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 스님의 금강경 강의
법륜 지음 / 정토출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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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서 책을 주로 빌려 읽다 보면, 빌려 읽기 잘했다 싶은 책이 있는 반면, 어떤 책은 정말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책도 있다. 책 표지가 빨간 색 천으로 된 이 이쁜 책은 정말 사고 

싶은 책이다. 상(相)을 내지 말라 그리 이르건만 과연 법륜 스님이다 싶은 상을 도저히 내지 

 

않을 수가 없다.ㅎㅎ 

<지금 여기 깨어있기>와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오히려 좋더라. 예전에  <지금 여기 깨어있기>

를 읽을 땐 연거푸 3번을 내리 읽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이해가 

쉬운 것은 <금강경>과 함께여서인가 싶다. 내 공부가 조금 더 깊어졌나? 설마..ㅎㅎ

학창시절 선생님들도 지루하거나, 무섭기만 하거나, 성의 없거나, 열정만 있거나 등등 다양한

분들 속에서 꼭 잘 가르치는 확실한 선생님들이 간혹 있었다. 법륜 스님의 금강경 해설을 보니 

그 시절 확실했던 잘 가르치던 선생님이 떠오른다.  그런 훌륭한 선생님은 학생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으며, 평생의 멘토가 되기도 한다. 

올해 5월 말 경에 <금강경>을 처음 읽었는데, 제1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부터 딱 걸리더라. 

 

다이아몬드처럼 찬란하고 빛나는, 그리 훌륭한 경(經)의 시작이 고작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탁발하는 모습이며, 발을 씻고 자리에 앉는 모습만이라니, 이것이 제 1분(分)이라니, 참 어이

 

가 없었다. 그 유명한 경의 시작이 고작 배경 설명 뿐이란 말인가? 아닐텐데... 내가 모르는 

 

것이 뭘까 싶어서 금강경 해설서를 찾아 읽다 보니 법륜 스님의 금강경까지 오게 되었고, 이 

 

책을 만난 것이 무척 감사하다. 

 

제 1분은 평범한 일상의 모습에 최고의 도(道)가 있으며, 1분에서 이 의미를 깨달으면 나머지

 

뒷 부분은 보충 설명에 불과하다는 해설을 그간의 몇 권의 해설서를 보고 나니 이제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계(五戒)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대부분의 책들은 불살생(不殺生) 등등으로 표현하지만 법륜

 

스님은 "첫째, 생명을 가진 존재는 그 누구라도 죽기를 싫어하고 살기를 원하므로 함부로 살생

 

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이유에 대한 언급까지 같이 엮어 두어서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

 

또한 상(相)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설명에 대해서는 이 책보다 더 잘할 수는 없지 싶다. 

꼭 필요한 용어설명이나, 예시로 든 이야기들, 경의 풀이가 지루할 사이가 없으며 과연 다음

 

분(分)의 해설은 어떻게 해 두셨나 궁금해서 책을 놓을 수가 없더라.

 
다음엔 도올의 <금강경 강해>를 읽을 참인데 과연 이보다 더 재밌을까 너무 궁금하다.

이 책의 제목이 <금강경 강의>이니, 내가 이 강의를 수강한 학생이라면 A+는 따 놓은

당상이다. 실천적인 면에서야 과락일지 모르겠으나 지식적인 면에서는 아주 쉽고 재미있으면

 

서도 훌륭한 강의여서 제차 공부해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으니 말이다.

 

 

 

 

 

 

*명상법 가운데 시계를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일상 속에서 시간을 잊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런 명상법은 나를 둘러싼 온갖 틀과 관념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를 돌아보게 하는 효과가 있

습니다.

 

*아상(我相)은 남과 구분된 나라는 존재를 고집하고,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 생각한 것을 말합

니다. 그러므로 친구는 말할 것 없고 부부나 부모 자식조차 같은 것을 보고 들으면서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 아상으로부터 다시 두 가지 망상이 일어납니다. 내 것이라는 소유 의식(我所)과 내 생각이

옳다는 고집(我執)입니다. 내 것이라는 소유 의식은 탐욕을 불러일으키고, 내 생각이 옳다는

고집은 분노를 일으킵니다. (...) 이렇게 자아에 대한 개념을 아상이라 한다면 영혼에 대한 개념

을 인상, 존재에 대한 개념을 중생상, 생명에 대한 개념을 수자상이라 말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는 상의 범위를 구분 짓는 경계에 따라서 나와 너를 구별하는 아상, 인간과 비인간을 구별하는

인상, 생명과 무생명을 구별하는 중생상, 존재와 비존재를 구별하는 수자상으로 분류하기도 합

니다.

 

*상대에게 베푸는 것으로 내 할 일은 모두 끝났다는 마음, 베풀었다는 생각마저 없이 행하는

보시는 내가 행복해지는 길이며 번뇌를 소멸하는 길입니다. (...) 상을 버린 보시는 베풂을 받는

상대가 아니라 베풂을 행하는 나에게 기쁨과 행복을 선물합니다. 내 기쁨을 위해 베풀고 있음을

자각하고, 내 베풂을 받아주는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보시해야 합니다.

 

*남에게 도움을 받으려면, 그들이 보기에 내 모습이 불쌍해야 합니다. 그러니 도움 받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사람은 자기 존재를 불쌍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베푸는 마음을 내는 것이 행복

으로 가는 길입니다. 행복해지고 싶으면 사랑받으려 하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해

받으려 하지 말고 이해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도움 받으려 하지 말고 도움 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보살핌 받으려 하지 말고 보살펴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것이 흔들리지 않는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악을 멀리한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첫째, 생명을 가진 존재는 그 누구라도

죽기를 싫어하고 살기를 원하므로 함부로 살생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누구나 자기 물건

을 잃어버리면 괴로워하므로 상대가 주지 않는 물건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누구나 원

하지 않는 성적 행위를 강요 받으며 괴로워하므로 삿된 음행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 누구

나 남에게 속고 싶어 하지 않으므로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섯째, 맑은 정신으로 살아

가려면 술이나 마약 같은 중독성 물질에 중독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오계(五戒)입니다.

 

*그런데 무주상보시의 공덕이 엄청나다는 말을 듣고는 보시를 하면서 한사코 이름을 밝히지 않

겠다고 고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이름을 내는 데 연연하기보다는 이름을 밝히지 않는게

좋은 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무주상보시의 참뜻은 이름을 내고 안 내고에 있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다니는 큰길가에 이름을 내걸었다 해도 돌아올 복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지 않으면 그것

이 오히려 무주상보시입니다. (...) 복이라 할 게 없음을 아는 것이 복 중에 가장 큰 복입니다.

