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패배 - 1940년의 증언
마르크 블로크 지음, 김용자 옮김 / 까치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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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5월 15일 수요일 아침 7시 30분, 프랑스 총리 폴 레노에게서 걸려 온 전화는 그때까지 비몽사몽이었던 처칠의 잠을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레노는 울부짖듯이 영어로 외쳤다. "우리가 졌습니다." 그는 다시 말했다. "우리가 졌습니다. 전투에서 졌습니다." 아니, 전쟁은 이제 시작되지 않았던가. 불과 닷새전 노르웨이 원정 실패로 탄핵을 받아 물러난 체임벌린 대신 영국 전시 총리로 임명되었던 처칠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당할 수 있다는 말이오?" 레노는 아르덴을 돌파한 독일군의 기갑부대가 스당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진격 중이라고 말했다. 처칠이 아직 승리의 기회가 있을 거라면서 필사적으로 달래려고 했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레노는 "우리는 이미 졌습니다."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었다.

바로 전날 독일군이 뫼즈강을 넘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프랑스 장군들은 스당이 돌파되자 그제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 꼴이었다. 그것도 단순히 허를 찔렸다거나 한 방 먹었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프랑스군 전체가 대혼란에 빠졌다. 그 순간의 당혹감은 그동안 쏟아졌던 수많은 경고를 고집스레 무시했던 모습이 무색했다. 프랑스군의 이인자인 알퐁스 조르주 장군은 어찌나 충격이 컸는지 "스당이 돌파당했다! 무너졌다고!"라고 외치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보다 못한 참모장 두망(Joseph Édouard Aimé Doumenc) 장군이 "전쟁에서는 원래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는 법입니다."라면서 달래야 했다.

싸움이 처음 시작될 때만 해도 독일군이 프랑스 땅을 밟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며 그토록 자신만만하던 프랑스군 총사령관 가믈랭 원수는 이제는 상황을 터무니없이 과장하여 정치인들까지 겁에 질리도록 만들었다. 이날 저녁 가믈랭은 국방부 장관 달라디에를 향해 독일군이 최후 방어선을 돌파하여 파리로 접근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달라디에가 1914년처럼 즉각 반격하여 적의 진격을 막아내라고 명령하자 자신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로 그를 비롯한 프랑스 전체를 절망에 빠뜨렸다. 다음 날 아침 허둥지둥 파리로 날아온 처칠이 "전략 예비대는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도 가믈랭은 "전혀 없습니다."라는 맥 빠진 대답으로 말문을 막아버렸다. 처칠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내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순간이었다."라고 썼다. 게리 올드만 주연의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서도 처칠이 프랑스까지 날아가서 그들의 투지를 다시 불붙이려고 애쓰지만 프랑스 지도자들의 한없이 무기력한 모습에 당황하는 장면이 나온다. 처칠로서는 앞이 깜깜했을 듯.

연합군 주력부대가 독일군을 딜 강에서 저지하기 위해서 벨기에로 부지런히 전진하는 동안 마지노 요새의 빈틈을 뚫고 들어온 독일군은 나중에 처칠의 유명한 표현대로 마치 낫으로 이삭을 베듯이 한방에 쓸어버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깨닫지 못했던 연합군 수뇌부는 독일군의 새로운 전술인 전격전에 당했다고 떠들었지만 그 패배의 상당부분은 실상 그들의 어리석음이 자초한 일이었다.


더욱 어이없는 점은 프랑스군 수뇌부가 독일군에게 허를 찔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차피 다 진 싸움이라며 전의 자체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막상 히틀러와 독일군은 승리는 커녕, 이제부터가 진짜라면서 마음 단단히 먹고 있는 판국이었는데 말이다.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리거나 판세를 뒤엎으려는 노력은 없었다.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포위된 150만명의 연합군 중 불과 33만명만이 덩케르크에서 겨우 탈출했다. 이들을 구한 것은 그때까지 남쪽에 남아 있던 100만명이 넘는 프랑스군이 아니라 영국 해군과 목숨걸고 자신의 배를 끌고 영불해협을 넘어온 수많은 영국 민간인들이었다. 프랑스는 6월 22일 콩피에뉴 숲에서 굴욕적인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만약 프랑스인들이 끝까지 버티느니 일찌감치 항복하는 쪽이 히틀러의 선처를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면 엄청난 착각이었다. 히틀러에게 관용은 없었다. 거액의 배상금은 물론이고 영토의 2/3는 독일의 직접 지배에 들어갔으며 나머지 1/3 역시 독일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또한 100만명 이상의 병사들이 전쟁 노예로서 독일로 끌려갔다. 전쟁이 제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패전은 그보다 몇 배 더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망각한 대가였다. 프랑스 역사상 가장 무기력하고 치욕스러웠던 1940년의 여름은 이렇게 끝났다.

