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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 - 미국은 왜 실패할 전쟁에 빠져들었는가
제프리 와우로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6년 5월
평점 :
입만 열면 미국과의 혈맹을 강조하는 우리로서는 섭섭하지만 오늘날 미국인들에게 한국전쟁은 아예 잊혀졌다고 할 수는 없어도 극동의 오지에서 벌어진 지루하고 재미없는 싸움으로 여기는 것은 분명하다. 할리우드에서는 한국전쟁을 소재로 하는 영화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비교적 최근인 2022년에 장진호 전투를 배경으로 하는 <디보션(Devotion)>라는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장진호 전투보다 미 공군 최초의 흑인 조종사였던 제시 브라운(Jesse LeRoy Brown) 소위에게 포커스를 맞춘 것이라. 게다가 블록버스터 영화도 아닐 뿐더러 평이한 내용 탓에 흥행에서 완전 폭망했다고. 솔직히 내가 봐도 따분하더라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없는 장군 중 한 사람인 맥아더와 엮인 탓에 논란이 일어날 게 뻔한 인천상륙작전은 그렇다쳐도 미 해병대가 10배의 중공군을 상대로 극적인 승리를 거둔 장진호 전투는 충분히 영화화할만 것인데 말이다. 할리우드의 이러한 홀대는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전쟁 액션 영화들을 끝없이 만드는 대조적이다. 갈수록 살기 팍팍한 미국인들로서는 자기네 리즈 시절이다보니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모양. "그때가 좋았지"

심지어 <트랜스포머5>에서는 미군이 외계인 로봇들과 편먹고 처칠 본가이자 나치 소굴이 된 블레넘 궁전을 터는 장면이 나오기도. 그러고보니 캡틴 아메리카와 울버린, 원더우먼도 2차대전 참전용사라던가. 이런 미친 괴물들과 맞짱뜬 독일군이 더 대단하달지.
제2차 세계대전이 두고두고 새겨야 할 영광의 순간이고 한국전쟁이 존재감 없는 무승부전이었다면, 베트남전쟁은 미국 건국 이래 처음으로 맛 본 악몽일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싸움에 졌다는 문제가 아니었다. 자기 힘에 도취된 무책임한 정치인들이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약자를 괴롭힌 부도덕하고 명분없는 전쟁이었고 미국 역사의 오점이었다. 민간인들을 상대로 과거 그들의 아버지들이 맞서 싸웠던 나치나 일본군과 다를바 없는 전쟁범죄가 광범위하게 자행되었으며 수많은 참전 군인들이 PTSD에 시달려야 했다. 우리를 비롯하여 미국을 믿고 자국 군대를 보냈던 동맹국들 역시 지금까지도 파병의 정당성을 놓고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베트남전쟁 초반 아이드랑 전투에서 활약한 미 제1기병사단의 대대장 할 무어 중령을 다룬 <위워 솔저스>에서는 멜 깁슨이 특유의 마초 분위기와 프로파간다적인 국뽕을 한껏 보여주지만 약 빨기 전의 찰리 신이 주연을 맡은 <플래툰>이나 <지옥의 묵시록>, <굿모닝 베트남> 등 베트남전쟁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은 대개 암울하고 부정적이다. 실버스타 스탤론의 <람보> 또한 시리즈를 더할수록 황당무계한 인간병기의 B급 액션물로 변질하지만 주지사님의 <코만도>와는 달리 원래 이 영화는 베트남에서 돌아온 재향군인의 PTSD와 부적응을 다룬 반전 영화이다. 그리고 이것이 미국에게 결코 자랑스럽지 못한 베트남전쟁의 기억이라는 얘기이다.

엑스맨의 대표적인 흑역사로 통하는 <엑스맨의 탄생>에서는 울버린 형제가 불사신으로 살면서 남북전쟁부터 베트남전쟁까지 미국의 모든 전쟁에 모습을 드러낸다. 게다가 베트남에서는 민간인 학살과 강간, 상관 살해까지. 이 양반들 6.25에도 참전하지 않았을지.
