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음악가의 음악 이야기 - 개정판 마음이 쑥쑥 자라는 세상 모든 시리즈 2
유미선 지음, 최상훈 그림 / 꿈소담이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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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베토벤만 편애해서 듣다 보니 다른 음악에 대한 관심이 없었는데,

이 책 덕분에 하이든의 종달새, 천지창조도 들어보고,

브람스의 대학축전 서곡의 활기와 기상, 기개에도 빠져보고,

아주 오랜만에 안익태의 한국환상곡도 들어보게 된다.

 

푸치니의 나비부인은 일본 기생이었고,

모차르트는 레퀴엠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며,

요한 스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은 푸르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들리던, 미사 중간에 불려지던 무반주 노래가 그레고리오 성가이며,

그레고리오 교황의 어깨에 비둘기가 앉아 성가를 불러주고,

그것을 교황이 다시 서기에게 불러주었다니,

그레고리오 성가, 노래로 하는 기도, 말조차도 참 아름답다.

 

어린이들을 위한 도서여서인지, 브람스는 평생 클라라만 바라보며 독신으로

살았다는 이야기같은 것은 실려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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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 김형석 교수의 신앙과 인생
김형석 지음 / 두란노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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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고 아름다운 삶이란 어떤 삶일까 싶었다.

저자의 인생과 종교가 가득한 이 책에서, 기대했던 대로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접하게 되니,

나도 그를 본보기로 본받고 따라서, 내 삶도 역시 선하고 아름다운 시간들로 채워나가야겠다

하고 다짐하게 된다.

가장 바람직한 종교인의 자세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겐 무척 큰 수확이었다.

진정한 종교인은 내 것만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 것이 아닌 다른 것은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믿으라, 믿으라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믿고 있을 뿐이다.

 

"저물어 가는 저녁,

석가님의 옆에 서서 이야기를 들으며 산 밑의 마을로 걷고 있는 자신을 생각해보라.

(..) 감람산 웅기중기 솟은 바윗돌 모퉁이에 가지런히 누워, 들려오는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잠드는 제자들의 한 사람으로 자처해보라."

                                                                   - <영원과 사랑의 대화(김형석)> 중에서

 

저물어 가는 저녁,

나는 김형석 교수님의 옆에 서서 흐트러짐 없는, 차분하고 겸손한 음성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산 밑의 마을로 걷고 있는 나 자신을 상상해 본다.

'나를 위해 한 일은 남는게 없어요.' 라던 그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 일은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안내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오히려 그것이 나 자신의 신앙과 성경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고, 신학자도

목회자도 아닌 내가 나름대로 신앙과 성경적인 신학을 터득하게 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죄악이란 무엇인가? 어떤 교리나 율법보다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와 고통을 주는 것이

죄악이다. 만일 많은 종교인과 그리스도인들이 이웃과 다른 사람에게 피해와 고통을 주는

것이 죄악이라는 뜻을 가르쳤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훨씬 좋은 삶을 영위할 수 있으며,

하늘나라의 희망이 밝아졌을 것이다.

 

*조선 왕조 초기에 우리는 주자학을 신봉해 왔다. 그것은 독일의 관념 철학과 성격이 비슷한

논리의 관념성, 즉 형식논리에 속하는편이다. 그리고 불교를 멀리하고 유교를 받아들이면서

유교의 윤리성이나 도의적 가치보다는 교조주의로 수용하면서 형식적으로 교화했던 것이다.