히틀러의 지배는 꼭 4년 뒤인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과 프랑스 해방으로 끝났지만 그후에도 프랑스인들에게 한 가지 의문만은 뇌리에서 떨쳐버릴 수 없었다. 도대체 우리는 왜 졌는가였다. 프랑스는 독소전쟁에서의 소련군처럼 손 놓고 있다가 전략적인 기습을 당한 것도 아니었다. 독일군의 침공이 시작되기 수개월 전부터 이미 서부전선은 전시 상태였다. 그렇다고 1870년처럼 자만하여 독일을 얕보지도 않았다. 프랑스는 독일과의 결전을 위해 자신들의 역량을 총동원했고 수십만명의 영국 원정군도 가세했다.

그들로서는 적어도 쓸 수 있는 수는 다 쓴 셈이었다. 서방의 언론인들은 서부 전선에 결집한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군대를 경외감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이번 전쟁은 반드시 프랑스군이 이길 것"이라고 장담했다. 막상 뚜껑을 열자 일방적으로 쓸려나간 쪽은 프랑스군이었다. 독일을 쉽게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이토록 어이없게 질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정말로 독일군이 그렇게 강했던가. 그렇다면 일이 그 지경이 되도록 도대체 프랑스 지도자들은 뭘 했던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군의 손발을 그토록 꽁꽁 묶어두었고 막대한 혈세를 마지노 요새 건설에 쏟아넣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원래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무개념한 장군들 덕분에 난공불락의 요새에서 역사상 최악의 대국민 사기극으로 전락한 마지노 요새. 10년 전 이 요새 건설을 처음 제안했던 프랑스 국방장관 앙드레 마지노는 저승에서 "난 억울하다고!"라고 외치고 있을 듯.

서방 언론들이 독일의 놀라운 승리를 '전격전(Blitzkrieg)'이라고 부르며 호들갑을 떠는 동안 가믈랭을 비롯한 패전지장들은 그 뒤에 숨는 쪽을 선택했다. 무능한 똥별들이 그러하듯 이들 역시 자성의 목소리 대신 모든 책임을 남탓으로 떠넘겼다. 자신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상대가 너무 강했고 동맹국들이 배신했으며 무엇보다도 프랑스 내부에 숨어 있던 '제5열'들이 사보타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전쟁 중 보여주었던 이들의 행태를 본다면 그야말로 뻔뻔한 소리였다. 그것은 이적행위이나 다름없는 직무유기였다. 무슨 말을 늘어놓은들 프랑스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가장 빠른 시간에 말아먹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만약 스탈린이었다면 고민할 것 없이 그 자리에서 이들을 모조리 총살시키거나 시베리아 굴라크로 보냈을 것이다. 비인간적이기는 했지만 효과는 확실했으니 말이다. 한편으로 생각한다면 늙고 고루하면서 뇌가 굳어버린 프랑스 장군들의 케케묵은 상식으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이상 이해할 방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들의 불행은 자신들의 둔감한 사고방식으로 따라잡기에는 시대가 너무 빨리 바뀌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대에 하필 이런 똘빡 영감들에게 운명을 맡겨야 했던 모든 프랑스인들의 불행이기도 했다.