이후의 미국에게 베트남전의 악몽은 끊임없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후임자들은 덩치크고 비효율적이었던 미군을 뿌리부터 바꾸었고 억지로 끌려온 오합지졸 신병 대신 잘 훈련된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새로운 미군은 걸프전에서 이라크군을 일방적으로 아작내어 베트남전쟁의 트라우마를 털어냈다. 부시는 이참에 후세인 정권을 끝장내라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쫓아내는 선에서 만족하여 또다시 수렁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반성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로부터 정치는 배웠으되 절제를 배우지 못한 아들 부시는 911테러를 빌미로 아프간과 이라크에 발을 들였고 결과는 제2의 베트남전쟁이었다. 베트남에서 벌어진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2021년 8월 15일 카불 함락은 반 세기 전 사이공의 데자뷰였다. 전직 미국 버클리 대학교수이자 기업가 출신인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탈레반이 카불로 진격하자 과거 남베트남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라를 버리고 가족과 재산만 챙겨서 잽싸게 달아났다. 미국은 아프간에서 또 한번 자신의 힘을 쓸데없이 낭비하고 위신만 실추한 채 불명예스럽게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정치인들이 책임을 통감하는 대신 궤변과 핑계를 늘어놓으며 자신들을 합리화한 것도 50년 전과 똑같았다. 몇달 전에는 강박적인 관심 종자인 트럼프가 이란을 상대로 벌집을 건드려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수렁에 빠뜨렸다.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의 말마따나 되풀이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어리석음이랄까.

역사 인문 전문 출판사인 책과 함께에서 지난 5월에 나온 신작도서인 <베트남전쟁>은 국내에서는 보기드문 베트남전쟁 통사이다. 여기에는 단순히 주요 전투의 나열 만이 아니라 700여 페이지에 걸쳐 미국이 베트남에서 장장 10년에 걸쳐서 그토록 많은 돈과 물자, 인명을 소모하고도 결국에는 두 손 들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전모를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늘날 푸틴이 삽질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겹쳐 보이기도. 저자는 명문 예일대 출신의 미국 노스텍사스대학교 군사사 교수이자 TV 역사 채널 진행자이기도 한 제프리 와우로(Geoffrey Wawro). 보불전쟁, 보오전쟁, 제1차 세계대전 등 주로 근현대 전쟁사가 전문인 모양. 그 중에서도 이 책은 2024년에 나온 그의 가장 따끈따끈한 최신작이라고.

뭔가 캐빈 코스티너 닮은 둣한 이 핸섬한 아재가 저자인 제프리 와우로 교수. 뉴욕타임즈는 그의 신작인 <베트남전쟁>을 가리켜 "베트남 전쟁에 있어서 최고의 통사이자 기본서가 될 것"이라고 극찬했다.
이 책은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영혼까지 털린 채 인도차이나를 떠난 프랑스에 이어서 아이젠하워가 바통을 넘겨받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는 디엔비엔푸 전투 두달 뒤 체결된 제네바 협정에서 북위 17도를 경계로 베트남을 임시적으로 분단하되 2년 뒤에 전국 총선거를 실시하여 재통일키로 한 약속을 깨뜨리기로 했다. 7년 전 한반도에서는 소련이 생깠다면 이번에는 미국이 써먹은 꼴이었다. 어차피 남쪽의 3류 지도자들로서는 북쪽의 국민 영웅인 호치민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결코 프랑스가 손 떼고 간 전쟁을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국내 반공여론의 비난을 면피할 만큼의 생색내기만 하겠다는 속편한 계산이었다. 그로 인해 어느 정도의 비용을 치를 것이며 북베트남이 순순히 받아들일지, 남베트남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민도 없었다. 히틀러가 북아프리카에서 죽을 쑤는 무능한 동맹자 무솔리니를 구하겠답시고 살짝 발을 들였다가 이탈리아의 전쟁 전체를 떠맡아야 했던 것을 되풀이한 셈이었고 후임자들에게는 지옥문을 여는 순간이기도 했다. 불과 10년 전 나치를 상대로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조차 아시아에 대해서는 이토록 안이했다는 것이 놀랍다랄까.