이 둘, 즉 형식 논리와 교조주의가 합쳐지면서 불행하게도 흑백 논리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흑과 백은 이론상으로는 추정할 수 있으나 현실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흑과

백의 중간인 회색이 있을 뿐이다. 백에 가까운 밝은 회색과 흑에 가까운 짙은 회색이 있을

뿐이다. 경험주의자들은 짙은 회색에서 밝은 회색을 찾아가고, 합리주의자들은 흑백을

구별하며 백색을 택하는 방법을 따랐다. 그런데 우리는 나와 우리 것은 백이고 너와 너희들 것은

흑이라는, 중간을 배제한 이론을 전개시켰다. 유림과 학문을 노하는 사대부들의 사고방식이

그러하였다. 설상가상으로 흑백 논리 위에 권력을 독점하려는 집단 이기주의까지 가세하면서

파벌 위주의 대결과 싸움이 해소되지 못했다. (...) 노사가 협력보다는 투쟁을 일삼는 이유도

짐작할 수 있다. 지극히 작은 대립에서도 결사반대나 결사 투쟁을 예사로이 내세우는 풍토도

그러하다.

 

*딸은 참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겸손하고 성실하며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가짐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없어 보여도 성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면 믿고 사랑할 수

있어도, 나와 같은 신앙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가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멀리하게 된다. (...)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신앙보다는 겸손하고 성실한 인간성을 갖춘 사람이 주님의 뜻에 더

가깝다고 나는 믿는다.

 

*부모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부모를 위하며 존경하게 되어 있다. 효는 존경과 위하는 뜻으로

채워진다. (...) 가족 관계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위해 주는 삶이다.

자녀들이 먼저 부모를 위해 주는 것이 순서가 아니다. 부모가 먼저 아랫사람들을 사랑하고

위해 주면, 아랫사람들은 그것을 배우고 따라가게 되어 있다.

 

*가장 소중한 사고력은 어떻게 키워 주자는 것인가. 어렸을 때의 성적으로 일생을 평가하거나

지식의 축적량으로 인물을 결정짓는 교육계에서 어떻게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소망스러운

교육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나는 내 후배 교수들이 무리를 해 가면서도 자녀들을 외국으로

보내는 이유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랑하는 자녀들의 행복과 장래를 위해서라면

교육 이민을 나쁘다고만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모든 자녀가 성공과 행복을 찾아 누릴 자질과 권리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좌절

시키거나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오늘의 우리나라 교육이다. 왜 이런 후회스러운 걱정을

하는가. 개성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의 정신이다.

 

*인생의 황금기는 과연 언제인가? (...) 우리가 얻은 결론은 60에서 75세까지였다는 공감대

였다. 50부터인가 하고 생각해보았으나 그 기간에는 일은 열심히 했으나 아직 인간적인

미숙함이 많았다는 점을 고려했다. 그래도 60이 되면서부터는 내가 나를 믿을 수 있어,

지도자의 품격을 갖출 수도 있고, 사회인으로서의 자신감도 갖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도 그랬던 것 같았다. 60 이전에는 인간적으로 아직 철들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인했던

셈이다. 그리고 60부터 75세쯤까지는 모든 면에서 성장을 계속할 수 있는 나이였던 것 같다.

그 60에서 75세까지가 인생의 황금기였던 것 같다는 합의를 보았던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나에게 언제쯤이 가장 좋은 나이였는가 하고 물으면, 75세 정도였다고 대답할

것이다.

 

*기독교의 진리란 무엇인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교리가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도움을 받아 영광을 더하는 차원의 존재가 아니다. 예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이웃을 위해 섬기고 희생하는 사랑이라고 가르쳤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안고 있는 문제에

궁극적인 해답을 주어야 한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확신을 주어야 한다.

세상 사람은 그 해답을 얻기 위해 종교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것이 진리인 것이다. 기독교

의 높은 뜻이 있다면, 그 진리는 우리의 연구나 지혜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였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 교훈이 우리 모두의 인생관이 되고, 가치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중심 되는 목표는 교회를 통해 참 신앙을 가진 많은 주님의 일꾼을

사회 모든 분야로 보내는 책임이다.

전 인격을 갖추고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며 새로운 사명을 갖고

하늘나라 건설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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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과 사랑의 대화
김형석 지음 / 김영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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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제일교회에서 김형석 교수님의 강의가 있었다.