까치 출판사에서 나온 신작 도서 <이상한 패배 - 1940년의 증언>은 지난 수십년 동안 수없이 제기되었고 논쟁의 대상이었던 "그 때 우리는 왜 아작났는가?"를 다룬 책이다. 시중에는 독일 연방군 장교가 쓴 <전격전의 전설>이나 <전격전, 프랑스 패망과 거짓 신화의 시작>, <히틀러 최고 사령부>처럼 그동안 한편의 신화로 포장되었던 독일 전격전의 허상을 벗기는 책은 많다. 그러나 이 책은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이 있다. 전후 책상 위에서 기록으로 당시를 재구성한 교수나 군인이 아니라 그때의 패배를 직접 겪은 사람의 증언이라는 점이다. 저자 마르크 블로크(Marc Léopold Benjamin Bloch)는 파리 대학교의 중세학 교수이자 유대인으로 군 입대를 한번도 아니고 무려 세번이나 한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폭발했을 때 그는 30대였고 진작에 군 복무를 마쳤지만 부사관으로 재입대했다. 마른 전투와 솜 전투 등 굵직굵직한 전투를 경험하면서 두번이나 중상을 입었으며 최고 영예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전쟁이 끝났을 때 대위로 제대했다. 전쟁 시작부터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여신의 가호를 받는 행운아였던 셈.

마지막 복무는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1939년 9월 폴란드 전역이 폭발하고 연합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동원령이 선포되었고 재입대했다. 그는 이미 53살의 중년이었고 사회적으로 저명한 교수였음에도 계급은 여전히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예비역 대위였다. 본문에서는 그 이유가 자신이 군에 불성실하다는 이유로 찍힌 탓이라고 말한다. 당시 프랑스군이 얼마나 경직되었으며 능력보다 절차와 위계질서를 따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셈이기도 하다. 프랑스는 민주주의 국가였지만 프랑스군은 민주 군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강의 차 미국에 갈 기회가 있었지만 모든 가족이 비자를 받지 못하여 포기했다. 서부전역이 폭발하자 프랑스 제1군에 소속되어 가믈랭의 명령에 따라 벨기에로 향했다가 독일군에 포위되었지만 덩케르크 철수 작전에 참여하여 영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대로 영국에 남을 수도 있었음에도 가족이 프랑스에 있다는 이유로 돌아왔다. 프랑스가 항복했을 때 운좋게 포로 신세가 되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운은 끝까지 가지 못했다. 저항군에 가담한 그는 1944년 3월 8일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고 혹독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프랑스 해방이 눈앞에 닥치던 6월 16일 총살당했다. 그 사이 어머니와 병석에 있었던 아내도 사망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말년에 와서 전쟁으로 인생이 꼬인 셈이다.

이 책은 덩케르크 철수를 거쳐서 영국에서 귀환한 저자가 프랑스가 항복한 직후 책임 대신 변명만 늘어놓는 군의 높으신 상관들을 반박하고 프랑스의 지성이자 하급 장교로서 자신이 목격했던 프랑스군, 더 나아가 1918년 승리 이후 프랑스 사회가 안고 있는 총체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 쓴 글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이 어이없는 패배의 진짜 원인은 독일군의 기상천외한 전술이나 신무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 물론 히틀러 치하에서는 감히 내놓을 수 없었고 그가 고인이 된 뒤 전쟁이 끝나고 1946년에 출간되었다고. 말하자면 프랑스판 징비록인 셈. 그렇다보니 그의 질타는 그야말로 신랄하면서 촌철살인같은 느낌이다.

우리는 방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패배를 당했다.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가. 의회제도, 군대, 영국, 간첩의 탓이라고 우리 장군들은 대답한다. 결국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조프르 장군이 훨씬 현명했던 셈이다! "마른 전투에서 이긴 사람이 나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그 전투가 패배로 끝났다면 그것이 내 탓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 p.34

그러나 "후방"에 있어야 할 부대가 "전방" 부대라고 하는 부대보다 실제로는 전투 지역에 더 가까이 있게 되자 놀라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미 뫼즈 강에 틈새가 열리자 이동 도중에 서둘러서 전선의 돌출지대를 메운다는 구실로 늑대의 벌린 아가리 안으로 던져 넣으려던 한 사단의 하차 지점을 바꾸어야 했다. 어떤 사단의 장군이 사령부로 쓸 지점에 도착해보니 적이 그보다 먼저 와 있는 경우도 있었다. - p.54

우리는 방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패배를 당했다.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가. 의회제도, 군대, 영국, 간첩의 탓이라고 우리 장군들은 대답한다. 결국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조프르 장군이 훨씬 현명했던 셈이다! "마른 전투에서 이긴 사람이 나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그 전투가 패배로 끝났다면 그것이 내 탓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 p.34

