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벽 너머 - 사라진 나라, 동독 1949-1990
카트야 호이어 지음, 송예슬 옮김 / 서해문집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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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후반 이후의 세대라면 미-소 냉전의 시대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어릴 적 TV를 통해서 우주에서 레이저로 소련의 다탄두 핵미사일을 격추한다는 레이건의 야심만만한 '스타워즈 계획'을 봤던 것이 생각난다. 물론 거의 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실현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개구라였다고 하지만, 그게 소련을 자극하여 무한군비경쟁으로 이어지면서 결과적으로 소련 붕괴와 냉전 종식에 일조했다는 평가도 있다.

1980년대만 해도 언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시대였고 인류가 미-소 핵전쟁으로 멸망한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영화와 애니에서 흔히 보는 주제였다. 하물며 전쟁이 시작되면 제일 먼저 박살날 나라가 우리였다. 어떤 썰에 따르면, 냉전 끝난 뒤 한국을 방문한 소련 미하일 프룬제 군사대학 출신 러시아 장군이 한국군 장성들에게 말하기를 남한 정도는 R-36 대륙간 탄도 미사일 한발이면 끝장낼 수 있었다고. 아무리 남한이 소련에게 약소국이라고 해도 지나친 과소평가라며, 터무니없는 허풍이라는 반발에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R-36에는 500~800kt급(히로시마 원폭의 30~50배) 핵탄두 10발이 탑재 가능하며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대전, 광주, 홍천, 울산에 각기 한발씩 박아넣고도 2발이 남는다나. 그 말에 바로 데꿀멍했다고. 그런 걸 무려 300발 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소련. 돌이켜보면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무사히 그 시절을 넘긴 것이 용하다. 요즘 푸틴의 불장난을 보면 아직은 인류의 미래를 안심하기란 이를지도.

빨간 내복이 보여주는 광란의 연주와 워보이 군단의 기상천외한 로드 액션, 그리고 임모탄 조의 간지나는 은색 이빨 마스크가 인상적인 <매드 맥스> 또한 핵전쟁 이후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상이다. 패러럴 월드 중에는 이런 세상도 있을지도 "V8! V8! V8! V8!"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던 냉전은 어느 한 순간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시민들의 손에 의해 무너졌다. 한달 뒤인 12월 2일 지중해 몰타에서 열린 미-소 정상회담에서 아버지 부시와 고르바초프는 상호 적대행위의 중단에 합의했다. 동유럽에서는 상전의 뒷배에 더 이상 기댈 수 없게 된 친소 위성국가들이 줄줄이 붕괴되고 1년 뒤에는 동서독이 통일했으며 1991년 8월 사흘 천하로 끝난 소련 보수파들의 쿠데타 실패와 고르바초프의 실각, 그리고 12월 8일 거대한 구 소련 제국이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서방의 승리였다. 베를린 장벽 붕괴가 냉전을 끝냈다고 하지만 그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게 된 이유는 처음부터 어떤 흑막에 의해 의도된 것이 아니라 한 관료의 말실수와 오보에서 비롯된 해프닝이었다.

이날 저녁 6시, 국내외 기자들을 상대로 일상적으로 열리는 동독 정부의 일일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동독 공산당 기관지의 신임 대변인이었던 권터 샤보브스키(Günter Schabowski)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기계적으로 메모를 읽어 나갔고 그 중에는 새로운 여행법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동독 국민들의 여행 허가 규제를 이전보다 완화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거의 바뀐 것이 없는 알맹이 없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아직 중앙의 승인조차 받지 않은 법이었다. 문제는 샤보브스키가 너무 급하게 전달받아 내용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회견장에 나왔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그의 역할은 자신이 전달받은 내용을 읽기만 하면 그만이었고 누가 시시콜콜 따지는 일 따위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산주의 특유의 관료주의와 무사안일의 결과였다.