 

*열 번 해서 안 되고 스무 번 해서 안 되고 백 번 해서 안 되다가도 어느 순간 불현듯 될 때가

있습니다. (...) 한 번 깨닫기만 하면 그 순간 모든 게 완벽한 경지에 이르게 될 거라는 생각은

깨달음에 대한 환상입니다. 하지만 한 번도 깨달아 본 적이 없는 사람과 한 번이라도 깨달음

의 맛을 본 사람은 그 힘이 다릅니다. 단 한 번이라도 깨달음의 맛을 보고 나면 '확실히 이렇게

하면 되는 거구나!' 하는 믿음이 생깁니다.

 

*내가 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나면 더 이상 아무 참을 것이 없는 행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인욕

바라밀입니다.

베푼다는 생각 없이 베푸는 행이 보시바라밀이며, 하고 싶고 하기 싫다는 모든 욕망을 끊어버림

으로써 계율을 지킨다는 생각 없이 계율을 지키는 것이 지계바라밀이고, 노력한다고 할 것이

없는 행이 정진바라밀입니다. 고요하려는 생각이 없는 행이 선정바라밀이며, 깨달음을 얻겠다

는 생각이 없는 행이 지혜바라밀입니다. 인욕바라밀이 여래가 인욕바라밀을 말함이 아니라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이라고 한다는 가르침이 그런 이치입니다. 모든 상을 떠남으로써 더 이상

참을 것이 없는 행이 참다운 인욕바라밀입니다.

 

*무슨 일로든 화가 잔뜩 났을 때의 자신을 돌이켜보면 그때의 내 마음은 '내가 옳다' '상대가 잘

못했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화가 나지 않습니다.

또 비록 상대가 잘못했더라도 '저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고 그의 처지와

마음을 이해하면 화가 나지 않습니다. 또 남을 탓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는 왜 이 모양일까?'

하고 자책하고 스스로를 탓하며 화내는 것 역시 '나는 남보다 잘나야 한다'는 아상에서 비롯된

태도입니다.

 

*내가 옳다는 상을 내려놓으면 상대의 생각과 입장이 눈에 들어오고, 상대의 생각과 입장을 이해

하면 그것이 바로 상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나에게는 내 입장이 있듯이 상대에게는 상대의 입

장이 있다는 그 사실만이 유일한 객관입니다.

 

*금강경을 수지독송하고 남을 위해 설한다는 것은 금강경의 참뜻을 마음에 새겨 일체의 상을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남을 이해하는 것은 그를 위하는 일인 것 같지만 사실은 나 자신에게 가장 큰 이익이 됩니다.

남을 미워하는 것은 그를 해치는 일인 것 같지만 미워하는 마음으로 괴로운 사람은 나 자신이고

결국 나에게 더 큰 해악이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게 부처님의 가피인 줄 압니다. 하지만 나쁜 일

이라는 것이 오히려 부처님의 가피인 줄 아는 이 경지에 이르면 일체가 다 걸림 없는 자유로운

삶이 열립니다.

 

*"내가 네 덕에 요새 기도를 해서 마음이 편하고 절도 해서 운동도 잘하고 있구나. 얘야, 고맙다."

 

*그런데 사실 중생의 사량 분별로는 복과 재앙을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추구

하는 복이라는 것이 실은 재앙일 확률이 더 높습니다. 쥐가 쥐약이 든 음식을 먹는 것처럼 말입

니다.

 

*작은 우물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안에서 살아온 개구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바닷가에 살던

개구리가 그 우물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우물에 살던 개구리가 물었습니다.

"바닷가에서 살다 왔다고? 그 바다라는 게 얼마만 해?"

"굉장히 커."

"굉장히? 저기 있는 돌덩이만 해?"

"어림도 없지. 훨씬 더 커."

"그럼 이 우물 반쯤?"

"아니, 도저히 비교가 안 돼."

"아니 그럼, 이 우물만 하다는 거야?"

"에이, 이 우물은 어림도 없지."

"야, 거짓말 마! 세상에 이 우물보다 큰 게 어디 있어?"

우물 속에서 평생을 산 개구리는 바다에서 온 개구리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겠지요.

사실을 알면 마음이 곧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건 이런 정도의 비유를 말합니다. 

 

그럼 여우처럼 의심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하루는 여우가 숲 속을 지나가는데 고깃덩어리 하나가 땅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아무 수고

없이 공짜로 고기를 먹게 된 여우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먹이를 입에 넣으려는

순간 꾀가 많은 여우는 문득 불안해졌습니다.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이런 고깃덩어리가 왜 여기에 떨어져 있는 걸까? 사람들이 독을

넣어서 미끼로 떨어뜨려 놓은 게 분명해!"

여우는 집었던 고깃덩어리를 내려놓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산모퉁이

를 돌아갈 때쯤 다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독을 넣은 미끼라면 그렇게 아무렇게나 던져 놨겠어? 그릇이나 나뭇잎에 잘 싸서 올려두었겠지.

땅에 떨어져 흙이 묻었다는 건 우연히 떨어졌다는 증거야. 다른 동물들은 독이 들었을까봐 겁이

나서 못 먹겠지만 지혜로운 나는 먹을 수가 있지."

여우는 다시 고기가 놓인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다행히 고기는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기를 입에 넣으려는 순간 다시 또 의심이 들었습니다.

"아니지, 음식을 얌전히 잘 올려놓으면 독이 든 음식인 줄 알아차리고 먹지 않을 테니 우연히 떨

어진 것처럼 보이려고 일부러 땅에 던져놓은 게 아니겠어? 다른 동물들은 어리석어서 이런 생각

을 못 하고 덥석 물겠지만 나는 절대 안 속아."

그리고 고깃덩어리를 내려놓고 다시 돌아섰습니다. 여우는 그 뒤로도 아홉 번이나 산길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의심과 망설임을 되풀이했습니다. (...)

여우 마음은 아홉 번 바뀌었다지만 사람 마음은 백 번도 더 흔들립니다.