아이젠하워는 미군 투입 방안에서는 물러서기는 했지만, 위스콘신주 상원의원 조지프 매키시 주변에 모여든 빨갱이 탄압 반공주의자들을 우려하여 남베트남에 군사 경제 원조를 쏟아부어 자신이 공산주의 위협을 진지하게 여긴다는 것을 입증코자 했다. 그는 조지프 매카시에게 트집 잡히지 않을 만큼만 남베트남을 지원하려고 했고 과하게 지원할 생각은 없었다. 남베트남은 부채가 너무 많았기에 아이젠하워는 설령 그곳이 함락된다고 해도 얽매이지 않으려고 했다. - p.28
1961년 취임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아이젠하워로부터 어떤 상황을 넘겨받았는지 알고 경악했다. 1950년대에 미국 뉴저지주 레이크우드에 있는 메르놀 신학대학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에게 자신을 유망한 활동가로 선전했던 지엠은 당시 남베트남에서 잘 풀리지 않고 있었다. 지엠은 인기 없고 독신을 고수하며 예의범절에 엄격한 독불장군으로 자기 주변을 가족들과 측근들로 에워쌌다. 그들 대다수는 부패와 폭정으로 빠져들었다. - p.32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호치민보다 11살 아래였던 응오딘지엠은 명문 집안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는 프랑스 식민지 관료를 지내기도 했으나 나중에는 독립운동에 뛰어들면서 나름대로의 명망을 얻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정치적 기반은 호치민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며 무장 투쟁의 경험도 없었고 휘하에 호치민의 베트민과 같은 무력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을 무찌르고 베트남을 독립시킨 것은 호치민 군대이지 그가 아니었다. 어쨌든 남베트남을 통틀어 그나마 호치민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1960년 1월 15일 또 다른 반공 거두인 타이완의 장제스를 방문한 응오딘지엠. 미국이 보기에 이승만, 장제스, 응오딘지엠은 '아시아의 부패 독재자 삼인방'이자 골칫거리였지만 이들은 그저 미국에 빌붙어 단물을 빠는 기생충이 아니라 강력한 지도력을 갖춘 민족주의 지도자였다. 응오딘지엠 치하의 혼란상은 말기적 증세보다 한 나라가 탄생 과정에서 겪는 불가피한 진통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참아낼 인내심이 없는 쪽은 미국이었고 고결한 자신들의 위상에 흠집이라는 이유로 제거함으로서 남베트남에 더 큰 혼란을 야기했다.
아마도 300년 전 쯤이었다면 한 왕조의 창시자로서 그런대로 무난하게 나라를 이끌었을지도 모르지만 하필이면 상대가 농민들을 선동하는데 익숙하고 산악지대의 싸움에 이골이 난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응오딘지엠은 서구식 교육을 받고 독실한 기독교도였음에도 정작 그의 본질은 봉건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한계였다. 20세기식 게릴라전을 구사하면서 사정없이 파고드는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캐캐묵은 방식으로 맞섰던 그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하자 미국을 붙잡고 매달렸지만 자충수가 되었다. 미국은 갈수록 성가시고 부담스러웠던 응오딘지엠을 잘라내기로 결심하고 남베트남 장군들을 부추겨 쿠데타를 일으켰다. 치명적인 실수였다. 남베트남은 인기 없는 독재자라고는 하지만 군부를 억누르고 북쪽과의 전쟁을 이어나갈 수 있는 유일한 구심점을 잃었고 권력을 맛본 장군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자기들끼리 싸우는데 열을 올렸다. 그러자 미국은 더 큰 실수를 저지르기로 했다. 아직 북베트남이 충분히 강하지 않을 때 남베트남의 개혁을 압박하거나 남베트남군을 싸울 수 있는 군대로 만드는 대신 자신들이 직접 전쟁을 떠맡은 것이었다. 그것은 한 나라를 망친 것에 대한 속죄도, 책임감도, 하물며 미국 자신의 국익 때문도 아니었다. 자신들이 경솔했음을 인정할 수 없다는 무책임한 일부 권력자들의 아집과 체면 치례를 위해서였다.