하지만 이 날은 달랐다. 이탈리아 국영 통신사(ANSA) 리카르도 에르만(Riccardo Ehrman)이라는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그 법이 언제 시행되며 동독 사람들은 이제부터 마음대로 외국에 나가도 되느냐는 것이었다. 심지어 베를린 장벽을 넘어서 말이다. 샤보브스키는 별 생각 없이 그렇다고 대꾸했다. 그의 말은 대번에 전 세계로 대서특필되어 마치 동독 정부가 베를린 장벽을 당장 철거하는 것으로 알려지게 된다. 방송을 들은 베를린 시민들은 자기들 손으로 무너뜨리겠다며 너도나도 망치와 곡갱이를 들고 장벽으로 모여들었고 어리둥절한 동독 정부가 미처 막을 틈도 없이 지난 30년 동안 동서독을 막고 있던 장벽은 하루밤새 허물어졌다. 샤보브스키의 멍청한 말 한마디가 냉전을 끝내고 소련을 무너뜨리게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런 게 베이징에서 나비가 날개짓하면 맨하튼에서는 토네이도가 발생한다는 진정한 나비 효과가 아닐런지.

20세기 최대의 말실수를 한 샤보브스키. 동독이 무너지고 공산주의가 붕괴되었지만 본인도 그 대가를 톡톡이 치러야 했다. 독일 통일이 서독 주도였기에 동독 관료들은 과거의 행적에 따라 처벌받았다. 샤보브스키는 잘나가는 엘리트 관료에서 민족의 죄인이 되어 3년 형을 선도받고 옥살이를 한 후 2015년에 독일의 한 요양원에서 86살의 나이로 쓸쓸하게 죽었다고 한다. 메모만 잘 읽었어도.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던 샤보브스키의 별 것 아닌 말 한마디가 냉전을 끝낼 수 있었던 것은 베를린 장벽이 냉전의 상징이자 다름아닌 냉전이 처음 시작된 곳이기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시 동맹이었던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전쟁 말기부터 삐걱대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대결은 1948년 6월 18일 제1차 베를린 위기였다. 서방이 자신을 얕본다고 여긴 스탈린은 자신의 위세를 만천하에 보여줄 요량으로 소련군을 동원하여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차단하고 모든 물자와 생필품, 연료, 식수의 공급을 봉쇄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뚝심있는 유럽공군사령관 커티스 르메이를 시켜서 수송기를 총동원하여 물량으로 압도했다. 히틀러는 항공수송으로 보급을 책임지겠다던 괴링의 말만 믿었다가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독일 제6군 30만명을 아사로 내몰았지만 미국은 220만명의 서베를린 시민들을 먹이고도 남았을 정도이니 스탈린의 기를 완전히 죽여놓은 셈이다. 과연 천조국 파워. 그 대신 홧김에 벌인 것이 극동의 망나니 김일성의 남침 허락이었다.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그보다 우리는 뭔 죄래. 이런 게 나비 효과라는. 게다가 베를린을 통해서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동독이라는 나라가 아예 붕괴될 판국이 되자 1961년 베를린 장벽을 세우게 된다.