100세 노인의 모습이 아니라,

100세 노교수의 모습이었다고 말하는게 더 나를 흡족하게 하는 표현일 것 같다.

어쩌면 그리도 당당하신지, 어쩌면 그리도 말씀이 바르고, 진솔하신지,

어쩌면 그리도 흐트러진 모습 하나 없으신지,

자신의 제자들을 이를때는 꼭 "내 사랑하는 제자가~~"라고 말씀하실 때는

제자를 향한 스승의 사랑이 그대로 내게 다가왔다.

앞으로의 나의 인생에 귀감이 되실 분 같았다.

독서하라, 일하라, 이 두가지 외에도 내 가슴을 울리던 말씀은,

나를 위해서 한 일은 남는게 없더라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내 선한 이웃을 위해서 하라는 말씀은

무척 귀한 것이 되어서 나의 가슴을 채웠다.

 

교회에 모인 대부분의 청강자들은 노인들이었는데, 내 보기에 이런 강의는 노인들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30 ~ 60대의 사람들이 들었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오래 전에 김형석 교수님의 책 제목들에 이끌렸던 적이 있었으나

책읽기로 이어지지는 못했는데, 이번을 계기로 그의 책들을 읽게 되어서

여간 고맙고 기쁘지 않다.

 

이 책,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무척 재미나게 읽었다.

아쉬운 점은 각 수필마다에 그 글을 적은 연도를 표시해두었더라면

시대나 상황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더 많이 되었을텐데 라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에 넣어 두신 어느 지인의 사랑이야기는,

이 책 전체의 교수님의 잔잔하지만 울림있는 수필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이어서

없는 편이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으나,

그 지인을 생각하는 교수님의 마음을 헤아려보자니, 충분히 이해가 됨직도 했다.

 

오래 전,

자신의 종교인 기독교를 어떻게 표현하셨을까,

신앙을 어떤 시각으로 보셨을까가 무척 궁금했었는데,

역시 교수님은 시대의 본보기이자 귀감이신 분이시며,

말씨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강의하시던 모습에서,

자신의 학생들에게도 높임말을 사용하는 것에서,

거듭 어떤 100년의 삶을 보내고 계시는지 느껴졌다.

 

내 앞에 거대한 산이 있어서,

거센 태풍은 막아주고,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광은,

부드러운 미풍은,  

나를 더 즐겁고 건강한 삶으로 이끌어주며, 격려해주며, 위안을 준다.

오늘도 그 큰 산 하나를 가슴에 품었다.

 

 

 

 

 

 

*종교계의 성자들은 문제 삼을 필요가 없이 인류의 벗이라고 곧 느껴진다. 저물어 가는 저녁,

석가님의 옆에 서서 이야기를 들으며 산 밑의 마을로 걷고 있는 자신을 생각해보라.

공자님을 모시고 식탁에 둘러앉아 잔을 나누며 그 원만한 인품에 접하고 있는 위치에

스스로를 놓아보라. 감람산 웅기중기 솟은 바윗돌 모퉁이에 가지런히 누워, 들려오는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잠드는 제자들의 한 사람으로 자처해보라.

 

*"무엇을 그렇게 걱정하나? 옳다고 믿는 대로 살면 곧 뜻대로 될텐데!"

 

*청년기는 근면과 더불어 활동의 기간이다. 가장 많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가장 큰 수고와

노력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청년기는 언제나 분투와 고생의 기간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삶의 목적인가?' '이러기 위하여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악을 이겨나갈 수 있는가?' (...) 사람의 일생을 등산에 비교한다면 정신적인

면에서는 등산의 수고가 곧 악에의 항쟁인 것이다. 높은 산정에서의 즐거움과 행복,

그것은 악과 싸워서 승리한 사람에게 주어진 만족과 행복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건강한 삶이 중요하다는 사실에는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건강이

유일한 조건도 아니며 절대의 여건도 못 된다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병을 통하여 인생의 뜻을 깨닫기도 하며, 건강치 못한 사람은 모두가 불행해진다는

이론도 성립되 못한다. 건강은 소망스러운 조건이다. 그러나 절대의 유일한 조건과 목적은

되지 못한다.

