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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3 ㅣ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3
박종호 지음 / 시공사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1, 2, 3'을 읽는 동안 무척 즐겁고 흥겹고 들뜨있었다.
내 가슴에 도끼같은 책을 만났을 때는 신나서, 걱정이고 뭐고 잊을 수 있어 무척 감사하다.
엘비라 마디간, out of Africa, 쇼생크 탈출, 인생은 아름다워등의 ost로만 기억하던 것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피가로의 결혼' 중 '편지 이중창',
'호프만 이야기' 중 '뱃노래'로 기억하게 해주니, 어설프게 알고 있던 것들을 제대로 알게 해주니
이 얼마나 즐겁고 고마운 일이냐!
예전엔 야상곡, 원무곡, 기상곡, 광시곡처럼 번역해서 불렀는데, 요즘은 녹턴, 왈츠, 카프리치오,
랩소디와 같이 원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나는 이제야 알았다.
그저 유명해진 부분부분 만으로 귀에 익었던 클래식음악들에 익숙해서, 전곡을 듣는다는 것은
다소 지루하게 느낀적이 많았는데, 이 책 3권까지를 모두 읽고 나니 전곡을 듣지 않고는 못
배기겠으며, 아울러 전곡이 주는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도 알 것 같다.
어제는 비가 왔다. 차를 몰고 도음산 수련원으로 갔는데, 마침 라디오에서 베토벤 <황제>가
나오는거라. 그 비와, 가을로 다가가는 산의 아름다움이 음악과 하나 되어, 그 아름다움을 절정
으로 치닫게 하는데, 우와~ 얼마나 좋던지! 이 책들을 읽지 않았더라면 그때의 베토벤 <황제>를
이렇듯 가슴으로 느낄 수는 없었으리라!
무척 훌륭한 책인데 다만 3권을 다 읽을 때까지 클래식 용어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어서 다소
아쉬웠다. 아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모르는 것
이다.
Requiem in d minor K.626
Heidenroslein D.257
Die Forelle Op.32
위에서 레퀴엠은 K.626이지만, 보리수는 D.257이라 하고, 송어는 Op.32 라 한다.
왜 다같이 작품번호 Op.를 사용하지 않고 달리 사용하는지, K와 D를 사용하는 근거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한 가지를 더 추가하자면 각각의 영어단어에 대한 영어철자를 명기하지 않은 것들이 있어서
몇몇은 혼란스럽기도 했다.
예를 들면,
"(...) 지금의 DG에 전속되면서 디스코그래피에서 약간 묻혀 있는 느낌이지만......"
"그 후에 티보데는 세계적인 음반 레이블인 데카의 피아니스트로......"
<디스코그래피>는 이 분야를 잘 아는 사람들이라면 자주 접하는 용어가 될지 모르지만 일반인
들에겐 생소한 단어가 아닐라나... <레이블>은 흔히 우리는 <라벨>이라고 많이 사용하고 있
어서 무슨 말인가 한참 찾아 보아야 했다. 이런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다소 대중화 되어
있지 않은 영어의 한국발음을 적을 때는 반드시 그 단어의 철자를 같이 병기하는 것이 올바르
지 않을까 싶다, 다음처럼.
"(...) 지금의 DG에 전속되면서 디스코그래피(discography)에서 약간 묻혀 있는 느낌이지만
....."
"그 후에 티보데는 세계적인 음반 레이블(label)인 데카의 피아니스트로......"
이 책, 3권 역시 네 부분으로 나눈 그 소제목들이 한결같이 잘 어울린다.
-소년의 시대, 추억의 고향
-안타까운 청춘, 향기로운 열정
-장녀의 무게, 고독의 시절
-아름다운 만년, 끝나지 않은 시간
박종호는 필시 글쓰기에도 전문가인 듯 싶다.
"그 음악은 밤공기의 입자 하나하나를 부수면서, 그것들을 크리스털 같은 새롭고 빛나는
분자들로 바꾸는 것만 같았다."
"그의 녹턴을 들으면, 먼저 기막힌 음색에 압도당한다. 일단 그 어떤 피아니스트도 하늘에
물방울을 튀기는 것 같은 루빈스타인의 음색을 넘어서지 않는 한, (...)."
"녹턴은 아주 자유롭게 연주해야 한다.
자유란 단어야말로 이 곡의 대표적인 정신이다.
하지만 그 자유도 오선지 안에서만 구가되는 것이다.
오선지 안에 갇힌 음표들은 오선지 밖으로 날아갈 듯 날아갈 듯 노래하지만,
결코 밖으로 멀리 날아가지 않는다.
쇼팽의 녹턴을 듣고 있으면 평행으로 그려진 다섯 줄의 반듯함 안에서 일탈을 원하지만
다시 돌아오고 또 도망치려 하지만 결국 돌아오고야 마는 우리를 보는 것 같다.
야상곡이 흐르는 밤이면, 듣다가 잠든 나의 귓전에 녹턴이 꿈을 그려 준다.
우리는 꿈속에서 환상을 그리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있다.
마치 녹턴처럼...... .
그러나 그 꿈이 있기에 살아간다."
법정스님의 글을 읽으면서 남자의 감수성이 여자보다 더 깊을 수도 있구나란 걸 느꼈는데
박종호 역시 같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의 감수성은 오히려 어느 여성의 것보다 진하고
섬세하고 깊다.
우리는 하나의 전문직도 어렵거늘 그는 의사, 클래식음악, 글쓰기, 무려 3가지 분야에서
전문성을 자랑하고 있으니 - 아니, 이 정도면 어쩌면 내가 모르는 전문성을 더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그를 흠모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살다 보면 너무 힘든 일과 마주칠 때가 있다.
그때 무엇이 위안을 줄 수 있을까?
사람도 믿음도 내 손에 잡히지 않는 순간이 있다.
다른 누구에게 나의 슬픔, 나의 두려움, 나의 불안을 다 말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고백하는 것 자체가 더욱 두렵고 반추하는 일이 더욱 아프기 때문이다.
그때 경력의 정점에서 스스로 인생을 마감해야 했던 한 남자의 유산, 이것만큼 나를 위로
해 주는 것이 있을까?
그는 분명히 지금의 나보다 더 큰 위험에 처했던 것이며 더 큰 슬픔 속에서 억수로 쏟아지는
장대비를 무방비로 맞듯이 그렇게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절규와 탄식은 나를 위로한다.
'그래, 나는 그보다 낫잖아...... .'
<비창>은 손으로 쓴 작품이 아니다.
이것은 눈물로, 그것도 피눈물로 쓴 그(차이코프스키)의 유서요, 자신이 써서 자신에게 바친
진혼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