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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끝낸 전쟁 - 1914년으로 향한 길
마거릿 맥밀런 지음, 허승철 옮김 / 책과함께 / 2025년 7월
평점 :
1908년 10월 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병합을 선언한다. 그 때만 해도 이 결정이 역사를 바꾸어놓게 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1878년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한 뒤 지난 30여년 동안 이곳의 통치자는 오스트리아였기 때문이었다. 유럽의 병자라고 불리던 오스만 제국은 잃어버린 고토를 찾으려고 와신상담은 커녕 여기저기서 균열을 일으키는 제국을 지탱하고 발칸의 꼬꼬마 국가들의 거센 도전에 맞서기에도 벅찬 판국이었다. 이 와중에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었던 불가리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최대 걸림돌이었던 러시아와도 밀실 야합하여 동의를 얻어낸 것을 기회삼아 오스트리아는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공식 병합한 것이었다. 그 대가로 오스만 제국에는 220만 리라의 보상금을 지급키로 했다.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익숙했던 현지 주민들은 순응했고 열강들 역시 묵인했다. 꼭 30년 뒤 벌어질 히틀러의 주데텐란트 병합과는 사정이 달랐다.

딴지를 건 쪽은 따로 있었다. 남쪽의 세르비아였다.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패배한 뒤 거의 5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한 이 소국은 마치 중세에서 타임머신 타고 미래로 슬립한 듯 마냥 국뽕 가득하면서 야심만만한 나라였고 주변국들을 상대로 영토를 확장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이들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세르비아인들이 많이 산다는 이유로 마땅히 자신들이 차지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럼으로서 大세르비아를 실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훨씬 덩치 큰 대국에게도 겁없이 덤빌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치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발칸판이랄까. 그리고 6년 뒤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 중이던 오스트리아 황태자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 부부가 백주대낮에 세르비아 극우파의 테러로 암살당했다.
하지만 이 순간까지도 세계대전이 폭발할 가능성은 없었다. 황태자의 죽음에 충격받은 오스트리아인들이 피의 보복을 외치면서 들고 일어나지도 않았고 다이애나 왕세자비마냥 국제사회의 동정을 얻지도 못했다. 심지어 삼촌이자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조차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자신의 뜻을 거역하고 신분 낮은 여자와 결혼했다는 이유였다. 사라예보 사건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어이없게도 제1차 세계대전의 첫 전투가 벌어진 쪽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프랑스와 독일 국경이었다. 그렇다고 프랑스와 독일이 흑막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1870년 보불전쟁 이후 40여년 동안 두 나라가 철천지 원수이기는 했지만 리벤지전의 제물로서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죽이라고 뒤에서 선동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히틀러에 의해 유럽에 전운이 감돌던 1939년에 비하면 1914년은 훨씬 평화로웠다. 전쟁이 끝난 뒤 승전국들은 모든 전쟁의 책임을 패전 독일에게 떠넘겼지만 독일 카이저 빌헬름 2세는 히틀러도, 알렉산더 대왕도, 칭기즈칸도, 하물며 푸틴도 아니었다. 그는 위대한 정복자를 꿈꾸기에는 유약하고 결단력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실제로 전쟁 내내 군부에 휘둘리다가 전쟁 말기에는 성난 국민들을 피해서 네덜란드로 달아나야 했다.

물건너 애니 <종말의 이제타>에서 독일 제2제국을 모티브로 한 가상국가 게르메니아의 오토 황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지 않아 독일 제국이 폭망하지 않았다는 설정이지만 이쪽은 빌헬름 2세보다는 히틀러가 미대 지망하는 대신 옥좌에 앉았다고 해야 할지.
전쟁이 일어나기까지는 단계가 있다. 국경에서 무력 충돌의 반복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협상과 중재가 실패로 끝나면 동원령이 선언된다. 최종적으로 병력 배치의 완료와 함께 본격적인 침공이 시작된다.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이 그러했고 6.25가 그러했으며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그러했다. 우발적인 싸움이 사생결단의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일은 흔치 않다. 철저히 준비해도 이길까 말까한데 서로 준비도 없이 싸워봐야 에너지 낭비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인도-파키스탄 분쟁을 보더라도 대부분은 첫번째 단계에서 적당히 봉합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제1차 세계대전은 역사상 가장 기묘한 전쟁이었다.