 

*인간은 결국 자기 인격의 성장만큼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인격이 50이면 그 사람은

모든 면에서 50의 생활 이하에 머문다. 인격 이상의 삶을 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릇의 크기만큼 물건을 담을 수 있다는 이치와 마찬가지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남이 소유하는 것은 다 버려도 남이 자기의 것으로 할 수 없는 것은

모두 내 것으로 하자고 마음에 타일렀다.

 

*오늘 우리는 전 세계의 기독교 특히 카톨릭교회의 초대 대표자인 예수의 제자 베드로를 안다.

베드로는 어부였다. 고기를 잡아 몇 식구의 식생활을 해결해야 하는 초라한 늙은이였다.

이미 수십 년을 물고기잡이에 다 허송해버린 인생의 찌꺼기에 지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그의 늙은 육체, 보잘것없는 심중에는 새로운

불길이 타올랐다. 그는 마침내 전 세계를 불사르는 새로운 역사의 혁명을 이룩하고야 말았다.

(...) 공연히 불필요한 후회로 한숨을 지을 때가 아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 인생의

게임을 다시 시작하자. 최선의 노력으로 다시 출발하자. 역사는 언제나 이런 인간을 찾는

것이며 신은 항상 이러한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제3의 부류가 있다. 그들은 늙음을 모르는 사람들이며 죽음이 눈앞에 당도

할 때까지 젊은이다운 신념과 희망을 가지고 꾸준히 일하는 사람이다. 노년기에 이를수록

더욱 성스러워지며 나이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의의를 보다 깊이 발견해 나아가는 사람들

이다. 항상 어린이 같은 고운 마음씨와 무엇인가 한 가지라도 더 남겨주고 싶은 심정에서

노년기를 보내는 이들이다. 이런 사람의 수가 아주 많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실망할

정도로 그 수가 적은 것도 아니다. (...) 그러나 지금 이야기한 제3의 노년기를 맞이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 송죽과 같이 항상 푸르며 노년기를 가장 충만한 행복과 영광으로

맞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거기에는 앞에서 말한 두 종류의 노년과 근본적으로 다른 조건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종교와 신앙, 내세관의 유무인 것이다. 이것이 있고 없음이, 그것을 가지고 못 가짐이 인생의

노년기를 절대적으로 지배해버리는 것이다. (...) 신앙과 내세관을 확고히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을 맞이하는 즐거움이 있다. 기대를 가지고

노년을 준비하기 때문에 보다 귀한 업적을 남길 수 있는 기간을 보내게 된다.

 

*"(...) 나는 이런 체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내세를 아무리 얘기해도 필요가 없다고 봐요.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또 이미 체험하고 믿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설명도 필요가 없을 거에요.

그래서 파스칼이 '세상 사람들은 철학자를 보고 놀라나 철학자들은 기독교인을 보고 놀라게

된다'고 말한 것이 아닐까요. 내 이성이 내 신앙에 놀라는 때가 있으니까요!

이런 체험을 한 사람에게 내세를 의심하라는 것은, 물건을 사다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돌아옴을 기다리는 아들에게 어버지의 약속을 믿지 말라는 것과 같지 않을 까요.

(...)"