우리가 전차, 비행기, 견인차를 충분히 보유하지 못한 것은 무엇보다도 무한정 있는 것도 아닌 돈과 인력을 시멘트에 들어부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동부 국경과 마찬가지로 노출되어 있는 북부 국경선에 충분한 방어선을 구축할 만큼 현명하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첫째 사람들이 우리에게 마지노 선을 믿도록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 방어선은 많은 비용을 들이고 요란한 선전을 하면서 건설되었으나 좌측에서 너무 짧게 끝나는 바람에 결국 라인 강에서 돌아 나아가 시작만 하고 중단되었기 때문이었다. 둘째로 마지막 순간에 노르도에 서둘러서 시멘트 보루를 건설하는 쪽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전방 방어에만 적합하도록 건설되어 정작 후방 쪽에서 점령당했다. - p.61

군이 소속 부대의 소재를 모르는데, 어떤 기적이 일어나서 명령이 제시간에 도달하겠는가? 어느날 기병부대가 이동하자 유류 저장소 장교가 평소처럼 선량한 고객을 만나러 갔다. 그가 부대로 돌아오자 나는 그를 제3국으로 데리고 갔다. 우리의 고위 전략가들이 새로운 사령부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지를 확인해두는 것이 현명할 듯 싶어서였다. 대조한 결과 실제 위치와 지도 위에 목탄으로 이미 표시한 지점 사이에는 약 30km의 차이가 있었다. 우리 지적에 대해 그들이 입 끝으로 내뱃듯이 하던 "고맙소"라는 말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중략) 게다가 우리는 "영국군"과의 협조 체제를 제대로 조직했는가? 우리 연락체계의 비극적인 결함이 문자 그대로 이보다 더 잔인하게 표출된 것은 없을 것이다. - p.76


장군이 노했다. 전사는 원한다면 사창가에 가도 되지만 부부간의 포옹은 자기 기준에서 연약함의 죄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새 지휘관은 그보다 먼저 우리를 지휘한 나이 많은 예비역 장군에게 15일간의 근신 처분을 내렸다. 그 예비역 장군이 어느날 저녁 나이든 아내와 팔짱을 끼고 있는 것을 보았다나. 사람들은 웃었다. 며칠 사이 사기가 바뀌었다. 장교에게 친절하고 정중하던 인사가 어느 순간 억지로 할 수 없이 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이 확실히 보였다. 군대의 건강하고 좋은 분위기를 망쳤다. - p.101

프랑스 군대는 옛날실 처벌을 충분히 없애지 않았다. 반면, 사령부는 적이 준 몇 개월의 유예기간을 이용하여 간부급에게 필요한 숙정을 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해야 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확실하다.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제1군에서 몇 명을 요란하게 좌천시켰다. 그러나 그때까지, 즉 그렇게 늦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는가? 왜냐하면 이미 전부터 몇 가지 결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p.102

독일군은 지나면서 잠깐 보았을 뿐이지만 우리와 비교해서 확실히 젊어보였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는 쓸데없는 가지를 쳐내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는 예비역 하사관에게 약간의 교육을 더 시켜서 소위나 중위 계급으로 올려주는 일도 하지 않았다. 1914년의 경험에 의해서 이들 중에 권위와 능력과 열성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점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나는 그들 상관인 대령이 사관후보생 과정에 나가는 것을 막은 경우를 알고 있다. 아마도 연줄이 불충분했기 때문일 것이다. - p.117

나이가 어느 정도 든 장교들, 1914년이나 1918년의 참전용사로서 아직 늙었다고 할 수 없는 사람 중에도 변화가 불가능하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우리의 사령부는 노인들이 모여 있는 곳임을. 평화시 승진규칙에 따르면 40세에 소령이 되고 장군이 되려면 60세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훈장을 가득 단 백발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이 무훈을 세웠을 때는 젊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한 채 그들의 젊은 후배들의 출세길을 막는 일을 하고 있다. - p.133