어느 쪽도 원치 않았고 준비되지 않은 싸움이었다. 사라예보 사건부터 오스트리아가 최종적으로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고 독일군이 저지대국가를 침공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폭발하기까지 5주 동안 각국 지도부는 서로의 의중을 살피고 동맹과 참전의 이해득실을 놓고 주판 두들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일부는 별일 아닌 양 여름 휴가를 떠나기도 했다. 빌헬름 2세만 해도 베를린을 비운 채 북해 항해에 나섰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불감증이 인류 최악의 전쟁을 초래하지 않았을까 싶다. 더 중요한 점은 여태껏 본 적 없는 무자비한 살육전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협상도 중재의 노력도 없었다. 한 세대가 완전히 파멸하고 어느 한쪽이 굴복한 뒤에야 비로소 총성은 멈추었다. 패배자는 있었지만 승자는 없었다. 유럽 열강들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뒤늦게 정신 차리고 도대체 우리가 왜 그토록 죽기 살기로 싸웠던 것인지 그들 자신도 궁금하지 않았을까.

인문 역사 전문 출판사인 책과 함께 출판사에서 역덕이라면 주목할 책이 나왔다. <평화를 끝낸 전쟁>은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몽유병자들>과 바바라 터크만 여사의 <8월의 포성>에 이어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상황을 파헤친 또다른 대작이다. 저자인 마그릿 맥밀런 여사는 캐나다 출신의 여류 역사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외할머니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전시 총리였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의 딸이라고. 금수저일세.

마그릿 맥밀런 여사. 이 바닥에서는 보기 드문 여류 역사 학자. 예전에 <전쟁은 인간에게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접한 기억이 있다.
이 책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시작한다. 새로운 세기 첫해에 열린 이 만국박람회는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이라는 말마따나 산업혁명이 한 세기 동안 이룩한 유럽 문명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한 귀퉁이에는 일본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던 대한제국 코너도 있었다고 한다. 조선인들이 아니라 고종의 의뢰를 받은 프랑스인들의 작품이었지만 말이다. 유럽인들에게는 영원하게 이어질 것 같았던 번영과 풍요의 시절이었다. 적어도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겠다고 전쟁이 한창이었던 1800년과는 대조적이었다. 그 평화가 불과 10년 뒤에 끝나고 한 세기 전체가 그토록 파란만장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국박람회는 혁명과 전쟁으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진보와 평화, 번영을 상징하는 한 세기의 종결을 기념하는 적절한 행사로 보였다. 유럽은 19세기에 전쟁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오랜 투쟁이 이어진 18세기나 프랑스 혁명 전쟁과 이후 거의 모든 유럽 국가가 끌려 들어간 나폴레옹 전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19세기에 벌어진 전쟁들은 일반적으로 아주 짧았고 아니면 유럽 땅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식민지 전쟁이었다. - p.43 |
돌아보면 파리만국박람회는 유럽 문명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긴장 국면을 경고하고 있었다. 식민지 전시와 민족적 전시의 과시는 강대국 사이의 경쟁을 암시했다. 독일의 유명한 예술 비평가는 유럽 문명을 선도하는 척 하는 프랑스를 조롱했다. 박람회를 방문한 그는 "프랑스는 다른 나라, 특히 늘 위험한 이웃 나라 영국과 독일에서 상업과 산업이 만들어낸 거대한 변화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 p.65 |
20세기 초반의 유럽은 지난 수백년을 통틀어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로우면서 협력적이었다. 기근도 없었고 정복자도 없었으며 체제 싸움이나 이념 갈등도 없었다. 강대국들은 경쟁과 갈등을 벌이면서도 대화를 중단하지 않았다. 프랑스와 독일조차 점진적으로 관계가 개선되었고 파리 만국박람회가 열리자 독일 기업들은 자신들의 발명품을 전시했다. 올림픽조차 보이콧했던 미소 냉전 시절에 비하면 훨씬 화기애애했다. 그럼에도 이들이 결국 평화를 포기하고 세계대전이 벌어지기까지의 복잡한 여정을 저자는 서사적으로 묘사한다. 여기에는 아무도 원치 않던 전쟁을 초래한 수많은 필연과 우연의 사건들이 톱니바퀴처럼 엮어 있었다. 심지어 비만에 고혈압이었던 베오그라드 주재 러시아 대사가 오스트리아 측과의 회견을 우호적으로 끝내고 일어서려다 급성 심장병으로 사망하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다. 그로 인해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를 중재하여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이 모든 것이 하늘의 뜻한 바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는 프로이센에서 아들을 낳았다. 자부심에 찬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손자가 장치 독일 빌헬름 2세가 되고 독일과 영국의 우호 관계가 실현되길 희망했다. 영국과 독일의 협력은 상식에 들어맞았다. 독일은 거대한 육상 강국이고 영국은 해상 강국이었다. 프랑스라는 공동의 적이 있고 프랑스의 야망을 함께 우려한 것도 양국 관계에 도움이 되었다. - p.111 |
