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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의 금강경 강의
법륜 지음 / 정토출판 / 2012년 11월
평점 :
도서관서 책을 주로 빌려 읽다 보면, 빌려 읽기 잘했다 싶은 책이 있는 반면, 어떤 책은 정말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책도 있다. 책 표지가 빨간 색 천으로 된 이 이쁜 책은 정말 사고
싶은 책이다. 상(相)을 내지 말라 그리 이르건만 과연 법륜 스님이다 싶은 상을 도저히 내지
않을 수가 없다.ㅎㅎ
<지금 여기 깨어있기>와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오히려 좋더라. 예전에 <지금 여기 깨어있기>
를 읽을 땐 연거푸 3번을 내리 읽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이해가
쉬운 것은 <금강경>과 함께여서인가 싶다. 내 공부가 조금 더 깊어졌나? 설마..ㅎㅎ
학창시절 선생님들도 지루하거나, 무섭기만 하거나, 성의 없거나, 열정만 있거나 등등 다양한
분들 속에서 꼭 잘 가르치는 확실한 선생님들이 간혹 있었다. 법륜 스님의 금강경 해설을 보니
그 시절 확실했던 잘 가르치던 선생님이 떠오른다. 그런 훌륭한 선생님은 학생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으며, 평생의 멘토가 되기도 한다.
올해 5월 말 경에 <금강경>을 처음 읽었는데, 제1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부터 딱 걸리더라.
다이아몬드처럼 찬란하고 빛나는, 그리 훌륭한 경(經)의 시작이 고작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탁발하는 모습이며, 발을 씻고 자리에 앉는 모습만이라니, 이것이 제 1분(分)이라니, 참 어이
가 없었다. 그 유명한 경의 시작이 고작 배경 설명 뿐이란 말인가? 아닐텐데... 내가 모르는
것이 뭘까 싶어서 금강경 해설서를 찾아 읽다 보니 법륜 스님의 금강경까지 오게 되었고, 이
책을 만난 것이 무척 감사하다.
제 1분은 평범한 일상의 모습에 최고의 도(道)가 있으며, 1분에서 이 의미를 깨달으면 나머지
뒷 부분은 보충 설명에 불과하다는 해설을 그간의 몇 권의 해설서를 보고 나니 이제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계(五戒)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대부분의 책들은 불살생(不殺生) 등등으로 표현하지만 법륜
스님은 "첫째, 생명을 가진 존재는 그 누구라도 죽기를 싫어하고 살기를 원하므로 함부로 살생
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이유에 대한 언급까지 같이 엮어 두어서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
또한 상(相)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설명에 대해서는 이 책보다 더 잘할 수는 없지 싶다.
꼭 필요한 용어설명이나, 예시로 든 이야기들, 경의 풀이가 지루할 사이가 없으며 과연 다음
분(分)의 해설은 어떻게 해 두셨나 궁금해서 책을 놓을 수가 없더라.
다음엔 도올의 <금강경 강해>를 읽을 참인데 과연 이보다 더 재밌을까 너무 궁금하다.
이 책의 제목이 <금강경 강의>이니, 내가 이 강의를 수강한 학생이라면 A+는 따 놓은
당상이다. 실천적인 면에서야 과락일지 모르겠으나 지식적인 면에서는 아주 쉽고 재미있으면
서도 훌륭한 강의여서 제차 공부해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으니 말이다.
*명상법 가운데 시계를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일상 속에서 시간을 잊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런 명상법은 나를 둘러싼 온갖 틀과 관념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를 돌아보게 하는 효과가 있
습니다.
*아상(我相)은 남과 구분된 나라는 존재를 고집하고,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 생각한 것을 말합
니다. 그러므로 친구는 말할 것 없고 부부나 부모 자식조차 같은 것을 보고 들으면서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 아상으로부터 다시 두 가지 망상이 일어납니다. 내 것이라는 소유 의식(我所)과 내 생각이
옳다는 고집(我執)입니다. 내 것이라는 소유 의식은 탐욕을 불러일으키고, 내 생각이 옳다는
고집은 분노를 일으킵니다. (...) 이렇게 자아에 대한 개념을 아상이라 한다면 영혼에 대한 개념
을 인상, 존재에 대한 개념을 중생상, 생명에 대한 개념을 수자상이라 말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는 상의 범위를 구분 짓는 경계에 따라서 나와 너를 구별하는 아상, 인간과 비인간을 구별하는
인상, 생명과 무생명을 구별하는 중생상, 존재와 비존재를 구별하는 수자상으로 분류하기도 합
니다.