그런데 아홉 번 의심하던 여우는 결국 그 먹이를 먹었을까요, 먹지 않았을까요? 독이 든 고기라면

먹었을 테고, 독이 들지 않은 고기라면 먹지 못했을 겁니다. 깨달음의 지혜로 세상을 보지 못하고

어리석은 마음으로 잔꾀를 부리면 결국 제 꾀에 제가 넘어가게 마련이니까요.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괴로움에서 사라졌다고 말하지만 실은 벗어나거나 사라질 괴로움이란

실체가 있는 게 아닙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괴로움이 사라졌다는 것은 단지 지금 내 마음

이 더 이상 괴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이 괴로운 이유는 괴로움이라는 실체가 있어서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내가 다만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다람쥐가 어떻게 도토리를 찾습니까? 그냥 찾으러 다닙니다. 이 괴로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냥 벗어나면 됩니다. (...) 지금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꽉 움켜쥐고 있는

자기 생각만 내려놓으면 그만입니다.

 

*좋은 것도 내 인생이고 나쁜 것도 내 인생입니다. 바라는 대로 되는 것도 내 인생이고,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것도 내 인생입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사실 내 속에서 순간순간 일어나는 분별을 일컫는 다른 이름

입니다.

 

*'바보같이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하고 자책하는 것은 스스로를 더 큰 괴로움 속으로 밀어 넣는

일입니다. 남을 시비하는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분별을 일으켰던 자기를 탓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앞으로는 똑같은 어리석음을 짓지 않으려는

노력입니다.

 

*'부처님, 저는 놔두시고 다른 사람을 돌봐주세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우리 가족은 제가 알아서 돌볼 테니 걱정 마세요.'

'우리나라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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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밀 2016-09-06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http://happybean.naver.com/donations/H000000132991

저는 이 근육장애인분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고 있어요
이분은 24시간 호홉기를 착용해야만 하는 최중증 장애인이신데요
어머니마저 암에 걸리셔서 돌보시기 힘든 상황이라 아주 상황이 안 좋습니다

매우 좁은 집은 곰팡이가 슬고 화장실도 너무 열악해요
최근에는 약먹다가 약이 기도에 걸려서 119 불러서 을지병원 응급실 다녀왔어요
몸이 너무 안 좋은 상황에다가 여러가지 악재가 겹치네요

추석이 다가오지만 이 장애인분에겐 쓸쓸한 명절이 될 것 같습니다

이번 해피빈 모금함을 만들면서 좋은 일을 한다는 것도 참 쉬운 게 아니란 걸 깨닫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하고요 괜찮으시면 도움 부탁드려 봅니다
 
금강경
도암 지음 / 의증서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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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앞서 본 몇 권의 금강경 해설서와는 시각차이가 있다.

내 안의 불성을 발견하는 것이 불교라는 것과는 달리, 반야는 지혜가 아니라 절대신이라

말하며, 그 신을 의지하지 않거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절대 해탈할 수 없다고 저자는 말

한다. 또한 불자들이 해탈하여 부처가 되려면 먼저 오늘날 깨달으신 바른 스승이나 생불

을 찾아서 그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모든 종교가 기복신앙화 됨으로 해서 만사형통이나 운수대통만을 바라며, 종교인들은 

신도들이 바라는 욕심을 채워주기 위해 중보기도를 한다는 부분에선 현각스님이 떠올랐

다. 오래 전, 그의 책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아주 감명 깊게 읽었으며,  <공부하다 

죽어라>라는 제목만으로 그가 얼마나 신심있게 종교생활을 하는지 우러러 봐 졌는데, 

25년 후, 그는 이 나라의 종교인이기를 거부하고 떠나겠다시니, 우울한 대한민국의 한

단면인 듯 보여, 이 모두가 욕심을 채우기 위한 집착심때문이라는 이 책 저자의 언급에 

상당한 공감이 갔다.

<선으로 읽는 금강경-김태완>에서는 말에 속지 마라 한다. 있는 그대로 보면 되는데

우리는 어리석어 자꾸만 그 이면을 해석하려 든다고 했다. 이 책에서는 <금강경> 속에

화두가,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고 말하며, 저자의 이 책을 정독하면 감추어져 있던 수많은 

비밀을 알게 될 것이라 한다.  내 생각엔 다이아몬드 같은 이런 훌륭한 경이라면 모두가 

쉽게 알아서 따르기를 바라는 마음이 법을 설한 자의 마음 아닐까 싶다. 굳이 이 경 속에 

비밀을 숨겨 두어서 이 경을 접하는 자들이 모르게 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고로 

말에 속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라던 <선으로 읽는 금강경>쪽에 내 마음은 더 쏠린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살생의 의미는 모든 생물을 죽이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살인, 즉 사
람을 죽이지 말라는 뜻인데, 살인도 사람의 육신보다 영혼을 죽이지 말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
입니다. 왜냐하면 동물이나 사람을 죽인 죄 보다 사람의 영혼을 죽인 죄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아제아제는 "너도 가고 나도 가자"는 자리와 이타, 즉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라의 세계는 상구보리를 성취한 자가 가는 곳이며, 바라승은 하화중생을 행한 자가 들어 
가는 곳이다.

*보리사바하는 불자들을 향한 부처님의 기도이며 간절한 소망입니다.

*방생을 하면 마음이 기쁘고 편안해지고 온유해져서 남에게 베푼 만큼 악한 마음이 선한 마음
으로 변하고 선한 마음이 복이 되어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행을 통해서 마음이 
선하게 되면 선한 민큼 천성이 바뀌고 천성이 바뀌면 팔자가 바뀌고 팔자가 바뀌면 복을 받게
되어 행복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불자들이 하고 있는 방생은 죽어 가는 생물을 살려주려는 자비심보다 방생을 하면
자신이 전생에 지은 업을 씻고 현생에서 복을 받아 잘 살 수 있다는 욕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 육신의 복을 받기 위한 목적이나 욕심으로 하는 방생은 오히려 악업을 쌓게 되는 것입
니다. (...) 베푸는 마음은 선이지만 취하려는 마음은 욕심이며 죄이기 때문입니다.

*신행생활을 복을 받겠다는 욕심으로 한다면 마음이 점점 강퍅해지고, 교만해지고, 악해
져서 선한 마음이 점점 악한 마음으로 변하게 됩니다. (...) 불자들은 신행생활을 통해서
항상 남에게 베풀고, 상대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  신행생활이란 
악한 마음을 선한 마음으로 바꾸어 가는 것이며 취하려는 마음을 베푸는 마음으로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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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칭 2 Watching 2 - 시야를 넓힐수록 마법처럼 이루어진다 왓칭 시리즈
김상운 지음 / 정신세계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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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년 전 쯤에나 이 책을 읽었다면 전혀 믿을 수 없다 치부했을지도 모르겠다. 오래 전,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의 <인생수업>, <사후생>을 읽었을 때 처럼. 