"더러운 물질주의"라고 어느 날 자신도 그렇게 정신적 순수함에 매료되지 것같지 않은 한 정치인이 외쳤다. 그는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노동자는 인간의 노동력을 파는 상인이다. 직물, 설탕, 또는 대포를 하는 상인이 적게 주고 많이 받으려는 상업의 대법칙을 적용한다고 해서 놀랄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때에는 정당한 이 태도가 국민이 위험에 빠진 상태에서 병사들의 희생을 앞에 두고는 매우 적절치 못한 것이 된다. 내 시골집 이웃은 배관공이었는데 징집되어 한 공장에서 일할 때 그가 작업장 내의 불문율보다 더 많이 더 빨리 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동료들이 어떻게 그의 연장을 감추었는지 이야기해주었다. 이것이 무서운 고발장의 생생한 상태이다. 물론 나는 예가 없지 않다는 점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광범위하게 퍼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전쟁 승패에 크게 작용하기에 충분하다. - p.147

소위 "우파"라는 정당들이 오늘 패전 앞에서 그렇게 쉽게 포기한 사실에 역사가는 그리 크게 놀라지 않을 것이다. 왕정복고로부터 베르사유 의회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의 거의 전 과정에서 그것이 그들의 변함없는 전통이었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오해가 한때 군국주의와 애국주의를 혼동하면서 규칙을 혼란시키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 차례로 극단적인 반독주의를 표방하다가 우리를 독일의 대륙체제에 봉신으로 들어가게 한다거나, 푸앵카레식 외교의 옹호자로 자처하다가 선거 때는 그들의 적이 주장하는 소위 주전론을 격렬히 바난하는 태도로 돌변하는 것은 이상한 정신적 불안정이다. 그들의 추종자들 역시 사고의 극단적인 이율배반에 놀라울 정도로 무심했다. - p.162

내 나이의 사람들은 조국의 재건을 담당하지 못할 것이다. 패배한 프랑스의 정부는 노인들의 정부였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새로운 봄을 맞이하는 프랑스는 젊은이들의 것이어야 한다. 지난번 전쟁의 선배들과 비교하여 그들은 승리 후에 오는 게으름을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는 슬픈 이점을 가질 것이다. 최종적 승리가 어떤 것이든 간에 1940년의 커다란 참패의 그림자는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 p.187

저자는 자신이 겪은 1940년의 여름과 함께 프랑스가 깨진 이유에 대해 200여 페이지에 걸쳐서 다음과 같이 구구절절이 설명한다. 읽다보면 상층부의 무능한 똥별들에 대한 저자의 분노가 와닿는다는.

  1. 독일군에 비하여 터무니없이 느린 명령 체계와 반응속도

  2. 독일군에 비하여 경직된 사고방식과 창의성 부재

  3. 독일군에 비하여 시대에 형편없이 뒤떨어진 전술

  4. 독일군에 비하여 사령부와 현장 부대, 또는 현장 부대간의 협조 결여와 소통 단절

  5. 독일군에 비하여 낙후된 병영 문화

  6. 독일군에 비하여 낮은 사기와 훈련 상태

  7. 독일군에 비하여 고령화된 프랑스군

  8. 평화 때에는 센 척 하다가 위기 앞에서 제일 먼저 꼬리를 내린 정치인들

제1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장군들이 지배하는 1940년 프랑스군은 여전히 병사들에게 화력보다 정신력을 강요했다. 병사들에게 더는 먹히지 않아서 문제이지. 자율성과 창의성 대신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했으며 승진은 연공서열이었고 무능한 자가 아니라 조직 위계질서를 거스르는 자를 속아냈다. 한마디로 남들 위에 튀기보다는 사고 안 치고 가늘고 길게 가는 게 장땡이라는 얘기였다. 가믈랭을 비롯한 프랑스군 수뇌부는 바로 그런 자들이었다. 이들은 한때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20년의 평화기를 거치면서 더 이상 군사 전문가가 아닌 군복 입은 공무원들이었다. 말하자면 정신력 빠진 일본군이랄까. 일본군에서 그거 빼고 나면 뭐가 남겠음. 따라서 프랑스가 방심하는 동안 독일군이 길러낸 진짜 전사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은 프랑스의 저출산 고령화라는 점이다. 산업 혁명 이전에만 해도 유럽 최대의 인구 대국이었던 프랑스는 19세기에 오면 일찌감치 심각한 저출산의 늪에 빠져 버렸다. 남들은 '멜서스의 덫'이라고 하여 오히려 지나친 인구 폭발을 걱정하는 판국이었는데 말이다. 그 바람에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는 물론이고 심지어 영국에게도 뒤쳐져 버렸다. 여기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공적에 눈이 먼 장군들의 정신나간 돌격주의는 프랑스에서 한 세대를 사실상 파멸로 몰아넣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프랑스의 출산율은 회복되지 못했고 1940년 당시 영국이 5천만명, 독일이 7천만명, 소련이 2억명인데 프랑스는 4천만명에 불과했다. 덕분에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프랑스군의 평균 연령은 30대 후반이었다. 20대는 안 보이고 하나같이 동네 늙다리 야비군 아저씨들이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 당장 저자부터 평균 연령을 올려놓는데 일조한 셈. 재입대 영장 한장에 집에서 끌려나온 중년남들에게 뭔 싸울 의지가 있었을 것이며 가혹한 전장에서의 체력도 젊은 애들에 비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무엇보다도 인간이란 나이 먹고 머리 굵어지면 어리고 철 모를 때처럼 위에서 시킨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본 가미가제만 해도 나이 많은 고참들은 눈치껏 죄다 빠지고 새파란 20대 청춘들만 총알받이로 내몰려서 정신차리고 보니 아스쿠니 신사로 향하는 길이었던지라.