*상대에게 베푸는 것으로 내 할 일은 모두 끝났다는 마음, 베풀었다는 생각마저 없이 행하는
보시는 내가 행복해지는 길이며 번뇌를 소멸하는 길입니다. (...) 상을 버린 보시는 베풂을 받는
상대가 아니라 베풂을 행하는 나에게 기쁨과 행복을 선물합니다. 내 기쁨을 위해 베풀고 있음을
자각하고, 내 베풂을 받아주는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보시해야 합니다.
*남에게 도움을 받으려면, 그들이 보기에 내 모습이 불쌍해야 합니다. 그러니 도움 받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사람은 자기 존재를 불쌍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베푸는 마음을 내는 것이 행복
으로 가는 길입니다. 행복해지고 싶으면 사랑받으려 하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해
받으려 하지 말고 이해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도움 받으려 하지 말고 도움 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보살핌 받으려 하지 말고 보살펴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것이 흔들리지 않는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악을 멀리한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첫째, 생명을 가진 존재는 그 누구라도
죽기를 싫어하고 살기를 원하므로 함부로 살생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누구나 자기 물건
을 잃어버리면 괴로워하므로 상대가 주지 않는 물건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누구나 원
하지 않는 성적 행위를 강요 받으며 괴로워하므로 삿된 음행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 누구
나 남에게 속고 싶어 하지 않으므로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섯째, 맑은 정신으로 살아
가려면 술이나 마약 같은 중독성 물질에 중독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오계(五戒)입니다.
*그런데 무주상보시의 공덕이 엄청나다는 말을 듣고는 보시를 하면서 한사코 이름을 밝히지 않
겠다고 고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이름을 내는 데 연연하기보다는 이름을 밝히지 않는게
좋은 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무주상보시의 참뜻은 이름을 내고 안 내고에 있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다니는 큰길가에 이름을 내걸었다 해도 돌아올 복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지 않으면 그것
이 오히려 무주상보시입니다. (...) 복이라 할 게 없음을 아는 것이 복 중에 가장 큰 복입니다.
*열 번 해서 안 되고 스무 번 해서 안 되고 백 번 해서 안 되다가도 어느 순간 불현듯 될 때가
있습니다. (...) 한 번 깨닫기만 하면 그 순간 모든 게 완벽한 경지에 이르게 될 거라는 생각은
깨달음에 대한 환상입니다. 하지만 한 번도 깨달아 본 적이 없는 사람과 한 번이라도 깨달음
의 맛을 본 사람은 그 힘이 다릅니다. 단 한 번이라도 깨달음의 맛을 보고 나면 '확실히 이렇게
하면 되는 거구나!' 하는 믿음이 생깁니다.
*내가 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나면 더 이상 아무 참을 것이 없는 행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인욕
바라밀입니다.
베푼다는 생각 없이 베푸는 행이 보시바라밀이며, 하고 싶고 하기 싫다는 모든 욕망을 끊어버림
으로써 계율을 지킨다는 생각 없이 계율을 지키는 것이 지계바라밀이고, 노력한다고 할 것이
없는 행이 정진바라밀입니다. 고요하려는 생각이 없는 행이 선정바라밀이며, 깨달음을 얻겠다
는 생각이 없는 행이 지혜바라밀입니다. 인욕바라밀이 여래가 인욕바라밀을 말함이 아니라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이라고 한다는 가르침이 그런 이치입니다. 모든 상을 떠남으로써 더 이상
참을 것이 없는 행이 참다운 인욕바라밀입니다.
*무슨 일로든 화가 잔뜩 났을 때의 자신을 돌이켜보면 그때의 내 마음은 '내가 옳다' '상대가 잘
못했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화가 나지 않습니다.
또 비록 상대가 잘못했더라도 '저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고 그의 처지와
마음을 이해하면 화가 나지 않습니다. 또 남을 탓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는 왜 이 모양일까?'
하고 자책하고 스스로를 탓하며 화내는 것 역시 '나는 남보다 잘나야 한다'는 아상에서 비롯된
태도입니다.
*내가 옳다는 상을 내려놓으면 상대의 생각과 입장이 눈에 들어오고, 상대의 생각과 입장을 이해
하면 그것이 바로 상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나에게는 내 입장이 있듯이 상대에게는 상대의 입
장이 있다는 그 사실만이 유일한 객관입니다.
*금강경을 수지독송하고 남을 위해 설한다는 것은 금강경의 참뜻을 마음에 새겨 일체의 상을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남을 이해하는 것은 그를 위하는 일인 것 같지만 사실은 나 자신에게 가장 큰 이익이 됩니다.
남을 미워하는 것은 그를 해치는 일인 것 같지만 미워하는 마음으로 괴로운 사람은 나 자신이고
결국 나에게 더 큰 해악이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게 부처님의 가피인 줄 압니다. 하지만 나쁜 일
이라는 것이 오히려 부처님의 가피인 줄 아는 이 경지에 이르면 일체가 다 걸림 없는 자유로운
삶이 열립니다.