과연 동독은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가. 부패와 타락의 대명사인 남베트남을 무너뜨린 것은 성난 국민의 횃불이 아니라 북베트남의 무력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 중에서도 꽤 잘 사는 축이었던 동독은 어째서 서독의 무력이 아니라 국민에 의해 무너졌던가. 정작 훨씬 더 가난하고 억압적인 북한은 여전히 버티고 있는데 말이다. 그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왜 독일은 통일하고 우리는 그렇지 못한가.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서해문집>에서 냉전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주목할 만한 책이 나왔더라. 냉전에 의해 등장하여 냉전과 함께 사라진, 한때 존재했지만 이제는 잊힌 또 다른 독일의 한조각 동독을 다룬 <장벽 너머>. 여기서 말하는 장벽이란 말할 것도 없이 동독을 서방 세계와 단절시킨 베를린 장벽. 우리에게 DMZ 너머의 북한이 그러하듯, 그 시절 서방 사람들에게 장벽 너머의 세상이란 '이세계'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요즘 물건너 나라에서는 꿈도 희망도 없다는 젊은 세대를 이세계로 승천시켜주는 환생 트럭이 유행이라지만. 이세계도 나름이라.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2월 4일 소련 크림반도의 휴양지인 얄타에서 연합국의 3거두인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이 한 자리에 모였다. 전후 세계 질서의 재건과 함께 무엇보다도 독일 패망 후 유럽을 어떻게 나누어가질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독일은 엘베 강을 따라서 두쪽으로 쪼개졌다. 독일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가 해방된 국가들 역시 쪼개졌다. 독일의 한패거리였는지, 독일에 맞서 싸웠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누가 점령했는가였다. 서방 연합군이 점령한 땅은 친서방 국가로, 소련군이 점령한 땅은 소련의 위성국가로 다시 태어났다. 냉전이 시작되고 이른바 '철의 장막(Iron Curtain)'이 드리우면서 양쪽은 서로 다른 세계로 갈라졌다. 누구도 허락없이 들어갈 수 없고 또한 나올 수도 없는 세계였다. 양쪽 모두에 점령된 오스트리아는 운 좋게도 영세중립국이 되어 공산주의의 마수에서 벗어났지만 전범국인 독일은 분단되어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섰다. 방식은 우리와 같았다. 소련이 독일 전체의 총선거를 거부하자 연합군 점령지역에서만 선거가 실시되어 서독이 세워졌다. 몇 달 뒤 소련 점령지역이 동독으로 탄생했다.

얄타 회담에 따른 독일 분할. 소련은 폴란드로부터 옛 러시아 땅인 동부지역을 빼앗는 대신 그 보상으로 오데르-나이세 강 동쪽의 독일 영토를 넘겨 주었다. 이 때문에 온전히 독립한 서독과 달리 동독으로서는 차포를 죄다 떼인 채 껍데기만 가지고 독립한 셈이었다.


그러나 동독의 면적은 소련이 점령한 독일 땅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동프로이센을 비롯한 알짜배기를 폴란드와 러시아에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동독은 서독에 비하여 면적은 43%, 인구에서는 1/3에 지나지 않았다. 분단 당시 남북한이 서로 비슷한 면적에 북한 인구가 남한의 절반 정도였던 것에 비하면 독일은 처음부터 서독에 완전히 쏠려 있었던 셈이다. 만약 스탈린이 욕심을 좀 덜 부렸더라면 동독은 면적과 국력 면에서 서독과 거의 동등했을 것이며 이후의 운명 또한 전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더 어이없게도 분단 당시 5천만명 정도였던 서독 인구는 1990년 63백만명으로 늘어난 반면, 동독은 18백만명에서 도리어 16백만명으로 감소하면서 양쪽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경제난에 허덕이던 동독인들이 더 잘 사는 서독으로 빠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샤보브스키의 말실수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동독은 시한부 운명이었다.

이 책은 동독이 세워지기 이전의 독일 공산주의자들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제1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 혼돈의 독일을 공산주의 유토피아로 만들겠다고 꿈꾸었던 이들은 1933년 히틀러에게 완패한 뒤 지옥을 겪어야 했다. 일부는 나치의 사냥을 피하여 소련으로 달아났지만 그곳 역시 지옥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마르크스주의가 만들어낸 최악의 괴물이었던 스탈린은 이들을 히틀러의 첩자로 여겼고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자 체포하여 혹독한 고문을 한 뒤 시베리아의 굴라크에서 서서히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물론 스탈린의 칼날을 운 좋게 피한 극소수의 행운아들도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동독의 실질적인 건설자이자 동독에서 스탈린식 철권통치가 무엇인지 보여주게 되는 발터 울브리히트(Walter Ernst Paul Ulbricht)였다. 그는 스탈린 치하에서 사는 법을 아는 인간이었다. 물론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히틀러에게 그러했듯 스탈린에게도 맞섰고 더욱 혹독하게 대가를 치러야 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1939년 9월 9일, 발터 울브리히트는 당원들을 어떻게 설득할 지 당의 집행위원회인 정치국에 방안을 제시하라는 명을 받았다. 울브리히트가 회의에서 한 발언은 그가 얼마나 논증적인 창의성을 발휘했는지 보여준다.