그러나 지금은 안다. 모든 것은 믿음, 확신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또한 모든 것은

억지가 아니라 자연스러워야 자연스럽게 온다는 것을!

내가 믿으면 있는 것이고, 믿지 않으면 없는 것이니, 내 보기엔 먼저 100% 확신을 전제로 

 

해야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Secret>에서 말하는 바 임을 이 책을 보고 나니 알

 

아진다. 말처럼 100%확신이라는 것은 쉽지 않다. 아니 굉장히 어렵다. 그러하다고 딱 믿어

 

야만 온 우주는 우리의 확신을 위해 움직여 주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금강경을 보니 한결 수월하다. 좌선할 때 심안(心眼)으로 공간을 바라보고자 

 

집중하니 잡념도 덜해지며, 올라오는 생각들을 바라본다는 것, 왓칭이 어떤 것인지도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나의 사고에 있어서의 전환점 역할을 해 준 왓칭1,2. 무엇보다 방법론적인 입장에서 나와 

 

계합이 잘 되어서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마음이 일렁이는지! 

 

텅 빈 공간을 보고 싶다. 나도 찬란한 빛을 보고 싶다.ㅎㅎ

 

 

 

 

 

 

*에너지 장을 보면 몇 년 후에 어떤 질병에 걸릴지르 미리 알 수 있다.

 

*시야를 넓혀 전체를 다 볼수록 운이 좋아진다.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면 마음속에서 그 문제와의 시간적, 물리적 거리를 늘리는 게 좋다.

"만일 내가 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까?"

"지금부터 50년 후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까?"

(...)

내 마음의 공간을 천 킬로미터 밖까지 넓히면 그 만큼 많은 지혜가 쏟아져 나온다. 내 마음

의 공간을 천 년 후까지 늘려도 그만큼 많은 지혜가 쏟아져 나온다. 마음의 공간을 넓힐수록

'나'는 무한히 퍼져 나간다.

 

*내 아이들은 10년 후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나는 세상을 떠날 때 내 인생을 어떻게 되돌아 볼까?

100년 후에는 사람들이 나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까?

이렇게 시간적 시야를 넓힐수록 '나'는 더욱 커진다. 그러면 나 자신을 더욱더 정확히 보게

되고, 헛발을 내딛지도 않게 된다.

 

*상대와 갈등이 생기면 무조건 상대의 시각으로 바라보라. 절대로 손해나는 일이 아니다.

그래야 나의 공간이 상대에게까지 확장된다. 그러면서 상대는 마법처럼 내 의도대로 움직이

게 된다. 공간을 넓힐수록 기적이 일어난다.

 

*한꺼번에 몰아서 공부하는 것보다 잘게 쪼개 조금씩 공부하는 것이 오래 기억된다.

 

*현실세계는 고통의 바다이다. 나 스스로 시공간상으로 시야를 좁혀 '나'를 육신의 공간 속에

가둬놓기 때문이다.

 

*시끄러운 소리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시야를 넓혀 텅 빈 공간의 고요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러자 마법같은 일이 일어났다. '아, 이렇게 조용한 걸!'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시끄러운 소리

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 시끄러운 소리가 점점 커졌다. 거꾸로 텅 빈 공간의 고요에 초점을

맞추자 고요함이 점점 깊어졌다.

 

*시야를 완전히 넓혀 텅 빈 공간과 하나가 되면 코가 얼얼해지거나 눈 주변, 이마 등 얼굴이

꿈틀거리는 걸 느끼기도 한다. 가슴이 쿵쿵 뛰기도 한다. 내 몸을 움직이는 건 두뇌가 아니라

텅 빈 공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텅 빈 공간은 만질 수도 있다. 양 손바닥을 벌려 서로 가까이

했다 멀리했다 해보라. 손바닥 사이의 공간이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밀면 밀리고 당기

면 끌려온다. (...) 텅 빈 공간과 하나가 되면 완벽한 고요함이 찾아온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빛의 물결이 흐르는 것처럼 가뿐하고 섬세한 음악같은 소리만 감지될 뿐이다.

텅 빈 공간은 지혜로 가득하다. 뭔가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 왓칭을 하고 나면 갑자기 답

이 떠오른다. 텅 빈 공간은 사랑으로 가득하다. 세파에 절은 내 몸과 마음을 치유해주고 위로

해 준다.

 

*육신 속의 나는 '개체 나'이다. 무한한 빛의 공간은 '전체 나'이다. '개체 나'가 점점 커지면

'전체 나'가 된다. 거꾸로 '전체 나'가 점점 작아지면 '개체 나'가 된다. 그래서 '전체 나'와

'개체 나'는 하나이다. '개체 나'가 시야를 넓히면 '전체 나'가 되고, '전체 나'가 시야를 좁히

면 '개체 나'가 된다. 그렇다면 '개체 나'가 소멸될 땐? '전체 나'로 완전히 돌아간다. 사람들

은 '전체 나'를 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개체 나'와 신은 별개의 존재일까? 아니다. 신과 나는

하나이다. 신을 나와는 별개의 존재로 분리시키면 신의 무한한 마음과 하나가 될 수 없다.

 

*시야를 넓힐수록 생각에서 벗어나게 되고, 생각이 만들어내는 환영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만일 내가 과거에 큰 죄를 지었다면? 지금 진심으로 뉘우치면 죄가 완전히 사라질까? 당연한

일이다. 단 조건이 있다. 아무런 주저함이나 의심도 끼어 있지 않은 '진심'이어야 한다는 것이

다. '진심'일 때만 텅 빈 공간과 접속되기 때문이다. 텅 빈 공간은 이처럼 시간과 거리를 초월

해 요술을 부리는 빛 알갱이들로 가득하다. 자연히 내가 시야를 넓히면 넓힐수록 '나'의 공간

이 넓어져 그만큼 더 많은 요술이 쏟아져 나올 수 밖에 없다.

 

*때로는 인생이 장애물로 가득한 미로처럼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럴 때 육안으로만 바라보면

아무 출구도 보이지 않는다. 물질인 육안은 시야가 짧다. 반면, 마음의 눈은 물리적 한계를

초월해 모든 걸 다 본다. 시야가 무한하다. 위에서도 보고, 아래에서도 보고, 멀리서도 보고,

모든 방향, 모든 시점에서 다 본다. 정말 출구가 안 보일까? 만일 출구가 없다면 그건 설계가

잘못된 미로이다. 인생의 모든 시련도 마찬가지다. 벗어나지 못할 시련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영혼이 영적 성장을 위해 스스로 설계해놓은 시련이기 때문이다. 시야를 넓혀

바라보면 인생의 가장 귀중한 기회가 최악의 시련을 가장해서 나를 찾아왔은을 깨닫게 된다.