저자는 1964년 8월 2일 통킹만 사건을 시작으로 존슨 행정부가 본격적인 개입에 나서는 것부터 1973년 1월 27일 헨리 키신저가 사실상 남베트남의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파리 평화협정에 서명하고 2년 뒤 사이공이 함락되기까지 10여년 동안 베트남에서 미국이 벌인 전쟁을 신랄하게 파헤친다. 그것은 목표없는 전쟁이었고 설사 이긴다고 한들 무엇을 얻을지도 불분명했다. 애초에 개입을 결정한 존슨부터 아무런 열의가 없었다. 그는 베트남전쟁을 원치 않았지만 남베트남이 붕괴되면 미국의 이미지가 실추되고 따라서 다음 대선에 좋을 것이 없다는 지극히 타산적인 이유로 뛰어들었다. 장군들 역시 개입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칼자루를 쥔 대통령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마지못해 찬성했다. 미국인들에게 베트남전쟁이 머나먼 오지에서 벌이는 심심풀이 막간극에 지나지 않는다면 북베트남의 목표는 훨씬 분명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베트남을 무너뜨리고 통일을 실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한 어떤 댓가와 희생조차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런 적을 상대로 미국이 명분이나 전략도 없이 자신의 판돈이 넉넉하다는 것만 믿고 덤벼서는 이길 수 없는 건 당연했다. 그렇게 살짝 발만 걸칠 요량으로 시작된 전쟁은 남베트남을 난장판으로 만들었고 스스로도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미국의 가식과 위선, 무분별한 작전은 책을 읽는 내내 분노를 자아낸다.
합참은 존슨에게 "스스로 정한 제한을 제쳐두고" "더 과감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합참은 북베트남의 모든 전력 거점을 타격하는 초토화 항공전역을 원했다. 하지만 존슨은 중국이 개입하거나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 그런 조치를 승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맥나마라는 합참이 밀어붙이는 '강한 타격' 대신 '점진적 압박'을 선택했다. 국방장관은 대통령에게 장성들이 점진적 압박을 '수용가능한' 전략으로 여긴다고 거짓으로 단언했다. - p.51
미군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적을 발견하면 우월한 전술과 기술로 섬멸할 계획이었다. 이름하여 공중기동작전이었다. 전쟁의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야전군이 수천 대의 헬기를 전술적 이동의 주된 방법으로 사용할 예정이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싸우기로 결심한 무렵 이 전쟁의 아이콘이 전투에 도입되었다. 바로 벨 사의 UH-1 이로쿼이 다목적 헬리콥터, '휴이'라는 별명으로 더 널리 알려진 헬기였다. - p.119