"소비에트연방과 독일의 조약은 독일 파시즘을 소비에트 연방의 발 아래에 두는 것이므로 세계 노동계급을 지지하는 것이자 소비에트 연방을 둘러싼 거짓말이 모순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 p.51

굴라크에서 살아나온 정치범들도 환영받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살해된 독일 공산당 정치인 헤르만 레멜레의 아내 아나 레멜레는 스탈린의 지하 감옥에서 썩다가 전쟁이 끝나자 독일로 돌아가기를 시도했다. 1920년대 레멜레 가족은 발터 울브리히트와 가깝게 지냈다. 아나 레멜레는 필사적으로 울브리히트에게 몇 번이나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울브리히트는 아나를 철저히 외면했고 그녀는 1947년 낙담하여 세상을 떠나 남편과 아들이 살해된 외국 땅에 묻혀야 했다. 딸과 손주는 그때에도 굴라크에 있었다. - p.60

에르빈 예리스는 기나긴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1949년 자신에게 형을 선고한 러시아인 판사와 나는 대화를 절대 잊지 않았다. 판사는 에르빈에게 사형과 다를 바 없는 소련 굴라크 25년 형을 선고하면서 빈정거렸다. "시베리아가 말 많은 당신 입을 다물게 할거요!" 에르빈은 침착하게 받아쳤다. "그리고 당신 입도 말이죠." - p.61

1945년 5월 8일 독일은 항복했다. 완전히 페허로 변한 베를린을 비롯한 독일의 반쪽은 소련의 지배에 들어갔다. 히틀러 치하에서 나치에 맞서 싸우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세상이 왔다고 여겼지만 금방 착각에서 깨어나야 했다. 소련 치하 독일은 그들이 아니라 소련으로 망명하여 스탈린의 충견 노릇을 하던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몫이었다. 국가를 다스리는 법은 몰라도 권력을 어떻게 누려야 하는지는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스승인 스탈린에 비하면 훨씬 서툴렀지만 말이다. 의외로 스탈린은 두 개의 독일을 원치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히틀러만큼이나 탐욕스러우면서도 히틀러와 같은 도박꾼과는 거리가 멀었던 스탈린은 언제나 서방의 눈치를 보면서 소심하게 굴었고 이참에 자신들의 왕국을 세울 욕심에 눈이 먼 독일 공산주의자들을 향해 참을성을 가지라며 윽박질렀다. 그는 서방이 먼저 서독을 건설한 뒤에야 마지못하는 척 동독의 건설을 허락했다. 무슨 삼국지의 유비 포지션도 아니고. 물론 그렇지 않았더라도 스탈린이 서방 편으로 넘어갈 것이 뻔한 독일의 통일을 허락할 리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독일 공산주의자들 역시 모처럼 자기 앞에 놓여진 밥상을 남이 치울 때까지 군침만 흘리면서 멍청하게 지켜볼 리도 없었다. 인간의 욕심은 평등한 법이다.