 

*내 육신은 감정과 생각의 공간에 같혀 있다. 감정과 생각이 내 육신을 움직인다. 하지만 이게

진실일까? 시야를 좀더 넓혀보면 영혼이 감정과 생각, 육신을 움직인다. 시야를 완전히 넓혀

보면 텅 빈 공간이 감정과 생각, 육신, 영혼을 움직인다. 내가 생각의 공간에 같혀 있으면 생각

이 육신을 움직인다고 착각하게 된다. 하지만 시야를 완전히 넓혀 전체를 보면 텅 빈 공간이

그 공간 속의 모든 현상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생각이 내 몸을 돌아가게 한다'고

믿으면 나는 생각과 한 덩어리가 된다 생각의 노예가 된다. 생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반면, 무한한 텅 빈 공간이 내 몸을 돌아가게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 나는 무한한

공간과 하나가 된다. 자연히 내 몸은 무한한 공간 속에 잠시 떠 있는 환영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내 몸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소용돌이도 잠시 스쳐가는 현상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설레는 마음은 '이럴까, 저럴까?', '될까, 말까?' 등과 같은 잡념을 품고 있지 않다. 오로지

문을 활짝 열어놓고 결실을 맞이하길 기다릴 뿐이다.

 

*새로운 생각을 깔려면 낡은 생각부터 놓아주어야 한다. 텅 비워야 한다. (...) 생각만 완전히

텅 비우면 텅 빈 공간이 내 속마음을 읽고 알아서 이뤄준다.

 

*'이젠 완전히 끝났다'라는 생각으로 일을 놓아버리면 마음의 공간이 넓어져 시야도 투명해

진다. 전체가 보인다. 마찬가지 이치로 문제가 이미 완전히 풀린 미래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전체가 훤히 보인다. 미래의 시점을 멀리 잡을수록 더 크고 투명한 눈으로 볼 수 있다.

 

*의지로 무의식에 깔려 있는 부정적 생각을 바꿀 수 있는가? 무의식은 의지보다 백만 배나 더

강하다. 그 속에 가둬놓고 짓누른다고 부정적 생각이 사라질 리 만무하다. 그보다는 마음의

공간을 넓혀 부정적 생각이 스스로 자유를 찾아 떠나도록 도와주는 게 훨씬 더 현명한 일이다.

 

*진심으로 현실을 바꾸고자 한다면 근원적인 진실을 이해해야 한다. 내 몸을 포함한 우주만물

은 죄다 생각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사실이다.

 

*잘 치겠다는 생각을 멈추고 공과 몸의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몸이 스스로 알아서

공을 쳐준다.

 

*몇 년 전 시골에 내려가서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빈 방에 들어갔다. 눈을 감고 왓칭을 시작

했다.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떠다니는지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생각이 떠오르면 바라보고, 

또 떠오르면 바라보고... 생각은 바라보면 사라졌다.

'다음 생각은 어디서 떠오를까?'

텅 빈 공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치 숲 속의 올빼미가 어둠 속에서 먹잇감이 떠오르길 지켜

보듯. 얼마나 지났을까?

'어?'

갑자기 양손과 팔이 마치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너무나도

황홀한 무한한 공간이 활짝 펼쳐졌다. 아름다운 투명한 빛이 가득한 바다였다. 너무나도 순수

하고 명징한 의식만 남았다.

'아, 드디어 고향을 찾았구나.'

공허하던 마음이 난행처음 가득 차오르는 걸 느꼈다. 내가 그토록 하늘을 그리워하며 살았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을까?

나는 과거 마음이 머릿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머릿속은 들여다보는 순간 텅 빈

공간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하!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이 떠오른다'고 말하는구나!'

마음의 공간에 울타리가 있을까? 다음 생각은 어디서 떠오를까? 하고 이 구석 저 구석 가만히

살펴보면 아무 울타리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생각이 사라지면 그냥 무한한 공간이다.

육안으로는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다. 그래서 마음의 눈으로 들여다봐야 한다. 들여다보는

순간 저절로 공간 속을 들여다보게 되고, 생각도 역시 저절로 사라진다. 생각은 들여다보면

꺼지는 거품이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왓칭하려면 상당한 연습이 필요할 수도 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졸음도 쏟아지고 잡념까지 끼어들기 때문이다. 왓칭과 졸음, 잡념이 서로 숨바꼭질을

한다. 하지만 연습을 하면 할수록 마음의 공간은 점점 더 커지고 맑아진다. 그러면서 쉬워진다.

 

*모든 생각은 에너지의 물결이다. 장기간 흘려보내지 않은 채 품고 있으면 마음속에 틀어 박힌

다. 정체기간이 길면 길수록 더욱 깊이 틀어박힌다. 나중엔 넓은 공간에 나가는 게 두려둬진다.

약을 먹어도 나을 리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나'를 생각으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

'머릿속에 든 생각을 어떻게 분리시키지?'

분리시키는 방법은 너무나도 간단하다. 마음의 눈으로 마음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들여다보는 순간 생각과 '나' 사이엔 거리가 생긴다. 거리가 생기면서 생각과 '나'는 저절로

분리된다.

 

*어두운 생각은 들여다보지 않으면 틀어박힌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사라진다. 들여다보면

꺼지는 허상의 거품이기 때문이다.

 

*텅 빈 공간은 모든 말을 알아듣는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면 상대의 내면도 알아차린

다. 단 어떤 주저함도 섞이지 않은 진심이어야 한다. 다른 생각이 끼어들면 마음이 완전히 열리

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상대에게 잘못을 저질렀든 안 저질렀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만일 상

대가 불쾌감을 느꼈다면 상대의 시각에선 그게 옳다. 따라서 무조건 용서를 비는 게 해결책이

다. 용서는 나를 위한 것이다.

 

*화가 내 몸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실제로 화는 내 몸속에 갇혀버린다. 그래서 독이 된다.

하지만 '나'는 몸에 갇힌 존재인가? 아니다. 시야를 넓히면 넓힐수록 무한히 퍼져나가는 존재

이다. 그래서 화가 몸 밖으로 퍼져나간다고 상상하면 실제로 퍼져나간다.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면 시간도 사라진다. 시간도 생각이 만들어낸 허상이기 때문이다. (...)

생각이 먼저 사라져도 텅 빈 공간이 되지만, 텅 빈 공간을 먼저 상상해도 생각이 사라진다.