나는 지금도 종교는 체험이라고 믿는다. 체험에 의한 내적 확증이 없는 곳에 신앙적 진리는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 종교를 생각 속에서 비판만 하는 사람은 어는 종교든 택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을 체험하는 사람은 하나의 종교를 택하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므로 파스칼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철학자나

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진정한 종교와 참다운 신앙을 위햐여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건전한 인격과 무게 있는

이성이다. 먼저 신념 있는 도덕적 주체성을 지닌 이성인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인간이 스스로의 전 인격과 삶의 과제를 가지고 종교의 문을 두드리며 신과의

관계를 맺게 되었을 때 비로소 신앙은 자라는 것이며 신은 우리들의 인격적 호소와 관심에

응해주는 실재로 나타난다. 진정한 종교는 이렇게 자라왔으며 앞으로도 그 생명은 이러한

위치와 사실을 통하여 계승 발전될 것이다.

진정한 이성인의 체험이 못되면 타당성을 가질 수 없으며, 완전한 인격적 사실이 아니면

신앙의 내용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신적 위치에서 신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만

있다면 그 얼마나 행복스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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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것이 무엇인고 - 그림이 된 예술가 나혜석 이야기 샘터 솔방울 인물 4
한상남 지음, 김병호 그림 / 샘터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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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가 "그림이 된 예술가 나혜석 이야기"이다.

나혜석, 이름은 들어 보았으나 그녀의 일대기는 몰랐었다.

그녀를 칭하는 호칭이 참 여러가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소설가,

여성으로는 최초로 세계일주 여행,

가장 처음 서울에서 미술 전시회를 개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운동가...

 

시대보다는 엄청나게 앞선 그녀여서 더욱 훌륭하고, 귀감이 되는 일들을 많이 했겠거니

싶었는데, 너무도 외롭고 슬픈 그녀의 말년에 가슴이 아팠다.

화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손떨림이 왔다는 것은 그녀를 얼마나 절망으로

몰아넣었을까 싶었으며, 남편으로부터 재산 없이 내쳐졌던 것에서는 억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순간의 선택과 결정이 얼마나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옛애인의 무덤으로 막 결혼 한 남편과 신혼여행을 간다는 것은, 그곳으로 간다는 것을

남편에게 알리지도 않고 그리했다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권리라기 보다는, 남편에 대한

배려와 예의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내 보기에 동등하다는 것을 그런 경우에 빗대어서

적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 같았다. 이것을 시작으로 해서 남편 김우영은 수 번을

아내 나혜석을 위해서 여러가지로 참고 견디어 낸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참아내는 것이 누적이 되다 보면 언젠가는 더 큰 폭발을 불러일으키는 법,

그것으로 그렇게 똑똑하고 시대를 앞서 갔던 화려했던 그녀의 삶은 이혼을 당하면서

무참히 파괴되어졌다.

 

이런 삶도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렇게 똑똑했던 그녀였기에 더욱 나라를

빛낼 삶을 살 수 있었겠거늘, 어찌하여 한낱 남자로 인하여 자신의 삶이 그렇게 무너져

내린단 말인지! 적절한 것이 가장 좋은 것이란 불가(佛家)에서의 말이 생각난다.

시대를 너무 앞섰더니 결국 53세의 나이로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던 것인가 싶다가,

흔히 하는 말로 이것이 그녀의 운명이었던 것일까 싶기도 하다.

 

적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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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약속 - 아름다운 도전 2 아름다운 도전 9
고정욱 지음, 이은천 그림 / 두산동아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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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장애가 오히려 아이를 더욱 강하게 키울 수 있는 계기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겪어보지 않고는 어찌 알 수 있을까!

이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졌다니 더욱 감동적이었다.

 

아이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상봉 장면은 울컥해서 눈물이 찔끔났다.

실제로 장애인 아버지와 아이는 한 달 이상을 자전거 여행을 하였다니

얼마나 훌륭한 교육이었을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어느 가정이라도 이런 살아있는 교육을 부모와 아이가 같이 할 수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자전거를 끌고 한 달 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면,

아이들은 정말 많이 자랄 수 있지 싶다.

어른들도 더욱 성숙한, 아이들에게 믿을 수 있는 어른의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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