*"내가 네 덕에 요새 기도를 해서 마음이 편하고 절도 해서 운동도 잘하고 있구나. 얘야, 고맙다."
*그런데 사실 중생의 사량 분별로는 복과 재앙을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추구
하는 복이라는 것이 실은 재앙일 확률이 더 높습니다. 쥐가 쥐약이 든 음식을 먹는 것처럼 말입
니다.
*작은 우물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안에서 살아온 개구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바닷가에 살던
개구리가 그 우물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우물에 살던 개구리가 물었습니다.
"바닷가에서 살다 왔다고? 그 바다라는 게 얼마만 해?"
"굉장히 커."
"굉장히? 저기 있는 돌덩이만 해?"
"어림도 없지. 훨씬 더 커."
"그럼 이 우물 반쯤?"
"아니, 도저히 비교가 안 돼."
"아니 그럼, 이 우물만 하다는 거야?"
"에이, 이 우물은 어림도 없지."
"야, 거짓말 마! 세상에 이 우물보다 큰 게 어디 있어?"
우물 속에서 평생을 산 개구리는 바다에서 온 개구리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겠지요.
사실을 알면 마음이 곧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건 이런 정도의 비유를 말합니다.
그럼 여우처럼 의심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하루는 여우가 숲 속을 지나가는데 고깃덩어리 하나가 땅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아무 수고
없이 공짜로 고기를 먹게 된 여우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먹이를 입에 넣으려는
순간 꾀가 많은 여우는 문득 불안해졌습니다.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이런 고깃덩어리가 왜 여기에 떨어져 있는 걸까? 사람들이 독을
넣어서 미끼로 떨어뜨려 놓은 게 분명해!"
여우는 집었던 고깃덩어리를 내려놓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산모퉁이
를 돌아갈 때쯤 다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독을 넣은 미끼라면 그렇게 아무렇게나 던져 놨겠어? 그릇이나 나뭇잎에 잘 싸서 올려두었겠지.
땅에 떨어져 흙이 묻었다는 건 우연히 떨어졌다는 증거야. 다른 동물들은 독이 들었을까봐 겁이
나서 못 먹겠지만 지혜로운 나는 먹을 수가 있지."
여우는 다시 고기가 놓인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다행히 고기는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기를 입에 넣으려는 순간 다시 또 의심이 들었습니다.
"아니지, 음식을 얌전히 잘 올려놓으면 독이 든 음식인 줄 알아차리고 먹지 않을 테니 우연히 떨
어진 것처럼 보이려고 일부러 땅에 던져놓은 게 아니겠어? 다른 동물들은 어리석어서 이런 생각
을 못 하고 덥석 물겠지만 나는 절대 안 속아."
그리고 고깃덩어리를 내려놓고 다시 돌아섰습니다. 여우는 그 뒤로도 아홉 번이나 산길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의심과 망설임을 되풀이했습니다. (...)
여우 마음은 아홉 번 바뀌었다지만 사람 마음은 백 번도 더 흔들립니다.
그런데 아홉 번 의심하던 여우는 결국 그 먹이를 먹었을까요, 먹지 않았을까요? 독이 든 고기라면
먹었을 테고, 독이 들지 않은 고기라면 먹지 못했을 겁니다. 깨달음의 지혜로 세상을 보지 못하고
어리석은 마음으로 잔꾀를 부리면 결국 제 꾀에 제가 넘어가게 마련이니까요.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괴로움에서 사라졌다고 말하지만 실은 벗어나거나 사라질 괴로움이란
실체가 있는 게 아닙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괴로움이 사라졌다는 것은 단지 지금 내 마음
이 더 이상 괴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이 괴로운 이유는 괴로움이라는 실체가 있어서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내가 다만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다람쥐가 어떻게 도토리를 찾습니까? 그냥 찾으러 다닙니다. 이 괴로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냥 벗어나면 됩니다. (...) 지금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꽉 움켜쥐고 있는
자기 생각만 내려놓으면 그만입니다.
*좋은 것도 내 인생이고 나쁜 것도 내 인생입니다. 바라는 대로 되는 것도 내 인생이고,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것도 내 인생입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사실 내 속에서 순간순간 일어나는 분별을 일컫는 다른 이름
입니다.
*'바보같이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하고 자책하는 것은 스스로를 더 큰 괴로움 속으로 밀어 넣는
일입니다. 남을 시비하는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분별을 일으켰던 자기를 탓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앞으로는 똑같은 어리석음을 짓지 않으려는
노력입니다.
*'부처님, 저는 놔두시고 다른 사람을 돌봐주세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우리 가족은 제가 알아서 돌볼 테니 걱정 마세요.'
'우리나라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