 

*눈 뜨고 왓칭하려면?

1. 시야를 최대한 넓혀 넓은 공간 전체를 바라본다. 육안의 초점을 완전히 풀고 힘도 완전히 뺀

다. 육안으로 보지 않고 마음의 눈으로 본다고 상상한다.

2. 시야를 넓히면 마음의 공간이 넓어져 갇혀 있던 생각들이 풀려나간다.

3. 텅 빈 공간에 또 어떤 다른 생각이 떠오르는지 지켜본다. 지켜보고 있으면 안 떠오른다.

 

*그렇다면 마음의 눈은 어디 있을까? 안구 바로 뒤의 두개골 깊숙한 곳에 송과선이 있다.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데카르트가 '영혼의 자리'(seat of the soul)라 불렀

던 곳이다. 육신의 세계와 영적 세계를 이어주는 곳이라는 의미였다.

 

*왓칭할 때 '난 육안으로 보지 않고 마음의 눈으로 본다.', 혹은 '마음의 눈에서 사방으로 빛이

퍼져나간다.'라고 상상하면 왓칭이 편안해진다.

 

*인생은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나를 알면 신을 알게 된다. 내 마음을 수정처럼 맑게 닦아

시야가 무한해지면 무한한 신과 하나가 된다. '원래의 나'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적으로 성장하는 길이다. 모든 것은 영적 성장을 위해 설계된 수업이다. 지구는 거대한 학습

장이다. 이사실을 깨닫는 것 자체만으로 시야는 무한히 넓어진다. 모든 걸 배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지구는 육신의 옷을 걸친 무수한 영혼들이 연기를 펼치는 연극무대이다. 모든 등장인물은 연기

자들이다. 연극의 이야기도 각자의 영적 성장을 위해 짜인 각본대로 전개된다. 때로는 각본에

정해진 나의 매역이 너무 견디기 힘들 때도 있다. 하지만 배역을 맡은 연기자는 연기자일 뿐이

다. '진정한 나'는 연극 전체를 멀리서 지켜보는 무한한 마음이다. 시야를 넓혀 멀리서 큰 눈으

로 내려다보면 무수히 많은 '개체 나'들이 한 무대 위헤서 다 함께 연기를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내가 중간에 배역을 포기하지만 않으면 반드시 도움의 손길이 나타나 연극을 무

사히 마치도록 해준다.

견디지 못할 시련은 존재할 수 없다. 왜야하면 나 스스로 써놓은 각본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겪는 가장 힘겨운 시련이 내 인생의 가장 귀중한 선무이 될 수 있다.

 

*가만히 바라보노라면 생각은 '나'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럼 생각은 '나'와 분리돼  스스로

사라진다. 생각이 사라지면 무한한 공간이 열린다. 무한한 사랑과 평화가 흐르는 공간이다

그곳이 나의 진청한 안식처이다.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은 지친 걸음을 잠시 멈추고 마음속을 들여다보라는 신호이다. 들여다

보면 고통을 일으키는 온갖 생각이 사라진다. 슬픔은 스쳐가는 것에 매달리지 말라는 신호이

다. 들여다보면 슬픔을 일으키는 생각도사라진다.

내 힘으로안 될 땐 너무 애쓰지 마라. 내 팔다리의 힘도, 내 몸뚱이의 열정도, 내 두뇌의 생각도,

나를 휘감는 온갖 감정도 사실은 바깥세상에 속한 것이다. 바깥세상을 움직이는 모든 건 내

마음속에 들어 있다. 바깥세상은 착가의 세계이다. 그 속에서의 몸부림을 멈추고, 대신 마음 속

을 들여다 보라. 들여다보면 무한한 공긴이 열린다. 시야가 무한해진다. 내가 그토록 매달리던

것도, 붙들고자 했던 것도, 얻으려 애쓰던 것도, 죄다 스쳐가는 허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무한한 공간 속에 사랑으로 가득한 무한한 존재가 들어 있다. 그 존재와 분리될수록 나는 점점

작아진다. 그 존재와 하나가 될수록 나는 점점 커진다. 그 존재 앞에 나의 모든 아픔과 두려움

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맘껏 눈물을 뿌려라. 나에 대한 모든 비판과 심판을 내려놓아라.

나를 완전히 열어놓고, 나의 모든 것을 완전히 내려놓을 때 무한한 존재와 하나가 된다.

그래야 비로소 참다운 안식을 얻게 된다. 참다운 안식 속에서 모든 새로움이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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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칭 Watching - 신이 부리는 요술 왓칭 시리즈
김상운 지음 / 정신세계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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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그것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던  코엘료의 <연금술사>,

소원은 100%의 확신으로 믿고 행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던 <Secret>, 

티벳의 라마승이었던 <롭상람파의 가르침>,

나를 죽이고 우주를 보라던 <마음수련>,

그리고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의 <금강경>.

<금강경>을 날마다 읽기를 두 달이지만, 그에 대한 해설서 보기를 몇 권이지만 여전히 

감도 잡지 못한다. 슬픔과 기쁨이 하나라니, 법을 설한 적이 없다니, 보는 모든 것이 다 

상(相)인데 상이 없다니, 그것이 공(空)이라니, 그 공까지도 이름일 뿐이라니... 

나의 정신은, 마음은 너무나 꽉 막혀있기만 해서 끝내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만 같다. 

그러다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금강경>과 같은 말을 한다. <연금술사>와 <Secret>처럼 말한다. 

나의 간절함은 우주가 알고 도우는구나. 의심없는 믿음은 소원을 이루게 하는구나. 

 

정말이지 모든 것은 허상이고 상(相)이 상이 아님을 보게 되면 여래를 보는구나. 

 

깨달음은 분명 있는 것이구나. 나도 할 수 있구나. 나도 할 수 있기를 저자가 간절히 바라는

 

구나. 아, 정말 그런거구나!

이젠 모른다해서, 믿지 않는다해서 틀린게 아니란 걸 잘 알겠다. 예를 들면, 만약 사후생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후생이 있다는 것은 틀렸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 지능, 몸, 물질까지도 바꿀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이유는 

 

미립자때문이며, 그 미립자는 사람의 속마음을 읽기때문이다. 마음 속의 수다를 잠재우고, 

 

고요한 마음으로, 의지보다 강한 이미지를 이용하면 더 깊이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아미그달라, 부정적 감정은 5세 유아 수준이며, 겨우 90초의 수명이니 거울처럼 비춰주면 

 

저절로 꺼진다는 것, 과정을 바라볼 때 잘게 쪼개면 가벼워진다는 부분은 흥미로웠다.