1966년 1월 연두교서에서 존슨은 베트남전이 끝없이 이어질 수도 있다고 밝혔다. "며칠이 몇 달이 될 수도 있고 몇 달이 몇 년이 될 수도 있지만 공격성이 우리에게 전투를 명령하는 한 우리는 계속 머무를 것입니다." 연두교서 이후 인터뷰에서 존슨은 자신이 사태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으며 전쟁에서 이기거나 빠져나올 수 있는 계획이 없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말았다. "얼마나 오래 갈지 얼마나 들지 누가 알겠습니까."라고 무심코 말해버렸다. 그러더니 잠시 말을 멈추었다고 이렇게 덧붙였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옳은가 아니면 그른가입니다. 나는 우리가 옳다고 믿습니다." 달리 말하면 전략은 변함이 없었다. 그것은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위선과 뒤섞인 폭력이었다. - p.173
베트남전쟁에서 낭비, 목적 없는 활동, 바보짓이 점점 늘어난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웠다. 웨스트모얼랜드는 씩씩한 플라이급 권투 선수처럼 비어 있는 링을 춤추듯 돌아다니면서 펀치를 날렸다. 다만 그런 펀치를 위협으로 여길 상대 선수가 없었다. 상대는 로프 사이로 빠져나갔다가 웨스트모얼랜드가 지쳐서 자기 코너로 돌아가 땀을 닦고 다음번 급습을 준비할 때만 다시 나타났다. - p.247
그동안 웨스트모얼랜드의 승리 이론은 미군의 기동성과 화력을 이용하는 '소모전략'으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주력 부대들을 격멸한다는 것이었다. 이 이론과 전략은 너무나 명백하게 실패하고 있었다. 적의 침투가 줄기는 커녕 도리어 늘고 있었다. 북베트남군은 1967년에 매달 평균 8500명을 남베트남에 침투시켰는데 이 수치가 연말에 급증하고 1968에 들면 두배인 2만 350명으로 한층 늘어날 터였다. 소모 전략은 적이 사상자를 전원 교체하고 새로운 부대를 추가하고 남베트남으로 더 깊이 밀고 들어옴에 따라 좌초하는 중이었다. - p.280
미라이 학살 소식, 그리고 인근 미케 촌락에서 제3보병연대 제4대대의 1개 중대가 최소 90명의 민간인을 더 학살했다는 소식은 미군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미 잔혹행위가 흔한 일이었고(보병들은 마주치는 마을 주민들을 강간하거나 학대하거나 살해했다) 그에 대한 소문을 보통 상부에서 은폐하긴 했지만 이번 학살은 은폐하기에 너무 큰 규모였다. 사이공의 한 장교는 '핑크빌 학살'에 대해 거의 즉각 들었고 육군이 학살을 1년 넘게 쉬쉬할 수 있었다는 데 '놀랐다'고 회상했다. - p.429
임기 막판에 웨스트모얼랜드는 전시 동안 자신이 저지른 무모한 행위에 대한 변명문을 작성하느라 바빴다. 그는 "어떤 미군 사령관이든 잡 장군만큼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면 하룻밤 사이에 해임되었을 것이다."라고 투덜댔으며 이로써 본인이 이끈 전쟁의 성격을 여전히 오판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평판을 만회하려는 웨스트모얼랜드의 열의는 끝이 없었다. 훗날 그는 해병대의 케산 역사서에 서문을 쓰기로 하고 이 작전의 가치에 대한 이기적인 허튼 소리로 지면을 채웠다. 마치 변호사처럼 지적한 수정 사항은 그가 북베트남에게 속은 이후 자신의 흔적을 감추려고 얼마나 열을 올렸는지 드러낸다. "내가 병력을 '덜 결정적인' 지역이 아니라 '덜 압박받는' 지역에서 데려왔다고 수정해 주십시오." - p.470
닉슨은 1968년에 본인의 당선을 위해 강화 절차에 훼방을 놓았다. 그때 닉슨은 미국에 더 유리한 조건으로 하노이에 종전을 강요하는 일은 자신이 존슨보다 더 잘할 수 있다면서 강해 방해를 정당화했다. 하지만 1969년에 제37대 대통령은 유권자에게 약속했던 강화 교섭을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 p.567