오히려 스탈린은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이념적 열정을 말리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도 역사학자들은 스탈린이 전후 독일을 위해 구상한 계획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인다. 분명한 사실은 애초에 스탈린이 울브리히트에게 지시한 것은 점령지에만 국한하지 않고 독일 전체를 위하는 해법이었다는 것이다. 소비에트 이미지를 딴 체제의 구축은 스탈린의 의도가 아니었다. - p.82

울브리히트는 모든 자리를 공산주의자가 꿰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모두의 지지를 받는 안정적인 체제를 구축하려면 절대 그래서는 안 되었다. "우리는 굳이 공산주의자를 구청장에 앉힐 이유가 없다. 노동 계급이 밀집한 구에서 구청장은 독일사회민주당원이 좋다. 중산층 지역에서는 부르주아와 구청장직에 올라야 한다. 다만 반드시 반파시스트여야 하고 우리와 함께 일할 수 있어야 한다." - p.89

5월 23일 독일연방공화국이 탄생했다. 이제는 스탈린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9월 27일 모스크바를 방문한 독일사회주의 통일당 대표단을 접견했다. 울브리히트, 피크, 그로테볼은 스탈린을 만나기 위해 꼬박 열흘을 초조히 기다렸다. 스탈린은 끝내 체념하여 독일민주공화국 수립에 동의했다. - p.115

이 책에서는 1949년 10월 7일 이른바 '독일민주공화국' 즉 동독이 처음 건설되어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서독에 백기투항하는 1990년 10월 3일까지 꼭 39년 동안 장벽 너머의 세상이 어떠했는지를 다루고 있다. 그곳은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렇다고 지옥도 아니었다. 생각보다는 꽤 살만한 동네였다랄까. 서독보다는 가난하고 억압적이었다고 해도 북쪽 동네처럼 고난의 행군을 겪지도 않았고 공산주의 체제이다보니 대한민국의 우리 직장인들마냥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버둥거릴 필요도 없었다. 동독 지도자들은 마오쩌둥이나 폴 포트처럼 국가적 자살이나 다름없는 무모한 실험으로 나라를 막장으로 몰아넣거나 개인 숭배에 열을 올리는 대신 나름대로 민생에 신경썼다. 서방과의 거래로 들어온 현금은 자신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하는 대신 국민들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구매했다. 심지어 국민들의 커피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베트남에 대규모 커피 농장을 세우기도 했다. 통일된 후 동독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로서는 차라리 그 때가 좋았다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할 듯. 사람이란 겪어봐야 깨닫는 법이라. 문제는 그것이 동독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소련의 원조 덕분이었다는 사실이지만. 따라서 소련의 원조가 끊기자 동독의 운명도 그대로 끝장났다.

소비에트는 식량을 원조하면서 4억 8500만 루블 상당의 차관을 주었다. 뢰스트는 일주일 동안 버터, 식용유, 기름, 생선 통조림 따위를 가득 실은 마차가 3천대 씩 들어왔다고 회고했다. "전쟁 후 우리는 빈털털리였다. 먹을 게 아예 없었다. 나중에는 참새를 잡으려고 씨앗을 넣은 쥐덫을 놓기도 했다. 그런데 1950년대 중반이 되자 형편이 훨씬 나아졌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갑자기 부족한 것이 없어졌고 배를 곯는 일도 없었다." - p.206

동독 여성들은 저녁이 되면 동료들과 맥주를 마시러 나가며 가정 바깥에서도 사회생활을 했고 서독에서 경험하기 훨씬 어려운 방식으로 사회의 일원임을 느꼈다. 1955년 당시 독일민주공화국에서 절반 이상의 여성이 노동에 참여했다. 이 비율은 점점 더 높아져 1970년에는 여성 3명 중 2명이 일을 했다. 반면 독일연방공화국은 1950년 여성 1/3만이 일자리를 가졌고 1970년에도 27.5%에 불과했다. - p.228

동서양의 타국 정치 지도자들과 달리 독일민주공화국의 엘리트들은 검소한 환경에서 살았다. 그들의 집은 젊은 가족이 얻은 방 2개 짜리 아파트에 비하면 널찍했으나 사치스럽다거나 호화로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23채의 집은 하나같이 회색빛이었고 기와로 지붕을 이고 기능성 벽돌을 쌓아 지었다. 이는 독일 민주공화국 초기 일반인들이 살도록 도시에 마구 세운 조립식 건물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 p.239