나는 마음 속의 수다가 많은 사람이다. 흔히들 생각이 많다라든가, 번뇌망상이 많다라고 

 

말하는 그것이다. 고요 속에 자신을 두고 싶지만 나에게 맞는 방법이 찾아지지 않더라. 

 

여기서는 생각 덩어리를 상상 속의 스크린이나 백지에 투사시켜 가만히 바라보라 한다. 

 

신기하게도 스크린이 상상 속에 나타나더니 나의 잡념이 모두 그 스크린으로 떼어져 나가고 

 

나니, 그걸 바라보고 있는 나는 그야말로 고요더라. 아무것도 없더라. 원래가 그런 모습인데 

 

수많은 생각들로 내가 덮여 있는 거였구나. 그래서 우리 몸은 육신을 덮어 쓴 여래라 했구나!!

이처럼 이 책에서는 구체적인 여러 방법들을 제시해 두어 고마웠다. 마침 그러한 것들이 

 

나와 딱 계합되는 게 있어 더욱 고마웠다. 관건은 연습이다. 꾸준한 연습만이 일취월장하게 

 

하리라.

선행은 몇 곱절로 돌아오며, 베품은 건강으로 되돌아 온다는 제 3부에서 이 책의 완벽함을 본다.

역시 <금강경>, <롭상람파의 가르침>등과 상통한다. 선하고 진실한 마음이 바탕이 되어 있지 

 

않으면 올바른 깨달음이란 없는 것일지도!

시기적절하게 이 책이 내게 와 주어서 감사하다. 

이 책을 권해 준 미애에게 깊은 감사를! 
마침 대출해서 가지고 있었던 함에게 깊은 감사를!

 

 

 

 

 

 

*난 모든 걸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분명히 몇 가지는 있다. 할 수 없는 것 때문에

할 수 있는 것까지 포기하지는 않겠다.

 

*기도가 반복될수록 그 효과는 점점 더 강해진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생각덩어리들을 상상 속의 스크린이나 백지에 투사시켜 가만히 바라

보는 것이다. 바라보면 바라보는 의도를 읽어내고 저절로 물러간다. 하지만 곧 또다른 생각

이 피어오른다. 그럼 또 바라본다. 또 사라진다. 이렇게 몇 번 되풀이하다가 이번엔 이런 질문

을 속으로 되뇌어보라.

"다음 생각은 어디서 나올까?"

고요한 마음으로 다음 생각이 피어오르는 걸 기다려보라.

1초, 2초, 3초...

이렇게 몇 초가 흘러가도 아무 생각도 피어오르지 않는다. 텅 빈 공간만 보일 뿐이다. 신기한 일

아닌가? 억누르려 들면 기승을 부리며 더욱 피어오르던 생각이 어서 나오길 기다리며 지켜보면

청개구리처럼 오히려 냉큼 나오지 않는다. 이게 생각의 속성이다.

 

*상대방에게 전화를 걸기 전 그의 웃는 얼굴을 그려본다. '좋다, 싫다, 될 거다, 안될 거다'등의

어떤 가치판단도 없이 상대의 웃는 얼굴을 짧은 순간 몇 차례 떠올린다. 길게 떠올리면 내 의지

나 의심이 스며든다. 그런 다음 편안한 목소리로 전화를 건다.

 

*나를 남이라고 상상하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 이미지가 더 선명해진다. 이미지가

선명할수록 제대로 바라보게 되고,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은 그만큼 더 높아진다.

 

*아무리 힘든 목표라도 작게 쪼개서 생각하면 쉬워진다.

 

*'난 머리 나쁜 사람'이라는 편견을 상기하는 것 자체만으로 성적이 크게 떨어진다.

 

*우주엔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 가능성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면 심신의 온갖 질병도 즉

각적으로 치유할 수 있다.

 

*지능은 내 머릿속에 고정돼 있는 것도 아니요, 내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두뇌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우주의 모든 가능성을 바라볼 때 저절로 흘러들어온다. '난 그런거 안 믿

어.'하고 가능성을 닫아버리면 관찰자 효과에 따라 지능도 닫혀버린다.

 

*머릿속 5세 유아(아미그달라)는 생존에 대한 위험을 감지하는 순간 반사적으로 빨간불을 켠다.

빨간불이 켜지면 머릿속에서는 부정적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생존을 위해 상상가능한

온갖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보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병이 된다. 하지만 위험이 사라졌

다고 판단되는 순간 거짓말처럼 쉽게 꺼진다. 그러나 위험 해제 신호가 이처럼 명백하지 않을 수

도 있다. 그럴 땐 5세 유아를 달래줘야 한다. 달래주는 최선의 방법은 바라보는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은 내 생존을 위해 생겨나는 것인 만큼, 그 존재를 인정하고 따뜻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두뇌야, 고마워. 내 생존을 위해 이런 소용돌이 감정을 만들어 내다니, 어차피 몇 분 만에 사라

지겠지? 나에게 오늘은 어떤 깨달음을 주려고 이런 감정을 선사하는 거니?"

 

*부정적 감정의 자연적 수명은 90초이다.

 

*놀이터에 놀러가도 돼?

 안 돼. 아직 숙제도 안 했잖아.

 

놀이터에 놀러가도 돼?

그럼, 숙제하고 가면 되지. 

 

엄마, 나 친구 집에 놀러가도 돼?

안 돼, 5분쯤 있다가 점심 먹어야 해.

 

엄마, 나 친구 집에 놀러가도 돼?

그럼, 물론이지. 5분 뒤 점심 먹고 실컷 놀아라.

 

*할 수 없는 건 철저히 무시하고 오로지 할 수 있는 걸 찾는 데서 기쁨을 얻도록 유도했다.

 

*행복은 환경, 운, 머리가 아니라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이 결정한다.

 

*톨스토이가 죽은 뒤 그의 방을 정리하던 사람들이 방 안에 빼곡하게 쌓여 있는 실패작들을

보고 놀랐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세익스피어도 평생 154편의 시를 썼는데 성공한 몇 편만

빼고는 형편없는 졸작이었다. 또 다윈은 <진화론> 말고 평생 119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프로

이트는 평생 무려 650편이나 되는 논문을 발표했다. 음악 신동의 대명사인 모차르트도 평생

무려 600편이나 되는 곡들을 발표했지만, 대부분이 작품성이 형편없어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이렇게 심혈을 쏟아 만들어낸 작품들의 99% 이상이 졸작으로

사장되고, 겨우 나머지 1% 정도만이 인정받아 위대한 인물로 기억되는 것이다.