베트남에서 복무한 미군 병사 중 4분의 3이상은 노동계급이나 저소득 가정 출신이었다. 전문직이나 경영직, 기술직 부모를 둔 병사는 23퍼센트에 불과했다. 부유층의 아들은 학교에 머물거나 꾀병을 부리는 수법으로 징병 유예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는 미래의 대통령 조지 부시처럼 예일 대학을 졸업해 학생 징병 유예권을 잃기 2주 전인 1968년 5월에 마치 마법처럼 주방위군에 임관함으로서 베트남 복무를 피했다. 그날 부시와 함께 또 한명의 고위층인 텍사스 상원의원 로이드 벤슨의 아들도 징집을 피하기 위해 같은 주 공군 부대에 비집고 들어갔다. - p.596
5개 사단의 5만 명으로 신속히 병력을 증원한 북베트남군을 퇴각하기 시작한 남베트남 지상군을 타격했다. 남베트남군은 온갖 실책을 저질렀다. 공중 엄호, 정찰, 측면 보호, 후위 전투를 거의 않았다. 무턱대고 후진하다가 번번히 매복 공격을 당했다. 손질과 패주에 가속이 붙는 가운데 어느 미군 조종사는 "속으로 이 모든 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지 생각했다." - p.645
p.404에서는 존슨 대통령이 참모들을 향해 "어째서 북베트남인이 남베트남인보다 훨씬 더 결연하게 그토록 잘 싸우는건가"라면서 절망을 토로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것은 모든 미국인들이 품었을 핵심질문이자 핵심을 비켜난 질문이기도 하다. 과연 그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몰랐을까. 베트남전쟁의 딜레마는 미국인들에게 미국의 전쟁임과 동시에 미국의 전쟁이 아니었고 남베트남인들에게도 남베트남의 전쟁이면서 자신들의 전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존슨은 말로만 남베트남을 동맹국이라고 부르면서 평화와 안정을 위해 싸운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방식은 20세기 초반 필리핀 식민지에서 현지 독립군을 상대로 벌인 토벌전이었다.
남베트남에서 미군 총사령관이었던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전쟁의 프로페셔널이 아니라 군복 입은 공무원이었고 전쟁을 모르는 책상물림 장군이었다. 그는 흔히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착한 베트콩은 죽은 베트콩"이 아니라 "죽은 베트남인들이 나쁜 베트콩"이라는 식이었다. 마치 대로에서 눈을 감고 칼을 마구 휘두르는 식으로 벌였던 미군의 작전은 무분별한 학살극이었고 칼을 맞아 죽은 사람이 베트콩이라는 게 웨스트모얼랜드가 말하는 전과였다. 이 전쟁을 통틀어 유일하게 자신들의 전쟁이었던 북베트남이 미군을 연구하고 꾸준히 약점을 찾아냈던 반면, 웨스트모얼랜드는 자신의 방식을 끝까지 고집했다. 그러면서 전과를 과장하고 허위 보고를 일삼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길 것이며 남베트남인들이 미국의 전쟁에 열광하기를 바란다는 말인가. 하지만 미국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자성하거나 바로잡는 대신 애초에 이런 싸움에 끼어든 것이 잘못이라며 난장판을 내팽게치고 떠나는 쪽을 선택했다. 남은 자들이 알아서 치울 몫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그렇게 전쟁은 끝났다. 베트남전쟁 동안 단 한발의 포탄이 떨어질 일도 없었던 미국은 5만명의 전사자와 막대한 전비, 국론 분열, 오만한 자존심에 처음으로 금이 간 정도라면 남베트남인들은 나라를 잃었다. 이들은 통일 베트남에서 2등 국민으로 전락했고 전체 인구의 1/10이 공산정권의 보복을 피해 해외로 탈출했다.