사람들을 팔아서 번 돈은 소문과 달리 독일민주공화국의 엘리트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기금의 목적은 서독 채권자들이 독일민주공화국에 계속 돈을 대출해 주도록 충분한 신용을 보장하는 것과 동시에 신발, 열대과일, 폭발적인 인기의 오리지널 미국산 청바지와 같은 섬유제품을 수입할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1980년 8월 7일 내역에 따르면 3200만 도이치마르크가 자전거 타이어, 비스킷, 초콜릿, 포도주, 남성용 양말, 성인용 속옷, 도톰한 수건, 야외 활동용 신발, 청소용 천, 마른 행주를 사는데 쓰였다. - p.398

국가는 주택, 복지, 오락에 막대한 돈을 투자했다. 1975년 건설 활동은 1970년 대비 128.5%나 증가했다. 많은 건물이 개조되고 확장되어 사람들은 더 나은 곳에서 살고 일했다. 집세 보조금도 넉넉히 받아서 독일민주공화국 시민들은 괜찮은 주거지를 찾고도 비용을 감당하지 못할까 걱정할 일이 없었다. 서독 4인 가구가 순수입의 21%를 집세로 지출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동독 4인 가구의 집세는 4.4%를 차지했을 뿐이었다. 새로 지어진 조립식 건물들은 중앙난방과 단열, 개별 욕실과 널찍한 공간을 제공했다. 1980년대에는 거의 모든 집에 냉장고, 텔레비전, 세탁기가 있었다. - p.400

람베르츠가 고른 대상은 에티오피아였다. 그는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을 만나 커피를 제공받는 대가로 대형 트럭, 기계, 농기구 같은 독일민주공화국 물자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멩기스투는 자국의 저항과 반 혁명 움직임을 진압하고 이웃 국가 소말리아와 벌일 전쟁을 대비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무기이거나 무기를 살 현금이었다. 결국 멩기스투와 람베르츠는 파란 콩(총알)과 갈색 콩(커피)를 맞바꾸는 커피 협정을 체결했다. 람베르츠는 커피 5천 톤을 받는 대가로 5300만 마르크 상당의 무기류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 p.427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은 무너졌다. 그것도 불만 가득한 국민들의 손에 의해 말이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동독이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보다 더 가난해서가 아니라 서독보다 덜 풍요로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동독 지도자들의 가장 큰 실수는 동독을 서독보다 더 부유한 나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라기보다 그 사실을 국민들이 알지 못하도록 눈과 귀를 철저히 막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베를린 장벽 차단과는 별개로 서독과 동독의 친척들은 서로 서신과 선물을 주고 받을 수 있었고 까다롭기는 해도 어느 정도 왕래도 가능했다. 70여년 째 철저하게 장막을 두른 채 어떠한 접촉도 허락하지 않는 남북한과는 대조적이었다. 이것이 동독 지도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독에서 끊임없이 이탈자가 발생했으며 특히 가장 잘 교육받은 엘리트 계층일수록 더 나은 삶을 찾겠다는 환상을 품고 서독으로 탈출했던 이유였다. 인간은 남이 나보다 더 잘사는 것을 참지 못한다는 점에서 너무 솔직했다는 점이 이들의 공산주의 실험이 실패한 원인이랄까. 세상의 아이러니이다.

우리는 노동을 해서 월급을 받았고 열심히 일하면 그만큼 상여를 얻었다. 그럭저럭 잘 살았고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러다 1987년 시누이의 60번째 생일을 축하하러 서독을 방문했는데 그 때 비로소 넘치는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보았다. 올덴부르크의 슈퍼마켓 뒤로 남아도는 식료품이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었다. 유행이 지난 가구 부품은 곧장 매장에서 거대한 컨테이너로 옮겨졌다. 동독에서는 없어 못사는 것이 그곳에서는 그냥 버려지고 있었다. - p.456

