단의 사슬을 끊게 만든 셈이다. 우크라이나군의 독특한 실적 보상도 주목할 부분이다. 구태의연한 관료주의에서 벗어나 전과를 올릴 때마다 포인트를 지급하여 필요한 무기와 물자를 쇼핑몰에서 직접 주문하고 순위를 매겨서 부대간의 경쟁을 유도한다. 뇌굳은 기성세대가 흉내내지 못할 MZ세대다운 유연한 발상이다. 바깥 세상에서는 전쟁을 게임화한다며 윤리가 어쩌구한다지만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니 말이다.

드론 조종사 훈련장은 축구장 크기의 콘크리트 건물 안이었는데 여기서 야구를 해도 홈런을 날릴 수 있을 만큼 높이도 대단했다. 이 안에는 각종 장애물들이 있었는데 다양한 크기의 원형, 정사각형 구조물들이 주를 이뤘다. 조종사들이 드론을 이 구조물을 피하거나 안을 통과시키는 등 자유자재로 다루는 훈련을 받고 있었다. 기둥을 돌아서 숨어 있는 표적을 식별하고 공격하거나 땅을 파놓은 참호 같은 곳 안으로 들어가 드론이 부딪히거나 추락하지 않도록 섬세하게 조종하는 훈련도 이뤄지고 있었다. - p.119


일부 드론에서 촬영된 영상에서는 러시아의 전략폭격기와 공중조기경보통제기의 기체날개와 연료탱크 등 취약지점이 정밀 공격을 받아 화염이 치솟는 모습이 생생히 담겼다. 배터리로 움직이는 드론이 갈 수 있는 거리의 제약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주파수나 통신교란 등 전파방해도 피하면서 전략 목표를 타격한 일대 사건이었다. 위성 사진을 통해서도 지상에 있는 러시아 전략 폭격기들이 드론 공격으로 불에 탄 흔적이 선명하게 확인되면서 전 세계 모든 나라의 지상 활주로에 있는 항공기들이 이제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 역시 입증되는 사건이었다. - p.127


세상은 그때까지도 드론의 진가에 대해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러우전쟁이 발발하고 러시아의 전차부대가 줄줄이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무력화되는 것을 본 뒤에야 깨닫게 된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장은 현대전에서 대규모 기갑전력의 기동을 보기 힘들게 된 첫번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전차들이 드론을 탐지하고 대항하는 호위 전력 없이 움직였다가는 하늘에서 갑자기 나타는 드론의 손쉬운 표적이 되어 순식간에 파괴된다. - p.143


3부와 4부는 갈수록 각자도생으로 치닫는 새로운 국제 질서에 대한 얘기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도 미국 패권 시대는 내리막길이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층 가속시켰다는 것. 푸틴이 2008년 조지아 침공 때처럼 제한전이 아니라 아예 우크라이나를 먹겠다며 덤빈 것 자체가 미국의 이빨이 무뎌졌다고 판단한 결과이다. 실제로 바이든 행정부는 러시아를 제지할 엄두도 못낸 채 젤렌스키더러 탈출을 종용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러시아군의 전진을 막은 것은 미국의 개입이 아니라 스스로 총을 잡고 일어선 우크라이나인들이었고 국민들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맹세한 젤렌스키의 용기였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강대국들이라고 해서 약소국의 운명을 멋대로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과 약소국들 입장에서는 강대국들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존재이며 결국 내 나라의 운명은 나의 선택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했다. 너무 당연하면서도 쉽게 망각하는 진리 말이다. 저자는 '우크라이나 임팩트'가 흑해와 중동을 넘어서 우리네 세상을 어디까지 바꾸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조지아는 러우전쟁을 자국의 안보 위기로 규정하고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이를 극복할 다양한 방법을 고민했다. 단순히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조심스러운 행보만으로는 부족해 보였다. 미국이나 나토 역시 위기 시 조지아 문제에 적극 개입하도록 하려면 조지아의 전략적 가치가 더 커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유럽으로 가는 주요 에너지 수송로의 허브가 되는 것이었다. 이 전략이 성공한다면 조지아와 유럽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윈원 전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p.167


튀르키예가 해협을 봉쇄하지 않고 바닷길을 러시아에 활짝 열어주었다면 러시아는 북해함대와 발틱함대에서 최신예 군함과 잠수함을 파견하여 흑해를 완전히 장악한 뒤 우크라이나의 해상 곡물 수출을 차단하고 남부 해안을 초토화시켰을지 모른다. 하지만 해협의 수문장 역할을 톡톡이 해낸 탓에 튀르키예는 나토의 강력한 '동쪽 방패'라는 사실이 깊이 각인되었다. 미국은 F-35는 주지 않았지만 튀르키예의 F-16 전투기 현대화 사업을 지원하기로 하고 신형 기체 판매도 승인했다. - p.188


2026년에 시작된 중동 전쟁은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시작된 나비효과의 결과물이다. 이를 정리해보면 이렇다. 러우전쟁으로 러시아의 국력이 소진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중동 거점인 시리아에 대한 지원이 약화되었다. 그 결과 아사드 정권이 붕괴했다. 반군이 집권했지만 시리아 내 힘의 공백이 생기고 러시아가 구축한 방공망은 무력화되었다. 이스라엘이 이란 공격의 '기회의 창'을 확보한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이란 본토를 사상 처음으로 직접 공격했다. 대리인을 내세운 그림자 전쟁이 끝난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8개월 만에 전면전이 발발했다. 미국도 개입하고 이란이 중동 내 미군 기지를 미사일 공격하여 전장은 중동 전역으로 확대했다. - p.213