1973년 1월 초 미국 양원은 자국 전쟁포로들이 송환되자마자 베트남 전쟁의 자금 지원을 전면 중단한다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서방 연합국은 11일간의 항공 전역과 민간인 사상자 수천 명에 경악했다. 라인베커II가 끝난 뒤 파리로 날아간 키신저는 1월 27일 마침내 파리 강화협정에 서명함으로써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종료했다. 닉슨은 "전쟁을 종결해 베트남과 동남아에 명예로운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자랑했다. 지난 5년 간 250차례 4자 회의를 통해 줄다리기를 벌인 녹샌 모직천이 덮인 커다란 테이블 주변에는 축하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두 차례 따로따로 진행된 서명식은 한 목격자가 보기에 "보슬비 내리는 잿빛 파리 하늘이 침울한" 것 만큼이나 "냉담하고 음울한" 분위기였다. - p.707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해군기지와 비행장 주면에서 남베트남군 부대들끼리 싸우는 소규모 접전을 지켜보았다. 다낭에서 탈출해 남하한 해병대와 유격대, 그리고 이 지역 본부를 확보하기 위해 사이공에서 파견된 병력 간의 전투였다. 이 부대들은 이제 미국의 원조가 줄었으니 '가난한 자의 전쟁'을 치르라는 티에우의 지시를 따르기는 커녕 오히려 군율을 팽개치고 눈앞의 전리품을 차지하려고 서로 싸웠다. 그들은 피아스터, 달러, 금, 보석, 가보 등 속수무책인 피란민들로부터 약할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전리품으로 챙겼다. - p.727
북베트남군 전차들이 사이공 시내로 진입했고 그 중 한 대가 대통령궁의 출입문을 들이받아 부수었다. AP 통신의 사이공 지국장 조지 에스퍼는 이 행위로 "한 세기에 걸친 서구의 영향이 종언을 고했다."라고 기록했다. 즈엉반민은 라디오로 남베트남군 전체에 오전 10시 24분에 항복하라고 명령했다. 공식적으로 항복하기 위해 대통령궁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즈엉반민은 이미 인민혁명으로 권한이 넘어갔으니 있지도 않은 권한으로 항복할 수는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 P.741
과연 베트남전쟁은 처음부터 실패가 정해진 싸움이었을까. 여기서 내가 그때 이래야 했다, 저래야 했다라고 떠드는 것은 한낱 탁상공론일 뿐더러 미국이 몰라서 생고생한 것도 아닐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웨스트모얼랜드같은 무능한 보신주의자가 아니라 마셜이나 아이젠하워, 브래들리같은 미국 최고의 장군들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또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미군이 힘든 것만큼이나 북베트남에게도 힘든 싸움이었고 실제로 북베트남이 먼저 손을 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분명하다. 누가 그 자리에 있어도 눈앞의 자기 선거에만 눈이 멀고 책임지지 않을 궁리만 하는 지도자 밑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는 점이다. 그보다도 존슨이 하필이면 웨스트모얼랜드같은 인간을 기용하여 제 발등을 찍은 것도 미 육군에 정말로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게 대통령으로서 존슨의 그릇이었을테니 말이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이 책은 오로지 미국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베트남전쟁이다. 정작 전쟁의 또 다른 주역이었던 남베트남인들에 대한 얘기는 없다. 과연 이들은 미국의 아집이 벌여놓은 전쟁에 억지로 휘말린 피동적인 존재이기만 했던가. 저자는 본문 내내 베트남에서 미국은 명분도 없었고 전략도 없었으며 충분한 병력도, 방법도, 의지도 없었다고 강조한다. 물론 결코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전쟁이 남베트남인들에게도 아무런 의미 없는 전쟁이었을까. 남베트남은 처음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저주받은 사생아에 지나지 않았던가. 하지만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 안 되는 사실은 남베트남인들이 상전 노릇하는 미국의 횡포에 분노하고 남베트남의 부패한 군부 정권에 실망했다고 해서 북쪽의 공산주의를 선호하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라는 점이다. 미국이 남베트남에서 저지른 수많은 만행은 분명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원래 전쟁이란 고통스러운 것이며 공산주의 치하에서 기다리고 있을 궁핍과 압제가 그보다 덜 할거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미국의 원조와 자유 무역 덕분에 남베트남인들은 북베트남인들보다 전반적으로 생활 수준이 더 높았다.