크게 성공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둠 속에 숨겨진 밝은 면에 초점을 맞춰놓고 몰입했다. 그러다

보면 밝은 면이 점점 커져서 어두운 면을 완전히 덮어버리게 된다.

 

*장점만 바라보면 장점이 점점 더 커진다.

 

*진실에 초점을 맞추면 독설은 들리지 않는다.

 

*영혼은 두뇌의 밖에 있다. 관찰자가 나를 남처럼 바라볼 수 있는 것도, 넓게 바라볼수록 지능이

높아지는 것도, 지능이 우주에서 흘러나오는 것도 모두 완벽한 지능을 가진 영혼이 두뇌 밖의

우주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육신 속의 당신은 육안이 볼 수 있는 것밖에 보지 못한다. 하지만 우주에 퍼져 있는 당신, 즉

당신의 영혼은 모든 걸 다 볼 수 있다. 당신의 육신을 10000미터 상곡에서도, 우주 저 끝에서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다. 상상을 깊이 하면 할수록 이미지는 더욱 선명해진다. 이런 명상을 깊이

하면 할수록 당신은 영혼의 존재를 그만큼 깊이 깨닫게 된다. (...) 무한한 상상력도 우주에

퍼진 영혼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영혼이 그리는 이미지가 점점 선명해지면 당신

은 실제로 볼 수 있다. 그걸 보지 못하는 건 뿌리 깊은 의심과 잡념때문이다.

 

*선행은 몇 곱절로 되돌아온다.

 

*베품은 건강으로 되돌아온다.

 

*나를 텅 비우면 오묘한 일들이 일어난다.

 

*만일 당신이 많은 연습을 통해 텅 비어 있는 상태를 마음대로 장시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때

당신에겐 신기한 능력이 생긴다. 별의별 오묘한 일들이 꼬리를 물로 일어난다. 왜 그러냐고?

그 텅 빈 공간, 즉 영점공간에는 당신이 원하는 정보가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능력의 크기는 단지 '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결정짓는다. 내 모든 능력은 내 육신 속에

들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육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반면 '나는 우주만큼 무한한 존재'라고

바라보면 능력도무한하게 쏟아져 나온다. 단순한 시각의 차이로 인생이 갈린다.

 

*영혼에 눈뜨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나를 남의 눈으로 깊이 바라보는 것이다. 육신의 눈은 나를

남처럼 바라보지 못한다. 하지만 텅 빈 무한한 공간, 우주에 퍼진 영혼은 나를 남처럼 바라볼

수 있다. 나를 남처럼 바라보는 순간 영혼은 저절로 눈뜨기 시작한다. 영혼을 거대한 우주 거울

로 삼아 나를 남처럼 비춰가며 살면 영혼이 지닌 양심, 사랑, 평화, 연민, 지능, 에너지가 저절로

흘러들어온다.

 

*우리는 깨어 있는 인생의 90~95%를 아무 쓸모도 없는 부정적인 생각에 허비하는 것이다. 자신

의 마음을 거울처럼 바라보지 못하고 그 속에 파묻혀 버리기 때문이다. 얼마나 소모적이고 불행

한 일인가?

내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은 내 안에 들어 있다. 내 마음속의 관찰자가 바로 그 거울이다. 세상이

나를 버려도 관찰자는 변함없이 따뜻한 어머니처럼 언제나 미소 지으며 나를 감싸주고 위로해

준다. 유혹에 흔들리고 있을 때 바라보면 그 유혹이 떨어져 나간다. 끙끙 앓던 문제도 실마리가

풀린다. 무엇보다도 우주만큼 넓고 깊게 바라보게 해준다. 나만의 이득에 집착하기보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연민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삶도 그만큼 넓고 깊고 풍성해진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짊어지는 모든 고통과 고민은 바라봄으로써 해결된다. 단지 이 왓칭 요술은

바라보는 만큼만 일어난다. 깊이 바라보면 깊이 일어나고, 얕게 바라보면 얕게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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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것 너무나 인간적인 것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강영계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들에게 어떤 재앙이 닥칠 때 우리들은 그 재앙의 원인을 제거하거나 아니면 그 재앙이 우리들의
감각에 미치는 결과를 변화시킴으로써 그 재앙을 벗어날 수 있다. 재앙의 이익은 아마도 나중에야 비
로소 명백하게 될 것이라고 재앙을 선으로 해석함으로써 재앙을 벗어날 수 있다.

*시인들 또한 인간적인 삶을 가볍게 하려고 하는 한에 있어서, 그들은 비참한 현재로터 눈을 돌리거나
아니면 그들이 과거로부터 빛나게 만드는 빛을 통해서 현재가 새로운 색깔을 띠도록 돕는다.

*만일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훌륭한 결혼이 더 많을 것이다.

*가장 고귀한 위선자-전혀 자신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매우 고귀한 위선이다.

*불쾌감은 나중에 불쾌감의 원인이 이미 제거되었다고 해서 결코 치유되지 않는 신체적 질병이다.

*아름다운 것은 서로 침묵하는 것,
더 아름다운 것은 서로 웃는 것,

*가장 나쁜 독자들은 약탈하는 병사들처럼 행동하는 독자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몇 가지는 끌어내고 나머지는 더럽히고 헝클어버리며 전체를 비방한다.

*훌륭한 저술가들은 두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경탄하는 것보다는 이해되는 것을 더
좋아하며 예리하고 지나치게 날카로운 독자들을 위해서 글을 쓰지 않는다.

* 천재들이 동시대인일 경우 천재는 천재들에 대해서 가장 불공정하다. 한편으로 천재는 천재들이
필요하다고 믿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도대체 그들은 쓸모없다고 여긴다. 왜냐면 천재는 다른 천
재들 없이도 천재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다른 천재들의 영향은 그의 전류 작용을 가로 막는다.
그렇기 때문에 천재는 다른 천재들을 해롭다고 말한다.

* 침묵-사람들은 자신의 친구들에 관하여 말해서는 안 된다. 만일 말한다면 사람들은 우정의 감정
을 잘못 말한다.

* 식인종의 나라로부터-고독한 자는 고독 속에서 자신을 다 먹어치우며, 많은 사람들 속에서는 많
은 사람들이 그를 먹어치운다. 자, 선택하라.

* 무엇으로 지혜를 측정하는가-지혜의 증가는 쓴 분노의 감소에 따라서 정확히 측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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