폴란드가 추진 중인 바르바라 프로젝트는 4킬로미터 상공에 레이더를 띄워 반경 300킬로미터 범위를 감시하며 미사일과 드론을 포착해 요격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일종의 거대한 기구에 레이더를 장착하는 방식의 이 응용 레이더 시스템은 산이나 건물 등 장애물과 사각지대를 이용해 은밀히 날아오는 미사일과 드론을 포착할 수 있다. 실전 배치가 완료되면 폴란드는 동북부 국경지대는 물론이고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벨라루스 국경지대 깊숙한 곳까지 실시간으로 들여다보는 눈을 갖게 되는 것이다. - p.224


러시아를 향한 경계심은 이 나라 지식인들에게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라트비아의 사회 지도층은 러우전쟁 이전 러시아가 나토의 동진을 공개적으로 경고했던 것을 상기하면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경고를 과소평가했다는 자성도 나오고 있다. 상대방의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바람에 침공에 대비한 어떤 대비책도 논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p.255


러시아와 가장 긴 국경선으로 맞댄 핀란드가 나토에 합류함에 따라 북극해에서 발트해를 지나 지중해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철의 장막'이 완성되었다. 러시아로서는 지난 냉전 시대 철의 장막보다 더 길고 촘촘한 새로운 철의 장막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푸틴이 서방 세계를 향해 또다시 '러시아의 안전을 보장하라'고 외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 p.278


미국이 유럽의 안보 전선에서 사실상 후퇴하면서 '이제 유럽은 유럽 스스로 지켜라'라는 강력한 신호를 보내자 유럽에선 핵전쟁은 물론, 이로 인한 초대형 재난이 닥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이제 미국이 주둔 미군 병력의 감축 등 추가적인 조치를 본격화한다면 유럽 내 위기감은 올라가고 혼란은 더 심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 p.302


마지막장인 5부는 다름아닌 한반도에서의 '우크라이나 임팩트'에 대한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머나먼 세상의 얘기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2024년 6월 18일 푸틴은 북한을 전격 방문했다. 유엔이 지정한 테러 국가이자 구 소련 붕괴 이후 사실상 방치했던 나라를 몇 십년 만에 찾은 것이다.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부분은 그 자리에서 북러 군사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미국이나 우리가 김정은 체제를 흔들거나 북한을 상대로 무력 행사를 한다면 러시아에 대한 공격으로 여기고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는 것이다. 1990년 한러 수교 이후 북한을 고립시키기 위한 우리의 '북방외교'가 한순간에 허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북한 또한 그 댓가로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고 푸틴은 이들을 총알받이로 삼아 쿠르스크를 되찾았다. 저자는 여기에 중국까지 끼어들어 북중러가 전에 없이 단단히 결속하고 있음을 경고한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탄약과 포탄이 부족해진 푸틴은 북한에 손을 벌리는 신세가 되었고 결국 폐기했던 북러 군사동맹을 복원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자동 군사개입 조항이 명기된 새로운 동맹조약은 그 자체로서 강력한 힘을 지닌다. 러시아는 북한과 조약 체결 이후 "한국이 북한을 침공할 리 없기 때문에 북러 조약 4조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밝혔다. 러시아가 이런 황당한 설명을 늘어놓게 된 안팎의 배경을 상세히 이해하려면 시간이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 p.333


분명한 것은 이미 동유럽 지역 차원의 분쟁을 넘어 중동을 뒤흔든 전쟁의 여파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어떤 결말로 끝날지는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분단으로 길이 끊어지고 높아지는 철조망을 눈앞에서 지켜봤던 한반도로서는 지금 유럽이 던지는 질문들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이다.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과연 무엇인지, 대한민국은 답을 준비해야 한다. - p.342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지구라는 좁은 세계에 살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라고 해서 우리와는 상관없다며 태평스럽게 강 건너 불구경할 수 없다는 얘기이다. 당장 트럼프가 이란을 상대로 불장난을 한 덕분에 기름값이 폭증하고 우리 일상 생활에 여파를 주지 않던가. 우리네 세상은 급변하는데 여전히 작디작은 한반도에 갇혀서 국민들 앞에서 소모적인 정쟁에만 열을 올리며 제 밥그릇 지키기에만 여념이 없는 것이 대한민국 높으신 분들의 한결같은 모습이다. 이들이 둔감하다기보다 워낙 세상 바뀌는 속도가 빠르기에 인간의 두뇌가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긴 정치인들을 탓하기 앞서 우리같은 소시민들의 관심사 또한 국내 방산업체들이 전쟁에 편승하여 어떤 수혜를 보고 그래서 내 주식이 얼마나 재미를 보는가이지 더 복잡한 차원의 얘기가 아니니까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진화되어 있다.

한편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시사한다. 역사는 언제나 강대국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인들에 의해 수렁에 빠진 푸틴은 그 돌파구를 북한에게서 찾았다. 김정은은 자신의 존재감을 처음으로 장거리 미사일이나 핵실험같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방법으로 세상에 확실히 각인시켰다. 정작 트럼프는 자신이 백악관에 재입성하면 24시간 내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겠다고 큰소리 친 것이 무색하게도 전쟁 종식은 커녕 자신이 푸틴과 똑같은 수렁에 빠진 꼴이 되었다. 올초 출간한 <약소국의 제2차 세계대전사>에서는 약소국은 강대국들이 만든 국제질서에 순응하는 피동적인 존재가 아니며, 때로는 약소국이 강대국의 운명을 휘두르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운명의 주체로서 우리 자신의 의지이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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