실제로 스당을 지키던 제55사단의 예비군들은 독일군을 만나기도 전에 단지 폭격을 한 차례 받은 것만으로 모조리 달아나면서 사단이 통째로 와해되었다. 하나가 괴멸하자 주변 부대들도 줄줄이 뒤따랐고 결국 프랑스군 전체가 무너졌다. 독소전쟁에서는 반대였다. 할더가 "12개 사단을 격파하면 어디서 또 12개 사단이 튀어나오더라"라는 말마따나 소련군이 그렇게 당하고도 끝없이 병력을 찍어내어 독일군을 수세에 몰아넣을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이 출산율에서 독일을 압도한 덕분이었다. 젊은 남자가 무려 3배나 많았다고. 그 시절 출산율 죄다 어디 가고 요즘은 아예 러시아에서 30대 이상 남자를 보기 어려울 정도라나. 10대때부터 죄다 골초에 보드카에 찌들어서. 여기에 푸틴이 전쟁까지 벌이고 있으니 제 명대로 살기 어려운 게 러시아 남자들.

여기에 하루에 한번씩 자신이 상남자임을 입증하기 위해 제 수명을 깎아먹는 일조차 마다하지 않는 것이 그 동네 철칙인지라.

물론 밀덕의 입장에서 본다면 저자의 지적이 전적으로 옳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는 이 책을 1940년 가을에 썼고 오늘날 우리는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군은 생각만큼 현대화되어 있지 않았으며 많은 결점 또한 안고 있었다. 4년 뒤 그가 총살되었을 때 독일군은 서방 연합군과 소련군의 맹렬한 공세 앞에서 수세에 내몰리고 있었다. 그리고 1년도 되지 않아 전쟁은 독일의 패배로 끝났다. 그가 말하는 프랑스군의 문제점이라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전쟁에 졌기에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결과론적인 얘기이기도 하다. 만약 저자가 그때 죽지 않고 살아남아 10년 쯤 지난 뒤에 다시 쓸 수 있었다면 내용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어쨌든 프랑스가 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중과부적이나 '졌잘싸'도 아니고 변명의 여지조차 없을 만큼 완패로 말이다. 그것은 분명 누군가는 책임져야 할 일이고 왜 졌는지 철저히 분석하고 반성하여 그런 치욕의 역사를 두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도록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네 현실은 정반대이다. 팔은 원래 안으로 굽는 법이라며 조직의 논리를 앞세우는 장군들, 그리고 이기적인 행태를 호되게 질타해야 할 정치인, 언론인, 학자들은 오히려 실패자에 대한 동정심을 이용하여 감싸기에 급급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의 기억은 망각되고 대중의 무관심 속에서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다는 말마따나 졸장이 명장으로 둔갑하고 도리어 묵묵히 자신의 본분에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이 책임을 뒤집어 쓰는 예가 얼마든지 있음을 작년에 <별들의 흑역사>를 쓰면서 뼈져리게 절감할 수 있더라. 당장 우리 역사를 보더라도.

그런 점에서 저자의 증언은 8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러모로 시시하는 바가 크다. 다만 출간을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닌 초고인지라 다소 정제되지 않은 느낌.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점이 옥의 티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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