프랑스인들은 영국이 1882년 큰 소요가 일어난 이집트를 차지한 것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당시 영국이 단독으로 행동에 나선 것은 프랑스 정부의 무능과 주저 때문이었다. 영국의 잊비트 점령은 일시적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집트에 들어가는 것보다 빠져나오는 것이 더 어려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연장되는 영국의 지배는 프랑스인들의 불만을 가중시켰다. - p.225 |
빌헬름 2세는 니콜라이 2세를 프랑스와의 동맹에서 끌어내려는 집요한 시도를 다시 했다. 두 통치자는 핀란드 비외르케 섬 앞에 정박한 요트에서 만났다. 빌헬름 2세는 곤경에 빠진 러시아에 대해 니콜라이 2세에게 동정을 보이고 프랑스와 영국의 배신을 같이 비난했다. 7월 23일 뷜로는 빌헬롬 2세로부터 러시아와 독일이 차르의 요트에서 조약을 체결했다는 기쁨에 가득한 전문을 받았다. - p.307 |
프란츠 요제프와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강대국 지위를 유지하는데 주력했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은 제국의 정치가들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외교정책에 대한 접근에서 보수적이었고 전쟁보다 평화를 원했다. 1860년대 전쟁에서 패배한 후 몇십년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가장 큰 이웃 국가인 서쪽의 독일, 동쪽의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게를 유지했다. 세 제국 모두 프랑스혁명전쟁과 1815년 빈 회의, 1830년, 그리고 1848년에 다시 혁명을 반대한 보수적 군주정이라는 점도 도움이 되었다. - p.353 |
1911년 새로 불가리아 대사로 임명된 사람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차르는 러시아가 아무리 일러도 1917년까지 전쟁 준비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만일 러시아의 핵심 이익과 명예가 걸린 상황에서 우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 1915년에도 도전을 받아들일 것이다." - p.377 |
산업혁명 덕분에 더 큰 군대를 보유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유럽의 인구 증가는 인력풀을 확대시켰다. 프로이센이 인력풀을 최대한 이용한 첫번째 국가였다. 프로이센은 징병제를 실시해 민간 사회에서 병사를 충당하고 몇 년 간 이들을 훈련시켰다. 그런 다음 훈련된 병사들을 민간으로 돌려보냈지만 그들은 예비군으로 편성되어 주기적으로 훈련받으며 전투 기술을 유지했다. - p.465 |
1914년 위기 때 독일군은 단 하나의 계획만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독일군은 러시아의 동원에 위협받으면 프랑스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동쪽에서 시작된 전쟁은 결과에 상관없이 거의 불가피하게 서쪽으로 확대될 수 밖에 없었다. - p.499 |
총참모부의 군사작전국 책임자인 루이 드 그랑메종 대령은 프랑스를 구한다는 자신의 처방으로 젊은 장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방어전은 겁쟁이들의 전쟁이었다. 오직 공세만이 생명력 넘치는 민족에 걸맞았다. 전투는 가장 중요한 면에서 의지와 에너지가 핵심 요인이 되는 사기의 시험장이었다. 프랑스 병사들은 애국심에 고무되어 조상들이 싸웠던 것처럼 싸워야 하고 적을 제압하기 위해 전장으로 밀려들어가야 했다. 1913년 프랑스군의 새로운 전술 교범을 작성한 장교들은 그랑메종의 의견을 받아들여 "오직 공세만이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낸다."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다른 강국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군부 역시 전쟁이 짧을 것으로 예상했다. - p.535 |
좋은 날씨와 많은 볼거리 때문에 찾아온 외국인들을 이탈리아를 바고 코웃음을 터뜨렸다. 이탈리아인들은 매력적이지만 혼란스러우며 어린애 같았고 진지하게 대우받을 국민으로 보이지 않았다. 국제 문제에서 다른 강국, 심지어 3국 동맹 파트너들도 이탈리아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보스니아 위기 때 이탈리아의 타협 요구는 무시되었고 강국들은 발칸 지역에서 이탈리아에게 조금이라도 보상할 생각이 없었다. - p.657 |
1914년 초 대부분의 유럽인은 10년 전과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익숙한 긴장이 지속되고 있었다. 영국과 독일은 해군력 경쟁을 계속 이어나갔고 프랑스와 독일 관계도 우호적으로 개선되지 않았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여전히 발칸 지역에서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동맹 안에서도 갈등이 있었다. 발칸전쟁 후 독일-오스트리아 관계는 악화되었다. - p.743 |
흔히 교과서에서는 소위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이 서로 대치하면서 1차대전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냉전 시절 나토와 바르사뱌 조약 사이에서 벌어졌던 일촉즉발의 긴장에 비하면 훨씬 느슨했다. 이들의 동맹은 이념이 아니라 국익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유럽 왕실들은 오랜 결혼 동맹으로 서로 엮여 있었고 설령 적대적이라고 해도 오늘날 남북한처럼 아예 대화의 문을 꽁꽁 걸어 닫고 불구대천의 원수마냥 배척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관계는 한시적이면서 조건부였으며 언제라도 편을 바뀔 수 있었다. 실제로 삼국동맹의 일원인 이탈리아는 전쟁이 터지자 연합군에 서서 어제의 우군에게 총부리를 돌렸다.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라고 했던 영국 총리 팔머스톤 경의 유명한 격언마냥 유럽 외교의 오랜 방식이기도 했다. 저자는 사라예보 사건이 터졌을 때 강대국들이 상대를 때려눕히고 유럽 패권을 차지할 호기로 여기기보다 거의 무관심으로 일관했음을 지적한다. 이들에게는 그런 일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당사자인 오스트리아조차 세르비아를 상대로 무력 응징할 지를 놓고 마지막까지 고민했을 정도였다.