1983년과 1984년 금융 협정을 계기로 바이에른과 독일민주공화국은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뜻밖의 연결고리를 형성했다. 자매도시가 생겨났고 연구 사업이 추진되었으며 문화교류가 빈번해졌다. 바이에른 국립박물관이 드레스덴에서 전시를 여는가 하면, 드레스덴의 예술 소장품이 뮌헨에 소개되었다. 1988년 기준으로 동서독이 함께 진행한 사업만 도 1천건이 넘었다. 서독 기업들은 니베아 크림처럼 독일민주공화국 시민들에게 인기 높은 몇몇 서독제품을 동독에서 생산하기도 했다. 동서독 국경 상황이 안화되고 통행 제안이 다소 풀리면서 동서독 사람들은 모든 방면에서 더욱 활발히 교류했다. 1987년 호네커는 헬무트 콜의 초청을 받아 본을 방문했다. 두 독일은 마침내 공존방법을 찾아낸 듯 했다. - p.491

1989년 11월 9일 자신들의 손으로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렸을 때 동독 주민들은 서독과 하나가 되기만 하면 자신들도 서독처럼 풍족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을 품었을 것이다. 이들은 서독의 풍족함만 보았을 뿐 서독에 산다고 해서 누구나 그 부를 똑같이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꿈꿀 수 없는 성공의 기회 또한 누릴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라고 하지만 그런 혜택을 누리는 것은 극소수의 행운아이며, 대부분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엄청난 노력을 해야만 비로소 최소한의 생활이나마 누리는 법이다. 그 경쟁에 뛰어들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장벽부터 무너뜨린 동독 주민들은 대번에 그 대가를 톡톡이 치러야 했다. 3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경제적 격차는 여전하다. 그렇다고 해서 대중이 어리석었고 동독 지도자들이 옳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들이 벌인 실험은 애초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차라리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으면 동서독을 나누는 갈등도 없었을테니 말이다.

2018년 동독의 반 난민 시위. 동독 지역에서 극우세력은 날로 기승을 부리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통일 이후 삶이 더 나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팍팍해졌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들의 실수는 자본주의의 풍요만 보았고 그게 공짜가 아님을 몰랐다. 그래서 속았다면서.


그나마 동독 주민들 입장에서 다행스러운 일은 더 최악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남북한이 몇 번의 화해 제스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증오를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는 1950년부터 3년 동안 죽기살기로 싸웠기 때문이었다. 친구끼리도 주먹 다짐을 하거나 사소한 감정 싸움 만으로도 쉽게 마음을 풀지 못하는 법인데 하물며 전쟁의 상처는 지도자들끼리 화기애애하게 악수한다고 봄바람에 눈 녹듯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그 상처를 봉합하기는 커녕 오히려 아물지 않는 쪽이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여기는 인간들도 있기 마련이다. 이것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이자 남북 통일을 내세웠던 우리 역대 정권의 시도가 실패한 이유이기도 하다. 독일은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 따라서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만으로 두 나라는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냉전 시절 동독 지도자들이 김일성처럼 서독을 먹겠다면서 스탈린을 부추겨 전쟁을 일으켰다면 동독은 그 때 멸망했거나 반대로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일성이 6.25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남북한 관계는 지금보다 훨씬 덜 복잡했을 것이고 통일되었을지도 모른다.

저자인 카트야 호이어(katja hoyer)는 동독 출신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로 동독에서도 가장 동쪽 폴란드 국경의 구벤(Guben)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 동독군 장교라고 한다. 1985년 생이라고 하니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네살이었고 동독 시절의 삶을 기억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대신 동독 시절이 어떠했는지 들었을 것이고, 동독이 무너진 후의 삶은 기억할 것이다. 저널리스트 출신답게 그 시절 사람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서술하여 딱딱하지 않고 부담 없이 읽을 책이다. 국내에 동독사를 다룬 책은 이 책이 거의 처음인듯. 번역도 매끄럽다. 올해 나온 역사책 중에는 교유서가의 <독일인의 전쟁>과 함께 최고의 책으로 추천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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