어쩌면 남베트남은 살아남을 수도 있었고 스스로 혼란상을 딛고 우리가 그러했듯 '사이공의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남베트남인들이 아니라 미국인들이 고통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쟁 내내 남베트남인들과 괴리되었던 미국은 이 재미없는 전쟁이 갈수록 부담이라는 이유로 아시아는 아시아인들이 지키라며 야반도주했다. 그로 인해 남베트남이 패망하자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할 만큼 했는데 남베트남인들이 싸우지 않은 탓이라며 모든 책임을 떠넘겼다. 하지만 자생할 기회를 줬던가. 애초에 부패하고 무능한 남베트남 정권과 남베트남군의 무기력함은 자연 발생이 아니라 미국이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남베트남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나라를 이끌만한 역량과 강단 있는 민족주의자들을 배척하고 부패하고 인기 없지만 말 잘 듣는 사람을 선호한 것이 미국의 방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베트남군이 퍼주는 것만큼 밥값을 못 한다고 타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렇다고 충분히 퍼준 것도 아니었다. 존슨 행정부 말기에 와서야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를 외치며 남베트남군의 강화에 착수했다지만 프로그램은 졸속이었고 시간은 촉박했다. 어차피 자기네가 떠난 뒤의 일 따위는 알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의 남베트남 대통령궁에 진입하는 북베트남군의 59식 전차. 미군이 철수한 지 불과 2년 1개월 만이었다. 철수하면서 대량의 무기를 남겨놓았던 미국은 남베트남군의 무력한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 무기의 태반은 가져가는게 비용이 더 많이 든다는 이유로 쓰레기 버리듯 투기하고 떠난 것이나 다름없었고 남베트남군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건 당연했다. 그리고 이것이 베트남전쟁 내내 남베트남군과 괴리되어 머리수 채우는 식민지 군대로만 취급했던 미국의 한결같은 방식이었다.
같은 시기 남한과 타이완 또한 미국의 원조에 기댔다고 하지만 이곳에서 싸우는 주체는 엄연히 이들이지 미국이 아니었다. 국공내전에서 남베트남군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장제스 군대는 1949년 10월 진먼다오에서 처음 승리한 이후 1950년대 내내 공산군이 타이완 해협을 넘는 것을 막아냈다. 미군이 나서지 않고도 말이다. 어째서 남베트남군은 그렇지 못했던가. 남한과 타이완 역시 비민주적이고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권위적인 정부가 지배했다. 그럼에도 공산주의 세력은 거의 침투하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는 자신들의 손으로 민주화에 성공했으며 비서구권에서 가장 번영하는 나라가 되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 국가와 남베트남의 운명을 갈랐던가. 이 책에서는 그저 미국인의 시각에서 남베트남이 부패하고 무능하고 타성에 젖은 구제불능의 정권이었다는 뻔하고 단편적인 사실만이 있을 뿐 왜 자립에 성공할 수 없었는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없다. 이것이 반세기가 넘도록 벗어나지 못하는 미국식 베트남전쟁 연구의 한계이자 그 많은 교훈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이 책은 미국의 10년 베트남전쟁을 이해하는데 비할 바 없이 훌륭한 개괄서이다. 다만 지적할 부분은 번역. 사단장을 '사단 사령관', 중화기를 '무거운 화기'를 번역한 것이나, p.470쪽에서는 "웨스트모얼랜드의 후임은 그의 부관인 53세 장군 크레이튼 에이브럼스였다."라고 나오는데 'deputy'는 보좌관을 의미하는 부관(aide)가 아니라 부사령관이다. 둘 다 같은 4성장군인데 영관급이 맡는 부관으로 해석해서야. p.636의 "응우옌쫑루엇 대령의 기갑기동부대"는 '기갑임무부대(Armored Task Force)'가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그보다도 번역 전반이 다소 매끄럽지 못하고 가독성이 떨어지는 느낌. 역자가 문외한도 아니고 <몽유병자들>과 <제3제국사>, <피와 폐허> 등 중량 있는 전쟁사를 여럿 번역한 바 있는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