7월 1일 그는 카이저에게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약소국 세르비아가 유죄라고 전 세계를 설득할 만큼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썼다. 이중제국의 국제적 입지도 이미 약해져 있었다. 루마니아는 비밀조약에도 불구하고 방관하지 않을테고 불가리아의 지원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티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와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p.784 |
독일 지도부는 일단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원하되 유럽의 여론이 아직 동정적일 때 동맹국이 빨리 움직이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빈 당국을 서두르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소화불량에 걸린 거대한 해파리처럼 이중제국은 나름의 웅장하고 복잡한 속도로 움직였다. 군대는 많은 병사들을 추수 휴가에 내보냈고 그들은 7월 25일에야 복귀해 군복을 입을 수 있었다. 그 정책을 편 콘라트는 독일 무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농업 국가다. 추수한 결과물로 1년을 살아야 한다." - p.797 |
푸앵카레같은 민족주의자들조차 알자스와 로렌의 상실을 받아들였고 그 지방을 되찾기 위해 전쟁의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았다. 프랑스-러시아 동맹으로 독일이 포위되었다고 느꼈지만 프랑스와 러시아 관점에서 본다면 이 조약은 독일이 선제 공격할 때에만 작동될 방어적 조약이었다. - p.882 |
그러나 개전 며칠을 앞두고 상황은 급변한다. 며칠 전만 해도 태평스럽게 여름 휴가를 보냈던 지도자들은 어느 순간 전쟁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음을 깨달았다. 기세등등한 군부 강경파들, 전임자 시절부터 오직 전면전만을 상정한 전쟁 계획, 실타레마냥 복잡하게 얽혀 있는 동맹관계가 속박했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이나 히틀러처럼 헛된 야심이 아니라 상황에 등을 떠밀렸고 이것이 생각지도 못한 전쟁에 나서야 했던 이유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과연 사라예보 사건이 없었더라도 1차대전은 폭발했을까. 1차대전은 단순히 어느 한 사건이 아니라 유럽 강대국들의 오랜 모순이 폭발한 결과이지만 그게 전쟁의 방아쇠가 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순간에 기다렸다는 듯이 몇가지 우연한 사건들이 겹쳤고 그럼으로서 지난 수십년 동안 유럽의 평화를 보장하던 안전수단이 마비되었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라예보 사건은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었으며 1차대전은 일어났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역사란 참 미묘하다.
저자는 책 말미에서 1차대전이 일어난 원인을 이렇게 정리한다. 첫째로 그런 전쟁이 얼마나 파괴적으로 치달을지 상상하지 못했고, 둘째로 전쟁 돌입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당당히 맞설 용기가 부족했다고. 그 시절 지도자들에게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게 사내다운 것이라고. 마초주의가 지배하던 시절에 나약함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죄악이었을테니 말이다. 하긴 트럼프나 푸틴이 귀 틀어막고 허세 부리는 꼴을 보면 요즘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같다.
<몽유병자들>이 유럽의 화약고였던 발칸에 포커스를 맞추고 <8월의 포성>이 사라예보 사건부터 전쟁이 폭발하기까지 약 한달의 시간 동안 벌어진 긴박한 상황을 묘사했다면 이 책은 보다 거시적이면서 20세기 초 유럽의 정치와 외교, 군사, 사회, 문화 전반을 흥미진진하게 다루고 있다. 저자의 식견과 필력이 놀랍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케네디 대통령은 <8월의 포성>을 읽고 군부의 압박에 굴복하는 대신 소련과의 협상을 선택함으로서 제3차 세계대전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른바 '신냉전'이라는 오늘날, 푸틴은 여전히 우크라이나의 굴복을 강요하고 있고 태평양에서는 트럼프와 시진핑이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고 있으며 인도-파키스탄의 충돌,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 등 세계 곳곳이 화약고이다. 제2의 히틀러가 등장하지 않더라도 사소한 불장난이 어느 순간 통제 불능의 큰 불로 번지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과연 그 때 트럼프나 푸틴, 시진핑이 케네디처럼 책임감 있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입만 열면 정쟁 벌이기에만 급급할 뿐 비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제발 이런 책 좀 읽으라고 충고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